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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환 | February 27, 2016 | view 4,557
남자 vs 남자 
남자 vs 남자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 2001년 8월 / 356쪽 / 9,500원

▣ 저자    정혜신
저자는 지난 1996년부터 여러 기업에서 중견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자아경영 프로그램 ‘come back myself'를 진행해 오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직장인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연구한 ’ADD증후군‘을 국내 최초로 제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중년남성들의 삶을 정신의학적으로 살펴본 ’맨 콤플렉스‘ 연구 및 기업경영 전략에 정신의학적 이론을 접목시킨 ‘심리경영’ 등의 연구 활동과 아울러, 최근에는 ‘조직원의 잠재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업차원의 정신건강관리 전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월간 『신동아』에 「정혜신의 남성탐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 『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이 있다.

▣ Short Summary
정신과 전문의, 그 중에서도 남성 심리 전문가라고 불리는 저자가 이 시대의 ‘한다’ 하는 남자 스물한 명을 분석한다. 전직 대통령에서 연예인, 문학가, 패션 디자이너까지 대체 어떻게 뽑힌 인물들일까 하는 의구심은 ‘VS’로 묶인 절묘한 테마를 보면 해결된다. 이른바 성공한 남자들의 심리 분석을 통해 저자가 보여주고자 애쓰는 바는 그들도 당신과 똑같다는 결론이다. ‘남성 심리 전문가’로 불리며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남성의 마음에 대한 탁월한 공감력을 보여주었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우리 시대 유명남성 21인에 대한 본격적인 심리평전을 펴냈다. ‘심리평전’이란 낯선 용어가 등장한 것은 심리분석이나 인물평전 중 어느 한쪽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이 책의 독특한 성격에서 기인하는데, 저자는 대상 인물을 단지 심리적인 측면에만 국한시키지도, 사회적 맥락 속에만 가둬놓지도 않는다.
 
▣ 차례
김영삼 vs 김어준 - ‘내 맘대로’ 왕자 / ‘니 맘대로’ 독재자
이건희 vs 조영남 - 완벽하지 ‘못한’ 황제 / 망가지지 ‘않는’ 광대
장세동 vs 전유성 - ‘나’로부터의 도피 / ‘나’를 향한 일탈
이수성 vs 강준만 - ‘마당발’의 닫힌 연대 / ‘단독자’의 열린 고립
박종웅 vs 유시민 - ‘돈키호테’형 소신 / ‘햄릿’형 소신
김윤환 vs 김윤식 - 변화를 ‘쫓는’ 빈 배 / 변화를 ‘품는’ 거목
봉두완 vs 이외수 - 화려한 재능의 눈물 / 치열한 재능의 선혈
정형근 vs 마광수 - 피해의식, ‘시대와의 불륜’ / ‘시대와의 불화’
김우중 vs 정동영 - 현실 부정의 몰락한 영웅 / 현실 직시의 고뇌하는 인간
김종필 vs 앙드레 김 - ‘나를 위한’ 직업 / ‘나를 거는’ 직업
이회창 vs 이회창 - ‘칼’의 이회창 / ‘저울’의 이회창

남자 vs 남자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 2001년 8월 / 356쪽 / 9,500원

김영삼 vs 김어준 - ‘내 맘대로’ 왕자, ‘니 맘대로’ 독재자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할 ‘김영삼론’ - 김영삼은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까지 만 5년 동안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첫해 90%대까지 치솟았던 YS의 인기는 임기 말에는 10% 이하로 떨어졌고, 현시점에서는 더 바닥을 치고 있다. 근자에 YS를 담당하는 기자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제발 YS를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돌대가리 YS와 붙어먹는 기자 너도 돌대가리’라는 폭언도 퍼붓는단다. YS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박종웅 의원의 육성이다. “내 홈페이지에 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런데 10건 중 9건은 욕이다. 심지어 YS를 왜 자꾸 따라다니느냐며 ‘둘이 호모냐’라는 욕까지 올라온다. 사람들이 YS를 ‘또라이’라고 하고 나를 ‘꼴통’이라고 하는 것 다 안다.” 게다가 한 네티즌은 YS의 막가파식 독설을 비난하며 “이젠 손명순 여사가 나서야 한다”며 비아냥거린다.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공개한 낸시 여사처럼 손 여사가 YS의 행동에 대해 솔직히 국민에게 고백하고 모종의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대단한 독설이지만 현재 그게 YS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솔직하고 감정적인 반응인 듯하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죽은 건 YS의 기(氣)가 셌기 때문이다?! - YS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기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문제는 그 정도가 거의 병적인 수준이라는 데 있다. 그는 전형적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 식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YS는 2000년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이라는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런데 두 회고록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역사를 YS 자신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이란다. 한 시사 잡지에 실린 만평이 걸작이다. 비서관이 그에게 자서전에 대한 시중의 여론이 ‘저질스럽기까지 하다’는 쪽이라고 전한다. 그랬더니 YS는 “그러게 내가 종이도 최고급으로 쓰고 표지에도 금박을 넣자고 했잖아”라며 흥분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걸핏하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YS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내 인생의 낙’이라고 했단다. 물론 YS의 말이다. 강력한 야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말도 예사롭지 않다. “내가 야당 때는 참 무섭게 싸웠어요. 그래서 결국 박정희가 죽은 거예요. 나를 국회의원 제명 안 했으면 박정희는 안 죽었죠.” 그러나 ‘내 멋대로’ 식 사고의 금메달감은 단연 김일성 사망원인에 관한 그의 진단이다.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죽은 건 자기처럼 기가 센 사람과의 회담 준비에 과도하게 신경을 쏟다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듣고 있던 사람은 완전히 할 말을 잃게 된다. 그가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모두 깜짝 놀랬제” - YS는 자신의 존재가 콘서트의 오프닝에서 가수가 처음으로 등장할 때처럼 극적이고 화려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YS는 대단히 강박적인 스타일리스트다. 넥타이를 잘 매고 옷을 잘 입어서가 아니라 내용보다 포장에 관심이 많다는 말이다. YS가 깜짝쇼를 좋아하는 심리적 배경이다. 1993년 3월 육국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후 수석비서관들에게 장난스럽게 YS가 던진 “모두 깜짝 놀랬제”라는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수석비서관은 이렇게 말한다. “김 대통령의 진면목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큰일을 저질러놓고 어른들이 당황하는 것을 지켜보는 악동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표정이었죠.”

