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 기
라시드 앗 딘 지음/김호동 역주
사계절/2003년 10월/506쪽/32,000원
▣ 저 자 라시드 앗 딘
이란 중부의 도시 하마단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익힌 제약과 의술 지식을 바탕으로 몽골 군주 일 칸의 궁정에 출사하여 문관으로서는 최고직인 재상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일 칸국의 군주를 시해했다는 정적들의 모략으로 처형당했다. 역사학을 비롯해 신학․식물학․약학 등 광범위한 분야의 저작들을 남겼으며, 재상 시절 가잔 칸의 명을 받들어 집필한 『집사』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최초의 세계사’로 칭해지고 있다. 중세 이슬람권 최고의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집사』의 몽골사 관련 부분은 오늘에도 그 독보적인 사료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역 주 김호동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황하에서 천산까지』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이 있으며, 주요 역서로는 『유목사회의 구조』『칭기스 칸』『유라시아 유목제국사』『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역사서설』이 있다.
▣ Short Summary
『집사(集史』는 ‘연대기의 집성’이라는 원제목이 시사하듯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고 통치했던 여러 군주들의 연대기를 종합하여 서술한 것일 뿐만 아니라, 몽골 이외에도 중국, 인도, 아랍, 투르크, 유럽, 유태 등 여러 민족들의 역사까지도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망라하여 서술한 이런 규모의 저술은 그때까지(13~14세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집사』를 가리켜 ‘최초의 세계사’라 부른다.
『집사』의 국역본 전3권 가운데 제2권에 해당되는 『칭기스 칸 기』는 분량이 다른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칭기스 칸의 조상들의 사적, 본서의 대종을 이루는 칭기스 칸의 일대기, 그가 남긴 유무형의 유산들을 정리함으로써, 몽골제국 건설의 전 과정을 주도면밀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서술했다. 그리고『칭기스 칸 기』는 칭기스 칸의 일생을 크게 여섯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세계 각지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병렬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런 서술 체제를 보면 『집사』가 무엇 때문에 ‘최초의 세계사’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차 례
제1편 열조기
제2편 칭기스 칸 기
1장 칭기스 칸의 계보
2장 칭기스 칸 일대기
3장 성훈․천호일람
칭기스 칸 기
라시드 앗 딘 지음/김호동 역주
사계절/2003년 10월/506쪽/32,000원
제1편 열조기
투르크인에 관해 믿을 만한 역사가들이 진술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몽골 종족들은 에르게네 쿤으로 갔던 두 사람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거기서 밖으로 나온 무리들 가운데 중요한 수령이 부르테 치나였고, 알란 코아의 남편인 도분 바얀과 일부 종족들이 그에게서 나왔다. 앞에서 말한 도분 바얀은 알란 코아라는 매우 정결한 부인을 얻었는데, 그녀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다. 하나는 벨구누트였고 또 하나는 부구누트였으며, 몽골의 두 종족이 그들의 후손에서 나왔다. 이제, 칭기스 칸과 그의 친족들의 지파에 관한 일화와 역사와 계보에 대한 설명을 도분 바얀과 알란 코아에서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자.
알란 코아의 후손들에게서 수많은 지파와 종족들이 나왔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의 수를 헤아린다면 백만도 넘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조상들의 계보를 잘 보전하고 있고, 그 무리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자식이 태어나면 그에게 계보를 가르쳐 주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계보를 분명하고 명료하게 알고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알란 코아의 남편인 도분 바얀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알란 코아가 과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천막 틈 새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와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출산할 때가 가까워지자 남편의 형제와 친족들이 모여 왔으나, “당신들이 나에 대해서 품는 어떠한 의심도 옳지 못하다. 내가 밴 이 자식들은 특별한 부류에 속한다. 그들이 장성하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군주와 칸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게 생긴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당신들과 평민 종족들에게 확실해질 것이다.”라는 설명을 마치자 그들은 더 이상 그녀를 비난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알란 코아에게서 세 아들이 태어났다. 큰아들은 부쿤 카타키였고, 가운데 아들은 부스킨 살지였고, 막내의 이름은 보돈차르 카안으로, 칭기스 칸의 계보는 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세 아들에게서 생겨 나와 모두 ‘니르운’이라고 불리는 - 즉, 순결한 허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 수많은 지파와 부족들은 극도의 존경을 받았다. 보돈차르는 수많은 몽골 종족들의 지휘자이자 군주로, 매우 용맹하며 출중했다. 보돈차르에게 있던 두 아들 중 큰아들 부카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부카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두툼 메넨은 칭기스 칸의 지파가 그에게로 소급된다. 그리고 두툼 메넨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여덟 명이 살해되었고 생존한 한 사람이 카이두 칸이었다. 카이두 칸은 칭기스 칸의 6대조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칭기스 칸의 조상들의 계보는 그 세 아들 중 바이 싱코르에게로 연결되어 있다. 툼비나 카안은 바이 싱코르의 아들이고, 칭기스 칸의 4대조이다. 툼비나 칸에게 있던 아홉 아들 중 여섯째 아들 카불 칸의 명성은 몽골 종족들 사이에서 매우 높았고, 자기 휘하에 있던 종족과 추종자들의 지도자요, 군주였다. 카불 칸은 칭기스 칸의 3대조이다. 또한, 카불 칸에겐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쿠툴라 카안이 군주가 되어 얼마 동안 칸의 지위에 있었으나 쿠툴라 칸이 죽은 뒤 그의 조카이자 바르탄 바하두르(칭기스 칸의 조부)의 셋째 아들인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군주가 되어 다스렸다. 이수게이 바하두르는 칭기스 칸의 아버지로 몽골의 여러 종족들의 군주였고, 그의 형과 아우들, 즉 그의 숙부와 사촌들 모두가 그에게 복속했으며, 합의에 의해 그를 자기들의 군주로 지명했다.
