Home 초원의집을 소개합니다. 후원안내 커뮤니티 게시판
 
 이경환 | February 18, 2016 | view 1,899
세계를 속인 거짓말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지음
뜨인돌/2002년 3월/287쪽/8,500원

▣ 저 자  이종호
고려대학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열역학,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유치과학자의 일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세계 및 한국의 문화유산을 연구했으며, 현재는 각종 강의와 저술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저서로는 『신화와 역사로 읽는 세계 7대 불가사의』『피라미드의 과학』『노벨상이 만든 세상 1,2,3』『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등과 소설『아누비스』『피라미드』가 있다.

▣ Short Summary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 중엔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왜곡된 것이 많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혹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교묘하게 조작된 역사적 사실들.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철저한 자료 분석과 고증을 통해 그 진실을 밝힐 뿐 아니라 조작하게 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마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 책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된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 점령이나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부터 개인의 영리를 위해 조작된 희대의 사기극 필트다운인 사건,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의 출현까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열한 가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크게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 첫째, 역사는 대부분 승리자들의 입장에서 기록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역사적 사실의 일부분을 삭제하거나 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왜곡된 사실들의 파급효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그것을 사실로 믿으려 하는 속성도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의심을 하다가도 나중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바스티유 점령’이 그 예이다. 두 번째, 사람들에겐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속성이 있다. ‘필트다운 사기 사건’의 경우 기존의 뇌의 용량이 작은 원인과는 달리 뇌의 용량이 큰 필트다운인 화석이 발견되자 인류는 다른 동물보다 뇌가 발달된 동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세 번째로 언론 매체의 조작이다. 사람들이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이 이권과 타협하여 사실을 왜곡할 경우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파라오의 저주’가 그 예이다. 이 책은 이런 세 가지 종류의 경우를 다루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좀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차 례
1. 콜럼버스의 신대륙
2. 링컨의 노예 해방
3.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4. 자유를 향한 바스티유 점령
5.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동상이몽
6. 인류의 조상 필트다운인
7. 갈릴레이의 이단 심판
8. 전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9. 비운의 아나스타샤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
10. 파라오의 저주
11. 사상 최대의 상륙 작전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지음
뜨인돌/2002년 3월/287쪽/8,500원

1. 링컨의 노예 해방
땅이 넓고 기름진 남부는 식민지 시대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고 노동력은 흑인 노예를 이용했다. 특히 그들은 대농장에서 면화 등을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필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반면 북부는 철과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적 공업이 발달했으므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것은 남부와 북부에서의 노동력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노예제도는 남부에서 먼저 폐지하려고 생각했었다.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전부 영국으로 수출했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목화씨를 빼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려서 실제로 농장주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3년 엘리 휘트니라는 미국 발명가가 목화의 씨를 뽑아 솜을 타는 조면기를 발명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마침 영국도 산업혁명 덕택에 수많은 기계로 많은 옷감을 짤 수 있는 대량생산체제로 돌입했다.

노예제 확대는 세계적으로 보아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1833년에, 프랑스는 184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미국은 이 골머리 아픈 문제를 각 주의 자치에 맡겼고 그 결과 남부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북부는 이를 금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다. 흑인도 인간이라는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는 이들이 세를 점점 불려 가고 있는 도중인 1848년 캘리포니아의 한 물레방앗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바로 이 골드러시는 노예제도 폐지의 기점이 된다. 이런 와중에 1852년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발간되었다.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인 면을 반영하여 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한 것인데 놀랍게도 미국 전역을 강타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노예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다.

1860년 11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바로 노예제도 폐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은 취임식에서 미합중국의 헌법은 각 주의 자치는 인정하되 합중국에서 빠져나가 새 나라를 세우진 못하게 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7개 주가 합중국에서 탈퇴하는 것은 미합중국의 헌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이를 막을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주의 문제는 계속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에게 노예제 문제는 연방의 통일이라는 문제보다 항상 뒷전이었다.

