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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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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선교회 동북아권역 수련회
2013년 바울선교회 동북아권역 수련회가 울란바타르 테렐치에 있는 UB-2호텔에서 8월4일-8월9일 동안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MK들 그리고 본부팀들이 101명이 참석할 예정인데, 본 수련회가 하나님을 기쁘시…
2013년 바울선교회 동북아권역 수련회가 울란바타르 테렐치에 있는 UB-2호텔에서 8월4일-8월9일 동안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MK들 그리고 본부팀들이 101명이 참석할 예정인데, 본 수련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교사님들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기회가 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31
JUL.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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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
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 아킬 모저 지음 더숲 / 2013년 7월 / 432쪽 / 14,000원 1장 누구에게나 한 조각 황량한 광야의 고독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확히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 처음 사막을 향해 떠났던 그날. 벌써 35…
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 아킬 모저 지음 더숲 / 2013년 7월 / 432쪽 / 14,000원 1장 누구에게나 한 조각 황량한 광야의 고독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확히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 처음 사막을 향해 떠났던 그날. 벌써 35년이 흘러버린 바로 그날, 내 인생은 180도 바뀌어버렸다. 내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학교를 다니고 있던 터라 6주 동안의 여름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계획했다. 함부르크를 떠나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여행이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왕국에서 나는 장거리 버스를 타고 꿈처럼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를 가로질렀다. 마침내 페스, 라바트, 카사블랑카 그리고 마라케시를 지나 모로코 남부에 이르렀다. 내 눈앞에 모래와 암석의 광야가 펼쳐졌다.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눈이 시리게 짙푸른 하늘 아래 물결치는 황갈색 모래언덕, 그 끝없는 광야를 마주한 순간, 그건 내게 차라리 신의 현현(顯現)이었다. 눈 닿는 곳까지 이어진 모래, 멈추지 않는 바람에 장엄한 풍경으로 거듭나는 황금의 바다는, 아무리 독창적이고 대담한 환상이라도 결코 자아낼 수 없는 그림이었다. 바람은 지극히 섬세한 무늬와 호화로운 모래의 선을 그려냈고,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모래파도가 넘실넘실 밀려가 지평선 너머에 닿아 있었다. 모래파도의 색깔은 그것이 태양을 마주하고 섰는지, 등지고 섰는지에 따라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아른아른 빛났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현실이라기보다 오히려 꿈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그건 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실재하는 존재였다. 모래도, 사구의 바다도, 광야도, 새파란 하늘도……. 그 순간 벼락에 맞은 것처럼 차고 넘치는 행복감이 몰려왔다. 나는 이미 내 존재 바깥에 서 있었고, 온몸을 휘감는 흥분을 느꼈다. 그런 감정은 서서히 자라난 것이 아니라, 끔찍한 쓰나미처럼 한순간에 전신을 덮쳐왔다. 한순간 나는 이성은 물론 영혼마저 빼앗긴 느낌이었다. 위대한 사랑을 인식하는 순간처럼 충만한 감정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앞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나는 빗살무늬 모래의 높은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가 배낭을 팽개치고 소리쳤다. 무언가 미친 소리를 내질러가면서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달렸다. 버릇없는 아이처럼 모래 위를 달렸고, 터벅터벅 걷다가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모래언덕을 떼굴떼굴 굴러 내려갔다. 그러다 다음 언덕이 나오면 다시 기어올라갔다. 한동안 나는 따스한 모래 위에 배를 대고 엎드려 있었다. 모래가 자꾸 입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엎드려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드넓은 광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경이로움의 극치! 모래언덕, 모래파도,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넘실넘실 깔려 있는 모래 양탄자! 그때 나는 그 순간의 느낌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 순간에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1950년대의 그림들. 발트 해안의 휴양지 그뢰미츠. 그곳은 부모님이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아드리아 해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꿈같은 하이킹 루트 다음으로 선호했던 휴가지였다. 주말이나 휴가 때가 되면 나는 머리에 챙 넓은 하얀 선캡을 쓰고, 플라스틱 삽과 양동이 그리고 화려한 색상의 모양찍기 틀로 무장하고 열심히 땅을 팠다. 정확히 말하면 하얀 모래밭이었다. 계속해서 코, 입, 귀 그리고 눈에까지 모래알이 척척 달라붙었다. 모로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15년이 지난 후에 나는 사하라의 물결무늬 모래밭에서 나뒹굴었고, 눈, 코, 입 그리고 귀 안에서 모래알을 느꼈다. 수건으로 계속 문질러가며 얼굴에서 모래알을 닦아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움직이는 점 몇 개를 발견했다. 그 점들은 아라비아 낙타에 올라탄 사람들의 무리였다. 작은 규모의 캐러밴(대상).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어디서 온 걸까? 어디로 가려는 걸까?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 걸까?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 걸까? ‘사막 인간’이라면 완전히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삶은 단순한 생존에만 맞추어져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들을 떠올리는 사이에 내가 사막의 삶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달았다. 그런 의문에 대한 대답들은 모래와 돌이 만든 광대한 평원 저 너머에 놓여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가 매혹적인 모습으로 내게 손짓했다. 갑자기 나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막, 사하라 깊숙이 그저 걸어 들어가는 것 말고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이미 나는 사하라에 들어와 있었다. 그로부터 5일 동안 걸으면서 무지의 세상 속을 쏘다녔고,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다. 문명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빨리빨리’의 삶을 벗어난 자리, 존재하기 위해 꼭 무엇인가 소유해야 할 필요가 없는 여기에서 걸음을 옮기는 사이, 내 생각은 어디로든 마음대로 뻗어가 한없이 자유로운 헤엄을 쳤다. 창조의 욕구로 가득한 풍경 속에서 나 자신까지 잃어버렸다. 아주 작아진, 그러나 자연의 일부인 내가 풍경 속에 있었다. 일단 한번 사막에 발을 디딘 사람은 더 이상 사막을 벗어날 수 없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독특한 근원 한가운데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사막에서의 삶은 근본으로 축소된다. 사막이 내뿜는 절대적인 고요와 고독 속에서 인간은 그가 본래 속했던 곳,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내던져지고 만다. 아무 예고도 없이 마주친 그 놀랍고 새로운 경험들을 가슴에 차곡차곡 채우고 나는 독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독일에서의 학교는 여전히 내게 힘들고 어려운 일상을 준비해놓은 곳이었다. 때때로 나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사막이 나의 환상에 너무 크고 멋진 날개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먼 나라를 지나는 긴 여행을 간절하게 꿈꿨다. 그 시기에 나는 내 작은 방의 방바닥에 몇 시간을 꼼짝 않고 누워서 탐험가와 학자들의 수많은 여행보고서들을 탐독했다. 그중 많은 작품들이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모험이 가득한 읽을거리에 푹 빠지고, 축구화의 징이 다 닳도록 축구장을 죽어라 뛰어다니는 것은 당시 나에게 학교생활보다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때그때 여러 가지 다양한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이유는 단 하나,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실제로 여행을 떠났을 때는 봄방학과 여름방학 동안으로 계획했던 이 여행들을 ‘내 마음대로’ 몇 주 더 연장하고 말았다. 아랍의 캐러밴과 함께 사하라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였다. 그 후 다시 독일로 돌아왔을 때 학교 성적이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여러 차례 학부모 상담을 거쳐야 했으며 심지어 전학까지 감수해야 했다. 결국 어찌어찌 하면서 마침내 나는 실업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넣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공적으로 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건 모두 엄마 덕분이었다. 내 양아버지 에르하르트는 엄마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언제나 혼자 있기를 좋아해서 아무도 고독으로 둘러쳐놓은 장막을 뚫고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의 일상 속엔 양아버지의 침묵만이 아니라, 타인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냉담함, 벌을 주면서 훈계하고 때때로 따귀까지 때렸던 일들이 적잖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든 일들은 내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상처로 남았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엄마를 책망하고 꾸짖는 걸 아주 즐겼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자주 심한 다툼으로 이어졌다. 그런 다툼엔 종종 인생계획과 돈 문제 등이 얽혀 있었다. 양아버지와 엄마가 다투면 나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고,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내면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양아버지가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가족들에게 넉넉한 느낌을 주는 날이 전혀 없었던 것 아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아주 짧고 드물었다. 그래서 내가 독립해서 살게 되자 양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몇 년 전 양아버지가 엄마와 내 곁을 영원히 떠났다. 양아버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호감 쪽으로 기울여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오늘날까지도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존재로 남아 있다. 때때로 만일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안아주었다면, 그동안 경험했던 어떤 사막여행보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내 첫 번째 여행은 도피였다. 무시하고 경멸하는 공간, 내 생명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듯 가슴을 옥죄는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첫 번째 아프리카 여행 이후에 나는 상당히 주저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함부르크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물론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알리바이였을 뿐이다. 그런 삶은 단 한순간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몰래 몇 가지 다른 전공과목을 수강했다. 아프리카학, 아랍어, 인류학 등이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대학 공부는 나를 채워주지 못했다. 나는 다른 삶의 방식을 탐색했다. 어쩌면 내게 올바른 것이고, 내 존재에 더욱 적합할 수도 있는 삶의 방식, 그 탐색 과정은 좁디좁은 관습과 한정된 경계를 가진 시민적 삶의 반대편을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길을 떠났고 많은 여행을 했다. 내가 삶의 의미와 삶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찾아다녔던 이 여행들은 나를 세상 곳곳으로 이끌었다. 사막과 원시림을 지났고, 산맥과 바다를 건넜다. 그런 어느 순간 우연히 잡지와 스폰서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내가 꾸었던 꿈들이 실제 현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직업까지 되었다. 그리고 벌써 거의 30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지구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지금 그런 내 직업에 충실하다. 이 새로운 길은 나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삶으로 인도했다. 그 삶 속에서 나는 하이테크 일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대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그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매혹과 위협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사막의 두 얼굴에 푹 빠져서, 나는 삶이 품고 있는 단순한 의미들을 배웠다. 인류의 진보를 평가하는 기준이 기술적인 성취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걷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방식을 발견했는지의 여부임을 알았다. 여행을 마치고 또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는 여러 언어의 기본적인 어휘들을 배웠고, ‘유목민의 생활방식’에 점점 더 적응해갔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간 세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멋진 인생의 스승이자 ‘영혼의 고향’이 되었다. 나는 몇 주 때로는 몇 달을 사막에서 보내다가, 다시 대도시 함부르크에서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을 하는 삶을 누렸다. 사막과 도시라는 이중적 삶은 결코 나를 분열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어쩌면 그건 아내 덕분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 아내.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주는 것만큼의 자유를 내게도 허락하는 아내. 이제까지 나는 서른 번의 탐사를 하면서 총 5년의 시간을 사막에서 보냈다. 영혼이 걸음을 멈추는 속도로 나는 거의 2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전진했다. 그 길들을 따라 나는 다섯 개 대륙의 먼 과거로 여행했다. 수수께끼 같은 사원의 흔적들, 고대의 동굴벽화들, 묻혀버린 도시, 돌이 된 숲, 감춰진 공룡 무덤 그리고 신비한 성지들. 스물다섯 개의 사막들이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불타고 있다. 바다처럼 넓은 광야에 몸을 맡기고 나는 신에 대한 나의 관념을 만났다. 아득한 경계에 자리 잡은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 비록 혼자 걷고 있어도 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절실한 외로움과 간절한 욕망의 순간에, 그리고 넘치는 행복과 생의 기쁨에 젖어든 순간에 자주 나를 지탱해주는 종교의 힘을 발견했다. 또한 사막에 거주하는 다양한 부족들을 만나면서 내 의식은 근본을 지향하도록 성장했다. 비단 자연의 정신을 재발견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절실하게 체험했다. 사막에서 중요한 것은 한 조각의 오트밀 빵, 한 줌의 쌀, 한 모금의 물, 한 줄기 온기와 무엇보다 배려하는 마음이다. 무엇이 나를 이리로 이끌었는가 하는 여행의 동기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 뿌리나 출신에 대해서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과거에 우리 친척들 중에 비슷한 흥미를 가졌던 사람이 있었는지 물었다. 혹시 내 친아버지가 여행, 모험,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들이 규칙적으로 나를 압박했지만, 나는 충분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그 의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내 방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아킬, 잘 있었니? 오늘 오후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 너의 캐나다 여행에 대한 인터뷰를 들었다. 이번에도 또 많은 체험을 했더구나…….” “도대체 누구신데……?” “내 이름은 하리 카르스텐이다. 네 아버지란다. 벌써 오랫동안 너를 지켜봐왔지만, 과연 네게 연락을 해야 하는 건지 늘 망설이기만 했단다. 그런데 오늘 네 목소리를 들었어. 참 포근하고 따뜻한 목소리더구나. 내게 용기를 주는 목소리……. 그래서 이렇게 전화기를 들었단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나를 한 번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만일 그래준다면 정말 기쁠 텐데…….” 전화 통화 이후 며칠 동안 나는 견딜 수 없는 갈등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쁘고 흥미롭고 호기심도 일었다. 이후 이루어진 첫 번째 만남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일종의 탈피 과정이었다. 과거의 부끄럽고 어색한 공간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어서 더욱 어색한 시간, 둘 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었다. 친근한 모습으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존중하고 기다리면서. 그러는 사이에 내가 가진 유전형질 중에 어떤 두드러진 것들이 엄마와 외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먼 나라들과 모험적인 탐사여행을 좋아했다. 청소년 시절에 스웨덴의 탐험가이자 학자인 스벤 헤딘을 방문하기 위해 그의 고향을 찾아갔을 정도였다. 또한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이 아버지가 수십 년에 걸쳐서 몇 번이고 다시 읽은 책들과 같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한 아버지는 등산 마니아로 마테호른과 킬리만자로의 정상에도 올랐다고 했다. 이런저런 사실에서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사과는 절대 가지에서 먼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과거에 대해 마침표를 찍었고, 내일을 향해 생각할 뿐 어떤 비난이나 해명도 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다. 서로를 공감하는 가운데 우리 둘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우정이 생겨났다. 함께 축구를 했고 영화를 보았고 여행을 떠났다. 심지어 아버지는 나의 남독일 순회강연회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나는 과거 양아버지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받았다. 사랑과 애정, 관심과 인정이었다. 어떤 사람은 사막을 사랑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뒤도 안 돌아보고 아주 빠르게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내 경우엔 모든 고난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막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막을 사랑한다. 언젠가 다시 사막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아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아 사막의 위대한 탐험가인 스벤 헤딘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에게나 사막이 필요하다.” 내게 꼭 맞는 말이다. 가끔씩 내게는 그저 한 조각 황량한 광야의 고독이 필요하다. 내가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생각들을 떠올리는 곳이며, 때때로 상당히 부조리하게 변하는 인간 존재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인식의 절정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곳이다. 2장 세계의 사막을 지나며 낙타의 발걸음처럼 느긋하고 일정하게_ 카이수트 사막 / 케냐(1996년) 지프와 낙타를 타고 동아프리카를 여행하기 위해서 나는 헝가리-오스트리아의 백작 사무엘 텔레키 폰 스체크의 역사적인 루트를 선택했다. 그는 1887~88년 원주민들이 ‘바소 나로크’, 즉 ‘검은 물’이라고 불렀던 전설적인 호수를 탐사하기 위해, 프레스부르크 출신의 해군 장교 루트비히 폰 회넬과 함께 케냐 북부를 여행했다. 여덟 시간의 비행 끝에 천일야화에 나올 법한 세상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잔지바르, 울림부터가 이국적이어서 신비와 모험의 세상으로 느껴지는 섬이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접점으로 두 세계의 문명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곳에서 텔레키 폰 스체크의 발자취를 따르는 나의 여행이 시작된다. 잔지바르는 후덥지근한 더위 속에 공기를 이국적인 향기로 채워 넣는다. 그러나 곰팡이, 쓰레기, 오줌냄새도 만만치 않다. 잔지바르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내가 향한 곳, 아마도 텔레키 폰 스체크와 루트비히 폰 회넬도 가장 먼저 그곳에 눈길을 주었으리라. 구시가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하얀 저택이다. 그 집에는 과거 한 영국인이 살았다. 그에 관한 글이라면 몇 년 전부터 빠짐없이 읽었다. 의사이자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73)이다.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30년을 보냈고, 그 가운데 4개월을 잔지바르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노예매매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다음 날 나는 아프리카 연안의 다레스살람으로 타고 갈 다우(아프리카-아라비아 해양을 항해하는 범선을 통칭)를 찾아보았는데, 다행히 한 척을 발견했다. 다음 날 다우는 거대한 바닷새처럼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삼각돛을 달고 인도양의 푸른 물결과 하얀 거품을 가르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 후 2월 중순 나는 오프로드 자동차를 타고 다레스살람을 떠났다. 코로그베, 모시, 아루샤를 지나고,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을 넘어 나이로비, 니에리, 나니우치 그리고 케냐산(5199미터)으로 향했다. 케냐의 북부 지방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농사를 짓는 땅은 점점 줄어들고, 건조한 사바나 지역이 시작된다. 낯선 모습의 식물들도 등장하는데 가시덤불, 우산처럼 생긴 아카시아, 선인장이 대표적이다. 텔레키 폰 스체크의 탐사 루트는 길이 없는 곳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점점 더 돌이 많아지면서 산길이 울퉁불퉁 험해지고, 심지어 깊은 도랑들이 빨래판처럼 줄줄이 이어져 자동차에 실었던 장비를 세 마리의 낙타로 옮겼다. 그리고 그바니와 카마이로니, 건장한 두 명의 삼부루족 탐사꾼이 케냐 북부의 사막 지역 탐사에 동행자로 나섰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케냐 북부의 광활한 사막은 ‘북부의 전투지역’으로 여겨져, 외국인 방문객들에게는 금지된 지역이었다. 오늘날 케냐 북부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 됐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많은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노상강도가 전통처럼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작은 탐사대가 카이수트 사막으로 나설 때 내가 가진 느낌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이제 매혹적이면서도 끔찍한 마법의 땅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낙타와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 사막이 보여주는 갈색, 빨강, 노랑, 회색, 녹색 등 갖가지 색깔들을 며칠 전 오프로드용 자동차를 타고 움직일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즐길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낙타에 짐을 싣고 드넓게 펼쳐진 사막으로 들어섰다. 낙타는 한 시간에 4~5킬로미터를 걸었다. 접시만한 크기의 발 네 개가 바닥을 스친다. 그래서인지 단단하게 다져진 모래 위엔 거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낙타의 속도에 맞추어 나의 발걸음도 자동화되어갔다. 그바니와 카마이로니는 걸어가는 내내 단조로운 노랫가락을 그들의 언어로 흥얼거린다. 사랑과 인생을 담은 노래라고 했다. 그렇게 노래하면서 그들은 고독을 내쫓고 사막의 정적에 풍요의 느낌을 심는 듯했다. 반면 나는 서서히 사막의 영혼에 젖어들었다. 우리는 타는 듯 뜨거운 가시덤불의 사바나를 지났다. 이곳엔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았다. 뜨거운 공기가 거울처럼 비쳐서 커다란 호수가 있는 듯 보이게 하지만 속임수일 뿐이다. 몇 마리의 타조들이 가까운 곳에서 경주를 한다. 여기서 살아가려면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 한낮의 열기 속에서 우리는 대개 몇 그루의 아카시아 나무들이 드리워준 그늘 속에 들어가 낮잠을 자거나, 밤에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주웠다. 사막에서 나무는 구하기 힘든 자원이다. 하지만 기분 좋게 찾아낸 마른 가지라고 가벼이 달려들다가는 큰일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바니와 카마이로니는 이 지역에 서식하는 위험한 독뱀에 대해 여러 차례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주의를 주었다. 여섯 번째 날은 사자의 날이었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사자 발자국을 발견했다. 찍힌 지 얼마 안 된 새로 난 발자국이었다. 그날 저녁에 바로 우리는 그의 방문을 받았다. 텐트 근처에서 사자가 어슬렁어슬렁 틈을 살폈다. 그바니와 카마이노리는 창과 단검을 손에 들고 신경을 있는 대로 곤두세운 채 사자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런 긴장이 한참 이어진 후 사자는 마침내 초원으로 돌아갔다. 아프리카의 동행자들과 내가 끝없는 광야를 걸어가면서 가끔 나뭇가지와 소똥과 염소똥으로 지은 몇몇 유목민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우리를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바니와 카마이로니에게 다정한 친절을 베푸는 것은 물론이고, 나 역시 삼부루와 투르카나의 모든 오두막에서 넉넉한 인심을 맛보았다. 