제2편 칭기스 칸 기
제1장 칭기스 칸의 계보
앞서 나왔던 기(紀)들과 일화들 가운데에서 설명했듯이, 칭기스 칸은 알란 코아에게서 나온 모든 니르운 종족들의 정화였다. 그가 등장한 뒤, 세상 사람들은 그가 하늘의 갖가지 도움으로 특별한 인물로 선택되어 그의 탁월한 위력과 용맹으로 투르크와 몽골의 종족들, 그리고 기타 여러 집단들을 복속시키고 예속민으로 만든 것을 목격했다. 그는 마치 여러 보석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보석 같아서, 그의 고귀한 본성과 정결한 품성은 여러 족속들 사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세상의 여러 왕국들을 장악했고, 그의 위대한 자손들과 유명한 일족들은 지상의 일곱 강역 가운데 여섯 군데에서 왕관과 보좌를 차지하고 행운의 군주가 되었다.
칭기스 칸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통치할 때 모여들어 그에게 복속했던 수많은 종족들은 칭기스 칸이 어렸기 때문에 그에게서 떠나갔다. 그의 어머니 우엘룬 에케는 매우 유능하고 현명했기 때문에 그녀의 힘이 닿는 데까지 그를 보호하고,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남기고 간 재산과 속민과 군대와 추종자들을 지키고 간수했다. 칭기스 칸은 어려운 처지와 수많은 곤경과 갖가지 고통에도 불구하고 매우 용맹하고 대담했으며, 대단히 지혜롭고 능란했고 이지적이었다. 그의 아량과 호의는 그의 명성을 주변에 널리 퍼지게 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 여러 종족들은 그에게 기울어 같은 편이 되려 했고, 결국 그는 강력한 힘을 갖추어 친구들을 승리자로, 적들을 패배자로 만들었다. 칭기스 칸은 먼저 그에게 적개심을 품었던 그의 친족과 사촌들과 부형들과 싸워서 그 종족의 대부분을 격살하고 예속민으로 편입했다. 또한 알탄 칸(주르체 종족 출신이며, 다이킴 완얀 아쿠다의 후손들 가운데 군주였던 사람들을 모두 알탄 칸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전쟁에 나서 키타이 지방 대부분을 정복했고, 티베트와 탕구스 왕국, 키타이, 카라장 지방, 투르키스탄 지방과 이란을 정복했다. 그는 조카들과 함께 키랄, 바쉬기르드, 불라르, 킵착 초원, 러시아, 체르케스, 아스를 비롯하여 북쪽 끝까지, 또 남쪽으로는 아비시니아에 이르기까지 점령했다. 솔랑카 지방도 마찬가지로 점령했다.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 칸은 키타이의 나머지 지방을 장악했고, 형제인 훌레구 칸은 바그다드, 시리아, 이란의 나머지 지방을 비롯하여 룸 지방의 가장 먼 곳까지 모두 점령했다.
칭기스 칸에게는 거의 500명에 이르는 부인과 후궁들이 있었는데, 각 종족에게서 취한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몽골식으로 혼인했지만, 대부분은 여러 나라와 지방을 정복했을 때 전리품으로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큰 부인들은, 첫째 명망 높은 네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들의 어머니인 부르테 푸진, 둘째 쿨란 카툰, 셋째 이수겐, 넷째 알탄 칸의 딸 공주 카툰, 다섯째 이수겐의 자매 이술룬이다. 부르테 푸진에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주치, 둘째 차가타이, 칭기스 칸이 사망한 후에 카안이 되어 13년간 카안의 자리에 있었던 셋째 우구데이, 넷째 톨루이였다. 칭기스 칸의 이 네 아들들은 모두 총명하고 유능하며 완벽하고 용맹하며, 아버지와 군대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칭기스 칸의 국가에 네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제2장 칭기스 칸 일대기
제1절(1155 ~1166년)
칭기스 칸이 태어난 날짜와 시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믿을 만한 점성사들은 그가 워낙 위대한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의 사망 연도를 기록했고, 돼지해의 가을 보름날에 사망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몽골의 여러 왕자들과 아미르(군 사령관 ․총독 ․황태자 등을 뜻하는 아라비아어)와 귀족들에게는 그의 생애가 만 72년이었고, 일흔 세 살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행운의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부배(父輩)들과 백숙(伯叔)들에게 속해 있던 모든 종족들의 통치자요 수령이었고, 모두 그에게 복속했다. 그러나 타타르를 비롯한 다른 종족들은 그와 적대했고, 그들 사이에는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의 부인 우엘룬 에케가 칭기스 칸을 임신했을 때도 그가 타타르 원정에 나섰을 때이다.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타타르의 군주인 테무진 우게, 코리 부카와 전투를 벌여 그들을 패배시키고 절멸한 뒤 승리하고 돌아와 그들의 재산과 가축을 약탈하고, 델리운 볼닥이라고 부르는 곳에 진영을 친 후 얼마가 지난 뒤 칭기스 칸은 돼지해(1155년) 행운의 시각에 태어났다. 칭기스 칸은 손에 마치 간(肝)처럼 생긴 복사뼈만한 응혈을 움켜잡고 있었고, 그의 이마에는 세계 정복자의 징표가 분명히 보였으며, 행운과 번영의 빛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이수게이 바하두르는 타타르와 그 군주인 테무진 우게에게 승리를 거두고 적을 눌렀기 때문에 그것을 상서로운 징표라고 생각하여 그 타타르 군주의 이름을 따서 영광스런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제2절(1167 ~1194년)