신이라 불리고 싶은 사나이 - 사람들이 자주 지적하는 YS의 오만과 독선은 이러한 심리적 패턴을 바탕으로 한다. YS는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성장했고 그런 태도를 신념화했다. 그의 사진을 가만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게 있다. 사진 속의 그는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사진에서부터 그런 습관이 나타난다. 초선의원 시절 자신의 정신적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조병옥 박사와 사진을 찍을 때도 뒷짐을 지고 있으며, 46세의 최연소 야당 총재로 국회에서 대표 연설을 할 때도 그렇다. YS는 다른 사람을 언급할 때 호칭을 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대중이가, 이인제가, 이회창이는….” 매사가 그런 식이다. 오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또 그가 잘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것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나 박태준 전(前)포철회장, 박철언 의원 등은 모두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YS에게 곤욕을 치른 사람들이다. YS에게 선악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을 지지하면 선이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거나 자신과 반대 입장을 취하면 그건 바로 악이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는 지금 YS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테러리스트?! - 김어준은 1968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세 번 떨어진 후 홍익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 최초의 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이후 무려 3년 동안 이스라엘, 터키, 이집트 등 40여 개국을 여행했다. 미당의 시구를 빌어서 표현해 본다면 ‘지금의 김어준을 키운 건 9할이 여행이었다’. 이집트에서 귀국한 김어준은 여행 관련 IP 사업과 이벤트 사업, TV 다큐멘터리를 기획, 제작하는 일에 종사한다. 배낭여행과 인터넷을 결합한 신종 여행상품을 개발해서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던 김어준은 IMF를 맞아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딴지일보」는 그때 시간은 남는데 할 거는 없고 그래서 심심풀이로 만들어본 개인 홈페이지라고 한다. 그는 아랍을 여행하기 전까지는 아랍인들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 유태인은 머리 좋고 역경을 이겨낸 민족,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랍 버스에 올라와 검문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은 아랍의 편에서 보면 일본 순사였고, 팔레스타인인의 폭탄 투척을 그들의 등 뒤에서 봤더니 바로 우리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김어준이 느낀 충격의 강도나 철학적 고민이 그대로 실려 있는 에피소드다. 그렇게 선입견을 없애고 뒤집어서 생각해본 경험이 「딴지일보」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럼 니가 만들어” - 김어준은 YS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오만과 독선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의 오만과 독선은 오히려 귀엽고 유쾌하다. 「딴지일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철저하게 비주류를 지향한데다 고정관념 없이 핵심을 향해 거침없이 찌르고 들어가는 비판과 풍자 때문이라는 게 인터넷 전문가들의 평가다. 「딴지일보」의 보도원칙이라는 것도 딴지식 표현처럼 ‘엽기적’이다. “독자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독자의 항의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변명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오만과 독선을 바탕으로 한다. 「딴지일보」의 독자들은 김어준과 딴지의 ‘귀여운 오만과 독선’을 충분히 수용하고 즐기기까지 한다. 김어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독자들이 딴지가 잘못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을 해오면 그냥 놔둡니다. 왜냐하면 그 비판 자체는 그 독자가 언론으로 기능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정 귀찮게 구는 독자가 있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 그럼 니가 만들어’.” 대단한 통찰력에다 얄미울 만큼 한계가 명확하다.

'당연한 걸 가지고 씰데없이 폼은‘ - 김어준은 부모의 완전 방임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맛있는 게 있으면 부모님들만 드시면서 “너는 먹을 날이 많이 남았잖아, 짜식아”,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김어준은 그런 통제 없는 시스템 속에서 자율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딴지일보」가 말을 막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거 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무책임한 짓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김어준은 늘 상식에 근거해 판단하려 한다고 말한다. 김어준은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좀 다르다. “저 페미니스트 아니에요.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남자 여자 차별 안 해야 하는 거 상식 아닌가요? 너무 당연한 걸 가지고 지가 페미니스트라고 잘난 척하는 남자들, 저 이해 못해요.” 역시 상식 수준의 역설이다.