그들은 달콤하고 강한 향기의 차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맛의 수프를 대접했다. 나는 작고 찌그러진 양철 냄비에 귀하게 담아주는 그 수프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걸쭉한 우유에 섞은 금방 짜낸 낙타의 피만큼은 입에 댈 수 없었다. 케냐 북부에서 10일 이상을 보내면서 나는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다. 계속되는 행군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안락한 느낌이 내 육체 안에 자리를 잡아갔다. 집을 떠날 때 사막으로 가져왔던 삶의 박자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광야의 한가운데에 동화되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그러고는 발걸음의 단조로운 리듬을 즐긴다. 내디딜 때마다 발 주위로 작은 먼지구름이 피어오른다. 내면의 느낌을 깨닫게 되면서 수 킬로미터의 길에 대해, 그리고 사막이 나를 위해 준비해놓은 것들에 대해 활짝 마음이 열린다. 보이지 않는 마법에 사로잡힌 듯 눈앞에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 장대한 광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나 스스로 광야가 된다. 광야를 카메라로 담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매번 셔터를 눌러보지만 나는 형편없이 부족한 사진을 얻을 뿐이다. 아예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무한히 뻗어 있는 길을 걸으면서 내가 느끼는 경쾌함과 심원한 기쁨, 광야가 안겨주는 황홀한 감동이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다. 북쪽을 향해 우리 작은 탐사대가 텔레기 폰 스체크 백작의 의미심장한 흔적을 깊게 밟아갈수록 주위 경관은 점점 더 황량해졌다. 투르카나족 남자아이들이 지키는 작은 염소 떼가 남아 있는 녹색 식물을 찾아 힘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의 척도가 되는 낙타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럴까 궁금해하자 카마이노리가 알려주었다. 이 지역에선 낙타를 둘러싸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투르카나의 땅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에티오피아 남부의 무장 폭도들이 문제라고 했다. 케냐 정부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런 습격에 대해 알게 될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침내 우리는 이 메마른 지역에서 숲을 만났다. 돌로 만들어진 숲이었다. 나는 이미 삼부루족의 오두막에서 화석화된 숲에 대해 들은 터였다. 그렇지만 직접 화석으로 변한 나무의 잔해들 앞에 서게 되자 저절로 경탄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우리 앞에 광활한 수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자수들이 짙푸른 수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취한 원주민들이 ‘비취의 바다’라고 부르는 호수, 바로 투르카나 호였다. 거대한 해조류 융단이 바람과 햇빛의 상태에 따라 다채로운 보석처럼 빛났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 완만하고 질척한 호숫가 둔덕 너머 검붉은 산줄기, 그런 광경을 뒤에 두고 터키옥 푸른빛을 발하는 투르카나 호가 자아내는 강렬한 대조를 어찌 말로 표현할까! 투르카나 호숫가에서 보내는 첫날밤, 그바니와 카마이로니 그리고 나는 곧바로 고삐 풀린 폭풍을 경험했다. 갑자기 반짝이던 별빛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사나운 바람이 호수에 물마루를 솟구쳐 올렸다. 그리고 물마루는 하얀 거품의 긴 띠를 채찍처럼 휘둘러 호숫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우리 텐트 주위로 격렬한 바람이 불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우리 셋은 텐트 기둥을 붙들고 버텼지만, 결국 텐트의 방수천 한쪽이 찢어지고 말았다. 바람이 머리칼과 옷을 무섭게 펄럭거리는 사이 모래 알갱이들이 총알처럼 날아와 얼굴을 때리자, 피부가 온통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끔찍한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렇게 무섭게 몰아치던 바람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이젠 건조한 사막의 바람이 우리를 괴롭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태양은 사막의 공기에 활활 불을 질렀다. 열기가 밝은 색 모래 바닥 위의 공기를 가물가물 피어오르게 했다. 사방에 신기루가 그려지고, 이마에 구슬땀이 맺히기가 무섭게 사막의 바람이 마셔버리고는 소금가루만 남겨놓았다. 우리는 힘겹게 호수의 동쪽 제방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날 늦은 오후의 태양빛을 뚫고 투르카나 호 동쪽 연안의 유일한 거주지인 로이얀갈라니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로이얀갈라니 오아시스 마을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다. 식료품 가게, 경찰서, 그리고 교회도 보인다. 가끔씩 나이로비에서 전세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방문객들도 있다. 여기서 보트를 타고 낚시를 하기 위해서다. 무게가 180킬로그램까지 나가는 나일 배스가 목표 어종이다. 이곳에서 텔레키 폰 스체크는 탐사대를 위한 물을 충분히 보충했다는데, 우리도 역시 물통을 가득 채웠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할 때 나는 거기에 없었다. 완전히 지쳐서 우리 낙타 옆 모래밭에 쓰러져 바로 잠이 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코앞에서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커피향이 나를 깨웠다. 거의 여덟 시간을 자고난 후에야 나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루우유를 넣은 커피와 귀리 플레이크, 설탕 그리고 잼을 바른 잡곡빵이 준비되었다. 모든 음식에 모래가 잔뜩 발라져 있어도 나는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한 시간 후에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특별한 길이 없는 상태에서 투르카나 호의 제방 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걷는 동안 미적지근한 바람이 등을 밀어주었다. 항상 같은 리듬으로 걷고 타고 달리면서, 우리는 끝도 없이 반복되는 파도의 철썩거리는 소리와 모래가 뿌드득 밟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자갈과 거친 용암 바위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는 마른 강을 지났다. 알리아 만까지 가는 동안 하얗게 얼룩진 빛이 모든 윤곽과 색깔을 지워버렸다. 그 지역은 인류를 깜짝 놀라게 만든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국립공원으로 선정되었다. 화석화된 동물과 원인의 유골을 발견했던 것이다. 가장 많은 원인 화석이 발견된 장소는 한참 더 북쪽으로 올라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쿠비 포라다. 쿠비 포라는 내 사막여행의 가장 북쪽 지점이었을 뿐 아니라, 길고 힘든 여행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긴장과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날 저녁, 나는 그바니, 카마이로니와 함께 비취 바다 옆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았다. 차와 설탕을 준비했다. 그러나 나는 미처 차를 마실 사이도 없이 넋을 잃고 불꽃 안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로 내 영혼이 스며들어가 버린 듯이. 모닥불 곁에 앉아 불꽃 속을 구경하는 사이 육체에 지워진 무게가 어디론가 사라져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바니와 카마이로니가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어우러지는 멜로디였다. 우리 야영지를 떠돌던 멜로디는 사막으로, 용암과 모래의 평원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또 케냐와 독일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를 비교해가면서 깔깔 웃고 즐거워했다. 그렇지만 나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독일이 자칫 낙원처럼 들릴까 두려웠다. 아프리카가 멋진 모험과 이국적 낭만 그 자체가 아니듯, 독일도 낙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또 투르카나 호수의 분위기와 하마와 악어에 대해 말했다. 불이 사그라지기 시작했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바니와 카마이로니가 잠자리에 들고 나서, 나는 떠나기 전 마지막 여운을 정리하기 위해 달빛 어린 호숫가로 혼자 걸어갔다. 이루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고되고 어려운 몇 주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 순간 나는 다음 날 아침 트럭을 타고 나이로비로 가서, 또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모든 게 뒤죽박죽 뒤섞이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바람 속의 연처럼 펄럭거린다. 갑자기 체험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합쳐진다. 사막의 적갈색 대지, 끝도 없이 굽이치는 사구들, 밤마다 들려주는 바람의 속삭임,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지는 행군의 기쁨, 사자의 울부짖음, 투르카나 사람들의 순박한 몸짓, 모닥불 가에 검댕이 잔뜩 묻은 찻주전자, 낙타의 울걱거리는 소리,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피로에서 느껴지는 환희, 그바니와 카마이로니의 환하게 웃는 얼굴, 황혼 속의 장관들, 이름 붙여 말할 수 없는 색깔들과 분위기들…….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독일로 돌아가는 순간 더 이상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언가는 남게 될 것이다. 카이수트의 장엄한 자연으로부터 한 조각 잘라내 내 안에 심어 지니고 가는 것, 바로 내 내면의 사막이다. 현실의 소음이 나를 덮쳐와 광야와 고요로 내 배터리를 재충전하고 싶을 때 그것은 나를 위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몇 마리 낙타의 고삐를 쥐고 나는 길을 떠날 수 있다. 모래와 돌로 이루어진 고대의 광야를 지난다. 눈 닿는 끝에서 지평선과 광대무변의 하늘이 하나로 녹아든다. 상상 속의 여행이다. 한 걸음씩 광야는 나와 함께 걷는다. 붉은 모래가 낙타 발굽의 소리를 삼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리가 다리처럼 걸어가는 즐거움에 젖어들면, 나는 꼬리를 물고 불쑥불쑥 솟아나는 생각의 고리를 놓고…… 그리고 잠겨든다…… 광야로.
29
JUL.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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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에 드리는 편지
평안하신지요? 저희 부부는 안식년을 마치고 지난 5월 15일, 몽골에 도착을 했습니다. 돌아와보니 몽골에는 제법 많은 변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우선 시내도로가 깔끔히 정비가 되어 울란바타르도 이젠 제법 여느 도시다운 모습을 …
평안하신지요? 저희 부부는 안식년을 마치고 지난 5월 15일, 몽골에 도착을 했습니다. 돌아와보니 몽골에는 제법 많은 변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우선 시내도로가 깔끔히 정비가 되어 울란바타르도 이젠 제법 여느 도시다운 모습을 보여주어 내심 놀랐습니다(그러나 세계의 수도 중 유일하게 아직 울란바타르엔 ‘맥도날드’가 없습니다). 우리 병원(‘초원의집’)에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직원이 많이 떠나갔고(두 사람의 의사가 몽땅, 그리고 간호사도 네 사람중 세 사람이 월급이 많은 다른 병원으로 이직을 했습니다), 홈케어 환우도 120명에서 90여명으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 정도만 말씀을 드려도 우리 ‘초원의집’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를 아마 동역자님들께서는 미루어 짐작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정도로는 놀라거나 마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2001년 11월 몽골에서 호스피스를 처음 시작을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사실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없는 것보다 현재 있는 것을, 그리고 잃은 것 보다는 하나님이 이제껏 우리에게 풍성히 주신 은혜를 힘써 주목하기로 했습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그 와중에도 병원이 3년의 허가를 연장 받았으며, 어려운 교회 허가도 받았고, 그래도 우리에겐 소수지만 충성스럽고 신실한 직원들이 몇은 있으며, 환우들이 언제고 입원을 할 수 있는 환경과 따뜻한 물이 펑펑 24시간 나오는 좋은 건물 그리고 도심속에 숲이 있는 병원 풍경이, 몽골 여름밤을 아름답게 수놓는 하늘의 별처럼 여전히 빛나며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 입니다). 직원들을 추스르고 병원을 다시 세팅을 하느라고(기계에 윤활유를 칠하듯이 말입니다) 한달이 금새 지나갔군요. 피곤해서 누우면 꿈도 꾸지않고 죽은 듯이 잠을 자곤 했었는데, 오늘 아침 새벽에는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제 ‘척에르든(처거)’이라는 겨우 1년 7개월된 남자아이가 주님 나라로 씩씩하게(정말, 예쁘게 떠났습니다)갔답니다. 한달남짓여 다섯분이 천국으로 연이어 이사를 갔지만, 그래도 ‘처거’는 아직은 너무나 어렸고, 이 아이가 남기고 간 자리가 죽음에 익숙한 제게도 너무 컸나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때때로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최선으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8월 초에는 우리 교회 성도들과 ‘홉트’라는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홉트는 울란바타르에서 서쪽으로 1,800km 떨어진 곳인데 놀랍게도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1/4이 이곳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늘 생각을 해왔고, 그래서 홉트 복음화에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이번에 자원한 20여 성도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이 귀한 계획에 동역자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그럼 2달후에 다시금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기 바랍니다(바이스테, 생소츠배가래). 2014년 6월 20일 초원의나라 몽골울란바타르에서, 몽골초원의 들꽃처럼 보잘 것 없지만 제자리를 지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픈 박인선, 이경환드림 기도 제목 1) ‘초원의집’이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2) 홉트 선교 여행에 놀라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도록 3) 98명의 홈케어 환우들과 가족들, 9명의 입원환자와 가족이 모두 다 주님을 영접하도록 4) 낙후된 난방파이프 전면교체 작업을 겨울전에 꼭 할 수 있도록(필요예산: 1,200만원) 5) 오래된 앰블란스를 쓸만한 차로 바꿔 주시도록(중고 앰블란스 구입비: 1,500만원) 6) 초원의집’을 재정적으로 도울 선교비즈니스를 할 동역자가 몽골에 속히 오도록
20
JA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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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살아 있게 하라
죽음이 살아 있게 하라 - 죽음을 준비하는 행복 - 죽음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는가? 페네롱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길 꺼리는 것은 죽음…
죽음이 살아 있게 하라 - 죽음을 준비하는 행복 - 죽음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는가? 페네롱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길 꺼리는 것은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근시안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윌리암 로우는 우리가 세상의 것을 누리며 살기 때문에 영원과 죽음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우리가 이러한 실수를 피하도록 “오늘 죽을 것처럼 모든 생각과 행동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의 모든 삶이 거짓이었다는 게 드러날 수도 있다. 옛 영성가들은 죽음을 보면서 큰 영적 유익을 발견했으며, 죽음의 실상을 파악하고, 죽음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죽음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클리마쿠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라고 촉구했다. “당신이 오늘 하루를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경건하게 보낼 수 없다.”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모든 일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죽음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붙잡고 하찮은 것은 흘러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죽음은 우리 시각의 초점을 맞춰 준다. 영원은 주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심판의 날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 속에서 우리가 행한 친절과 사랑의 행위들을 기억하며 이를 위해 시간을 사용한 것을 기뻐할 것이다. 또한 죽음은 우리의 열정을 여과해 준다. 파스칼은, “우리의 열정을 해로운 일에 쓰지 않으려면 우리가 살 날이 한 주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라고 썼다. 영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신의 열정을 따르는 것은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고 있는 것과 같다. 사물이 보다 선명하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시야는 어두워지고 희미해진다. 우리는 큰 그림을 놓친다. 죽음을 부인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거역하게 된다. 우리가 평소 제멋대로 저질렀던 잘못이 언젠가는 저절로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자신의 이러한 생각에 놀라겠지만, 마침내 우리의 영혼은 무디어지고 우리는 결국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잊어버리며,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죽음이 갑자기 우리를 삼킬 것이다. 토마스 아켐피스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죽음의 시간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뻐하면서 살도록 노력하라.”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시간이 오늘밤이라면 당신은 자신의 모습에 기뻐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에너지를 다 쓴 후에 죽음을 맞고 싶다. 가장 나를 만족시켰던 경기는 쉽게 우승한 경기보다 내가 우승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했던 경기였다. 영원한 안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현재의 안식에 정신을 팔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자신의 우선순위를 새로 정하고 죽음을 은혜와 거룩이 성장하는 데 사용할 때, 죽음은 우리의 종이 된다. 또한 죽음은 위로자가 될 수 있다. 견디기 힘든 상실이나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위로를 줄 수 있다. 우리가 떠나보내고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시간의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죄성도 없는 ‘새롭고 개선된’ 우리 자신을 보면서 기뻐할 것이다. 더욱이 죽음은 하나님과 동행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위로이다. 우리가 영원의 문지방을 넘을 때, 우리의 꿈 그 이상으로 실현될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동행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부활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때문에, 때로는 원수인 죽음도 우리를 위로해 주는 생각일 수 있다. 의를 위한 우리의 싸움은 끝이 있으며 우리의 고통에는 한계선이 그어져 있기에 외로움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살아 있게 하라. 그러기 위해 윌리암 로우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매일 밤 드리는 기도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자들과의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과 삶을 통해 나의 일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항상 잊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시면서 죽으셨다. 당신의 ‘그 일’은 무엇인가? 당신이 예수님처럼 죽음을 맞을 때 하늘을 우러르며 “저는 충성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성취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시작이 있고 끝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뿌리 깊은 영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게리 토마스 지음]
17
JA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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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이채윤 지음 북오션 / 2012년 3월 / 279쪽 / 14,000원 ▣ 저자 이채윤 시민문학사 주간과 인터넷 서점 BOOK365의 CEO를 역임했다.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고, 《문학과 …
록펠러,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이채윤 지음 북오션 / 2012년 3월 / 279쪽 / 14,000원 ▣ 저자 이채윤 시민문학사 주간과 인터넷 서점 BOOK365의 CEO를 역임했다.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고, 《문학과 창작》지에 소설이 당선된 후부터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동안 시, 소설, 역사, 신화, 종교, 경제, 경영, 자기계발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하고 맛깔스러운 글을 써내면서 전방위 작가를 자처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삼성전자 3.0 이야기』, 『안철수의 서재』, 『위대한 결단』, 『삼성처럼 경영하라』, 『황의 법칙』, 『중국 4000년의 법칙』, 『18세, 네 꿈을 경영하라』, 『어린왕자의 성공법칙』, 『컴퓨터 병을 고치는 의사 안철수』, 『엽기 그리스로마신화』(1~2권), 장편소설 『대조선』, 『주몽』, 『대조영』, 『아버지』, 『하모니』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록펠러는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억만장자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재주를 깨닫고 그런 ‘선물’을 내려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남겨 주었고, 그중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특히 강조했다. 첫째, 항상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려야 한다. 셋째, 교회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아야 한다. 아들은 평생 그 약속을 지키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계발해 나갔다.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한 푼의 돈도 아끼는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그리고 그는 노년에 이르러 사업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자선 사업에만 전념해, 일찍이 기업가의 사회적 역할이 분명하지 않았던 시절 사회사업을 통해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세상에 인식시켰다. 또 그의 아들 록펠러 2세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록펠러 센터 등 많은 기관들을 설립하는 한편 자선 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책은 청교도 신앙을 가졌던 어머니로부터 십일조의 가치를 배운 록펠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부터 일생을 바쳤던 석유 사업, 자녀들에게 물려준 근검의 미덕, 돈만을 위한 인생의 목표는 곧 파멸의 길임을 깨닫고 주위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게 된 계기, 록펠러 재단의 설립,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어온 나눔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록펠러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십일조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씨앗의 열매임을 확인하게 하고 있다. 록펠러는 자신이 십일조를 바치면, 그것이 복리로 불어나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 재산을 쌓는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자신이 필요할 때 수십 배의 자금으로 하나님이 돌려주신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젊은 시절부터 사업의 어려운 고비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돈이 들어왔기 때문에 갖게 된 믿음이었다. 그는 교회에 헌금을 내거나 남을 돕는 일은 보답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해야 할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 차례 프롤로그 - 하나님이 주신 선물 Part 1 어린 시절 자유로운 아버지와 신심을 가진 어머니 / 어머니에게 십일조를 배우다 어려서부터 배운 돈의 이치 / 신흥 도시 클리블랜드로 가다 위대한 유산을 남긴 어머니 Part 2 일찍 시작한 사업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한다 / 인생을 기록하다, 회계장부A 여호와가 인도하는 사업을 시작하다 / 사업보다 열심히 믿음의 활동을 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사용하는 법 / 영혼의 동반자를 맞이하다 능숙한 이는 왕 앞에 설 것이오 / 다정다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Part 3 일생을 바친 석유 사업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다 / 믿으면 모든 것을 맡겨라 원유업계를 점령해 나가다 / 석유의 모든 것을 장악할 계획 산업계의 위대한 정복자 / 억만장자의 근검절약 정신 / 자녀교육 Part 4 록펠러 제국 찬란한 뉴욕 시대를 시작하다 /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받은 것을 돌려주는 삶을 계획하다 / 차근차근 실현한 하나님의 계획 경영을 떠나 개인의 삶 속으로 /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내려놓다 아버지의 뜻을 받든 록펠러 2세 Part 5 완전한 믿음 세계 최고 부자의 노후 / 하나님의 뜻으로 나누는 자선 사업 한 시대의 전설이 남긴 마지막 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답하다 하나님과 함께한 위대한 거인은 가고 에필로그 - 세계 최고 부자가 남긴 유산 록펠러,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이채윤 지음 북오션 / 2012년 3월 / 279쪽 / 14,000원 Part 1 어린 시절 자유로운 아버지와 신심을 가진 어머니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친 아버지: 록펠러의 어머니는 엄격한 ‘청교도 신앙’을 지닌 탓에 도덕적이고 경건하고 엄격했으며 때로는 가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화가 났을 때도 행동에 절도가 있었고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법이 없었다. 