칭기스 칸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부친 생전에 그를 미워했고 은밀히 적개심을 품었던 타이치우트 종족의 수령들, 즉 그의 친족들은 오랜 원한을 드러냈다. 타이치우트는 가장 막강한 지파였기 때문에, 이수게이에게 복속하던 다른 친족과 군대가 그의 자식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타이치우트 쪽으로 기울어 점차 그들과 연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지녔다. 칭기스 칸에게 적개심을 품은 자무카 세첸도 타이치우트 종족에게로 가서 연합하고, 이키레스 종족, 코룰라스 종족이 타이치우트와 연합하여 3만 명의 기병으로 칭기스 칸을 공격해 왔다. 그들의 의도와 계략을 전해들은 칭기스 칸은 즉시 군대를 정비하고, 그를 지지하며 우호적이던 종족과 족속들 모두에게 소식을 알려 그들을 다 모여서 나누니 13쿠리엔(말의 뜻은 ‘고리’인데, 한 종족이 어떤 지점에 진영을 칠 때 고리 같은 모양을 이루고 그들의 지도자는 마치 그 원 안의 점처럼 위치했기 때문에 쿠리엔이라 불렀다)이었다. 양측의 전투가 벌어졌고 13쿠리엔으로 적군 3만 명의 기병을 격파했다. 적들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고, 우두트와 부르두트 종족의 수령인 우드트와 부르두트가 그에게로 와서 복속했다.
타타르 종족이 알탄 칸의 명령을 받들지 않고 그에게 복속을 표하지 않았는데(타타르 종족들은 키타이 군주인 알탄 칸에게 복속한 예속민이었다), 그를 대적할 만한 힘이 없어 극심한 궁지에 빠지자, 부인과 아이들과 말떼와 가축과 노복들을 데리고 이동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칭기스 칸은 타타르 종족의 무진 술투와 그의 부하들의 이런 소식을 듣고는 공격하여 무진 술투를 붙잡아 죽이고 그들이 갖고 있던 모든 말떼와 가축과 물자를 노략했다. 이 같은 일이 알탄 칸과 그의 아미르들의 희망에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탄 칸 휘하에 있던 대아미르인 칭상은 매우 기분이 좋아서 칭기스 칸을 칭찬하고 그에게 ‘자우우트 쿠리’(키타이 말로 대아미르라는 뜻)라는 칭호를 주었다.
칭기스 칸이 타타르에게 승리를 거두고 그의 군사와 속민들이 많은 보상을 받았을 때, 그는 유르킨 종족을 회유하기 위해 약탈물 가운데 일부를 그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생각했으나, 도중에 유르킨 종족 가운데 일부가 반도들과 연합하여, 칭기스 칸 휘하의 군인 두 명을 살해하고 50명의 말을 빼앗은 뒤 그들의 옷도 벗겨버린 일이 발생했다. 그러한 보고를 받은 칭기스 칸은 분노하며, 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그 후 니르운에 속하는 다른 종족들과 타타르, 메르키트 등 여러 종족들이 서서히 칭기스 칸의 어전으로 와서 그의 군대의 숫자도 많아져, 마침내 상술한 이 27년의 기간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막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제3절(1195 ~1203년)
칭기스 칸의 부친 이수게이 바하두르와 옹 칸은 서로 이웃한 곳에 살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매우 우애 있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다. 옹 칸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쿠르차쿠스의 계승권을 두고 나라 안에서 서로 다투었던 관계로 자신의 형제와 조카들 몇 명을 살해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숙부인 구르 칸이 그를 공격했고, 옹 칸은 패배하여 한동안 떠돌이 신세가 되었는데, 그때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고, 그를 도와 출정해서 구르 칸을 공격하여 나라를 빼앗아 옹 칸에게 맡겼다. 그 같은 빚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의형제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형제’라고 불렀고, “애정은 세습된다”라는 속담처럼 칭기스 칸도 우호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칭기스 칸은 메르키트 종족의 톡타이를 치기 위해 출정하여, 메르키트를 격멸하고 약탈했는데, 그 전투에서 빼앗은 것들을 모두 옹 칸과 그의 누케르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옹 칸은 강력해지고 군대와 속민(屬民)들을 지휘하게 되자 아무 상의도 없이 메르키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그 곳을 치고, 가축과 노복들과 함께 끌고 왔으나 그것을 가운데 어떤 것도 칭기스 칸에게는 주지 않았다.