링컨의 노예 해방에 대한 소신은 여러 번 오락가락했다. 링컨은 1858년 7월에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 사람이니 저 사람이니, 이 인종이니 저 인종이니, 어떤 인종은 열등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모든 모호한 말들을 버립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의 단일한 국민으로서 뭉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선언을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찰스턴에서 한 연설은 노예 해방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담고 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흑인이 정치․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습니다. 흑인에게 선거권이나 배심원의 권한을 주는 것, 그들이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 것, 또한 백인과 결혼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한 그들이 우리처럼 살 수 없으므로 상층과 하층 계급은 반드시 존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상층의 지위는 백인들에게 할당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생각은 단순했다. 단일 연방의 유지야말로 미국 정부가 지켜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며, 노예제 폐지는 정치적 이해에 따라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그는 노예제도에 관한 소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1861년 4월 12일 섬터 요새에 대한 남부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어도 노예 문제에 대한 링컨의 대도는 여전히 모호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들이 점령 지역에서 노예제를 즉각 폐지하자고 건의했을 때조차 그는 반대했다. 그렇지만 전투는 북군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북군은 남군에게 연전연패했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자 링컨은 1862년 7월 노예 해방령을 선포한다. 남부에 유리하던 전쟁은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한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결국 1865년 4월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몬드가 함락됨으로써 전쟁은 끝난다.

놀라운 것은 남북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많은 남부인들이 남부의 독립을 얻기 위해 노예제도의 철폐를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전쟁 종료 한 달 전, 제퍼슨 데이비스는 한 외교관을 시켜 영국과 프랑스에 “두 나라가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다면 남부연합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키겠다.”라고 제안했다. 당시 남부의 한 신문 사설도 이를 증명해 준다.

“남부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극복할 수 없는 방해물이 된다면 노예제도를 당장 폐지해 버리자.”

그러나 이런 발언들은 너무 때가 늦은 것이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흑인 노예들은 링컨에 의해 해방되었다. 비록 전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예 해방을 전격적으로 선언했지만 그에 의해 노예가 해방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엄밀한 검증에 의할 경우 그는 결코 노예 해방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 의해 노예 해방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포장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는다. 극도의 첨예한 문제를 절묘하게 빠져나간 링컨은 가장 현명하게 거짓말을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 대통령 사상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 자유를 향한 바스티유 점령
프랑스 대혁명은 근대사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적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미국에서 먼저 독립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식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미국이 독립에 성공하자 자유, 평등의 개념이 백성들에게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반감이 프랑스 백성들의 마음 속에 축적되기 시작했으며, 그들도 미국과 같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대혁명도 사실은 돈과 관련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대혁명 전 프랑스는 유럽의 부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는 왕과 귀족의 손에 쥐어져 있는 반면에 백성들은 가난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막상 돈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에 가난한 백성들은 세금을 꼬박꼬박 부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의 무분별한 국고 소비로 극심한 빚더미에 올라앉은 프랑스는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이자 상환을 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었다. 국고가 바닥나고 더 이상 다른 나라로부터 차관을 끌어다 쓰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프랑스는 국내 세금을 인상한다. 당시에 먹을 빵도 없어서 빵을 달라는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백성들에게 세금을 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내어먹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국민들이 세금을 인상해야 하는 근본 요인이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낭비가 어찌나 심했던지 ‘적자 부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녀의 사치는 사실 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인들이 처형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들이 외국의 보수 세력만이 왕정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치밀한 탈출 계획을 세운 후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발각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이 탈출극으로 왕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결국 죽음을 자초했는데 그들의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데는 앙투아네트의 왕비병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38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구설수로 군주제에 내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바스티유 함락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바스티유 공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유명한 ‘공격자’의 한 사람인 에리라는 장교는 “바스티유는 결코 무력으로 공략되지 않았다. 공격받기 전에 항복했기 때문이다.”라고 시인했다. 1806년 나폴레옹 밑에서 장군으로 승진한 유란도 같은 발언을 했으며, 바스티유 수비대 소속 하사관도 이를 수긍했다.