‘니 꿈을 이뤄주마’ - 이제 김어준은 딴지사옥을 마련해 주방과 간이 바도 만들어놓고 수많은 딴지 식구들과 함께 삐딱한 책상에 않아서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다. 그가 말하는 딴지그룹의 경영철학도 삐딱하긴 마찬가지다. “저희의 사규가 ‘니 꿈을 이뤄주마’예요. 직장이 바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거죠. 저는 과거에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엔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가 중요하죠.” 어느 해 추석을 앞두고 역지사지의 정신을 설파하는 김어준의 말을 들어보자. “왜 방송은 추석 때마다 성룡 영화를 그토록 재방 삼방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PD들이 골라냈을 텐데, 그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요. ‘니넨 그거 재밌니? 니들이 재미없으면 우리도 재미없어’.”

오로지 ‘나’를 위한 예외 - 미국의 어느 기자가 ‘미국 국회의원들은 모두 다 저능아다’라는 신문기사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 문장을 미리 본 고참 기자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 기사가 나가면 국회의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그러니 한 구절만 추가하자.” 다시 고친 문장을 이랬다. “미국 국회의원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다 저능아다.” 기사가 나간 후 항의한 국회의원을 한 명도 없었단다. 국회의원들은 모두 그 ‘한 명’이 바로 자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이건희 vs 조영남 - 완벽하지 ‘못한’ 황제, 망가지지 ‘않는’ 광대

누구에게나 ‘아픈 곳’은 있다  - 오늘날에는 콤플렉스란 말이 열등감과 같은 뜻으로 일상용어처럼 쓰이고 있다. 개인적 콤플렉스는 인간의 심리적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은 구강기(口腔期), 항문기(肛門期), 남근기(男根期)의 순서로 심리적인 발달을 하며 성장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성인이 되어서도 구강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소아적 의존성을 가진 미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고, 항문기적 성향인 사람은 목표를 정하고 완벽을 추구하며 강박적인 삶을 사는데, 그들은 세상을 경쟁의 원리에 따라 바라본다. 그에 반해 남근기적 성향인 사람은 즐거움 자체를 추구한다. 그들에게 경쟁과 완벽은 의미 없는 논리가 된다. 이렇게 분류할 때 이건희는 전형적인 항문기적 성향의 소유자고, 조영남은 그것을 뛰어넘은 남근기적 성향의 사람으로 본다.

황제의 열등감?! - 이건희는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황태자’를 거쳐 ‘황제’가 된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가 한 다이어트를 ‘황제 다이어트’라 칭하고, 그가 사람들에게 베푼 정을 가리켜 ‘황제의 정’이라는 희한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런데 나는 이건희를 볼 때마다 정상에 선 사람의 고독감보다는 ‘황제의 열등감’을 느끼곤 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건희에게 ‘열등감’이란 단어는 가당치도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인간 이건희’의 일생을 찬찬히 관찰하다보면 열등감이란 키워드만큼 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건희에겐 시비도 걸지 마라 - 이건희의 성격을 정신의학적으로 규정해 보면 ‘강박적 성향’에 해당한다. 이 성향의 심리적 축은 열등의식이다. 강박적인 성격의 특징을 한번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감정기능이 빈약하다. 이건희는 취미가 ‘연구와 생각’이라고 할 정도로 감정보다는 사고가 비대한 사람이다. 이건희는 퇴근 후에도 자기 방에 들어가 한번 앉아버리면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도 2~3일에 한 번씩 아빠 방에 와서 ‘아빠’ 소리 한 번 하고 겨우 5분 정도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었단다. 강박적 성향의 소유자는 타인과의 감정적, 정서적 접촉을 꺼린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의식에는 권위에 대한 공포가 내재화되어 있고 그와 함께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강한 분노와 적개심이 혹시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강한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발간된 독일의 경영전문 월간지 『매니저』에는 삼성그룹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에는 한국에서 이건희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한 독일인이 겪은 일을 소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 독일인은 이웃집의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커 두 번이나 항의해도 통하지 않자 세 번째 항의 차 옆집으로 갔다. 그러자 관리인은 그 집이 이건희의 저택이라고 말하면서 독일인이 세든 집도 이미 이건희 소유로 넘어갔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건희가 항의 소식을 듣고 옆집을 매입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이 개입될 문제를 만나면 아예 그 해결과정을 피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비용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강박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원리원칙을 따지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할 때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이다. 이건희는 삼성직원들에게 ‘신경영’을 전수하면서 “내 말을 적어도 50번 이상 반복해서 테이프를 통해 들어라. 자꾸 들어 외울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몸에 배게 되고 실천이 가능해진다”면서 자신의 방식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직원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삶의 철학이란 것이 반복해서 듣고 보는 것만으로 체득되는 것인가. 문제가 있을 때 그 메커니즘이 머릿속에서 풀리는 순간 문제는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방식이다. 그는 인간관계도 그러한 원칙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눈치다.

강박적 성격의 세 번째 특징은 도덕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들은 예의범절이나 에티켓 같은 것을 지나칠 정도로 중시한다. 이들은 어릴 때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그 권위에 압도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건희도 성격적으로 이러한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건희는 자신이 추구하는 경영철학을 “기업이란 이윤추구 집단이 아니라 높은 도덕성과 강한 동지애로 뭉쳐 최고의 효율을 통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모임”이라고 정의한다. 기업이나 종교단체, 학교, 사회단체 등은 각기 담당해야 할 나름의 몫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기업의 오너이면서 완전한 도덕성을 꿈꾸는 이건희의 욕심은 끝이 없다.