칭기스 칸은 옹 칸과 연합하여 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부이룩 칸 휘하의 군사령관인 쿡세우 사브락을 치기 위해 출정하여 동이 트면 전투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옹 칸은 자기 군대가 주둔하는 자리에 불을 밝히고는 밤중에 산을 넘어서 가버렸다. 옹 칸이 그 같은 기만술을 써서 이탈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는 도중에, 메르키트의 군주인 톡타이의 동생과 톡타이의 아들이 옹 칸이 없는 틈을 타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자기들의 군대와 영지를 수습했다. 쿡세우 사브락은 군대를 데리고 즉시 추격하여 그곳에 있던 웅 칸을 급습하고, 그들의 모든 재산과 가축을 약탈했다. 옹 칸은 다시 곤경에 처하자 칭기스 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칭기스 칸은 네 명의 대아미르를 보내어 재산을 다시 빼앗아 옹 칸에게 돌려주었다. 칭기스 칸은 옹 칸과 함께 만나 회합을 열고 쿠릴타이(Khuriltai : 몽골인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사이에 옛날부터 관행(慣行)되어 온 합의제도)를 개최하고, 함께 타이치우트를 공격하여 그 종족들은 패주했다. 칭기스 칸은 타이치우트 및 그들과 연맹한 다른 종족들을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이디 코로칸이라는 곳에서 자무카를 격파했고, 쿵크라트 종족도 거기서 복속했다.
자무카 세첸은 원래 칭기스 칸에 대해서 적개심과 악의를 품었고 속임수와 악행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옹 칸의 큰 아들인 셍군에게로 가서 “칭기스 칸은 당신의 적인 타양 칸과 의기 투합하여 계속 사신을 보내고 있다”라고 말하여, 칭기스 칸이 출정할 때를 이용하여 군대를 사방에서 불러 그를 치자고 합의하였다. 칭기스 칸의 숙부인 다리타이 옷치긴과 알탄, 쿠차르 등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그에게 분노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자무카와 셍군 사이의 합의에 동참하여, 모두 연합하여 칭기스 칸을 치기로 했다. 그때 셍군은 아버지와 떨어져 엘레트라는 곳으로 이동한 뒤, “전에 그가 우리의 딸을 자기 아들인 주치를 위해서 청했으나 우리는 주지 않았다. 이제 사람을 보내 ‘딸을 줄 테니 와서 잔치를 벌이고 혼례 음식을 같이 먹자!’고 말하자. 그리고 그가 오면 그를 붙잡아 버리자.”라고 계략했다. 칭기스 칸에게 전갈이 전달되자 그는 출발하였으나 옹 칸과 셍 군이 칭기스 칸을 향해 출정할 계획을 꾸민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옹 칸 휘하의 대아미르인 한 사람이 현재 일어난 일을 부인과 말하는 이야기를 집 밖에 서 있다가 들은 키실릭은 즉시 칭기스 칸에게 신속하게 소식을 알려주었다. 칭기스 칸은 이 말을 잘 이해하고 자신은 아랄에 머물고, 천막들은 산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옹 칸이 마우 운두르산의 전면(前面)에, 붉은 버드나무 숲이 자라는 곳으로 온 소식을 전해들은 칭기스 칸은 즉시 출정했다. 양측 군대는 대치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칭기스 칸의 군대는 적었고 옹 칸의 군대는 많았으나 칭기스 칸과 다른 아미르들도 모두 함께 공격을 개시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케레이트 종족들 가운데 하나이며 옹 칸 휘하의 최정예 군대인 지르킨 종족을 패주시켰다. 그 뒤에 케레이트 종족에 속하는 퉁카이트 종족을 격파하고, 그 다음에는 옹 칸 휘하의 아미르들 가운데 대아미르인 코리 실레문 타이시를 패배시켰다. 그때 셍군이 공격을 하다가 화살 한 대가 그의 얼굴에 꽂혔고, 그로 말미암아 케레이트 군대의 공격이 줄어들고 중지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완전히 파멸할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이 전투는 몽골 종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아직도 칼랄진 엘레트의 전투에 관해서는 되풀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칭기스 칸은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퇴각해서, 옹 칸에게 그가 빚진 은혜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옹 칸의 아들 셍군은 칭기스 칸을 치기 위해 다시 진군했다. 칭기스 칸이 사신을 옹 칸에게 보냈을 때, 그는 쿵크라트 종족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모두 복속시키고 발주나 쪽으로 갔는데, 이키레스 종족에 속하는 보투가 코룰라스 종족에게 쫓겨 패주해 왔다. 그는 그곳에서 칭기스 칸과 연맹하고 함께 머물렀다.
칭기스 칸의 숙부인 다리카이 옷치긴, 자지라트 종족의 자무카, 바아린 종족, 녹타 보올의 일족, 타타르 종족의 아미르 등 모두가 연맹하여 상의하기를, “옹 칸에 대해 야습을 감행하여 우리들 스스로 군주가 되자. 옹 칸이나 칭기스 칸 누구와도 연합하지 말자”라고 말했다. 이러한 내용이 옹 칸에게 전해지자, 그는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여 그들을 약탈했다. 이런 까닭에 다리카이 옷치긴과 케레이트 종족들에 속하는 사카이트 종족, 눈친 종족 등이 칭기스 칸에게 귀순하고 연합했고, 알탄 제운, 타타르 출신의 쿠투 티무르 등은 나이만의 타양 칸에게 가버렸다.