나중에 민중의 혁명적인 영웅 행위를 조사하는 상설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역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원래 요새인 바스티유는 그 당시 감옥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신분 높은 사람들을 위한 호화로운 설비의 감옥이었다. 파리의 시내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은 정치범 등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관련되었던 사람들만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420년이나 되는 바스티유 성은 5.5미터나 되는 높이에 견고하게 축조되어 외부에서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82명의 수비병과 31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떠한 공격에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바스티유 성 안에 단 1일분의 식량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봉기한 민중도 당시 7명이던 죄수를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화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바스티유 사령관 드 로네이 후작과 몇 차례 교섭을 가졌고 드 로네이는 최종적으로 수비대 전원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바스티유를 넘겨주는 데 동의하고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바스티유 성의 수비병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군중들은 혁명기간 동안에 사망한 동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스위스 용병들은 시청에 끌려가 총살되었고 드 로네이 사령관은 시청으로 끌려가는 도중 군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며, 파리 시민의 봉기는 ‘앙시앵 레짐(낡은 제도)’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스티유 감옥이 혁명의 와중에 민중에 의해서 공격당한 후 점령되었다고 설명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바스티유의 점령이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믿는 것에는 그 사실이 진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것이 일반인들의 구미에 어떻게 잘 부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굳이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항상 값비싼 정보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시민들이 믿고자 하는 상황,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진실과는 전혀 다른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가 되는 것이다.


3. 갈릴레이의 이단 심판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갈릴레이가 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피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현대와 같은 과학시대가 열리진 못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원래부터 과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사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하지만 그는 이 대학의 교육방법에 실망한다. 사물을 차분히 관찰하고 근본 이치를 깨닫게 되는 학업방식이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한 갈릴레이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과학과 수학 공부를 시작한다.

갈릴레이는 매우 머리가 좋은 학생으로 새로운 학문에 입문하자마자 천재성을 발휘한다. 겨우 18세에 유명한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다. 1592년에 갈릴레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파도바대학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그의 생애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놓는 전기가 생긴다. 1608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는데 샘플 하나가 1609년 7월에 파도바에 도착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천재성은 곧바로 발휘되어 이 망원경을 바탕으로 눈으로 볼 때와 비교해서 약 1천 배로 확대되고 30배 이상 가깝게 보이는 개량된 망원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망원경으로 본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던 갈릴레이는 달은 미끈하지도 않고, 완전한 구형도 아니며, 바다와 깊은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뿐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은하수가 사실은 무수히 많은 별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목성을 관측하여 목성의 달, 즉 4개의 위성들이 그 둘레를 돌고 있음을 알아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발견한 천체의 현상을 연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이론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때부터 갈릴레이의 수난이 시작된다. 그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갈릴레이 자신이었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들이 목성의 둘레를 돌고 있는 것과 같이 달도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고, 지구도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고 생각한다. 망원경으로 발견한 현상들을 과감히 발표한 갈릴레이의 주장은 즉각적인 반박을 받는다. 그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하는 전통적인 생각이 뒤집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신이 의도한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갈릴레이는 자연적 현상에 의한 지동설을 주장했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발견 사실을 고집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부정하는 언사를 자행하자 1605년에 피렌체의 성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갈릴레이에 대한 고발장을 두 번에 걸쳐 교황청에 보낸다. 물론 교황청은 공소기각 결정을 내린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갈릴레이는 자신이 고발되었다는 사실에 동요하여 예수회파 장군이며 성청(이단을 결정하는 교황청의 부서)의 심판위원장인 벨라르민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낸다. 벨라르민은 한때 천문학을 강의한 적도 있었으므로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인 편지를 쓴다.

“갈릴레이 씨는 제가 항상 이해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처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가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 같군요. 그러나 내가 그 같은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벨라르민이 갈릴레이에게 쓴 편지에서 보듯 교황청에서도 지동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교황청에서도 명확한 증거를 보여 준다면 지동설에 대해서 신축성 있는 견해를 보이겠다고 적은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지동설에 대한 완벽한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자 교황청은 1616년에 판결을 내린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철학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이단”이라는 것이다.