찬바람은 옷섶을 열지 못한다 - 이건희도 개인적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다. 이건희식 사고방식을 한번 그대로 차용해 보자.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순간 문제 해결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건희 자신과 삼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인간 이건희와 삼성의 울타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더 유연하고 여유 있는 ‘남근기적 삶’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도 좋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히트곡이 나의 히트곡 -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도 설교를 계속할 자신이 없어서 목사 되기를 포기했다는 사람이 바로 조영남이다. ‘가수, 화가, MC, 글쟁이, 뮤지컬 배우, 연애쟁이.’ 그가 밝히는 자신의 이력이다. 못생긴 얼굴에다 <화개장터> 외에는 변변한 자기 노래 하나 없는 그가 평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무시 못할 존재로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저는 가수입니다.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입니다.” 언젠가 신문에 기고한 그의 칼럼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걸 자기의 무기로 삼고 인기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이 세상에 있는 히트곡이 바로 나의 히트곡’이라는 그의 배짱이나 당당함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유쾌하게 한다. 군 시절에는 부대를 방문한 박정희 전대통령 앞에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를 열창해 주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죄로 인생을 마감할 뻔하기도 했다. 그게 조영남이란 사람이다.

자기를 망가뜨리면서도 절대 망가지지 않는 사람 - 사람들한테 ‘오버’한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과장된 몸짓과 말투는 조영남의 트레이드 마크다. 예전에 <쟈니윤 쇼>에서 보조MC로 나왔던 그를 기억한다. 턱을 괴고 앉아서 웃다가 팔꿈치가 무릎에서 미끄러져 옆으로 넘어지고, 게스트가 우스갯소리를 할 때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다가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30년을 넘게 대중예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유치함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조영남은 자기를 망가뜨려가면서도 절대 망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못생겼다는 자신의 얼굴이나 두 번의 이혼 경력,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 등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쯤 되면 그의 약점은 이미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그는 열등감을 훌쩍 뛰어넘어서 진화시킨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 - 연애도 인생도 봄바람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그는 결혼 두 번, 이혼 두 번에 지금은 자유로운 싱글이다. 이젠 세상의 히트곡처럼 세상의 여자가 온통 그의 연애 대상이 되었다. 그가 두 번째 이혼을 하자 한 개그맨은 “딸 가진 부모님들 조심하십시오. 조영남이 이혼을 했답니다”라며 사람들을 웃겼다. 그는 하늘이 내린 예술적 재능과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 자신의 자유로운 삶과 대중의 욕구를 적절하게 충족시키면서 ‘풍요로운 예술가’로 살아간다. 그러한 자유로움의 심리적 근원은 무엇일까.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평생 술독에 빠져 지내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식구들을 예배당으로 내몰고 정작 당신은 장터에서 술에 절어 지내곤 하던 아버지였다. 그가 방학 때 고향집으로 달려와 “어버지, 저 왔어요”하면 아버지는 너무 반가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는 설레임과 벅찬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건희의 부자 아버지와는 달리 무능했지만 아들과 정서적인 끈을 놓지 않아 행복했을 조영남의 아버지. 조영남은 어린 자신에게 화투 ‘육백’을 가르치던 한량기 많던 아버지를 조금의 찜찜함이나 부끄럼 없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자막 좀 비뚤어지면 어때! - TV광고를 연출하는 감독의 이야기이다. CF감독에게 가장 피가 마르는 순간은 완성된 작품을 가지고 클라이언트 앞에서 시사회를 할 때라고 한다. 그래서 그 감독은 가끔 시사회장에서 장난(?)을 친단다. 그 회사의 이름이나 브랜드명을 표시하는 자막을 일부러 약간 삐딱하게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클라이언트가 그 삐딱한 자막에 신경이 쓰여 다른 부분에 제대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사 로고 자막만 똑바로 하면 좋을 거 같네요.” 자막을 교체하는 정도의 작업은 일도 아니란다. 비뚤어진 자막 때문에 정작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친다면 이것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없다. 그러나 열등감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실상은 ‘마음의 자막’을 하나 갈아 끼우는 간단한 작업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럼에도 당사자는 죽을 듯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게 우리네 삶인 모양이다.