록펠러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와 근면함,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았다. 한편 록펠러의 아버지는 현실적인 면으로 아들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록펠러가 걸음마를 시작하자, 도회지로 데리고 나가서 가죽 신발을 사 주면서 일찍부터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록펠러를 비롯한 세 아들에게 승마, 사격, 수영을 가르쳤고, 때로는 아이들을 데리고 호수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지시켰다. 어머니에게 십일조를 배우다 / 어려서부터 배운 돈의 이치 2센트의 헌금: 존 록펠러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존아, 오늘부터 혼자서 교회에 다니도록 해라.” 그리고 어머니는 록펠러의 손에 난생처음으로 20센트의 용돈을 쥐어 주면서 “20센트는 분명히 엄마가 너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너는 이 돈을 함부로 다 써서는 안 된다. 이 안에는 네가 하나님에게 바쳐야 할 몫이 있거든. 20센트 중 십 분의 일인 2센트는 하나님의 몫이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것이 ‘십일조’라는 것이고, 앞으로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를 반드시 따로 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록펠러는 교회에 가서 헌금 접시에 십일조를 바치고 예배를 드렸다. 찬송을 부르고 목사의 설교를 듣는 동안 어린 그의 가슴에 왠지 모르게 기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 후부터 록펠러는 교회에 나가는 것과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게 되었다. 칠면조 키우기: 록펠러가 일곱 살 때 일이다. 어느 날 농장 덤불에 드나드는 칠면조 암컷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록펠러는 살금살금 칠면조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칠면조는 순식간에 덤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록펠러는 다음 날 다시 그 자리로 가서 칠면조를 찾았다. 하지만 칠면조는 전날처럼 록펠러를 따돌렸다. 록펠러는 실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몇 차례 시도한 끝에 칠면조를 추적해서 드디어 둥지를 찾아냈다. 그는 칠면조를 붙잡아 알과 함께 헛간으로 가져왔다. 어머니는 록펠러에게 칠면조를 길러서 팔아보라고 권했다. 늘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렇게 자립정신을 가르쳤다. 야생 칠면조는 헛간에서 알을 품었고, 얼마 후 예쁜 칠면조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다. 록펠러는 정성을 다해 칠면조 새끼들을 돌보았다. 가을이 되어 새끼들이 다 자라자 록펠러는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록펠러는 다음 해에 칠면조 암컷을 몇 마리 사다가 더 많은 칠면조를 부화시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칠면조를 길러서 모은 돈이 50달러나 되었다. 어머니는 그 돈을 이웃집 농부에게 7퍼센트 이자로 빌려 주도록 했다. 1년 뒤 록펠러는 원금과 함께 3달러 50센트의 이자를 받았다. 3달러 50센트, 그 돈은 그가 하루 열 시간씩 열흘은 감자를 캐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때 록펠러는 돈이 어떻게 이익을 만들어 내는지 깨달았다. 훗날 노년의 록펠러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때부터 나는 돈을 위해 일할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진정으로 부유해지고 싶다면 소유하고 있는 돈이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도록 하라. 개인적으로 일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돈이 벌어다 주는 돈에 비하면 지극히 적다.’ 신흥 도시 클리블랜드로 가다 / 위대한 유산을 남긴 어머니 활기찬 도시 클리블랜드: 열네 살이 되던 해, 록펠러 가족은 클리블랜드로 이사를 했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에서 센트럴 공립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록펠러는 학구적인 학생은 아니었지만, 사물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그는 글쓰기와 발표력이 상당히 우수했는데, 그가 우연히 자신을 표현한 말인 ‘슬플 때에도 미소를’은 별명이자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인생을 함께한 두 친구: 록펠러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인생에서 중요한 두 명의 친구를 만났다. 한 사람은 남자였는데 이름은 ‘마크 한나’였다. 한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진짜 사나이다운 기질을 가졌는데, 훗날 상원의원이 되었고 록펠러와 평생 서로를 돕는 관계를 유지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록펠러가 사귄 또 한 사람의 친구는 여자였는데, 이름은 ‘로라 셀리스티아 스펠먼’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록펠러의 아내가 되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학창 시절부터 불꽃 같은 연애를 한 것은 아니었다. 록펠러가 로라와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록펠러가 좋아하는 경영 과목을 그녀가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선택과목으로 공부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세 가지 유산: 록펠러는 어린 시절 신앙심이 투철한 어머니로부터 여러 가르침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한 세 가지 약속은 그가 대 사업가로 성공한 비결이라고 다음과 같이 자서전에서 밝혔다. “첫 번째 유산은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용돈을 20센트씩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십일조 헌금을 해야 한다면서 십일조를 드리는 습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번째 유산은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래야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세 번째 유산은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목사님의 말씀을 따랐고, 어떤 일이든지 교회에서 정한 일은 불평하지 않고 항상 순종한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축복의 씨를 드리면, 반드시 20년, 30년 후에 어마어마한 결실로 돌려주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Part 2 일찍 시작한 사업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한다 / 인생을 기록하다, 회계장부A 인생의 첫걸음 / 일에서 느낀 행복: 1855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의 소년 록펠러는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클리블랜드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9월 26일, 3층짜리 벽돌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원하는 곳을 찾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곳은 ‘휴이트 앤 터틀’이라는 곡물 위탁판매 회사였다. 사장은 록펠러의 이력서를 들여다보다가 “자네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뭔가?”라고 물었다. “저는 회계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경리 일을 하고 싶습니다.” 록펠러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록펠러는 그 회사의 경리직원으로 채용되었다. 한편 사장과 동료들은 록펠러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태도에 모두 놀랐다. 그는 매일 같이 새벽 6시 30분에 출근했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그러나 그의 월급은 그의 노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록펠러는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을 배울 수 있다는 자체에 행복을 느꼈다. 록펠러는 배달된 물품을 확인하고 계산서를 정리하는 일에서부터 대금 지급과 미수금 정리까지 회사의 회계 장부 일체를 도맡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회사가 운영되는 상황을 누구보다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경영에 대해 배워갔다. 아울러 점차 산업 발전을 보는 통찰력을 키워나갔다. 또한 미국 경제에 혁명을 일으킨 것이 철도와 전신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일기 같은 장부책: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일기를 쓰는 대신, 자신만의 금전출납부인 회계장부를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그 장부를 기록하며 자신의 하루 일과를 꼼꼼하게 짚어 나갔고, 다음 날의 수입과 지출을 따져보았다. 말하자면 장부에 적힌 숫자가 하루하루의 기록이자 반성이었던 셈이다. ‘휴이트 앤 터틀’에 입사한 후, 그는 더욱 철저히 회계장부를 기록했다. 당시 그가 기록한 장부를 사람들은 ‘회계장부A’라고 부른다. 록펠러에게 있어서 ‘회계장부A’는 사업의 의사결정을 이끌어 주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감정을 배제시키고, 비능률적인 요소들을 포착하게 해주며, 심지어 부정을 폭로해 주는 신성한 책이었다. 여호와가 인도하는 사업을 시작하다 / 사업보다 열심히 믿음의 활동을 하다 전혀 안 어울리는 두 사람: 1858년, 록펠러는 회사에 3년째 근무하면서 600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가치와 자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연봉을 80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구두쇠인 사장은 적당히 넘어가려는 태도였다. 록펠러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다른 위탁판매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는 모리스 클라크가 록펠러에게 함께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영국 출신인 클라크는 록펠러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이었고, 술과 담배를 즐기고,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거구의 사나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은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위탁판매 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첫 사업에서 거둔 성공: 1859년 3월, 록펠러는 허름한 창고 건물에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장의 문을 열었다. ‘클라크 앤 록펠러’사는 육류, 곡식, 어류, 석고, 대리석 등 클리블랜드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것을 취급했다. 회사 일은 자연스럽게 분업이 이루어져서, 클라크가 현장을 뛰고 록펠러는 경리를 맡았다. 사업은 빠르게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농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거래할 작물들을 골랐고 농부들과 친분을 돈독하게 만들어 나갔다. ‘클라크 앤 록펠러’사는 첫 해에 4,400달러, 다음 해에는 1만 7,000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급성장했다. 거기다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그들의 사업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열아홉 살의 집사 록펠러: 록펠러는 열아홉 살에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클라크 앤 록펠러’사를 차린 후에도 그는 회사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교회 일을 거들었다. 그는 새로 조직된 YMCA 일을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교회 사무를 보며 교회 재정을 관리하는 등 행정적인 일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재정도 세상의 비즈니스처럼 깔끔하게 해야 된다고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사업이 번창일로를 걷기 시작하자, 그의 헌금이 교회의 주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영적(靈的) 복식부기: 해가 바뀔 때마다 록펠러의 헌금 액수는 놀랄 정도로 많아졌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회에 헌금을 내거나 남을 돕는 일은 보답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해야 할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895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소. 나는 내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서 그 돈을 쓸 것이요. 하나님은 내가 돈을 벌면 곧 그것을 다시 나누어 줄 것임을 아시고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려 하는 것 같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사용하는 법 / 영혼의 동반자를 맞이하다 / 능숙한 이는 왕 앞에 설 것이오 마음으로 깨달은 재능 / 두 번째 선물, 석유: 일찍부터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록펠러는 돈을 버는 재능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고 평생 즐겁게 열심히 돈을 버는 데 전력을 다했다. “엄청난 양의 석유는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은 록펠러가 석유 사업에 성공을 거둔 후에 한 말이다. 사실 석유는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 선물인 셈이다. 록펠러가 ‘클라크 앤 록펠러’사를 세운 이후, 미국은 남북전쟁에 휘말려 들었고 미국 전체가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미국 사회는 독점 재벌을 탄생시키는 자본주의의 확고한 실험대가 되었다. 곧이어 미국 사회에는 ‘골드러시’에 이어 ‘오일러시’라는 강력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초로 유전을 발견한 것은 1859년, 펜실베이니아 ‘타이티스 빌’의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이었다. 타이티스 빌의 유전이 발견된 지 4년 후, 클리블랜드에는 획기적인 일이 발생한다. 클리블랜드에서 뉴욕, 그리고 ‘석유 지대’의 중심지와 직결되는 철도가 놓인 것이다. 록펠러는 이제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예측을 불허하고 실패 확률이 높은 유전개발보다는 정유업의 전망이 더 밝다고 내다보고, 동업자인 클라크, 사무엘 앤드루스와 함께 8,000달러를 투자해서 정유 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이 차린 정유 공장은 몇 대의 증류기, 용광로가 전부였고 기술력은 일천했지만, 그곳에는 곧 철도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록펠러는 석유 회사를 세우고 항상 그래왔듯이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현명한 여인, 로라 / 서로에게 내린 축복: 1864년 3월, 록펠러는 로라 스펠먼과 약혼했다. 그리고 록펠러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서자 로라에게 청혼했고, 그해 9월 8일, 두 사람은 로라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목사님과 양가 식구들, 그리고 직원 몇 명만을 초대한 단출한 결혼식이었다.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 1865년 초, 잘나가던 록펠러의 회사가 경영진의 불화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클라크는 회사 부채가 거의 10만 달러나 된다면서 불만이 많았고, 록펠러는 록펠러대로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클라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회사를 경매에 부쳐서 가장 높은 값으로 사들이는 측에게 매각하는 게 최선이라는 합의에 도달했다. 물론 석유 전문가인 앤드루스는 록펠러의 편을 들었다. 회사의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다. 입찰은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시작했다. 그러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7만 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클라크가 말했다. “7만 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결국 클라크는 손을 들고 말았다. 그날 이후, 회사는 ‘록펠러 앤 앤드루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록펠러의 성공 요인 네 가지: 첫째,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록펠러는 첫 직장에서 새벽 6시 반에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일에 매진했다. 둘째, 자기 분야에 끝까지 파고든다. 록펠러는 석유 사업을 시작한 후, 오로지 석유만 생각했다. 셋째, 인재 관리에 뛰어나다. 록펠러는 사업 초기부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넷째,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진다. 록펠러의 성공은 대개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력과 통찰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는 석유 사업에 몸을 담으면서 원유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정제하는 정유 사업과 그것을 저렴하게 수송하는 운송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창안함으로써 석유 산업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Part 3 일생을 바친 석유 사업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다 / 믿으면 모든 것을 맡겨라 / 원유업계를 점령해 나가다 탄광에서의 기도: 1863년, 록펠러가 처음으로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석유 사업의 진가를 잘 알지 못했던 록펠러는 광산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친구 한 사람이 광산업을 권유했고, 그는 거금을 들여서 탄광을 인수했다. 그러나 아무리 광산을 캐고 들어가도 돌덩어리만 나왔다. 광부들은 임금이 밀리자 폭도로 변해 아우성을 쳤다. 그는 믿을 곳이 한 곳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러다가 그는 잠든 듯 쓰러져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잠시 잠이 든 것인지, 꿈을 꾸는 것인지, 어떤 길을 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다.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그러다가 너무 피곤해서 한편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난데없이 어떤 큰 손이 다가와서 그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러자 다시 다른 손이 다가와 꼬꾸라지는 그를 붙들고 그 험한 길을 계속 걷게 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어떤 지점에 다다르자 두 손은 그를 놓아 주었다. 문득 정신이 든 록펠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아직까지 차디찬 폐광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커다란 손을 느끼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네가 갈 곳에 이미 이르렀느니라.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네가 있는 곳을 더 깊이 파도록 하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듣고 용기가 용솟음쳤다. 그는 탄광 밖으로 나와서 광부들에게 마지막 호소를 했다. 록펠러의 눈물 어린 호소에 감동한 몇몇 광부들이 마지막으로 한 번 록펠러를 믿어보겠다고 땅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석탄 대신 검은 물이 솟구쳤다. 그것은 석탄보다도 값진 석유였다. 그 후 록펠러는 석유 사업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재를 알아보는 용인술: 록펠러는 광산에 잘못 투자를 했다가 기사회생한 이후, 자기 일생을 석유 사업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석유 사업으로 세계를 제패할 꿈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록펠러는 동업자 사무엘 앤드루스와 협의하여 또 한 사람의 협력자를 맞아들였다. 그 사람은 록펠러와 평생 동지로 지내게 된 플래글러였다. 플래글러는 록펠러보다 아홉 살이나 위였지만, 록펠러가 석유 사업을 하는 동안 그의 분신 역할을 했는데, 그는 추진력과 대외 섭외력에 있어서는 록펠러를 능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록펠러는 제유법을 발명한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 앤드루스와 대외 섭외력이 뛰어난 플래글러라는 양 날개를 가지게 된 셈이었다. 이 두 사람은 록펠러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온전하게 보완해 주었다. 그 후 세 사람의 사업은 일취월장하여 1870년, 그 유명한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을 탄생시키고, 미국 석유 시장의 95퍼센트를 점유하는 초유의 글로벌 기업을 만드는 초석을 다지게 된다. 최초의 주식회사 설립: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중역회의 제도를 실시한 회사였다. 투자자들은 주식회사 제도에 매료되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록펠러는 경제 공황기였던 1870년에도 결코 손실을 유발하지 않았으며, 주주들에게 100퍼센트 이상의 배당금을 주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차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정유 회사로 성장하였다. Part 4 록펠러 제국 찬란한 뉴욕 시대를 시작하다 저급 원유를 되살린 기술: 그 무렵 록펠러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원유 공급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큰 문제가 있었는데, 우선 남아있는 원유의 매장량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1880년대 초반에는 펜실베이니아가 유일한 원유 채취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원유가 바닥난다면 이 거대한 기업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의문이었다. 또 스탠더드 오일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 아닌 외부에서 유정이 발견될 경우, 그 여파는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스탠더드 오일의 전략을 낱낱이 보아온 경쟁업체들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되는 것이며, 이는 스탠더드 오일을 위협하는 엄청난 문제가 될 게 분명했다. 오하이오와 인디애나에서 유정이 발견됨으로써 두 번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1885년, 실제로 리마 도시의 북서쪽 오하이오 근처에서 유황성분이 섞인 유전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다행히 시추된 원유의 질이 형편없었다. 그런데 록펠러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유전을 몽땅 사들였다. 과학자들은 리마 유전의 석유는 유황을 대량 함유하고 있어서 충분한 수준으로 정제될 수 없다는 진단을 거듭해서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회사의 석유정제 기술자 헤르만 프라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이 석유를 정제할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네. 자네들이 이 석유를 판매할 수 있게끔 정제만 해준다면 내 개인 돈 300만 달러를 상금으로 내놓겠네. 세상에 불가능은 없는 법이야. 안 그런가?” 원래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한 록펠러가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그렇게 말하자 록펠러의 확신에 감동한 프라슈는 말했다. “회장님이 정 그렇게 믿으신다면, 한번 위험을 감수해 보겠습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라슈는 획기적인 성과를 올렸다. 프라슈를 팀장으로 하는 스탠더드 오일의 기술자들은 리마에서 추출되는 원유에서 유황성분을 제거하여, 사용이 가능한 석유로 만드는 공법을 개발하여 특허를 따냈다. 이 사건으로 스탠더드 오일에서 록펠러의 능력과 신념이 재확인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산업 전반에 걸쳐서 록펠러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프라슈가 리마 원유 활용 방법을 알아낸 덕분에, 미국은 치명적인 석유 부족으로 전 산업이 마비되었을지도 모를 위기를 넘기는 효과를 얻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스탠더드 오일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인디애나까지 제3의 원유인 유황 성분의 석유를 퍼올렸고, 이를 완벽하게 독점했다. 또 리마 유전의 부산물인 천연 가스는 스토브, 가로등, 화로 등 여러 분야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이에 따라 스탠더드 오일은 전국을 잇는 가스관을 건설하고 많은 도시에서 특허를 따냈다. 이 대목은 록펠러의 탁월한 통찰력의 백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 받은 것을 돌려주는 삶을 계획하다 / 차근차근 실현한 하나님의 계획 병상에서 얻은 깨달음: 50대에 이르자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그에게는 전혀 예기치 않은 병마가 덮쳐들었다. 오로지 사업밖에 모르고 30여 년간 몸을 혹사해 온 탓이었다. 정밀한 종합진단 결과, 병원에서는 록펠러가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록펠러는 언론이 자신의 사망 기사를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 속에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록펠러는 교회에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것은 물론, 많은 자선 사업을 해왔지만 그것은 다 자신을 위한 일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신앙생활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만을 위한 인생의 목표는 곧 파멸의 길임을 비로소 깨닫고,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주는 것의 행복: 록펠러가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생긴 일이었다. 그는 무심코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자를 보게 되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찡한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다. 잠시 후, 주변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딸을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게 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나눔의 삶을 결심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건강을 돌려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 부디 저의 건강을 돌려주십시오.