칭기스 칸은 오난 강 원두에서 추종자들을 집결시킨 뒤 옹 칸을 치기 위해 출정했다. 밤에도 멈추지 않은 채 진군하여, 그는 옹 칸이 있는 곳에 이르러 전투를 벌였는데, 옹 칸을 격파하고 케레이트의 군대와 왕국을 모두 빼앗았다. 옹 칸과 그의 아들 셍군은 패배하여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도주를 하다가 옹 칸은 나이만의 군주 휘하에 있던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었고, 그의 아들 셍군도 도망쳐 나가 부리 티베트 지방 일부를 약탈하며 한동안 머물며 파괴를 일삼다가 지베트 종족의 한 사람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것이 케레이트 종족들의 최후이자 그 일족의 국가의 종말이다. 칭기스 칸이 이처럼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군주의 대업이 그에게 확정되었고, 주변에서 종족들이 그에게 귀순해 들어왔다. 칭기스 칸은 거대한 회의를 열고 크나큰 은총에 감사하면서 준엄하고 자비로운 법령들을 선포하고, 상서롭게 칸의 자리에 앉았다. 칭기스 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제4절(1204~1210년)
나이만의 군주 타양 칸은 “지상에서 어떻게 두 사람의 군주가 한 왕국에 있을 수 있겠는가. 칭기스 칸의 직위를 빼앗아 버리자”라고 웅구트 종족의 군주인 알라쿠시 티긴 쿠리에게 사신을 보냈다. 칭기스 칸은 타양 칸이 적대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상술한 이야기를 새롭게 듣고 보름날에 타양 칸과 전투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한동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말 한 마리가 칭기스 칸의 군대에서 도망쳐 나이만 군대 속으로 가버렸고, 그 말이 여윈 것을 본 타양 칸은 전투를 시작했다. 그 날 커다란 전투가 벌어졌고, 타양 칸의 군대가 패배하고 전투에서 물러났다. 타양 칸은 깊은 상처를 많이 입어 움직일 수 없었다. 코리 수바추와 타양 칸의 아미르들은 “타양 칸이 죽는 것을 우리가 보기 전에, 우리가 죽는 것을 그가 보도록 나가서 전투를 하자”라고 말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여 모두 죽음을 당했다. 칭기스 칸은 그들을 산 채로 손에 넣고자 했지만, 그들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죽음을 당했다. 이에 칭기스 칸은 놀라며 그 단호함과 충성심에 탄복했다. 이 전투에서 두르벤, 타타르, 카타킨, 살지우트 종족들이 모두 귀순하여 칭기스 칸의 어전으로 왔고, 타양 칸의 아들인 쿠쉴룩은 도망쳐 자기 숙부인 부이룩 칸에게로 갔다. 그 뒤, 칭기스 칸은 메르키트 종족에게 원정하여 그들을 패배시켰고, 탕구트라고 불리는 카신 지방으로 출정하여 정복했다.
1206년 쉰두 살의 칭기스 칸은 9개의 다리를 지닌 흰 깃발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장엄하게 쿠릴타이를 열어, 축복을 받으며 보좌에 앉았다. 신령한 힘과 이적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쿠케이 텝 텡그리는 앞으로 자신이 주장하던 이적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하기를, “각자 구르 칸이라고 주장하던 이 지역의 군주들은 이제 모두 그대에게 정복되었고, 그들의 왕국도 그대의 것이 되었다. 그러니 그대도 그것과 같은 뜻을 지닌 ‘칭기지’, 즉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칭기스’는 ‘칭(ching)’의 복수형이고, ‘칭기지’는 '칭‘의 강세형이기 때문에, 이 말의 뜻은 왕 중의 왕이다.” 아미르들은 그의 제의에 만족하며, 그 칭호를 그에게 바쳤다. 그의 위력과 위세는 극에 달했고, 세상의 군주라고 할 만했다. 그 회의가 끝나고 쿠릴타이가 종료되자 칭기스 칸은 부이룩 칸에 대해서 원정을 나섰다. 칭기스 칸과 그의 군대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들 위를 덮쳐, 그를 죽이고 그의 왕국과 가옥, 부인과 자식, 말떼와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키르키즈의 아미르들과 그 지방이 칭기스 칸에게 귀순하였으며, 거듭 전쟁을 벌이고 반란을 일으켰던 메르키트의 군주 톡타이 베키를 잡아 살해했으며, 위구르 종족이 귀순하였다.
제5절(1211 ~1218 년)
칭기스 칸은 이 기간 중 마지막 해에 예순네살 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먼저 군대를 정비하여 몽골인들이 ‘자우쿠트’라고 부르는 키타이와 카라키타이와 주르체 등의 지방들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는 출정하면서,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빼앗았다. 주르체의 도시들 가운데 매우 큰 도시인 퉁깅 시 방면으로는 제베를 출정시켜 함락시켜 버렸다.
칭기스 칸이 파우주이라는 도시에 진영을 치고 포위에 들어갔을 때, 키타이 군대의 수령인 쿠샤 삼진은 주르체 군대의 수령인 기우닝과 협의하여 “칭기스 칸의 군대가 파우주이 시를 약탈하고 약탈물을 분배하고 말들에게 풀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어 주의를 소홀히 하고 있으니 급습하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상의한 뒤에 함께 연합해서 수많은 보병과 기병의 지원을 받아 출정했다. 군대가 음식을 만들어서 먹느라고 정신이 없는 바로 그때 칭기스 칸에게 금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솥들을 쏟아 버리고 즉각 출정하여 두 부대로 나뉘어 적이 오기를 기다리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는데, 알탄 칸의 군대는 매우 많았다. 이윽고, 양측의 군대가 서로 부딪쳐 전투에 들어갔다. 몽골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즉시 키타이와 카라티카이와 주르체의 군대를 격파했고, 패주자들을 추격해 가서 그들을 다시 격파하고 패주시켰다. 이 전투는 매우 중대했고 유명해져서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널리 회자된다. 키타이와 주르체의 유명한 사람들이 그 전투에서 사망했고, 칭기스 칸은 그곳에서 개선해서 돌아왔다. 칭기스 칸이 키타이 방면으로 원정을 시작해서부터 미주라고 불리는 큰 도시에 도착한 그때까지 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그가 갔던 모든 도시와 지방과 성채들을 정복했다.