정형근 vs 마광수 - 피해의식, ‘시대와의 불륜’ ‘시대와의 불화’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래? - 걸핏하면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가 있다. 물론 그때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이 그녀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려고 손만 쳐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남편은 혀를 끌끌 찬다. 자신의 아내가 지나친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야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피해의식’이 있다는 말인즉슨 옳다. 그런데 이따금 그 남자는 그의 아내가 했던 ‘맞을 짓’(?)을, 힘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그에게는 과장된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되고 그러면 어이없다는 상대방의 반응이 뒤따른다. ‘당신, 나한테 무슨 피해의식 있어?’ 이런 경우 아내와 남편 모두 ‘피해의식이 있다’는 진단은 둘 다 틀리지 않다. 정형근 의원과 마광수 교수의 정치행동과 지적 활동을 찬찬히 분석하다보면, 사람들이 피해의식을 가지게 될 때 생기는 양면성 혹은 그때의 미묘한 심리적 차이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최악의 서울대 총학생회장 - 작년 11월 한 인터넷 웹진에서 ‘역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중 최악의 인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네티즌 선거를 실시했다. 당선자(?)는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형근이었다. 그가 뽑힌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1980년대 공안검사 시절부터 민주화 인사에 대한 고문을 주도했고, 둘째로 서울대라는 시가 2억 원짜리 브랜드를 팔면서 학력주의를 조장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마다 신빙성 없는 폭로전을 펼치며 ‘식물국회’로 몰고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사결과를 보면서 정형근이 6.8부정선거를 규탄한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의 정형근과는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미지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정형근은 194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경남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후 법대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을 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미국 미시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다. 10년 동안의 검사 생활을 거쳐 안기부에서도 핵심 요직만 역임하다가 잠깐 동안의 변호사 생활을 거쳐 지금은 한나라당의 재선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4남2녀 중 장남으로서, 가난에 대한 처절한 기억이 있다. 아침 점심을 샘물로 대신하면서, 물론 대학도 고학으로 마쳤다. 거친 환경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그의 고난과 성공은 얼마나 큰 희망을 안겨주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2000년 현재의 젊은이들은 정형근을 역대 최악의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꼽고 있다.

‘양식 있는 엘리트가 어떻게 고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 1983년 초,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이 제일 유능한 검사를 뽑아오라고 지시해 안기부, 검찰, 법무부에서 각기 1등에서 10등까지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 세 군데 모두에서 1등으로 추천된 사람이 정형근이었다. 이렇게 출발부터가 화려했던 그는 엘리트주의가 뼛속 깊이 각인된 사람이다. 그가 안기부 대공 수사국장으로 재직시 박노해 시인에게 했다는 말은 워낙 유명하다. “너 같은 공돌이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부하들을 거느릴 수 있느냐. 너의 시나 글들은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 써준 것 아니냐.” 정형근은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운동권 인사 중에서도 자신의 출신학교인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어야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고문 국회의원 정형근을 심판하는 모임’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이 그의 고문 전력을 문제 삼았지만 정형근은 명예훼손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펄쩍 뛴다. 당시 현역 의원이던 서경원은 정형근에게 고문을 당해 피를 세 그릇이나 쏟았다고 증언을 하고, 고문의 현장에서 그와 몸서리쳐지는 대면을 했다는 증언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정형근은 당당하게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서울법대와 검사 출신의 양식 있는 엘리트가 어떻게 국민의 대표기관을 때리고 피를 세 그릇이나 받아낼 수가 있습니까?” 그의 억울한 사연(?)은 계속된다. “안기부 조사실에는 비디오카메라가 다 설치돼 있습니다. 다 찍히는데 어떻게 고문을 합니까? 내가 수사할 땐 그 많은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고문 시비가 한 건도 없었습니다. 정형근 이름으로 고소당한 것 있습니까?” 강준만 교수의 말처럼, 모두가 억울하다니 하루 빨리 ‘고문조작 의혹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모든 진상을 규명해 이 나라를 영원히 고문 없는 나라로 만들어야 옳다.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 죄? - 정형근의 안기부 재직 시절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도 했겠지만 나름대로 기준과 잣대를 갖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안기부 근무시절 사회가 좌파이념으로 물결칠 때였던 만큼 나라도 몸으로 막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낸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나름대로의 소신’은 몰가치적인 현상에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소신이란 ‘객관성’이나 ‘공동선(共同善)’을 담보로 할 때 그 진정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나를 인간적으로 매장시키고 죽이려 하는데 가만 앉아서 죽을 내가 아니다. 내가 죄가 있다면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확고한 소신을 가진 재선의원 정형근에겐 아직도 음습한 공작정치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러한 요인들은 정형근에게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폭로전문가의 폭로정치에 대한 피해의식 - 정형근 의원은 정치권을 긴장시킬 만한 발언의 소재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 최고의 전략정보통이다. 한 신문에 실린 시사만화는 그의 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의기양양하게 ‘폭로용 뻥튀기’ 기계를 돌리고 있는 정형근에게 ‘정치권’이란 이름의 사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꼭 이럴 때 ‘뻥’ 해야겠어?”라고 묻는다. 이럴 때 그가 폭로하는 내용의 실체적 진실은 두 번째 문제다. ‘뻥’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하게 가공해서 적시에 활용하는 능력 면에서 단연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다. 게다가 그의 ‘정보 공개’는 최종적으론 늘 정치권을 겨냥하기 때문에 파괴력이라는 면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맨 출신답게 폭로정치나 전력 시비 등의 여론에 대응하는 패턴도 지극히 전략적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무조건 허위라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라.” 이때 누군가 그가 폭로한 정보의 허구성을 지적하면 ‘여러 가지 확인 할 수 있는 정황과 근거가 있었다. 지금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그의 주변 인사들은 정형근의 이런 전략적 발언들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다.