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벌어들인 돈을 세상을 위해 보람 있게 쓰고 싶어서입니다.” 그러자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요한일서 3장 17절의 말씀이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그 후 록펠러는 건강한 몸을 되찾아갔고, 1899년 이후부터 사업가가 아니라 자선 사업가로 변모했다. 셔먼 독점 금지법: 록펠러가 자선 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심을 굳힐 무렵, 미국 사회에서는 스탠더드 오일의 트러스트를 해체시키라는 압박이 거세졌다. 마침내 1890년, 의회는 ‘셔먼 독점 금지법’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기업 트러스트는 물론 생산, 판매, 무역거래에서 모든 조직을 금지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석유 사업 독점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강해지자, 세계 시장을 100퍼센트 지배하겠다는 꿈이 지나치게 높은 이상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못지않은 또 다른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그는 위대한 자선 사업의 트러스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특별한 조력자 게이츠 목사: 록펠러는 우선 집중적이고 치밀한 자선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 기업 경영에서도 그랬듯이, 자선 사업에서도 뛰어난 협력자를 찾았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사람이 서른여덟 살의 젊고 열정이 넘치는 프레드릭 T. 게이츠 목사였다. 록펠러는 시카고 대학교를 후원하기 위해 결성된 침례교회 전국 지도부 모임에서 게이츠를 처음 만났다. 그 후 록펠러는 게이츠에게 자신의 일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고, 석 달 후, 게이츠는 록펠러가 벌이는 자선 사업 총책임자가 되었다. 록펠러 의학 연구소: 게이츠는 제일 먼저 록펠러에게 록펠러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설립할 것을 제의했다. 록펠러는 그 의견에 동의했고, 첫 번째 결실로 1901년 미국 최초의 의학 연구소인 ‘록펠러 의학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록펠러 의학 연구소는 ‘질병은 인류의 삶에 대한 최대의 적’이라 규정하고, 미국 의학의 전문화와 선진화를 위해 의학인력의 양성과 실험의학 발전 프로그램을 전개해 나갔다. 이 연구소의 소장인 플렉스너 박사는 연구소 창립 4년 만에 유행성 뇌막염을 치료할 수 있는 혈청을 개발해냄으로써, 록펠러 의학 연구소를 세계적인 연구소로 만들었다. 경영을 떠나 개인의 삶 속으로 /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내려놓다 / 아버지의 뜻을 받든 록펠러 2세 여유로운 은퇴생활 / 아내의 죽음: 록펠러 의학 연구소와 GEB(일반교육위원회)의 일은 게이츠 목사와 아들 록펠러 2세에게 맡기고, 록펠러는 그야말로 여유 있는 은퇴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다. 록펠러의 아내 로라 스펠먼은 1915년 3월 12일, 일흔 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록펠러는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서 7,400만 달러를 기부해서 ‘로라 스펠먼 록펠러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록펠러가 기부한 기금으로 교회와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주로 했고 나중에는 록펠러 재단에 합병되었다. 록펠러 재단의 설립: 록펠러 재단은 1910년, 록펠러의 부를 전 세계 인류의 행복으로 증진시키기 위해 사용할 위대한 기관으로 출범했는데, 이 재단의 운영은 애초의 계획대로 게이츠 목사와 록펠러 2세가 맡았다. 록펠러 재단이 내걸고 있는 주요한 과제는 기아 근절, 인구문제의 해결, 대학의 발전, 미국 국내의 기회균등 및 문화적 발전이었다. 록펠러 재단은 유럽에서 중국, 일본에 이르는 많은 도시에 의학 대학 건립을 위한 자금을 기부했고, 많은 의약품을 개발해 말라리아, 발진티푸스, 결핵, 황열병을 비롯한 많은 질병의 퇴치에 공헌했다. 아버지의 뜻: 록펠러는 자선 사업을 하는 데 있어 네 개의 대형 비영리기관을 운영했다. 그것은 록펠러 의학연구소, GEB, 록펠러 재단, 로라 스펠먼 록펠러 재단이었는데, 그는 점차 자선 사업 운영을 외아들 록펠러 2세에게 맡겼다. 록펠러는 아들을 단순한 유산 상속자가 아닌 동료 자선 사업가로 보았고 아들에게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재산을 쓰기 원한다.”라는 쪽지를 남겼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요청에 “저는 아버지가 재산을 관리해 오신 것처럼, 양심적으로 관리할 것이며, 현명하고 관대하게 재산을 사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라고 기꺼이 약속했다. Part 5 완전한 믿음 하나님의 뜻으로 나누는 자선 사업 / 하나님의 말씀에 답하다 십일조의 비밀: 록펠러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십일조를 바치면, 그것이 복리로 불어나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 재산을 쌓는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자신이 필요할 때 수십 배의 자금으로 하나님이 돌려주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젊은 시절부터 사업의 어려운 고비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돈이 들어왔기 때문에 갖게 된 믿음이었다. 록펠러는 왜 그런 세상의 이치, 그 비밀을 사람들이 모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주식 투자를 해서 꼬박꼬박 십일조 헌금을 냈다. 덕분에 나이가 들어도 그의 머리는 쉽게 녹슬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에 서서 / 마지막 숨결: 처음으로 산소 호흡기를 사용한 날 록펠러는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느꼈고, 이제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과거 하나님에게 드렸던 기도를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는 건강한 몸으로 그로부터 43년을 더 살면서 세계 최고의 자선 사업가란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후 록펠러의 98번째 생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던 1937년 5월 22일. 그는 몸이 불편한지 간호사에게 자주 몸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고, 간호사가 거들어 주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록펠러는 저녁 무렵 간호사에게 몸을 좀 더 높이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가 몸을 일으켜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 훨씬 좋군.” 그리고 그는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새벽 4시 5분이었다.
17
JA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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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슬퍼하라
마음껏 슬퍼하라 노만 라이트 지음 노란숲 / 2009년 6월 / 163쪽 / 8,500원 ▣ 저자 노만 라이트(H. Norman Wright) 저명한 기독교 상담가로서 30년 이상 상담사역에 헌신해 왔으며, 전미 지역에 혼전상담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이다. 그는 현재…
마음껏 슬퍼하라 노만 라이트 지음 노란숲 / 2009년 6월 / 163쪽 / 8,500원 ▣ 저자 노만 라이트(H. Norman Wright) 저명한 기독교 상담가로서 30년 이상 상담사역에 헌신해 왔으며, 전미 지역에 혼전상담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이다. 그는 현재도 왕성하게 결혼세미나, 자녀양육세미나, 인생의 상실로부터의 회복, 트라마 위기상담세미나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또한 위기상담전문가로서 애도, 상실, 트라마로부터의 회복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 오고 있다. 본서 『마음껏 슬퍼하라(Experiencing Grief)』는 삶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던져진 치유지침서로서 널리 권해지고 있는 책이다. 그는 미 연방정부 산하의 다양한 부서들(전미 피해자지도목사회와 상담가협회, 아동학대사회복지과, 병원들)과 연계하여 많은 워크숍과 실습훈련을 실시하였으며, 9.11테러와 카트리나 홍수 때는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치유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였다. 저서로는 『마음껏 슬퍼하라』, 『위기상담학』, 『상실로부터의 회복』,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 『여성을 위한 카운슬링』, 『부모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외 70여권이 있다. ▣ 역자 금병달 목사: 서울대를 졸업하고 필리핀 아시아신학연합대학원(AGST)에서 신약학(Th. M)을,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가정사역(D.M.)을 전공한 뒤, 2002년 도미하여 미주지역 한인들을 위한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현재 남가주 사랑의교회 가정사역 담당) 김정진 사모: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탈봇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가정사역 전공)을 밟고 있다. 현재 “가정을 세우는 사람들”(Family Builders Ministry)을 설립하여 혼전상담과 부부성장모임, 대화학교, 가족치유, 이혼회복모임, 상실로부터의 회복모임 등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들 부부는 『연애공식』, 『결혼이 늦어지는 12가지 이유』(규장/2001), 『멍든 남자가슴 패인 여자마음』(말씀사/2004)을 공저하였고, 역서로는 『내 곁에 있는 당신』(순출판사/1998), 『결혼 준비됐나요?』(말씀사) 등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모든 상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과 혼란을 초래한다. 특히 사별로 인한 상실은 그 냉혹한 단절성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보다 깊고 심각한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의 여정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남은 자들은 죄책감과 분노, 충격, 낙심 등 복합적인 감정들에 불가항력적으로 압도당해 버린다. 이 어두운 계곡을 통과해 걸으며 해답을 찾는 것이 애도의 과정(Experience Grief)이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과 싸우고 씨름하며 끌어안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쓰러지려는 순간에도 가야할 길을 가고, 자신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며, 경험되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상실, 혹은 상실의 영향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문화 속에서 살기 때문에 올바르게 슬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절한 애도의 과정이 무시될 때 연소되지 않은 슬픔은 우울증이나 기타 심각한 신체증상으로 모습을 달리해 나타나서 우리 삶을 파괴해 버릴 수 있다. 이 책은 사별을 경험한 사람들이 참된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애도의 과정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쓰였지만, 이혼이나 실연, 원치 않은 이별로 인해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지금 애도 혹은 상실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깊은 통찰력과 지혜,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차례 추천사 / 책머리에 / 서문 제1장 슬픔의 얼굴들 제2장 고통과 부인 제3장 파괴적인 슬픔 제4장 슬픔의 성격 제5장 슬픔은 왜 존재합니까? 제6장 슬픔이 하는 일들 제7장 당신의 삶 속에 생긴 빈자리 제8장 슬픔에 대한 의문들 제9장 눈물의 의미 제10장 초대받지 않은 손님 제11장 두려움과 염려의 엄습 제12장 죄책감의 문제 제13장 분노의 문제 제14장 슬픔이 가실 때가 있을까요? 제15장 나의 감정을 어떻게 할까요? 제16장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감정 제17장 사연이 복잡한 사망의 경우 제18장 특별한 경우들 제19장 고인에 대한 추억을 보관하기 제20장 회복-반드시 이루어진다 제21장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제22장 ‘안녕’이라고 말하기 제23장 삶의 변화 제24장 슬픔이여 안녕! 제25장 충격적인 사건_ 가장 깊은 상처 부록: 눈물의 수프 만들기 마음껏 슬퍼하라 노만 라이트 지음 노란숲 / 2009년 6월 / 163쪽 / 8,500원 슬픔의 얼굴들 세상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익숙하고 어떤 이들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 - 친구나 부모, 조부모, 혹은 배우자나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이 사라집니다.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는 빈자리가 생기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습니다. 새로운 얼굴이 고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익숙하지도, 친근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슬픔’이라는 얼굴입니다. 슬픔. 당신은 슬픔에 관련해 어떤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슬픔은 흔히 우리에게 상처와 혼돈, 당황스러움과 위협감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강한 마음의 고통, 또는 날카롭게 찌르는 슬픔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슬픔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익숙하던 세계의 바닥이 뻥 뚫려버리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삶의 근간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듯 여겨집니다. 이로 인해 짙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예수님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계셨다는 사실을 아직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셨습니다”(사 53:3). 애통은 슬픔의 경험에 따르는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것은 슬픔이 표현되는 과정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회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슬픔을 고치거나, 더 낫게 만들거나, 떠나보내거나, 극복해버릴 수 없습니다. 슬픔은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나는 여행과 같은데, 그곳에는 골짜기와 봉우리, 사막과 가끔씩 만나게 되는 오아시스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 여행의 각 부분을 통과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끝은 짐작하기 어려우며, 어디에서 여행이 끝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마침내 목적지에 닿게 될 것입니다. 슬픔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힘든 작업입니다. 시간이 지체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류의 상실에 필수적입니다. 슬픔과 대항해 싸우거나 막으려고 애쓰지 말고 슬픔을 품어버리거나 수용하려 들면 더 많은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슬픔으로 하여금 당신의 삶 속에서 애통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허락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슬픔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고,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감정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부인 사랑하는 사람이나 아끼는 것을 잃어버릴 때 슬픔은 찾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슬픔의 동반자인 고통도 함께 찾아옵니다. 우리에겐 고통에 대한 면역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침입해오면 저항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인함으로써 고통과 싸웁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일 먼저, ‘아니야,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줘’, 또는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라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슬픔의 과정은 여러 단계의 부인을 통해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머리로 받아들이고, 다음에는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마지막에는 삶의 양식을 드러난 현실에 맞게 조정을 하게 됩니다. 부인하는 태도가 줄어들면 고통이 스며듭니다. 이러한 고통을 달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협상을 하거나 자신 안에 파묻혀버리거나 분노를 폭발합니다. 파괴적인 슬픔 슬픔은 너무도 무질서하게 진행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조절할 수도 없고, 언제 슬퍼할 것인지 예약할 수도 없습니다. 슬픔은 또한 우리의 사고나 감정의 능력을 방해합니다. 혼돈이 찾아오고 기억력이 사라집니다. 보통 때라면 상당히 결단력이 있던 사람도 쉽게 집중을 못하거나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별 후 1년 이내에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들은 이 시기의 강렬한 감정들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슬퍼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슬퍼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채 가슴속에다 쌓아둡니다. 침묵하는 것은 아직 낫기도 전에 상처를 덮어두는 것과 같아서 감정적으로 세균에 감염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슬픔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자신의 짐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슬픔은 왜 존재합니까? 왜 슬픔이 있어야 합니까? 왜 꼭 이런 경험을 통과해야만 합니까? 무슨 목적이 있는 건가요? 슬픔을 통해 성경 속의 인물, 욥의 고백처럼 새로운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슬픔은 상처도 가져오지만 또 다른 면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느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누군가의 슬픔에 완전히 잠길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죽음을 진정으로 심각하게 경험하게 될 때, 당신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Robert Veninga, A Gift of Hope) 슬픔은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정도 아니지만, 가치 있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품이나 인생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속되는 슬픔에 잠겨 사는 동안 이러한 슬픔이 평생을 가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들 때는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당신의 삶 속에 생긴 빈자리 누군가를 잃었을 때, 우리의 삶 속에는 빈자리가 생깁니다. 식탁에서도, 교회의 옆자리에도 사랑하는 이의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남으로써 그와 연관되어 따라오는 온갖 종류의 상실 때문에 고통은 더 커집니다. 일상의 생활, 사랑하기, 일하기, 예배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상실의 슬픔뿐 아니라 결코 가져보지 못했거나 갖지 못할 것에 대한 슬픔도 불러 일으킵니다. 이러한 상실은 특히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과는 멀어지고, 어떤 사람들과는 더 가까워집니다. 행동양식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합니다. 특히 당황스러운 경험은, 가끔씩 멍하니 생각이 멈춰버린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슬픔 속에서 감각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이의 사망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대부분의 사람을 마비상태로 몰아갑니다. 그의 죽음이 갑작스러웠다면 무감각 상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마취를 당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일어나는 방어체계입니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신경계를 마비시키고 비현실감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목적지를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슬픔에 대한 질문들 무감각의 시기가 지난 후에는 분리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이 상태에서는 떠나버린 사람이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의 모습이나, 음성, 그의 냄새, 그가 대문으로 다시 걸어들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고통은 워낙 커서 차라리 충격상태나 무감각의 단계로 되돌아가고픈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왜’라고 질문합니다. 반면에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쪽 다 정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질문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항의이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절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도 열여섯 차례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난 설명이 필요해요. 난 응답을 듣고 싶어요.’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응답이 없으면 분노가 쌓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라고 질문하는 일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욥의 경우, 그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천둥소리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켄 가이어의 말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 하늘의 음성은, ‘잠잠하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고 말씀하시지, ‘잠잠하면 이유를 알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먼 훗날에 ‘이해’라는 성례가 점차적으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눈물의 의미 이런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물을 보이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린 울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슬플 때 우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상실을 당한 무렵에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한없는 눈물에 잠기게 됩니다. 울고 또 웁니다. 이런 상태가 끝없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구름이 걷히고 땅에 물기가 마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폭풍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결국은 조금씩 조금씩 맑은 하늘이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잃어버린 사람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다가 잊어버렸다가 하는 변화를 마음속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마음 속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이때 몹시 곤핍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들이 당신과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언젠가는 더 이상 눈물이 필요없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초대하지 않은 손님 이러한 시기에 나타나는 또 다른 감정들 가운데 공허감과 외로움, 고독감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이나 밖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가져옵니다. 바로 곁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에도 외로운 느낌이 찾아드는 고통의 순간입니다.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세워진 것입니다. 외로움이란 상실의 부산물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사별한 지 약 3개월쯤 지나서 찾아오게 되는데, 이때쯤 남들은 우리가 이제 잘 지내고 있거나 잘 지내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외로움은 또 다른 감정을 동반하는데, 그것은 ‘소속되지 않는 느낌’입니다. 우리 자신 또는 사별한 그와 교제했던 사람들이 예전처럼 우리를 자주 초대하거나 초대에 응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불필요한 존재처럼 여겨지거나 이전보다 더 격리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레고리 플로이드는 6살짜리 아들을 잃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실제적이고도 섬세하게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린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단지 그분이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우리의 가슴이 반복적으로 부서져 내리는 소리를 들어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시편기자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3) 지금 그러한 손길이 필요하신가요? 하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필요, 즉 그들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 두려움과 염려의 엄습 다음으로 따라오는 감정은 두려움과 염려입니다. 혼자 남는 데 대한 두려움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 또 다른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 다른 떠남이나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입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사실상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많은 이들이 상처받은 다른 가족들이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지를 염려합니다. 다음엔 다른 가족이나 친구를 잃게 될까봐 걱정합니다. 두려움이나 염려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슬픔 그 자체입니다. 슬픔의 감정은 강렬하고도 특이합니다. 