칭기스 칸은 키타이 지방에 대한 정복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메르키트 종족 - 칭기스 칸은 그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그들의 군주인 톡타이 베키와 그의 몇 몇 아들과 동생들을 죽였으며, 그 군대의 대부분을 궤산시킨 바 있다 - 에 속한 톡타이 베키의 형제 쿠두, 그의 세 아들이 다시 도주하여 나이만 지방의 변경에서 무리를 모아 일을 도모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수베테이 바하두르를 군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병사들을 위해 많은 수레를 준비하고 그것을 쇠못으로 단단하게 하여, 돌 위에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수베테이 바하두르는 몽골리아 지방 안에 있는 잠 무렌 부근에서 쿠두와 전투를 벌여 메르키트 종족을 격파하고 모두를 죽였다. 그래서 그 종족의 자취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키르키즈나 투마트 또는 다른 종족들처럼 귀순한 뒤에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을 모두 붙잡아 죽였다. 이제까지 1211년의 처음부터 1218 년의 마지막까지 8년 동안 칭기스 칸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했다.
제6절(1219 ~1227년)
칭기스 칸은 아들들과 만호장․천호장․백호장(칭기즈칸은 몽골을 지배하는 지위에 오르자, 그때까지의 씨족 및 부족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국가 기구를 개혁하여, 국내 유목민을 95개의 천호(千戶)로 하는 집단제로 분할하였다. 그가 구성한 천호 및 그것을 구성하는 백호(百戶) 집단은 행정단위이면서 군사 단위였는데,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는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들을 정하여 정비하고, 집회를 열어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그들 사이에 통용될 새로운 규정과 규범과 법령을 정해준 뒤, 호라즘 샤의 지방을 치기 위해 출정하여 도중에 있는 모든 지방들을 점령했다. 칭기스 칸은 대군을 이끌고 오트라르시에 도착하여,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에게 수만 명의 병사와 함께 도시를 포위하라고 명령하고, 주치에게는 약간의 군대를 주어 잔드와 양기켄트 쪽으로 보냈고, 일군의 아미르들은 호젠트와 파나카트로 보냈다. 오트라르에서는 5개월간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왕자들은 도시를 정복하고 주민들 전부를 도시 밖으로 몰아낸 뒤, 거기에 있는 것들을 모두 약탈했다. 왕자 주치도 잔드와 양기켄트 시가 있는 곳으로 진군하여 정복한 뒤 감독관을 배치했다. 이 기간 동안 칭기스 칸은 막내아들인 톨루이 칸과 많은 군사들과 함께 부하라로 가서, 부하라 시 외곽의 성문에 진영을 쳤고, 뒤이어 도시를 둘러싸고 진을 쳤다. 칭기스 칸은 도시의 구역들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해 도시의 대부분이 며칠 만에 모두 불타 버렸고, 성채를 공격해서, 3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포로로 끌려갔고, 젊은이들은 징용대로 선발해 사마르칸트와 다부시야로 끌고 갔다. 칭기스 칸은 그곳에서 사마르칸트를 정복하기 위해 출발했다.
사마르칸트 군대의 막대함과 그곳에 있는 성벽과 성채의 견고함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사마르칸트 시를 정복하는 데만도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먼저 그 주변을 깨끗이 일소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고 판단하여, 막내아들인 톨루이 칸과 함께 부하라로 가서 그곳을 정복한 뒤 거기에서 모든 징용대를 사마르칸트 쪽으로 보냈고, 도중에 어느 곳이든 복속을 하면 해를 가하지 않았지만, 반항을 하면 군대를 남겨두어 정복하도록 했다. 그가 사마르칸트 시에 도착했을 때, 오트라르나 다른 지방으로 보냈던 왕자들과 아미르들이 그곳들을 정복하고 돌아와 징발된 징용대와 함께 사마르칸트에 왔다. 칭기스 칸이 그 도시와 성문을 장악할 방책을 궁리하는 가운데, 호라즘 샤가 하영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대아미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던 제베 바하두르와 수베테이에게 3만 명을 주어 술탄을 추격하러 보내고, 알락 노얀과 야사우르를 바흐시와 팔리칸으로 파견했다. 그 뒤 셋째 날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몽골군과 징용대가 도시의 성벽을 포위해 전투를 하였고,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밤이 되자 각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칭기스 칸은 직접 말에 올라 전군에게 도시의 성벽을 포위하라고 하고, 활과 칼로 도시의 군인들을 전쟁터로 나오게 했다. 다음날 대담한 몽골인들과 주저하는 도시민들은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새벽이 되자 병사들은 다시 성채를 둘러쌓고, 양측에서는 화살과 돌이 쏟아졌다. 저녁이 되었을 때 몽골군은 성문을 장악하고 시내로 들어가 도시와 성채를 폐허나 마찬가지로 만들고 수많은 아미르와 병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다음날 남은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칭기스 칸은 그 무리들 가운데 3만 명을 직인(職人)이라는 명목으로 정하여 아들․카툰․아미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와 같은 숫자를 징용대로 정했다. 그는 징용대 가운데 일부는 후라산으로 데리고 가고, 일부는 아들들과 함께 호라즘 쪽으로 보냈다. 그 징용대들 가운데 목숨을 보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런 까닭으로 그 지방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칭기스 칸은 그해 여름과 가을을 사마르칸트 주변에서 보냈다.