1618 년에는 갈릴레이가 또다시 큰 실수를 저지른다. 1613년 예수회 수사인 그라시 신부가 세 개의 혜성을 발견했는데 갈릴레이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혜성이 착시현상에서 비롯되었고 땅에서 나오는 증기가 반사되어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 간의 논쟁은 그 후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며, 예수회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적이 되어 갔다. 이때 갈릴레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울 5세가 1623년에 사망하자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었던 우르바누스 8세가 새 교황으로 임명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태양계에 대한 정확한 책을 쓰겠다고 밝히자 교황은 잘 해보라고 격려까지 했다. 갈릴레이가 교황과의 약속으로 저술한 책이 1632년 2월에 발간된 『우주의 커다란 두 가지 체계에 관한 대화』이다. 이 책을 찍은 것이 갈릴레이로서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칭찬을 받을 줄 알았으나 교황청에서는 그의 책에 대해 판매 금지를 시키고 책을 압수하더니 갈릴레이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 책에서 우회적으로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가설들이 옛 가설들보다 현실을 더 잘 설명해 준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성스러운 사람들이 새 가설들을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적었다. 그것은 교황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갈릴레이의 선의의 표현이었으나 문제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그 대목을 갈릴레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신성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이성의 무능함을 꼬집었는데 바로 그 무능한 자가 교황 자신을 빗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르바누스 8세는 굉장히 진노했고 갈릴레이가 죽은 후에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목성과 금성, 수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을 발견한 갈릴레이가 모든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 발견으로 박해를 받기는커녕 1611년에 교황 바울 5세를 알현하고 예수회 회의에서 표창까지 받는다. 이때 이미 교황청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론은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이미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는 지동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세 군데를 바꾸면 금서 목록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첨부했고, 1620년에 이렇게 정정된 이론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학자인 갈릴레이는 1616년에도 교황을 접견했다. 교황은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대해 반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레이가 자연 현상을 엄밀하게 증명하는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절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유지했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여러 해를 거쳐 증명도 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자 학자들이 그에게 증거를 대라고 다그쳤다. 결국 갈릴레이는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1633년의 재판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 열린 것이다. 그때의 재판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갈릴레이가 유죄가 된 것은 불복종이라는 죄목에 따른 것이지 이단이라는 죄목 때문은 아니었다. 갈릴레이는 추후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진실이라고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으나 천문학적, 수학적 연구로서의 가정을 논의하고 부연하는 것까지 금지 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갈릴레이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갈릴레이가 재판 기간 중 감옥에 있었고 고문을 받았다는 말은 다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갈릴레이는 교황청에 의해 소환되자 처음에는 생탱쥐 성에 있는 종교재판소 감옥 대신 토스카나 대사관이 자리잡은 메디치 관에서 묵었다. 물론 첫 번째 심문을 받은 뒤에 수감되었지만 그는 독방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주거를 할당받은 데다가 집사와 하인이 각각 한 명씩 딸려 있었다. 법정은 갈릴레이에게 형식적인 금고형을 선고했으며, 놀랍게도 감옥에 들어가지도 않고 재판이 끝나자마자 로마를 떠났다.