슬픔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것 때문에 두려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완전주의적인 성향이 강할수록 통제할 수 없는 상실의 느낌이나 두려움도 커집니다. 두려움은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슬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거나 느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한 역할 모델이나 지침도 별로 없기에,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죄책감의 문제 죄책감과 수치감도 슬픔의 여정 속에 끼어듭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원인들은 다양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될 때는 즉시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죄책감은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발생할 수 있습니다. 때론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경험하기 쉬운 또 다른 경향은, 고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나쁜 일이나 부정적인 것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고인이 행했던 선한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흔히 우리가 만약 무엇인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무엇인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의 ‘만약 ~했더라면’ 하는 목록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난 상처를 입었어요’ 또는 ‘난 화가 나요’라는 표현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이미 지난 일은 흘러갔습니다. 그 일은 바뀔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지고 있어서 더 이상 자기고발이나 자학, 자기 비하 등의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지 목록을 적어보고 크게 읽은 다음에 미안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그리곤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죄책감을 거두어 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죄책감이 남아 있으면, 결코 회복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분노의 문제 또 다른 감정은 분노입니다. 그것은 불쾌하고 성가시며 항의하는 감정입니다. 분노는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이나 상처, 두려움, 무기력감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부당함을 선언하거나, 누군가에게 대가를 지불하기를 바라며 슬픔 가운데서 항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분노는 상처나 고통에 대한 반응입니다. 때로 이러한 분노는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을 향해 폭발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노는 죄가 아니라 감정의 정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분노는 슬픔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론 고인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때로 버림을 받았거나 희생을 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해주시지 않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신앙이나 믿음이 소용없는 것처럼 보여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십시오. 슬픔으로 인한 분노가 하나님을 향해 생기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실로 인한 반응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일지’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자신과 자신의 분노에 대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노를 표출하더라도 자신의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유지하는 한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자신의 분노를 포기하십시오. 분노에는 목적이 있지만, 많은 경우 목적을 다 이룬 후에도 남아 있게 됩니다. 다윗은 분노에 차서 질문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고백의 단계에 다다랐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3:5, 6) 슬픔이 가실 때가 있을까요? 마침내 슬픔이나 우울증, 낙심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슬픔에 젖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이 깊어갈수록 무기력감 때문에 꼼짝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는 피동적이 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도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을 바라보던 태도까지도 바꾸어 버립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빛과 평화, 기쁨을 경험하는 대신에 그 반대의 감정을 느낄 뿐입니다. 그럴 때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은 흔히 우울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심하게 우울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울을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슬픔처럼 우울증도 하나의 여정이지만 무미건조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광야의 불편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감정적으로 낙심된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 가운데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자요 질고를 아는 자(사 53:3)이십니다. 슬픔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나의 감정을 어떻게 할까요? 혹자는 슬픔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기에 가장 깜깜한 밤과 같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다양한 변화를 겪을 수 있습니다.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는 썰물처럼 떠나갑니다. 우리들에게 밀려오는 감정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으면 마침내 그러한 감정들을 정복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신 것같이 생각됩니다. 또한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상실과 슬픔의 시기에도 거친 현실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시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여,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감정을 억누르고 틀어막는 것은 가능하지만, 오랫동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글이나 말로 표현하게 되면 혼자서 그 무게를 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정을 표현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침묵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잘 극복해가고 있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에게 ‘난 당신이 이렇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감정 슬픔의 감정들 가운데서 가장 은밀한 것은 안도감입니다. 사실 이러한 감정이 슬픔 속에 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간혹 자신 안에서 안도감을 감지하는 경우에도 놀라며 그래서는 안된다는 복잡한 감정과 뒤섞이게 됩니다. 죽은 사람들은 흔히 사랑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은 후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때로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을 때, 경험해서는 안될 것 같은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지거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감정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경우에는 고인뿐 아니라 보살피는 사람에게도 여러 방면에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안도감이 느껴진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달리 해결책이 없었던 상황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배신이나 신의의 저버림, 인격적인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러한 안도감은 먼저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실을 자신에게 인정함으로써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큰 소리로 외치거나 글로 여러 번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고인에 대한 추억을 보관하기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과정을 지나면서 고인에 대한 추억이 희미해져감에 따라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고인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런 감정도 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우리가 취해야할 새로운 역할 중 하나는 고인을 위한 역사가가 되는 일입니다. 애도자만이 고인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는 핵심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격체로서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추억하는 일입니다. 이 작업은 결국 당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표현이며, 헝클어지고 복잡해진 추억들을 보다 분명히 하는 일이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게 될 내용들을 보존하는 일입니다. 회복_ 반드시 이루어진다 회복! 그것은 잡히지 않는 꿈같이 여겨질 것입니다. 회복은 정해진 목적지에 한번 도착하면 끝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어떤 날에는 회복되는 듯하다가 어떤 날에는 제자리로 되돌아간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과연 이 슬픔이 얼마나 더 지속될까요?’ ‘이 여정이 끝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한가요?’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슬픔의 여정에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전환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인의 사망 후 3개월 정도에 가장 힘든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6~9개월 정도 지나면 정서적인 면과 신체적인 면의 건강관계를 고려해야 할 수준이 됩니다. 다음으로 사망 1주기 때가 힘든 시기입니다. 슬픔이나 고통이 마치 처음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처럼 강하게 환기될 수 있습니다. 18개월쯤 되면, 지금까지의 시간들보다 훨씬 나은 시간들을 경험하면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이제 정신을 차리고 자기 생활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부터 해야 하나요? 이때가 바로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처리해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내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말입니다. 어떤 시점에서 슬픔을 흘려보내는 일은 이 여정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슬픔을 떠나보내는 일은 결코 그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인을 뒤에 남겨두고 자유롭게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안녕’이라고 말하기 슬픔을 떠나보내는 과정의 첫 단계는 슬픔을 떠나보내는 편지를 쓰는 일입니다. 이러한 편지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감정들을 놓아 보내기도 합니다. 고인이 된 사람과 자신이 그리워하는 바나 바라는 바, 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나 애도의 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배운 바는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진실해야 합니다. 슬픔의 여정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슬퍼하기’나 ‘슬픔을 멈추기’를 허락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도의 과정을 통해 떠나간 고인에게 계속적으로 ‘안녕’이라고 말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도 ‘안녕’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변화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고통에 수반되는 가치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고통 그 자체나 고통의 과정에 있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부여됩니다. 우리는 슬픔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장점이나 잠자고 있던 달란트, 결코 사용해보지 않았던 능력, 이전엔 결코 보지 못했던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 타인의 상처나 어려움에 대한 새로운 공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복이란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실감과 함께 살아가기를 배우는 것과, 새로운 삶에 적응해가는 것을 뜻합니다. 회복은 고인을 잊는다거나, 다시는 쓰라린 마음을 경험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공휴일에도 허전한 느낌이 없다거나 더 이상 슬픔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애도를 표현하는지를 배움으로써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슬픔이여 안녕! 애도의 과정에서 혼돈상태가 끝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의 몇 가지 표시가 회복되어가는 상태를 말해줄 것입니다. 첫 번째 표시는 편안해진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데 묶여 있던 상태에서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보다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또 다른 표시는 내적인 힘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무력감이 사라지고, 이전에 하던 활동들을 예전처럼 다시 할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 표시는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표시는 먹고 자는 일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성인이라면 대개 이러한 상태가 나타나기까지 18개월에서 24개월 정도 걸립니다. 하지만 위의 네 가지 표시 이외에도 회복하는 시간에 많은 변수들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고인에 대해 기억은 나겠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아픔도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애도가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소망이 슬픔을 대신하러 옵니다. 슬픔으로 꽉 막힌 하늘이 맑게 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제냐고요? 모든 애도의 시간을 마무리할 그 때가 바로 그 시간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1,4)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사 6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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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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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하게 세상에 이기는 법
현명하게 세상에 이기는 법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스카이 / 2013년 4월 / 228쪽 / 12,900원 ▣ 저자 발타자르 그라시안 1601년 1월 8일 벨몽트에서 태어나 57세의 나이로 사망한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어린 시절…
현명하게 세상에 이기는 법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스카이 / 2013년 4월 / 228쪽 / 12,900원 ▣ 저자 발타자르 그라시안 1601년 1월 8일 벨몽트에서 태어나 57세의 나이로 사망한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을 했던 그는 15세의 나이로 발렌시아의 사라고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계와 인간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무적함대’라 불리는 스페인 황금시대가 막을 내리려던 시기에, 기독교 예수회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현자론』, 『영웅론』 등의 세계적인 저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간의 본심을 인정하고 인생의 욕망을 철저히 이루도록 돕는 뛰어난 인생론으로,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여러 가지 비결을 전수해주는 그의 저서들은 후세의 니체나 쇼펜하우어, 모리 오가이 등 많은 철학자,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400년 이상에 걸쳐 지금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두루 읽히고 있다. ▣ 역자 민경수 충남 부여 출생.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지식정보센터에 재직 중이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성균관대학교 유교경전학과 석사 과정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서당, 국사편찬위원회 초서과정 등을 수료했다. 10여 년간 출판사 편집장을 지냈으며 『승정원일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편찬에 참여했고 한문 고전 번역가로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는 『초역 채근담』, 『초역 행복론』, 『멘탈붕괴유머』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의욕, 삶의 보람이 넘치는 일을 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다.’ ‘승부를 겨룰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기고 싶다.’ ‘소중한 사람이 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본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17세기 스페인에서 쓰였다. 철학자이자 신학 교수였던 저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인간의 본질’을 예리하게 관찰해서 살아 있다면 누구나 품을 만한 ‘인생의 욕(慾)’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좋은 사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허술함이 없고 인간미가 있으며 유연하게 살기 위한 방법이 짧은 문장 속에 가득 담겨 있다. ‘옛 철학자, 성직자의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고리타분한 부분은 전혀 없다. 때로는 영리하게 처신할 것을 권하며 ‘인생의 심리전’에서 한수 위가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냉정한 시각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이 책은 당신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눈을 갖게 해줄 것이다. 일상의 작은 문제부터 인생 고민까지 이 짧디짧은 말에 당신에게 최고의 ‘해답’이 되어줄 뛰어난 인생론이 담겨 있다. 인생을 씩씩하게 살아가기 위한 ‘좌우명 체크리스트’로 오늘부터 당장 활용하길 바란다. ▣ 차례 프롤로그 1 강인한 현명함이란_ ‘일직선으로 나는 새’는 바로 저격당한다 2 지성과 품격을 갖춘다_ ‘유리 같은 사람’으로 끝날 것인가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3 인간관계의 달인에게_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의 작은 궁리 4 일에 보람과 성과를_ ‘인생의 목표’라는 기폭제 5 주장을 굽히지 않는 ‘줄다리기’_ 인생의 심리전에서 명백한 승리를 거두는 방법 6 재수와 행운을 나에게_ 또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7 ‘내일이 더 좋아지는’ 최고의 인생_ 자신의 진가가 훌쩍 뛰어오르는 삶의 방식 에필로그 현명하게 세상에 이기는 법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스카이 / 2013년 4월 / 228쪽 / 12,900원 1 강인한 현명함이란_ ‘일직선으로 나는 새’는 바로 저격당한다 자신의 완성도를 그린다 당신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내가 될 것이다!’라는 완성도를 그릴 필요가 있다. 명철한 머리, 배어나오는 지성, 적확한 판단력, 풍부한 인간성…….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다. 또한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완성도’대로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높은 곳을 향해 노력하는 동료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동료들과 힘을 합쳐 상승효과를 내게 되고, 더욱 빨리 ‘목표를 이룬 자신’에 도달할 수가 있다. 적게 노력하고 많이 얻는 습관 예의는 마법 같은 것이다. 마음을 다해 예를 갖추면, 타인의 ‘사랑’을 얻게 된다.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게 되면 대우가 훨씬 따뜻해진다. 마찬가지로 자신도 상대로부터 예의 바른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예의는 하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특히 공적인 장소에서는 예의를 지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공기 같은 것이 있다. 예의를 잃으면 엄숙한 공기를 망치게 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불쾌감을 안겨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의를 지키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그야말로 ‘적게 노력하고 많이 얻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갈채보다도 비평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당신은 훌륭하다.”는 말을 들으면 자존심도 세워지고 만족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상태에 빠져 언제까지고 도취되어 있으면 허무할 뿐이다. 또한, 갈채는 자신을 오만하게 만들어 걸음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제자 중에 유일하게 아리스토텔레스만 인정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임과 동시에, 가장 엄격한 플라톤의 비평가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단련해 갈고닦게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갈채’가 아니라 ‘현자의 한마디’인 것이다. 만족시키지 말고 기대를 갖게 하라 ‘남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중요하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필요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사람들의 부탁을 전부 흔쾌히 들어주면,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은 갖지만 그런 감사는 금세 잊혀지고 만다. 샘물로 갈증을 달랜 사람은 바로 샘을 등지고 떠나가버린다. 기대가 없으면 호의도 감사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보다 기대하게 만드는 편이 훨씬 수확이 크다. 일직선으로 나는 새는 바로 저격당한다 당신은 항상 똑같은 행동 패턴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행동 패턴은 가끔 변화를 주어야 한다. 언제나 단순하고 명백한 행동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을 취하면 당신을 지켜보던 적이 당신의 하나뿐인 행동 패턴을 파악해 그 허점을 노리게 될 것이다. 일직선으로 나는 새는 저격당하기 쉽지만 곡선을 그리며 나는 새는 맞추기 힘들다. 그렇다고 언제나 남의 눈을 속이는 행동만 취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세상에는 도처에 사람들의 악의가 숨어 있다. 이것을 잘 피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혜와 재치가 필요하다. 기세 좋게 져도 다시 전진하는 사람 무언가 목표를 갖고 그것을 향해 걷기 시작할 때, 마음의 레벨이 올라간다. 그리고 그 걸음을 한 발짝씩 뗄 때마다 마음은 점점 더 수련되어간다. 희망을 가지고 앞을 향해 전진할 때는 쓸데없는 사념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그 빛을 더하게 된다. 이 의지와 자신감을 동시에 손에 넣은 사람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하면 된다!’는 의지를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2 지성과 품격을 갖춘다_ ‘유리 같은 사람’으로 끝날 것인가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나의 노력으로 열의 성과를 거두는 방법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성격 탓에 혹은 사교성이 부족해서 그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썩히는 사람이 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가. 우선 그걸 찾아내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걸 메우려고 노력하면 된다. 자신의 재능을 살리는 데에는 반성과 궁리로 충분하다. 즉시 결단, 즉시 해결의 함정 무언가를 승낙하거나 반대로 제안을 거절할 때도 잘 생각해본 후에 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안이하게 대답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바로 답해주지 않으면 곤란해.”라고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결단을 재촉하는 것은 사기꾼들이 잘 쓰는 상투적인 수법이다. 이와 같은 책략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시 결단이나 즉시 해결에도 확신을 갖고 판단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의심이나 망설임이 있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의 뜻에 적당히 타협하게 되면 그 대가는 생각보다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게 될지도 모른다. 상대의 본심을 빛처럼 읽어내는 방법 현대라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리한 통찰력이 필요하다. 