마와라안나흐르의 왕국들이 모두 정복되고 다른 지방들도 마찬가지로 점령되었을 때, 호라즘은 마치 밧줄이 끊어진 천막처럼 정복지 한 가운데에 있었다. 칭기스 칸은 그곳도 정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의 큰아들인 주치와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에게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을 정복하라고 정해 주고, 자신은 톨루이 칸과 함께 행군의 피로로 말미암아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얼마간 휴식을 취했다. 그의 의도는 곧이어 자신이 직접 술탄을 추격하여 후라산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그 후 왕자들이 호라즘에 도착하여 그곳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칭기스 칸은 나흐샤브로 와서 잠시 그곳에 머문 뒤 티르미드 강을 건너 발흐로 가서 그 도시와 지방을 정복했고, 그는 거기서 탈리칸 성채를 포위하기 위해 갔다. 그가 탈리칸 성채를 포위하기 시작하려던 바로 그때 호라즘에 있던 아들들이 호라즘을 공략하지 못한 채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그 까닭의 일부는 주치와 차가타이 사이의 불화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칭기스 칸은 분노하여, 그들의 막내 동생인 톨루이가 지휘관이 되어 그들과 그 휘하의 군대를 지휘하고, 그의 말에 따라 전투를 하라고 명령하고는 톨루이 칸에게 대군을 주어 후라산 정복을 위해 보냈다. 그렇게 한 뒤 병사들을 모두 전투에 투입시켜, 일주일 만에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 그리고 칭기스 칸 자신은 티르미드를 공략했고, 그곳을 떠나 캉구르트 지방과 슈만 변경으로 가 그 부근의 지역들을 정복하고, 아무다리아를 건너서 발흐를 함락시키고, 탈리칸 성채로 진군해 그곳을 포위했다. 칭기스 칸은 탈리칸에서 사신을 보내어 톨루이 칸에게 돌아오라고 했고, 그가 도착할 즈음 칭기스 칸은 격렬한 전투를 통해서 탈리칸 성채를 점령하고 그것을 파괴했다.
술탄의 병사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칭기스 칸은 잠수부들에게 명령하여 강으로 들어가서 가능한 것들을 모두 건져 올리라고 하고 전리품을 모은 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진영을 쳤다. 그 뒤 칭기스 칸은 발라 노얀과 두르베이 노얀 두 사람을 대군과 함께 힌두 지방으로 보내서 술탄을 찾도록 하고, 자신은 인더스 강 상류 쪽으로 돌아가 그 지방을 정복하도록 했다. 칭기스 칸은 그 해 여름을 몽골인들이 파르반이라고 부르는 평원에 머물며 발라 노얀을 기다리면서 그 부근에 있는 지방들을 모두 정복하고 약탈했다. 칭기스 칸은 발라 노얀이 도착하자 그곳에서 이동했으며, 쿠나운 쿠르간 성채에 도착했을 때 우구데이가 그곳에서 어전에 합류했다. 그 뒤 칭기스 칸은 술탄 무함마드의 일을 처리하고, 그의 아들 술탄 잘랄 앗 딘의 일도 처리하고 나서 - 한 사람은 죽고, 또 한 사람은 방랑자가 되었다 - 술탄의 영역들 가운데, 아란,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시르반을 정복하러 제베와 수베테이를 보냈다. 간단히 말해 제베와 수베테이는 이라크 지방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이라크 지방과 속령의 대부분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겨울이 오자 추위가 매우 심하여 그들은 아제르바이잔 쪽으로 향했고, 도중에 가는 곳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살육과 약탈을 하면서 타직 지방을 거쳐 칭기스 칸의 어전으로 왔다.
칭기스 칸은 타직 지방을 정복한 뒤 원래의 거주지와 옛 영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서두른 까닭은 자신의 오랜 부재로 말미암아 탕구트인들이 동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칭기스 칸은 탕구트 지방에 도착하여 대부분의 도시들을 정복했다. 그가 캄주, 사주, 카주, 우루카이 등의 도시들을 포위하고 거기에 불을 지르고 있을 때, 그 지방의 군주인 시두르쿠라는 인물이 50만 명과 함께 몽골군과 전투를 하러 나왔다. 마침 그 부근에는 카라무렌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호수들이 있었는데, 모두 얼어붙었다. 칭기스 칸은 그 얼음 위에 서서 병사들에게 적을 향해 활을 쏘아 얼음 위로 오지 못하게 하고 실수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탕구트인들이 그렇게 건너다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 시신의 머리를 세워 두었다고 한다.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1만 명이 죽으면 한 시신의 머리를 세워 두는 관습이 있다. 칭기스 칸은 그 도시를 지나서 다른 도시․지방들을 취하고 키타이 방면으로 갔다.