갈릴레이의 재판 결과가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변질된 것은 갈릴레이와 같은 대학자가 이단 심문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가 진정으로 사면된 것은 그가 교황과 잘 알고 있으며 힘이 있는 추기경과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원래 이단 심문에 걸리면 그 어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나 대학자들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가 근신이라는 처분을 받은 것은 교황청에서조차 이미 천동설은 폐기되어야 할 학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이 불공정했고 그가 비록 교황청의 이단 심문 재판에 순종하는 서약을 했지만 재판이 끝난 후 과학자적 양심을 철회한 것에 대한 가책을 받고 “그래도 역시 그것은 움직인다.”라고 말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전설 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은 과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으며 위인전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에피소드이지만 이 내용 역시 조작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지 않다고 철회한 상태에서 갈릴레이가 재판관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법정 모독죄에 해당하는 그런 발언을 들었다면 유머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재판관들이 곧바로 가혹한 형벌을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1757년에 인쇄된 그의 초상화에 적혀 있었던 것이 최초인데 그때는 그가 사망한 지 1백 년도 넘은 후이다. 갈릴레이가 과학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후대에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4. 파라오의 저주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을 만들어 낸 투탕카멘 파라오는 유명한 왕은 아니었지만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신비로운 왕이다. 기원전 1343년에 이집트 18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와 제2 왕비 키야 사이에서 태어나 기원전 1333년인 10세에 파라오가 되어 기원전 1323년에 불운의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1992년 10월 26일, 사망한 지 3245년 만에 거의 완벽한 상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유물 발굴 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인 투탕카멘의 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남달랐다. 발굴에 얽힌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것은 물론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된 이후에 ‘파라오의 저주’라는 뜻밖의 전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왕가의 계곡’에 묻혀 있던 투탕카멘을 발굴해낸 장본인인 고고학자 카터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고고학에 입문하여 20대에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상 이집트 및 누비아 지역의 사적 주임 조사관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한편 자동차 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이집트에 요양 중이던 영국의 카나번도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골동품 수집 및 발굴 작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는 발굴 작업을 함께 할 전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때 한 친구의 권유로 카터를 만나게 된다. 1907년 두 사람은 드디어 의기투합하여 발굴 작업에 나선다.

발굴은 생각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카터는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발굴지를 정리하기로 한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1922년 11월 4일, 발굴하던 장소에서 마무리 청소를 하던 한 인부가 계단의 흔적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카터는 즉시 달려가 표면을 석회로 입힌 입구에 지하 묘지를 지키던 사람들의 관인과 투탕카멘 파라오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1월 26일 카터는 카나번과 그의 딸, 사위, 그리고 인부들을 뒤에 세워 둔 채 문에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불을 비추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안에서 훅 하고 뛰쳐나온 더운 공기 때문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윽고 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이상한 동물이며 조각상 등 방안의 풍경들이 차츰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황금! 온 사방에 눈부신 황금들이 번쩍거렸다.”

투탕카멘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아마도 호화로운 유물보다는 발굴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찾아온 의문사, 소위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 있다. 사람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도 이런 글이 써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이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

‘파라오의 저주’를 만든 장본인은 사실상 카나번이라고 볼 수 있다.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고 카나번이 이 이 소식을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카나번에게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파라오의 저주가 카나번에게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나번은 유명한 점장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노파 점장이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이런 충고를 듣지 않고 카나번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의 발굴에 참여한다. 이후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지의 특파원 아더 웨이갈은 카나번에게 만약 투탕카멘 왕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6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고, 이 말을 들은 소설가 마리 코렐리는 카나번이 사망하기 15일 전 왕의 저주에 대한 흥미 위주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카나번은 투탕카멘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린 후 합병증으로 1923년 4월 5일 사망하고 만다. 무덤에 손 댄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카나번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 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나번의 애완견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후 카터 및 카나번과 관련된 사람들의 의문의 죽음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약 30여 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 TV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적인 분석이라는 것은 파라오의 저주가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의 저주에 대해서 조사하던 학자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 그 발굴 작업에 관련된 1천 5백여 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했다. 193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는 그 동안 신문이 발표한 21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뒤쫓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이거나 우연한 죽음이라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에는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카나번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카나번이 발굴하는 데 자금이 쪼달리게 되자 발굴이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런던 타임스 신문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당시 유례가 없던 이 일은 전 세계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파라오의 저주는 때마침 카나번이 일찍 죽게 되자 이런 ‘악감정’을 가진 언론에 의하여 과대 포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기사들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이자 언론은 ‘파라오의 저주를 받은 죽음’, ‘파라오의 복수’라는 제목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카터는 ‘투탕카멘의 저주를 둘러싼 소문은 중상 모략을 위해서 짜낸 착상’이라고 혹평했다.

 
   
 


   Mongolia Ulaanbaatar Bayanzurkh 22-Khoroo Ulgi-20 GREEN HOME HOSPICE (LEE,KYEONG HWAN). E-MAIL : greenhomes@hotmail.com
   TEL : 976-9118-9119(핸드폰), 976-11-462943(병원), 976-11-462883(집) copyright (c) 2013 himongol.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