통찰력이란 하나를 들어 열을 알거나, 빙산의 일각을 보고 전체를 파악하거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말한다. 이해가 빠른 사람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빛과 같은 속도로 읽어내고, 살쾡이같이 예리한 눈으로 상대의 목적을 적확하게 맞춘다. 통찰력을 단련해두면 진실 뒤에 숨겨진 거짓을 간파할 수가 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상대의 본심이나 진정한 목적을 추정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실체가 불확실했던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직과 바보스런 정직은 다르다 정직은 좋은 것이다. 정직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그렇지만 바보스런 정직함은 그렇지 않다. 이를 이용하려는 사기꾼의 맛있는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악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게 구는 것도 중요하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이 방법을 이미 잘 터득했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주변 색에 맞춰 스스로의 몸을 위장하거나 평소에는 그늘에 숨어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먹이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불시 공격을 개시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뱀 같은 교활함과 비둘기 같은 온화함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다. 중용을 아는 사람 무슨 일을 하건 절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도를 넘으면, 정의도 악이 되고 용기도 무모가 된다. 친절이 지나치면 참견이 되고, 세련이 도를 넘으면 촌스러움이 된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정도’라는 게 있다. 이것에 못 미쳐서도 안 되고 이를 넘어서도 가치가 떨어진다. 젖소의 젖을 짤 때, 힘을 너무 세게 주면 우유에 피가 섞인다고 한다. 맛있는 우유를 마시고 싶다면 적당하게 힘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실수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사람은 누구나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죗값을 치르는 게 당연하다. 그 죗값의 기본은 ‘반성’과 ‘사죄’다. 이 두 가지만 잊지 않으면 이후의 문제들은 대개 피할 수 있다. ‘누가 알기 전에 회복시켜 놓으면 된다.’는 생각에 임시방편으로 대충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내 책임이니까 혼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우선 한마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자. 제일 어리석은 짓은 사과의 말을 입에 담기 전에, 자기 신변 보호를 위한 변명만 늘어놓는 것이다. 3 인간관계의 달인에게_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의 작은 궁리 ‘마음의 핸들’을 놓지 마라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면 화가 난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잡게 되면 기쁨이 샘솟는다. 이것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절대로 감정을 폭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제정신을 잃을 정도로 감정적이 된 사람은 허점투성이다. 무방비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악의 있는 사람에게 그 틈을 보이면 호되게 당할 가능성이 높다. 감정으로 인해 이성을 잃은 사람은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자기와 자기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냉정함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준다. ‘불만’이라는 괴물을 길들여라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저것을 갖고 싶다.’ ‘이것도 하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항상 불평불만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 탓으로 돌리거나 때로는 자기혐오에 빠져 녹슬고 탁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런 망상의 나날을 보내는 일이 없다.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감정이 생겼다고 느낄 때, 의식적으로 플러스 기분을 낸다. 감정의 균형을 맞춤으로 평정심을 되찾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변덕스럽게 수시로 고개를 드는 어리석은 망상에도 확실히 브레이크를 걸 수가 있다. 진정한 파트너에게 ‘다만’은 필요 없다 순조로울 때의 친구라면 얼마든지 있고 그런 친구는 찾기도 쉽다. 오히려 찾기는 어렵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 소위 ‘역경의 친구’는 한 명이라도 좋으니 꼭 사귀길 바란다. 인생은 잘 풀리다가도 한번 악평이 나면 혼자서 그 역풍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 ‘역경의 친구’는 이런 경우에 든든한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운명도 세상도 혼자라는 걸 알면 가차 없이 공격하지만, 둘이면 그렇게 쉽게 공격하지 않는다. 혼자 서 있는 사람에게 부는 역풍은 강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평생의 친구를 두고, 힘들 때의 무거운 짐이나 슬픔을 둘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잘 맞지 않는 사람과 잘 지내는 비결 자신과 성격이 잘 맞는 사람과 사귀는 건 참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들하고만 교제할 수는 없다. 잘 맞지 않는 사람, 성격이 자기와 너무 다른 사람이 있다면, 조금씩 자신을 상대방에게 길들이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과 충돌하는 일도 없어지고, 처음에는 불쾌하게 생각했던 상대의 결점도 점차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자제심을 갖고 사귀다 보면, 불쾌한 일은 어떻게든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느낌이 조금씩 옅어져 있을 것이다. 4 일에 보람과 성과를_ ‘인생의 목표’라는 기폭제 절대 잃지 않는 ‘인생의 목표’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모범으로 삼아, 그 사람에게 항상 자극을 받아 분발한다. 이런 존경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난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의욕이나 투쟁심을 불러일으킨다. 고생하지 않고 인생의 목표를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목표를 잃지 않는 한 의지가 꺾이는 일도 없다. 알렉산더 대왕이 아킬레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건 그 운명에 동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명성이 아직 아킬레스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저 사람 같은 명예를 얻고 싶다.’는 생각은 자신을 끊임없이 궁리하고 노력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는 불안이나 불만, 연약한 질투심 같은 게 들어올 여지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직업을 갖는 건 먹고살기 위해서, 좋아하는 일을 하다 죽고 싶기 때문에,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기 위해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렇게 사람마다 이유도 다르겠지만,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 또한 일에 따라 모두 다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서 꼭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머리를 필요로 하는 일, 체력을 필요로 하는 일, 재치를 요하는 일, 독창성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일……. 직업을 선택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선택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자신의 자질이나 주특기가 뭔지 심사를 거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다. 이것이 ‘직업’의 순리다. 사람을 의욕적으로 만드는 보수를 어떻게 건넬 것인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는 지불되어야 한다. 일하는 입장에서는 보수를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노동자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불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약간의 궁리가 필요하다. 보수란 금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이 끝난 다음에 건네는 금품은 당연한 보수지만,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의 격려는 기대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한마디 격려에 은혜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하의 사기가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평소보다 일찍 다양한 형태의 보수를 건네보자. 이것은 큰 성과로 이어질 것이다. 5 주장을 굽히지 않는 ‘줄다리기’_ 인생의 심리전에서 명백한 승리를 거두는 방법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교묘한 기술 배가 고프면 먹을 걸 원하게 된다. 지갑이 가벼워지면 돈이 갖고 싶어진다. 다시 말해, 욕망은 결핍에서 생겨난다. 모든 것이 다 채워진 사람의 마음은 평정을 유지한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동요하지 않고,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는 일도 없다. 무언가 부족할 때, 원하는 것이 수중에 없을 때, 사람의 마음에는 틈이 생긴다. 맛있는 먹이가 눈앞에 보이면 의심하지 않고 달려들고 만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정치가는 채워지지 않는 서민의 욕망을 자극해 기대감을 선동한다. 하지만 결코 만족시키는 일 없이, 항상 불만을 품게 해서 그걸 다시 기대로 이어간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교묘한 기술인 것이다. 의미 없는 박수를 의심하라 보통 박수나 갈채는 칭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관객은 아무리 시시한 연설에도 박수를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그런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해서 결코 우쭐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의미 없는 박수갈채에 상기된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관객 중에는 그 본질을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며, 씁쓸해하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런 냉정한 사람의 비판이야말로 달게 받길 바란다. 달이 되어 빛나는 방법 옛날 어느 미녀는 못생긴 여자들만 골라 초라한 옷을 입혀서 자기 주위에 시녀로 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밤하늘에 달이 눈에 띄는 것은 주위에 작은 별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과 손을 잡으면 자신의 빛은 상대의 빛에 묻혀, 상대가 주역이 되고 자신은 조역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빛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어줄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 별 부스러기 속의 달이 되어 자기의 빛을 한껏 빛낼 궁리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너무 수준 낮은 사람들하고 있으면, 자신의 가치까지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적당히 조절하기 바란다. 능력 있는 매가 발톱을 감추는 진짜 이유 손윗사람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압박하면 반드시 사람에게서 미움을 사게 되는데, 특히 손윗사람을 이기려는 행동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당신이 지능 면에서 손윗사람을 앞지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일 수 있다. 손윗사람은 단순한 조언은 받아들여도, 아랫사람이 자기보다 더 빛나는 건 달가워하지 않는다. 조언이라 해도 본인이 우연히 잊고 있던 걸 생각나게 하는 형태의 충고라면 기쁘게 듣지만, 모르겠지 하는 마음에 가르치려 드는 태도의 충고는 좋아하지 않는다. 손윗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도, 그걸 잘 포장해 감추고 있어야 한다. 봄바람 같은 말로 말을 걸어라 상냥하고 따뜻한 말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에게 힘을 북돋워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말도 잘못 쓰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탄환이 몸을 관통하듯, 폭언이나 험담은 사람의 마음을 관통한다. 그야말로 언어폭력인 것이다. 빈정거림이나 독설 또한 사람의 마음을 서서히 도려낸다. 이렇게 도려내어진 마음의 아픔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세상만사는 전부 말로 사고, 말로 팔게 된다. 사람은 말을 사고팔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항상 ‘비단 같은 말’을 준비해, 상냥하고 따뜻한 말씨를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절대 까칠한 말을 뱉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대에 대해서도 항상 따스한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부드럽게 말을 거는 것이 좋다. 쓸데없는 변명을 하지 마라 실수했을 때에는 실수를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자기 죄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혹은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 건 굉장히 보기 안 좋다. 이는 자기가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대가 이유를 듣고 싶어 한다 해도, 필요 이상으로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실수를 저지른 것에 대한 마이너스에, 상대에게 불신감까지 주게 되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다만 오해를 받았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에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런 때에는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오히려 당당하게 주장해야 한다.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해둔다 미래에 일어날 일 중에는 ‘반드시 일어날 일’과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 있다. 이 중에 우리는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시대의 흐름을 잃고 장애물을 예측하고 자기가 걸어갈 여정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예상하고……. 이렇게 해야 비로소 자기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정할 수 있다. 항상 ‘예측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반드시 ‘OK’ 하도록 부탁하는 법 무언가 ‘부탁하기 쉬운 사람’과 ‘부탁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상대가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 약한 사람이라면 별 고생 없이 쉽게 부탁할 수 있다. 하지만 부탁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에는 특수한 기술이 필요하다. 우선 상대가 기분 좋은 때를 노리자. 다만 처음부터 당신의 의도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한 수 위라면, 당신이 부탁도 하기 전에 거절부터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가 ‘NO’라고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약간의 의리를 보이면 좋다. 상대가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는 것이다. 상대가 양심적이면 양심적일수록 그 효과는 크다. 이런 기술은 양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전에 이런 사람에게는 중요한 부탁을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6 재수와 행운을 나에게_ 또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삶에 그대로 적용되는 ‘일몰의 미학’ 태양은 빛이 옅어지기 전에 구름 속에 몸을 숨겨 일몰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사람도 승마장 한가운데에서 낙마해 웃음을 사지 않으려면 지치기 전에 말에서 내려오는 것이 좋다. 남에게 버림받기 전에, 자기가 먼저 버리는 것이 현명하고 분별 있는 행동이다. 꿈지럭거리다가는 손쓸 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이 ‘아직 한참 더 할 수 있는데…….’ 하며 아쉬워할 때 무대에서 내려와서 풍요로운 마음으로 만년을 즐기는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를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상대를 틀림없는 내 편으로 만드는 ‘욕망 이용법’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기가 필요하다. 이 동기를 파고 들어가면 욕망에 다다른다. 어떤 사람은 명예욕, 어떤 사람은 금전욕, 또 쾌락의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욕망을 채워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만약 이 기회를 준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제안을 바로 덥석 물어버린다. 그러므로 욕망은 약점이기도 하다. 만약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싶다면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욕망이 뭔지 알면, 자기 뜻대로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을 이루는 사람은 천천히 서두른다 생각나는 대로 바로 행동으로 옮기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행동하기 전에 모든 사태를 상정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도 좋지 않다. 앞이 너무 빤히 보이면 주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막상 행동하기도 전에 이미 때가 늦은 불우한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익은 과일은 제일 맛있을 때 얼른 먹어야 한다. 너무 익어버리면 나중에는 썩어서 도저히 입에 댈 수 없다. 오늘, 과감하게 행동을 개시하면 일의 절반은 이룬 셈이나 마찬가지다.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말은 당신에게 최상의 격언이 될 것이다. 7 ‘내일이 더 좋아지는’ 최고의 인생_ 자신의 진가가 훌쩍 뛰어오르는 삶의 방식 인생의 단맛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시간 사용법’ 하루하루의 생활은 활동과 휴식, 이 두 가지로 나뉜다. 활동 중에서도 노동은 괴롭다. 반면에 휴식은 쾌적한 것이다. 누구나 즐거운 시간을 줄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활동이나 노동은 신속하게, 휴양이나 즐기는 건 느긋하게’를 생활 신조로 삼으면 좋다. 정해진 일생이라는 시간을 잘 배분해서 쓸 수 있는 사람은, 시간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악의 근본을 차단하는 방법 사람 마음의 중심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적의가 항상 숨어 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자연 발생적으로 솟아난다. 말하자면, 본능 같은 것이다. 이런 불쾌한 감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발생한다. 따라서 사전에 예방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 이유 없는 미움을 피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그건 상대를 존경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받으면 상대에게도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는 습성이 있다.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미움을 갖지 못하는 법이다. 가지와 잎, 나무, 숲 중 무엇을 봐야 하나 이 세상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세세한 일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난다.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없는데, 신경이 쓰이면 괜히 관여하고 싶어진다. 고민하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하기도 하는 동안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게 된다. 하지만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지와 잎에 눈이 팔려 있는 동안 나무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나무에 마음이 뺏겨 있으면 숲이 보이지 않는다. 전체상을 파악하지 않으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자기 위치를 잃으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게 되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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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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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다르게 행동하라
하나만 다르게 행동하라 빌 오한론 지음 원앤원북스 / 2013년 7월 / 316쪽 / 15,000원 ▣ 저자 빌 오한론 저명한 심리학자인 저자는 스티브 드 세이저와 더불어 미국 단기치료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세계적인 명성을 지…
하나만 다르게 행동하라 빌 오한론 지음 원앤원북스 / 2013년 7월 / 316쪽 / 15,000원 ▣ 저자 빌 오한론 저명한 심리학자인 저자는 스티브 드 세이저와 더불어 미국 단기치료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전문 상담사이자 공인된 결혼 및 가족 치료 전문가이며, 해결중심 요법의 개발자 중 한 명으로 다양한 치료요법을 창시했다. 전 세계에서 700개 이상의 세미나를 열었으며 19권의 책을 집필했다. 미국 유명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오프라 쇼〉와 〈투데이 쇼〉에 패널로 출연했다. ▣ 역자 김보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다니고 싶은 회사 만들기(공역)』가 있다. ▣ Short Summary 최근 심리학, 그중에서도 정신분석학이 대중에게 인기를 끌며, 개인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심리학계와 대중이 함께 만들어낸 이러한 흐름과 반대로, 미국 심리학계의 거두인 저자는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가 개발한 치료법은 문제의 원인에 과도하게 집중하지 말고, 해결 방법에 주안점을 두는 해결중심 요법이다. 이 책은 효과적인 문제 해결 접근법을 찾는 10가지 열쇠를 선사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진 문제 원인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단지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왜 풀릴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들만 제시해 결국 해결책과 멀어지게 만든다고 설명하면서 해결중심 요법의 핵심을 제시한다. 해결 열쇠를 관념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돕는 적절한 예시와 함께 소개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문제 대응 방식에 변화를 주는 법, 2부에서는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을 변화시키는 법, 3부에서는 해결중심 요법을 인생에 적용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각 부의 큰 주제 안에서 저자는 인생의 곤경을 헤쳐나갈 10가지의 해결 열쇠를 제시한다. ▣ 차례 들어가며_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에 집중하라 1부 행복하지 않다면 문제 대응 방식을 바꾸자 1장 해결 열쇠 1 - 문제 패턴을 깨뜨려라 2장 해결 열쇠 2 - 해결 패턴을 찾아서 활용하라 2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을 바꾸자 3장 해결 열쇠 3 - 당신의 과거와 감정을 인정하라 4장 해결 열쇠 4 - 주의를 전환하라 5장 해결 열쇠 5 - 미래를 상상하라 6장 해결 열쇠 6 - 해결중심적 스토리로 바꾸자 7장 해결 열쇠 7 - 영성으로 자신을 넘어서라 3부 해결중심 요법을 인생에 적용하자 8장 해결 열쇠 8 - 행동 대화법을 사용하라 9장 해결 열쇠 9~10 - 과거의 유령을 몰아내라 10장 해결중심적 성생활을 하라 나오며_ 무언가 다른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라 하나만 다르게 행동하라 빌 오한론 지음 원앤원북스 / 2013년 7월 / 316쪽 / 15,000원 1부 행복하지 않다면 문제 대응 방식을 바꾸자 문제 패턴을 깨뜨려라 한 부부가 자기들의 힘으로는 다툼을 멈출 수가 없다며 상담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화가 나면 상처가 될 말을 가리지 않고 쏟아내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가고는 했다. 상담사는 부부가 어떻게 이런 패턴을 갖게 되었는지 분석했고, 그들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알게 된 후에도 부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별다른 변화 없이 상담만 계속하던 중 상담사가 내 강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후에 상담사는 워크숍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그 부부와 다시 상담한 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들려주었다. 우선 상담사는 부부에게 자신이 워크숍에 참석해서 새로운 방법을 배워왔다고 밝히고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 방법을 시도해보자고 제안했다. 부부는 무엇이든 해볼 의향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동의했다. 이에 상담사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말다툼이 커질 기미가 보이면, 잠시 멈추어 한숨 돌린 후에 욕실로 가라고 했다. 이때 남편은 옷을 모두 벗고 욕조에 눕고, 부인은 옷을 입은 채로 욕조 옆 양변기에 앉는다. 그러고 나서 끊겼던 언쟁을 이어나가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논쟁을 벌이기가 어렵다. 남편은 자신의 벌거벗은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워 평상시대로 행동할 수 없었으며, 부인도 이 방법이 아주 재밌어서 보통 때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부부는 처음 몇 주 동안 다툼이 생길 때면 이 방법을 행동에 옮겼다. 그렇게 몇 번 욕실에서 다툼을 벌인 후에 그들은 논쟁을 조정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로 이 부부의 다툼이 최악으로 치닫는 일은 없었다. 논쟁이 과열될 조짐이 보이면 한 사람이 욕실을 쳐다본다. 그러면 상대방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알겠어, 알겠다고. 조금 진정하고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자.” 