이제 약속대로 - 이문열의 「약속」이라는 단편소설이 떠오른다. <머리는 좋지만 너무나 가난해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던 한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은 꿈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한 노인의 영혼을 만나 특별한 약속을 한다. 앞으로 소년이 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줄 테니 그 힘을 가지고 타살을 당했으면서도 자살로 처리된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것이다. 소년은 목숨을 담보로 그 약속에 응한다. 그 약속을 하고 십여 년이 지난 후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다. 노인과의 약속을 위해 다시 그 사건을 조사하지만 자신의 친아버지와 장인까지 그 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알고는 재조사를 포기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검사의 꿈속에 노인이 나타난다. 이제 오늘로서 그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난다며 슬픈 얼굴로 검사를 쳐다보던 노인은 ‘왜 힘 있는 사람을 만들어주었는데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았느냐’고 하소연하다가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한다. “이제 약속대로 가세.” 다음날 그 검사는 자는 듯이 죽어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정형근은 이제 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려운 사람 편에 서기 위해서” 검사가 되었다는 자신과의 굳은 ‘약속’이 지켜지길 바란다. 자신에 대한 세간의 의혹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밝힌 후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만을 돕는 전문적인 ‘인권변호사 정형근’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야한 남자(?) - 마광수는 야하다는 말의 의미를 ‘들판’이라는 개념의 ‘야(野)하다’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난만하게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가꿔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겉은 전혀 야하지 않은데 속만 야한 사람이 바로 마광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광수라는 인물을 그의 속마음(야한 남자)으로 인식한다. KAL기 폭파범이었던 김현희의 범죄 사실에 앞서서 사람들이 주목했던 건 그녀의 뛰어난 미모였다. 사람들의 인식이란 많은 경우 그렇게 일차원적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마광수는 특이하다. 많은 사람들이 겉이 야하지 않은 마광수를 ‘야한 남자’라고 인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광수 습격사건 - 1992년에 모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마광수 습격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은 『즐거운 사라』 개정판에 대한 외설 시비 사건으로 부르지만, 법률적으로 표현해 보면 현직 대학교수인 마광수가 형법 244조 음란물제조 혐의로 전격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한 사건이다. 사건의 조짐이야 그 전부터 있었다. 1990년 마광수의 소설 『광마일기』는 음란성을 이유로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는다. 이어 1991년에는 두 편의 소설로 관계당국이 제재결정 1회, 경고 2회를 내렸고 심지어 FM 라디오에서 외설스러운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방송출연금지’ 처분을 받기도 한다. 1991년 7월에 출간된 『즐거운 사라』 초판은 타의에 의해서 나온 지 한 달 만에 출판사측이 자진 절판을 하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즐거운 사라』 개정판의 외설 시비로 인해 사법적 제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은 20세기 대한민국의 문화적 후진성과 야만성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야한 교수’라서 조교를 성희롱한 것도 아니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솔직하게 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교수에서 전과자가 되어 6년여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교권과 표현의 자유를 유린당한 데 대한 울분으로 마광수는 오랫동안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에조차 무기력해져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냈으며, 아울러 자신을 변태성욕자나 다중인격자로 보는 사람들의 이상야릇한 시선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고 한다. ‘시대와의 불화’라고 표현하기조차 민망하다. ‘사라’ 사건 이후 지금까지 그는 투사 아닌 투사가 되어 심한 피해의식에 시달리면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솔직하게 발가벗기 - 한 중견작가의 수필 한 대목이 기억난다. 데뷔 초창기에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소설을 쓸 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하는 일이었단다. 요란한 섹스 장면이나 지극히 비윤리적인 행위를 묘사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부모나 형제, 애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상상력이 위축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닐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느냐고 의아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등의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 면에서 마광수는 거리낌이 없다. 무한대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의 글은 솔직하다. 그는 모든 글쓰기의 기본 심리를 노출증에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솔직하게 발가벗기’가 글쓰기의 근본 동인이요, 좋은 글의 첫째 요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광수는 옳다 - “21세기를 맞이한 지금에 있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가장 뼈아프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여지껏 끌어안고 있는 ‘문화적 촌티’다. 이러한 ‘문화적 촌티’는 문화독재적 사고방식과 수구적 봉건윤리로부터 기인하는데, 이 ‘문화적 촌티’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고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표현의 자유 억압’과 변화의 거부, 그리고 ‘성의식의 이중성’인 것이다.” 명쾌하기는 하지만 때론 너무 선정적으로 보여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마광수 주장의 핵심이라 할 만한 말이다. 마광수는 지금까지도 계속 시대와 불화를 빚으며 심한 우울증과 막연한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다. ‘사라’ 사건 직후 『인터내셔널 헤롤드 트리뷴』지는 마광수를 가리켜 “한국의 외로운 에로티카의 장인”이라고 표현했는데, 마광수는 지금까지도 그런 외로움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1995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회는 「이 시대의 가장 음란한 싸움에 대한 보고」라는 책자 한 권을 발간했다. 『즐거운 사라』 사건을 둘러싼 성에 대한 문화사적 논쟁과 마광수의 사상과 문학 세계를 집대성한 『마광수는 옳다』라는 책인데, 그 서문의 한 구절은 우리에게 ‘마광수’라는 인물에 관련된 만만치 않은 화두 하나를 던져준다. “우리 학생들은 일상생활에서 마광수 교수가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을 『마광수는 옳다』라고 정하여 일종의 선언을 하고 있다. 이 선언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영혼까지 파괴하는 피해의식 - 피해의식은 나만 손해 본다는 느낌이다. 피해의식은 또 다른 피해의식을 불러일으켜 인간관계에 신뢰가 없어지고 불신이 팽배해진다. 그러므로 결국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이유 없이 손찌검을 하는 남편과 오래 살아온 아내들 중에는 은연중에 ‘혹시 내가 맞을 짓을 해서 그런 건지 몰라’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한 개체로서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을 물론이고 영혼까지 황폐화된다. 어떤 경우에도 한 개인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피해의식을 갖게 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옳지 못하다.