칭기스 칸은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꾸고는 아미르들과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아들들과 함께 조용히 자리를 잡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훈계와 충고를 해주었다. “오, 아들들이여! 내가 세상을 하직하고 마지막 여행을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알라! 나는 창조주의 힘과 하늘의 도움으로, 그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 1년이나 걸리는 거리인 광대한 왕국을 너희 자식들을 위해 정복하여 완성시켰노라. 이제 나의 遺志(유지)는 너희들이 적을 물리치고 친구를 치켜세워 주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편안하고 풍요롭게 인생을 보내고 왕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우구데이 카안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유촉을 모두 마친 뒤, “너희들은 각자의 왕국과 울루스로 가라. 왜냐하면 왕국이 소홀히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으며, 나의 명성과 영예를 위해 저승으로 가겠노라.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 법령을 바꾸지 말라. 차가타이가 여기에 없지만, 그에게 내가 떠난 뒤 내 말을 바꾸어 왕국 안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감독하게 하라. 너희들은 가거라!” 그는 그들을 각자의 왕국와 울루스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군대와 함께 낭기야스 방면으로 향했는데, 그 도시의 군주들이 차례로 찾아와 복속했다. 칭기스 칸은 병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아미르들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라고 유언했다. 돼지해 가을(1227년 8~9월)에 그는 보좌와 왕국을 명망 높은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덧없는 세상을 떠났다. 아미르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이 사실을 은폐했다가 그 종족이 밖으로 나오자 그들 모두를 죽인 뒤, 그의 관을 모시고 귀환했다. 그들은 그것을 오르두들에 운반할 때까지 도중에 마주치는 모든 피조물들을 죽였다.
제3장 성훈 · 천호일람 (聖訓 · 千戶一覽)
성훈
칭기스 칸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의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는 자식들, 형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동생들, 부인을 신뢰하지 않는 남편, 남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부인,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 시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 며느리, 어린애들을 보호하지 않는 어른들, 연장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연소자, 종들의 마음을 멀리하는 대인들, 외부인을 맞아 주지 않는 사람, 나라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강화시켜 주지 않고 법령과 규범과 현명한 방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반목으로 말미암아 도둑과 사기꾼과 반도와 불법자들이 창궐하고 그들은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그들의 말과 가축은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전쟁시 선봉에 세워 타고 다니던 말들이 안식을 얻지 못해, 마침내 그 말들은 버려지고 쇠약해져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종족은 혼란되고 우둔하다.”
칭기스 칸의 행운이 분명히 드러나서 여러 종족들이 그의 명령을 받자, 그는 강력한 법령으로 그들을 다스려, 지혜로운 자와 용맹한 자들을 군대의 아미르로 만들고, 민첩한 자와 기민한 자들에게는 유수영을 맡겨 가축 떼를 지키도록 했고, 우둔한 자들에게는 작은 채찍을 주어 목동으로 내보냈다. 이런 이유로 그가 꾀하는 일은 날마다 커져 갔고, 그의 하영지(夏營地)는 연회와 잔치의 자리가 되고, 동영지(冬營地)는 넉넉하고 편안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집을 올바르게 정돈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라를 올바르게 정돈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깨끗이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왕국에서 악을 없앨 수 있다.” “현명한 세 사람이 동의하는 말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말을 다시 해도 괜찮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에 대해서 신임할 수 없다. 너 자신의 말과 다른 사람의 말을 현명한 사람들의 말과 비교해 보도록 하라. 만일 서로 일치한다면 말해도 좋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대인(大人)을 찾아가는 사람은 그 대인이 질문을 하기 전에는 어떠한 말도 하지 말라. 그 질문에 따라서 적절한 답변을 하라. 만일 그가 묻기 전에 말했을 때 대인이 듣는다면 상관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말은 차가운 쇠를 두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마치 잘 기른 송아지처럼 말없이 있어야 하고, 전투를 할 때는 마치 사냥터에서 먹이를 쫓는 굶주린 매처럼 앞장서야 한다.”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옳은지 생각해 보라. 한번 내뱉은 말은 심각하게 말했든 아니면 장난기로 말했든 다시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는 모든 것이 그 주인을 닮는다.”
“술과 다라순(곡주의 일종)에 취한 사람은 장님과 마찬가지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불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어 그에게 말을 해도 대답을 할 수 없다. 술에 취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똑바로 앉으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는 마치 머리에 타격을 받아 상처를 입고 어지럽거나 혼미해진 것과 같다. 술과 다라순에 빠지면 지혜와 이성과 기술이 없어지고, 좋은 행동과 품성도 잃어버린다. 만일 술 마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한 달에 세 번 취하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니, 그것을 넘는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만일 한 달에 두 번 취한다면 더 좋고, 한 번이라면 더 훌륭하다. 만일 아예 마시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취하지 않는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그를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칭기스 칸이 젊었을 때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앞머리에 몇 오라기의 백발이 생겼다. 근신들이 그에게 “오, 행운의 군주시여! 페하의 연세는 아직 초로(初老)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어찌하여 앞머리에 백발이 생겨난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지고한 신께서 나를 만호들과 천호들의 수령과 연장자로 삼고 나의 행운의 깃발이 세워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연장자의 징표인 백발이 내게 생기도록 하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천호일람
칭기스 칸의 친위 천호인 중군, 보르추 노얀이 선임자였던 우익, 무칼리 구양이 선임자였던 좌익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그가 사망한 뒤에 유산으로 네 번째 아들인 톨루이 칸에게 속한 것들, 다른 자식들과 형제들과 조카들과 어머니에게 주어서 그들의 소유가 된 것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많은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모두 12만 9천 명이 현재까지 알려진 몽골 군대들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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