지금 당신이 문제에 갇혀 쩔쩔매고 있다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라. 딱 한 가지만 다르게 해보는 것이다.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문제 패턴을 깨뜨려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다. 패턴을 깨뜨리고 싶다면 인류학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라는 인간이 가진 문제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말이다. 각별히 주의해 자신이 가진 문제를 명확히 관찰하고 철저히 연구하자. 해석과 이론은 잠시 잊고 있는 그대로 상황을 기술하자. 또한 상황이 ‘왜’ 그러한가를 따지지 말고 상황의 ‘무엇’과 ‘어떻게’에 더 집중해야 한다. [방법 1 - 문제 대응 방식을 바꿔라] 우울증을 겪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 만약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 패턴은 다음과 같다. 아마 처음에는 그저 되도록 오래 침대에만 누워 있을 것이다. 어쩌다 침대에서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집 안 어느 한 곳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도 가급적이면 피할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의 흔적이나 잘못을 골돌히 생각하며 혼자 보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교류를 해야 한다면 두세 명만 제한적으로 만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결국에는 내가 얼마나 우울한지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다. 끝으로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면서 더 초라해진 기분을 느끼고 말 것이다. 이런 우울증을 확실하게 낫게 할 한 가지 방법은 그 패턴을 깨뜨리는 것이다. 즉 우울증을 겪으면서 행동했던 방식 중 어떤 한 부분을 중단하고, 패턴을 깨뜨려줄 다른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불안증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해볼 수 있다. 한편 패턴에 새로운 것을 접목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때때로 문제를 깨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제프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 중 무언가에 신경이 쓰이면 그것을 오래오래 골똘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깊게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불안해했다. 문제는 불안감이 그가 혐오하는 감정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제프는 그런 감정을 피하려 술을 마셨고, 여자친구나 부모님, 직장 동료처럼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해결중심 요법 전문가인 치료사는 제프와 함께 패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내 둘은 패턴을 중단시킬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우선 제프가 무언가를 골돌히 되새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즉시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또 불안감이 느껴질 때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운동을 하러 가기로 다짐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 더 이상 술을 마시고 공황장애를 겪는 문제 패턴의 마지막 단계까지 가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문제 패턴을 바꾼 것이다. [방법 2 - 역설적인 방법을 사용하라] 오스트리아의 한 고등학교에서 연극을 공연하기로 했다. 등장인물 중 하나는 말더듬이였는데, 마침 그 학교에 말더듬이가 있어서 연극 단원들은 그에게 해당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연극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극 연습 중에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말 더듬는 장면을 연기할 때면 소년은 말을 더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소년은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게 대사를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랭클린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의 환자들에게 적용해보기로 했다. 그는 불안 발작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에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떠올리고 실제 상황인 것처럼 느껴보라고 지시했다. 환자들은 애써 불안감을 떠올리려 했지만, 예상대로 대다수가 앞의 이야기 속 소년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프랭클린의 방법은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는데 문제가 풀리게 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해답은 사람들이 자연적인 일을 억제하려 할수록 반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자연스러운 과정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결국에 일은 예정된 상황으로 흘러가게 된다. 따라서 해결책은 문제를 풀어내려고 애쓰는 것을 멈추거나, 상황을 악화시키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대신,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방법 3 - 새로운 행동을 문제 패턴에 접목하라] 거식증에서 회복 중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체중이 더 줄지 않기를 원하지만, 종일 식사 대신 물을 마시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물을 계속 마시기 때문에 배가 고프다고 느끼지 않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식사 시간을 잊어버렸고, 자꾸만 살이 빠졌다. 이에 그녀는 해결중심 요법 전문가인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식사 문제에 물을 마시는 습관을 접목하기로 결심했다. 물 한 컵을 마실 때마다 약간의 크래커와 치즈를 먹기로 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그녀는 점차 먹는 습관을 들여갔으며, 체중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문제 패턴을 깨뜨리기 원한다면, 부담스럽거나 하기 힘든 일을 찾아내라. 그리고 그 일을 문제행동을 할 때마다 함께 행하라. 2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을 바꾸자 당신의 과거와 감정을 인정하라 정신과 의사들은 종종 우리에게 “감정에 솔직해져라.”라거나 “감정대로 하라.”라고 조언한다. 나 역시 일단은 당신의 감정을 인정하라고 말하겠다. 다음에 할 일은 그 감정대로 행동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참고로 해결중심 요법은 오직 현재와 미래에만 집중한다.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해결중심 요법이 현재와 미래의 행동과 관점을 변화시키는 일에 중점을 둔다고 해서, 과거와 감정을 다스리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과거와 감정을 바라볼 때 적절한 관점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방법 1 - 자신의 경험과 감정, 자아를 인정하라] 해결중심 요법은 삶의 여러 요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이러한 인정은 엄청난 힘을 지닌다. 몇 년 전 정신과 전문의 칼 로저스 박사는 이 강력한 원리에 기반한 치료법을 개발했다. 로저스의 간단한 절차를 따름으로써 장기간의 치료에서 해방될 수 있다. 먼저 당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당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인정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다. 문제를 없애려 하거나 숨기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대신 그저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이 원리를 잘 보여주는 정신치료계의 명언이 있다. 원하는 자리에 도달하려면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있는 자리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한다면, 원하는 자리로 나아가기가 어려워진다. 당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빚어지는 또 다른 결과는 감정이나 기억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감정과 기억을 거부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끌어안고 있으면, 일시적으로 끝날 수 있었던 문제가 지속된다. [방법 2 - 타인의 감성과 관점을 인정하라] “지금 당신이 내 말을 안 듣고 있잖아.” 이 말은 커플상담 치료를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다. 이것은 인정의 힘이 가진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바로 타인의 경험과 그들 자신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는 일이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문제는 ‘누가 옳고 누가 틀리나 게임’을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실제로 커플들은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함께 풀어나가려고 힘쓰는 대신에,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이런 문제를 피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개인적 진리와 일반적 사실을 구분하는 것이다. 개인적 진리란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이 경험한 것과 스스로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나 행동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해 알 수 없다. 따라서 나의 경험상, 문제를 발생하지 않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다른 이가 가진 개인적 진리에 대해서는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 사실은 다른 문제다. 일반적인 사실은 관찰에 기초를 둔다. 사람의 시각, 미각, 후각, 청각, 그리고 촉각을 사용해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이 점에서는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져볼 수 있다. [방법 3 -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게 하지 마라] 실제로 과거라는 배경은 현재의 당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과거가 당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지언정, 지금 당신의 행동을 결정짓도록 놔두지 말라는 것이다. 내 지인인 스티브 월린이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 받는 가족과 아이들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 의사다. 어느 날 한 소년이 여자 친구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 소년은 매우 비정상적인 양육 환경에서 자랐는데, 그의 부모는 마약과 술에 취해 있어서 4명의 자녀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다행히 소년의 여자 친구 부모가 상황을 알고 그를 품어주기로 결정해서 현재 소년은 여자 친구 집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스티브가 소년에게 그렇게 훌륭한 부모를 둔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말하자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고 한다. 행운이 아니라 자신을 돌봐줄 만한 부모를 둔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만남을 거듭한 끝에 지금의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소년은 아직 집에 남아 있는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 방과 후에 일까지 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어린 소년이 이런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그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다른 아이들의 양상을 연구해보니, 그 소년과 같은 적응력을 보이는 사례를 꽤 많이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렇다. ‘과거에 있었던 상처와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당신의 미래를 좌우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해결중심적 스토리로 바꾸자 어린 시절 나는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다. 이러한 성격으로 여러 절망적인 경험도 했다.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으며, 마음에 드는 여학생과 데이트를 할 수도 없었고, 발표할 때도 또렷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나는 늘 외롭게 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고서 나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 책은 내가 수줍음이 많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저 ‘수줍어하는 것’을 배웠을 뿐이었다. 이런 개념은 내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줍어하는 행동을 학습한 것뿐이라면 ‘수줍어하지 않는’ 행동도 학습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그동안 생각해온 나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전혀 다르게 행동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수줍음을 탄다는 말을 들었고 가족들도 그렇게 평가했지만, 그것은 그저 하나의 지어낸 스토리일 뿐이었다. 지금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수백 명 내지 때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워크숍에서 강연을 한다. 이는 나에 대해 지어낸 스토리에 수년 동안 도전한 결과다. 당신 역시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당신 자신에 대한 거짓된 스토리를 만들어왔다. 물론 “나는 체계적인 사람이야.”라든가 “나는 아이들을 잘 돌보는 것을 타고났어.” 같은 스토리는 삶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니까 괜찮다. 하지만 몇몇 이야기들은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으며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또한 당신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용하지 않은 신념을 극복하는 것이 관점을 바꾸는 또 다른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나는 이 방법을 ‘해결중심적인 라이프 스토리 만들기’라고 부르겠다. 당신에 관한 어떤 스토리나 생각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거나, 계속해서 똑같은 일만 반복하게 만드는가? 여기 변화를 방해하는 4가지 유형의 문제중심적 스토리가 있다. [유형 1 - 비난 스토리] 이 유형은 어떤 일이건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단정 짓거나, 그 사람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로 당신은 지금 내가 당신을 통제하려 들거나 이기적으로 굴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문제를 푸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이의 협력을 받는 것을 어렵게 할 뿐이다. [유형 2 - 불가능 스토리] 인류 역사에서 진보는 대부분 불가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60년대에 개 몇 마리를 대상으로 실험이 행해졌다. 먼저 바닥이 철망으로 만들어진 우리에 개들을 가뒀다. 우리는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중간에는 개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구멍이 뚫린 장벽이 있었다. 실험이 시작되면 한쪽 칸에 약간의 전기 충격을 가한다. 당연히 개들은 빠르게 움직여 다른 칸으로 이동한다. 그 뒤 이번에는 양쪽 칸 모두에 전기 충격을 가한다. 얼마간 개들은 전기 충격을 피할 요량으로 이쪽 칸에서 저쪽 칸으로 이리저리 움직여댄다. 하지만 어느 자리로 옮겨도 전기 충격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개들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서 노력하기를 멈춘다. 개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실험자는 한쪽 칸에 가하던 전기 충격을 멈춘다. 그리고 개들이 다른 칸으로 도망치면 전기 충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언제쯤 발견하게 되는지 살펴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개들은 절대로 다른 칸으로 도망쳐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왜 번거롭게 애쓰겠는가? 이것이 바로 불가능 스토리다. 만약 당신이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내가 ‘대부분’의 개들이라고 쓴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실제로 그중 아주 소수는 전기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이들은 탈출이 불가능해 보여도 노력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성공한다. 실험자는 사람을 대상으로도 같은 실험을 실행했다. 물론 철장으로 이루어진 우리에 사람을 가두고 전기 충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태도와 해명을 측정하는 실험을 시행한 것뿐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 어떤 사람들이 ‘불가능’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철장 속에서 좌절한 개처럼 사고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상황을 바꿀 힘이 없으며 문제 상황이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지속될 거라고 믿었다. 이런 관점은 곧 자성예언으로 바뀐다. 불행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더 많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유형 3 - 무가치 스토리] 우리는 때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감정, 사상, 또는 자아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반면 우리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지나치게 예민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대상이 어리석거나 그릇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반복해서 다투기만 하는 부부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남편은 그의 전용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을 몹시 사랑했다. 하지만 부인은 비행기 조종은 어리석고 위험한 취미이며 돈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그들은 매번 같은 말다툼을 반복했다. 다툼의 순서는 이렇다. 먼저 일요일 오후 즈음이면 남편은 일상적으로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 후 드라이브를 하러 나가겠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는 비행장으로 슬쩍 나가버린다. 부인은 의심스러워하며 비행장으로 나가본다. 그러고는 남편이 자신을 속인 데다 바보 같은 취미 생활에 또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 착륙하길 기다리다가, 남편과 마주친다. 부인은 남편의 취미가 쓸데없고 멍청한 짓이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고, 다툴 때도 이 주장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양쪽에게 상처가 되는 행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위의 예시 속 남편은 그의 아내를 속였다는 점에서 확실히 잘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욕구와 이익이란 관점에서 봤을 때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각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 문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삶의 방식이 어떤 점에서 틀렸다고 주장할 때 발생한다. [유형 4 - 무책임 스토리] 오늘날 우리는 아주 쉽게 자신이 벌인 일에 책임이 없다고 믿어버린다. 미디어가 갖가지 변명거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전학을 통해 우리가 그저 이런 식으로 태어났을 뿐이며,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는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탓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었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스토리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권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는 행동할 때 정해진다. [문제적 스토리를 해결 스토리로 바꾸는 방법] 다행히도 우리는 문제적 스토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얼마든지 이에 도전해 바꿀 수 있다. 나는 상담 업무를 하던 중에, 자신의 문제적 스토리를 극복하고 해결중심적이고 유용한 스토리를 새롭게 만들어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인정하고 사실만 서술하라: 스토리를 바꾸는 하나의 방법은 일반적인 서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서술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너무 우울해. 내 우울증은 절대 나아지지 않을 거야.”라는 표현 대신에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아라. “나는 지금 피곤하고 기력도 없어. 이런 상태가 더 나아지지도 않을 것 같아.”라는 식으로 말이다. 때로는 이렇게 우리 경험을 관찰하고 인정하는 것이 틀에 박힌 낡은 해석 방식과 문제적 스토리에서 벗어나는 출구가 되기도 한다. 반대 증거를 찾고 없다면 만들어라: 문제적 스토리는 그 패턴에 들어맞지 않는 당신 삶의 증거를 찾으면 약화된다. 또 직접적으로 그 스토리에 도전하는 방식을 쓸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내 경우를 살펴보자. 나는 ‘수줍음 타는 소년’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스토리에 걸맞지 않게 행동했다. 그 결과 점점 그 스토리를 믿지 않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 자신이 곧 당신의 스토리는 아님을 알자: 사람들은 종종 자기 문제를 너무 잘 파악한 나머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간혹 다른 사람들이 이 과정을 더 강화해주기도 한다. 예로 치료사들과 의사들은 자신들의 내담자나 환자를 일컬을 때 자주 약칭을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저는 여러 명의 우울증 환자를 다뤄봤어요.” 혹은 “저는 당뇨병 치료 전문가입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약칭들이 하나의 스토리가 되어 그 환자에게 달라붙은 채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꼬리표가 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우울증 환자나 당뇨병 환자로만 정확히 딱 분류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인 동시에 선생님이며 아버지일 수 있고, 남동생이거나 정비공, 의사, 어부일 수도 있다. 또는 멋지고 재미있는 어떤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더 유용한 스토리를 만들어라: 나의 동료 치료사는 상담하러 온 첫날에 내내 울음을 멈추지 않는 여성을 만났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 여성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여성은 흐느껴 울다 숨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의 말(馬)이 죽었답니다.” 당황한 치료사가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래요. 그 애는 2년 전에 죽었어요. 그리고 저는 아직도 말의 죽음이 몹시 슬퍼요. 하지만 남편은 이런 저에게 이제 그만 슬퍼해야 한다고 말하죠. 친구들도 그래요. 제 주치의는 불안정한 상태를 가라앉히려면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권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도 저는 여전히 슬프고 고통스러워요.” 그녀의 설명에 내 동료 치료사가 물었다. “대체 누가 부인의 슬픔이 2년짜리라는 규칙을 만든 거죠? 부인은 비통한 기분이 드는 한 언제까지라도 슬퍼할 수 있어요.” 여자는 울음을 멈추었다. “제가 계속 슬퍼해도 괜찮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혹시 그 애의 사진을 보여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내 동료가 대답했고 그들은 사진을 보며 남은 상담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여자는 자신의 말을 추억하며 서로 특별했던 관계를 떠올리고는 눈물 몇 방울을 흘렸다. 하지만 상담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랬듯이 격렬하게 흐느끼지는 않았다. 상담 후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에게는 말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있으며, 필요한 만큼 슬퍼할 것이라고 알렸다. 그 후부터 그녀는 전보다 훨씬 덜 울게 되었고, 때때로 말의 죽음에 대해서도 평온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당신 자신과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당신이 당뇨병을 앓고 있거나 우울증 증세를 겪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힘들어한다면, 이러한 행동은 당신이 처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3부 해결중심 요법을 인생에 적용하자 행동 대화법을 사용하라 [상대의 문제를 분석하려 하지 마라]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러한 분석은 보통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의 결론으로 매듭지어지며, 이는 대개 상호비난, 비판, 오해의 굴레만 일으킬 뿐이다. 분석은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주고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하거나 잃어버린 친밀감을 되살려주지 못하며, 둘 사이의 만성적인 논쟁도 해소해주지 않는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어느 행성에서 왔는지를 밝히는 것은 이곳 지구에서 항상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해결중심 요법은 이전 치료법들과는 다르다. 당신은 해결중심 요법을 당신의 연애, 성관계, 가족관계, 직장생활, 사업 그리고 친구들에게 두루 적용할 수 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라] 24년간 결혼 상담을 해온 내가 현장에서 목격해온 바를 토대로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결혼생활과 연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화는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잠시 멈추어 상대방의 감정과 관점을 인정해주면 된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그가 옳았다고 인정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당신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으며, 묵살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된다. 