김종필 vs 앙드레 김 - ‘나를 위한’ 직업, ‘나를 거는’ 직업

당신에게 직업은 무엇입니까 -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지금의 직업과 연관을 맺은 시기가 비슷하다. 김종필 총재는 1961년 35세의 나이로 5.16을 통해 정치와 연을 맺었고, 앙드레 김은 1962년 25세의 나이로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오픈하면서 패션계에 데뷔했다. 그 이후 4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업세계에서 늘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철저하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인이면서도 대중을 별반 의식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종의 ‘유아독존’형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직업의식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업인’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김종필 총재와 앙드레 김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자.

‘직업인 김종필’은 없다? - 김종필의 직업은 정치인이다. 1970년대 초와 1990년대 말, 두 번에 걸쳐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현재 9선의 국회의원인 그의 직업이 정치인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5.16이라는 무대를 통해 시작된 그의 정치인생이 어느덧 40년이다. 거의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한 직업적 노하우,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성실성이나 끈기 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감히 넘보기조차 어려운 기록이다. 그렇다면 40년의 정치 경력을 자랑하는 김종필도 당연히 직업적 예찬론의 한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보인다. 왜 그럴까.

1980년 5월 초 당시 대권을 꿈꾸고 있던 김종필에게 한 언론인이 ‘대통령직이 직업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직업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직업인이라고 봐서도 안 된다.” 그가 말하는 ‘대통령직 직업불가론’의 핵심적인 단어는 ‘사심(私心)’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든 사심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종필의 단호한 태도를 보니 의아한 생각이 든다. 혹시 김종필의 마음속에는 직업의식이라는 ‘틀’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김종필이 몸담고 있는 정당의 지지율이 겨우 3%이며,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60%에 달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김종필의 애매한 직업관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다. 1999년 월간지 『신동아』에서 유력 정치인들의 정치 행태를 조사, 분석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조사결과 김종필의 정치스타일에 대한 불만으로는 기회주의, 변신, 편법, 생존적 처세 등의 단어가 1위(17.9%)로 꼽혔다. 다음으로는 애매모호함, 어물 슬쩍, 의뭉, 선문답식(10.7%), 현실 안주, 미온적, 2인자 처세(9.6%), 구시대, 수구적(7.5%) 등의 순서로 지적됐다. “기회주의적 처신과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 그게 김종필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인식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 - 김종필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5.16혁명에 참여했다. 당시 김종필은 엄청난 결정들을 대담하게 내려가면서 상황을 끌고 나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패기만만한 혁명아의 한 전형이었다고 한다. 1962년 실질적인 2인자 김종필은 박정희의 냉혹한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그는 1963년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날아갔다. 외유를 강요당한 것이다. 너무 일찍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알아버린 30대 후반의 사내에게 8개월간의 유럽여행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김종필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알아서 긴다는 것이다.

‘쇼당패’ 정치 -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그 다음은 김영삼 최고위원이다. 최고위원도 다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김영삼 최고위원과 나란히 걷지 않고 뒤따라간다. 민주화가 됐다지만 무릇 사회와 조직에는 상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은 유교적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임금이 임금답지 않더라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배웠단다. 불교적인 집안에서 자라지 않아 윗사람을 ‘부처님 모시듯’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YS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그 유명한 ‘홍곡(鴻鵠)과 연작(燕雀)’의 발언을 비롯,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명언(?)들을 줄줄이 쏟아낸다. 김대중 정권 창출의 한 축이었으면서도 1997년 12월의 국회연설은 그의 깍듯한 몸가짐을 잘 보여준다. “김대중 당선자께서 정계에 봉사하시려는 참뜻을 보람 있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김종필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들에겐 대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한 정치인의 지적이 헛말은 아닌 듯싶다. 김종필의 정치는 어떤 면에선 ‘쇼당패 스타일’이다. 고스톱에서 쇼당이란 내가 1등을 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차선의 전략이다. 쇼당패를 만들려면 판세를 읽는 절묘한 감각과 나머지 두 사람이 필요로 하는 패가 내 손에 있도록 상황을 몰아가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김종필은 천부적인 ‘쇼당패’ 정치 감각을 타고났다.

권력욕이 없는 사람(?) - 김종필은 조선 영조(英祖) 이래 가장 오랫동안 권력의 핵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언제나 양지만을 쫓아 변신하는 권력형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김종필이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에겐 권력 그 자체가 1차적인 목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종필에게 있어 권력이란, 김종필이란 한 개인이 추구하는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실현시켜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종필이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정치적 업적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문화계에 끼친 공로는 만만치 않다. 또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는 개인적인 삶의 즐거움이나 윤택함도 동시에 챙겼다.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역임한 4년 6개월간의 총리 시절에 대해서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인간적인 교류 외에 특별한 일을 했을 리 없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 하의 파워 총리로서 재임한 1년 6개월의 기간 동안에도 그가 국정 현안에 대해 어떤 중요한 발언을 하거나 결단을 내렸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자신의 개인적 삶을 즐기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힘은 좋은데 일은 안 하는 머슴’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을까. 4.13총선 후 골프만 치러 다니면서도 늘 당당하다. “왜 유독 우리집 양반이 골프 치는 것만 그렇게 비난하느냐. 박세리나 박지은이 골프 치는 것은 국위선양이라고 하면서…”라고 그의 부인이 했다는 말은 평소 김종필이 지닌 생각을 잘 대변해주는 듯하다. 구분이 없다는 건 확실히 무서운 일이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의 길 - 얼마 전 김종필은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한 야당의원의 한마디가 걸작이다. “그 사람이 불출마 선언을 하는 건 반에서 꼴찌 하는 학생이 서울대를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쯤 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김종필처럼 ‘르네상스적 교양으로 탄탄하게 무장된 사람’이 왜 이런 ‘험한 뒷모습’을 보여주는지 안타깝다. 김종필의 좌우명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아닌가. 칠순의 노인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느껴진다면 몇 마일의 길을 더 가지 않고 책을 보면서 쉬거나 편안하게 잠을 청하면 될 일이다. 아무도 안 말린다.

홍보가 필요없는 ‘국민디자이너’ - “앙드레 김이 새삼 무슨 홍보가 필요하겠어요?” 옷로비 청문회 건으로 엄청난 광고효과를 보았다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앙드레 김이 했다는 말이다. ‘국민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이 괜히 붙었겠는가. 1982년, 패션 강국 이탈리아의 대통령은 앙드레 김에게 문화공로훈장을 수여했고, 1997년에는 패션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의 기념패션쇼 이후 지난번의 시드니올림픽까지 연거푸 4차례 올림픽무대에 서왔는데, 각국마다 내로라하는 유명 디자이너가 많지만 올림픽 행사에 초청받기는 그가 유일하단다. 샌프란시스코시(市)는 1999년 11월 6일을 ‘앙드레 김의 날’로 선포했다. 해외에서 패션 외교사절이라고 부를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놀랄 만한 사건이다.

고독 속에서 탄생한 예술, ‘패션 오페라’ - 그는 날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국내외 14개 신문을 정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해외 패션쇼가 없는 경우 그는 대부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그의 의상실에서 작품구상과 제작에 매달린다. 자신의 직업에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사람이라서 별일이 없는 한 이 스케줄엔 변동이 없다. 저녁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87개 나라 대사관에서의 중요기념일 리셉션에 참가하거나 국내에서 열리는 음악회, 무용, 연극, 콘서트 등을 관람하며, 그 나머지 시간에는 텔레비전을 본다. 5남매 중 넷째지만 부모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나서 명절 때는 꼼짝없이 아들과 둘이서만 지내야 한다. 그에게는 ‘문화적 풍성함’과 ‘일상적 가난함’이 공존한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목숨을 건다고 할 만큼 치열하고 엄숙하다. 그는 매년 2~3회씩 해외 패션쇼를 갖는데 한 번 패션쇼를 할 때 필요한 옷이 약 1백70벌이란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에 한 개씩의 작품구상과 아이디어 스케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퇴근 후 사람들과 어울려 호프집에도 가고 노래방에도 가는 따위의 평범한 생활은 해볼 짬이 없다. “예술은 고독 속에서 탄생된다”는 글을 읽고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고백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건 40년의 생활이 실제로 그렇게 일을 중심으로 치열했기 때문이다. 앙드레 김은 패션쇼에 그의 창작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쏟아 넣는다. 그는 패션쇼란 오페라처럼 웅장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며, 의상과 음악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패션쇼를 ‘패션 오페라’로 규정한다.

‘앙드레 김’ 브랜드의 독특한 자산가치 - 앙드레 김이 드디어 적당한 사업파트너를 찾았는지, 머지않아 ‘앙드레 김’ 향수를 비롯한 화장품이 나올 예정이란다. 또 청소년을 위한 캐주얼의류와 홈패션 그리고 골프의류도 준비중이라니 흥미진진하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로얄티 지불을 위해서 그의 사업파트너가 제시한 ‘앙드레 김’이라는 브랜드의 자산가치는 도대체 얼마였을까. 심리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앙드레 김’이란 이름은 독특한 자산가치를 지닌다. 의상을 디자인하는 패션디자이너로서, 패션 오페라를 기획하는 엔터테이너로서 직업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독특한 예술가, 앙드레 김. 80세가 넘어서도 계속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단다.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일상과 직업의 황금비(黃金比) - 밥 위에 카레를 끼얹어 먹을 때 카레를 끼얹은 부분이 5, 흰밥이 보이는 부분이 3일 때 카레라이스의 맛이 가장 좋게 느껴진다고 한다. 미술에서도 5대 3의 비율은 황금비라 부른다. 사람은 이 구도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일과 삶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무엇이 5가 되고 무엇이 3이 되어야 황금비가 되느냐에 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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