아무튼 인정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중하게 들어주는 것은 타인과 성공적인 관계를 맺는 첫 번째 단계다. 다음 단계는 우리 자신을 상대방에게 맞추고, 상대방을 향한 행동을 바꾸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상대의 행동을 직접 묘사하는 행동 대화법]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직장 상사가 “당신은 제멋대로야. 난 당신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사고방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고야!”라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당신은 충격을 받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사가 말한 대로 사고방식을 고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사고방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직장 동료나 친구들에게 불평을 하거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직장 상사가 얼마나 부당하고 자신의 직장이 얼마나 끔찍한지 토로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상사가 “출근 시간은 오전 9시인데, 자네는 최근 며칠간 9시 반에 출근했어. 다음 달부터 하루라도 9시 5분 이후에 출근한다면 난 당신을 해고하겠어.”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상황이 상당히 달라진다. 물론 그 상사가 하는 말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직장생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게 된다. 이렇듯 행동 대화법을 사용하면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불만스러워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꿀지 서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행동 대화법이란 상대방이 행동한 것,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전부 설명해주는 대화법이다. 이 대화법은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2가지의 전형적인 의사소통 문제인 비난과 모호성을 피하게 해준다. [행동 대화법으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라] 행동 대화법이라는 해결 열쇠를 배우자. 가족, 친구 혹은 직장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세부 요소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불만 말하기: 행동 대화법의 첫걸음은 상대방의 어떠한 행동에 대해 당신이 불만을 느끼는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내적 자질이나 그런 행동을 한 이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행동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요구사항 말하기: 다음은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주기를 바라는지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나는 당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요구사항을 말할 때는 원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 혹은 얼마나 자주 그러한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랑 외식을 더 자주 했으면 좋겠어.”보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나랑 외식을 해주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편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칭찬하기: 상대방이 과거에 했던 행동에 대해 당신이 고마워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쓰면 과거 혹은 현재의 당신이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는 행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점심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어서 좋았어요. 당신이 혼자 있을 때도 나를 생각하고 있다고 느껴서 사랑 받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라고 말하면 된다. [틀에 박힌 관계의 패턴을 바꿔라] 몇 년 전 나는 『결혼생활의 신기루』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관계의 새로운 본질을 포착하고 ‘10피트(약 3m)짜리 막대기’라고 부르는 관계 패턴을 논했다.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행동이나 언어를 통해 “나는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고 당신이 더 많이 헌신해주길 원해.”라는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면, 상대방은 물러서며 “나는 나만의 공간이 더 많이 필요해. 부담스럽고 무언가 쫓기는 기분이야.”라는 뜻을 몸짓이나 말로써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대화를 객관적으로 보면, 서로 상대방의 그러한 반응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10피트짜리 막대기가 있어서 한 사람이 도망가려 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러한 패턴이 굳어져서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관계라는 시스템의 본질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하게 독립적이지 않으며, 주변과 연결되어 서로 반응하는 존재다. 이런 시스템의 좋은 점은 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적으로 한 사람 탓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만이라도 다르게 행동한다면, 새로운 시스템이나 패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의견 충돌이 있을 때 목소리부터 커지는 버릇이 있다면 한번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보아라.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아라. 상대방이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나의 조언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하면, 배우자, 친구, 직장 동료, 부모를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다르게 행동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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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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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대화법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대화법 윤치영 지음 시그널북스 / 2013년 6월 / 258쪽 / 13,000원 ▣ 저자 윤치영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외래교수. 화술경영학 박사. 자기계발 및 동기부여, 스피치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로 활동. 윤치영스…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대화법 윤치영 지음 시그널북스 / 2013년 6월 / 258쪽 / 13,000원 ▣ 저자 윤치영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외래교수. 화술경영학 박사. 자기계발 및 동기부여, 스피치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로 활동. 윤치영스피치아카데미 대표 교수. 대전대학교 무역통상학과에서 소호창업과 마케팅 강의,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인천광역시 행정혁신 전문위원으로 활동. 호서대학교 경영대학원, 한밭대학교 산업대학원 외래교수. 배재대학교 컨설팅대학원 겸임교수. 저서로는 『당신도 화술의 달인이 될 수 있다』, 『프레젠테이션기법』, 『성공화술백서』, 『고급 화술 123』, 『삼색습관혁명』, 『업그레이드 인생』, 『나를 1등으로 만드는 스피치의 힘』 등 스피치와 성공학에 관한 30권이 있다. ‘삼성, 금호, SK, 현대, KT 등 기업체연수원’과 ‘중앙공무원교육원’ 등에 3,000여 회 출강했으며 KBS, SBS, MBC 등 TV와 라디오에도 다수 출연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언어만으로도 정신적 건강은 물론, 육체적으로 막혀 있는 곳까지 뚫어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NLP(신경언어 프로그램)의 차원에서 봤을 때, 언어는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곧 마음을 만든다. 언어는 곧 마음의 구성 요소이다.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생각은 신체, 면역 체계,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그 말대로 어떤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고 한다. 틀림없이 말에는 힘이 있다. 말은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금언에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만 번 이상 반복하면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는 말이 있다. 말의 각인력이 우리의 뇌를 지배하고 말의 견인력이 우리의 삶을 끌고 가는 것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말의 치유력이다. 누군가 자신의 입장이 돼서 자기 말을 들어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또한 자신의 분노나 증오, 억울함 등을 토로하면서 어느덧 자기 자신에게도 옳지 못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와 함께 자책감, 죄책감, 자신의 결점, 수치, 실패 등 그 밖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진솔하게 얘기한다. 이 진솔한 대화를 통한 공감이야말로 자기를 치유하는 힘이다. 이처럼 말은 우리의 삶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현대인들에겐 변화무쌍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로 말미암아 많은 스트레스와 집착하는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 때문에 소통과 힐링이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국민 소통, 세대 간의 소통 등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소통’이다. 소통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일 것이다. 이 단어는 ‘함께’라는 의미의 Comm과 ‘하나’라는 뜻을 가진 Uni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함께 하고 하나가 되자’는 뜻이다. 한자로 소통(疏通)은 ‘트일 소(疏)’, ‘통할 통(通)’ 자로 이루어진 말이다. 탁 트인 마음으로 물이 흐르듯이 서로의 마음이 흐르도록 하자는 뜻이다. 마음을 열고 자신의 정서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 교감해야 한다. 그것이 소통의 진정한 뜻이다. 또한 소통이라는 말의 뜻 가운데는 ‘공감’이라는 것이 있다. 공감(共感)은 ‘함께 느낀다’는 말이다. 소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려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애정과 관심을 갖고 느껴야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즐거움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소통의 즐거움이다. 물론 소통에도 좋은 소통, 남을 배려하는 소통이 즐거움을 준다. 공감하지 않는 소통은 가치가 없다. 어떻게 소통하느냐보다 어떻게 공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남들과의 관계에서 공감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소통은 관계지만 공감은 사랑이다. 사랑이 있어야 공감이 이루어진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지는 말 그리고 스스로 내적 치유와 건강한 원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힐링’을 할 수 있는 말을 제시하고 있다. ▣ 차례 제1장 삶을 디자인하는 말 왜 말이 중요한가 / 효과적으로 말을 선택하라 / 한 마디 말이 인생을 바꾼다 / 말이 곧 비즈니스다 말이 곧 삶의 방식이며 모습이다 / 자신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하라 / 왜 말을 잘해야 하지? 언어 습관이 사고 습관을 갖게 한다 / 언어 습관이 인간관계를 넓고 깊게 한다 말은 아낄수록 손해 볼 거 없다 / 순화된 언어를 평소 사용한다 /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말 어려움을 함께할 말벗 셋을 얻어라 /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 닫힌 말보다는 열린 말로 다가선다 /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자기 메시지 느낌표, 물음표, 쉼표 / 사랑과 배려가 담긴 리더의 스피치 제2장 말에는 감정이 있다 언어 능력이 풍부해야 감정을 다스린다 / 자존심을 내세워 감정을 나타내지 마라 부정적 감정, 부정적 마인드에서 탈바꿈 / 인간의 감정은 언어 능력을 키운다 감성 지능을 살려 열정지수를 높이자 / 감성 습관을 길러 말에도 감성을 깃들인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투를 배워라 / 수다는 마음의 보약이다 말이 주는 힘, 힐링의 원천이다 / 자기 최면으로 긍정의 힘을 키우자 모든 것이 좋아진다는 자기 개방과 자기 암시의 효과를 믿자 제3장 두려움과 열등감을 극복하라 발표 불안을 극복하라 / 발표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 발상을 180도로 바꿔라 불안증을 어떻게 극복할까 / 스피치를 잘하는 요령이 있다면 확신과 자신에 찬 말로 상대를 위로하라 / 어떻게 말해야 상대의 호응을 얻을까 자기 단점의 노출로 홀가분하게 상대를 대하라 / 자존감을 높여 자아 개념을 성숙시켜라 열등감은 자기가 만든다 제4장 꿈과 감동을 주는 대화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대화 기술이란 / 가까울수록 조심할 일곱 가지 말 빛나는 말, 어루만져주는 말 / 대화 도중 욕설을 섞지 마라 인격의 잣대를 결정짓는 존댓말과 반말 / 상대의 장점을 말해 다독여준다 행복과 성공을 약속하는 행운의 말 / 처음 만나면 어떻게 대화를 풀까 제5장 말은 인생을 푸는 열쇠다 어린아이처럼 살아라 / 용서하지 못하는 것 세 가지 / 한계를 깨야 한없이 높은 곳을 향한다 티핑 포인트를 찾아 한계의 벽을 뛰어넘어라 / 셀프 이미지와 자동 성공 메커니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대화법 윤치영 지음 시그널북스 / 2013년 6월 / 258쪽 / 13,000원 삶을 디자인하는 말 왜 말이 중요한가 말에는 4력(四力), 즉 네 가지 힘이 있다. 각인력, 견인력, 성취력, 파괴력이 그것이다. 첫째, 머릿속에 새겨지는 각인력이다. 어느 뇌 과학자는 뇌 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매일 5분씩 다음과 같이 세 번을 외쳤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내부에 위대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발휘되지 않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을 되풀이해서 같은 말을 하다 보니 그는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자신감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둘째, 잡아끄는 견인력이다. 말은 행동을 유발하는 힘을 가졌다. 말을 하면 뇌에 각인되고, 뇌는 척추를 지배하고, 척추는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이 뇌에 전달되어 내 행동을 이끌게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 할 수 있게 되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면 할 수 없게 된다.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 셋째는 무엇인가를 이루는 성취력이다. 어느 청년이 저명한 경영학자 노만 빈센트 필 박사를 찾아왔다. “박사님, 어떻게 하면 세일즈를 잘할 수 있을까요?” 필 박사는 조그만 카드 한 장을 내주며 자기가 하는 말을 받아쓰도록 했다. “나는 훌륭한 세일즈맨이다. 나는 세일즈 전문가다. 나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프로다. 나는 내가 만나는 고객을 나의 친구로 만든다. 나는 즉시 행동한다.” 필 박사는 그 카드를 갖고 다니면서 주문을 외우듯이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했다. 청년은 곧 실행에 옮겼고, 얼마 가지 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말이 그 청년을 유능한 세일즈맨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넷째, 무엇인가 망가뜨리는 파괴력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한다. 인생을 되는 대로 그럭저럭 살면서 ‘힘들다’, ‘그만둬야겠다’, ‘미치겠다’, ‘적성에 안 맞는다’와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시시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듣고 자랐으며, 무슨 말을 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말이 곧 삶의 방식이며 모습이다 ‘말’을 길게 발음하면 ‘마알’이다. 즉 ‘말의 알갱이’라는 뜻이다. 말의 알갱이는 무엇인가? 바로 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며 거기엔 행동이 뒤따른다. 얼굴은 고운데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 그 사람의 얼굴도 흉하게 보인다.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질서정연하게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한다. 하지만 그것이 뒤에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는 아무리 말을 잘했어도 신뢰를 잃어 이중인격자가 되기 쉽다.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무심코 불쑥 내던진 한 마디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부부간이나 고부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밖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집으로 가져와 말을 함부로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좋은 말, 착한 말을 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더욱이 홧김에 내던지는 생각 없는 한 마디가 큰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로의 대화에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경청은 고상한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말은 습관성이 강해서 버릇이 된다. 그것이 말버릇이다. 품위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늘 품위 없는 말을 하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기 혼자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남을 헐뜯는 사람은 언제나 변함없이 헐뜯는다. 내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남의 말을 더 많이 듣는 경청은 자신의 말실수를 크게 줄일 수 있으며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높일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말 사랑을 하다 보면 상대방을 구속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오랫동안 사귀어 온 연인일수록 상대방의 개인 생활이나 개인적인 여유를 주지 않으려 한다. 이는 상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그릇된 행동이다. 여자는 여자만의 공간이 필요하고 남자는 남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각자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자유를 주고 뒤에서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공적인 남녀 관계를 살펴보면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의 자유를 박탈하려고 하면, 본의 아니게 상대를 속이는 경우도 있고, 의심이 커져 불신하기 쉽다. 결국은 거부감 같은 감정 대립만 불러일으키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프라이버시를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아무리 허물없는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상호 간의 신뢰와 존경이 형성된다. 사랑과 배려가 담긴 리더의 스피치 요즘 힐링, 즉 치유가 유행이다. 우리 몸 치유력의 실체는 생각과 말이다. 우리 몸에는 많은 기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으며 그러한 신체 활동을 총괄하는 것은 뇌이다. 예컨대, 몹시 화를 내면 뇌가 그 화를 우리 신체의 관련 기관에 전달해서 화에 속한 세포가 생성된다. 기쁨에 가득차면 기쁨에 속한 세포가 생성된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하게 하고 의롭게 하면 우리 몸은 자연히 치유력을 갖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방치하고 홀대하면서 방탕과 중독에 빠지면 뇌가 컨트롤 능력을 잃고 정상적인 모든 작용을 무너뜨린다. 그럴수록 자신의 뇌에 강력하게 말해야 한다. “미안하다. 용서해라, 나는 이제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다.” 주문처럼 수없이 그렇게 다짐하면 뇌는 그와 관련된 세포들을 만들어내 정말 그렇게 된다. 생명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대화도 그렇다. 자신이 말 잘하는 사람인 듯 번지르르하게 포장은 하지만 알맹이 없는 말, 자기변명만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난 당신들과 달라.” 하는 말투로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오만하고 교만한 대화는 절대 금물이다. 그러다 보면 뇌의 작용으로 그 사람은 결국 위선적이고 교만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말 잘하는 사람은 자신감과 리더십이 넘치는 스피치를 하고, 사랑과 배려가 담겨 있으며 결단력과 공감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우리 사회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스피치는 어때야 할까? 첫째, 나약한 말투를 쓰지 마라. 자신에게 긍정적인 언어를 써야 호소력이 있고 공감력이 있다. 둘째, 비판을 삼가고 칭찬이나 지혜로운 동조 기술을 갖춰라. 실력을 지녔더라도 독설가가 되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청중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동조하고 되도록 비판적인 말을 삼가고 칭찬을 많이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셋째,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마라. 불필요한 말은 자칫하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구설수를 만들 수 있다. 넷째, 상대의 말이 틀렸더라도 일단 긍정하고 자기 의견을 덧붙여라. 스피치든 대화든 그 시작은 항상 긍정적인 것이 좋다. 상대가 틀린 말을 하더라도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무조건 첫마디가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나오면 상대는 긴장하고 더욱 반대할 이유를 찾는다. 다섯째,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말하라. 여러 사람의 얘기를 들을 때는 그 가운데 항상 삐딱한 사람이 끼어 있어서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하고,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스피치를 망친다. 불쾌하고 화가 나더라도 감정적인 대응은 피해야 한다. 그럴수록 더욱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말해야 청중이 스피치에 몰입한다. 여섯째, 항상 운이 좋았다고 말하라.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일하는 것도 그렇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기쁘게 일하면 정말 운이 굴러오기도 한다. 그것은 삶의 긍정이다. 긍정적인 대화가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준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운이 좋은 것이 아닌가. 말에는 감정이 있다 자존심을 내세워 감정을 나타내지 마라 인간의 특성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존심이다. 자존심은 곧 자신의 정체성, 자존감, 자신의 가치 등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존심을 상하면 굴욕으로 여기고 분노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가 잘못했으면서도 변명을 늘어놓고, 엉뚱한 소리를 하며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모두 자존심 상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한다. 자존심과 인정은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인정을 받으면 자존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자존심이 손상을 받게 되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얕보는 것 같아 화를 내는 것이다. 결국 자존심, 인정, 체면은 서로 비슷한 것인데 문제는 그것을 지나치게 내세울 때 발생한다. 남이야 어찌되든 자존심을 내세우려 하고, 인정받기 위해 과장하고, 체면을 세우기 위해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을 한다. 때로는 겸손, 배려, 용서와 같은 긍정적인 심성도 자존심과 체면을 상하는 일로 착각하고, 능력도 없으면서 인정해 주지 않으면 분개한다. 아무튼 이러한 자존심, 체면, 인정은 자신이 말로 아무리 주장해봤자 소용없다. 남들이 알아줘야 하고, 자존심이나 체면에 걸맞게 올바른 일, 당당한 일, 칭찬받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남을 무시하기도 하고, 좋았던 인간관계를 무너뜨린다. 또한 자존심 때문에 거짓된 행동, 거짓된 감정 표현을 하기도 한다. 자신을 낮추거나 남을 배려하는 것을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으로 착각한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존심 때문에 감정 표현을 못하거나 감정을 감추지 말라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감정을 거짓으로 표현하면 오해가 생기기 쉽다. 어린아이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울음을 참고 안 아픈 척하는 것은 아프다며 울음을 터뜨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만,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애써 참는 것이다. 우리도 대화의 과정에서 그와 같이 감정을 억누르고 참아야 할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거짓으로 표현하지 말라는 것이다. 속으로는 큰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까짓 것에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해.”라고 말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이다. 대화를 할 때 누구나 자기 위주로 말하지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는 솔직해져야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자존심보다 솔직함과 정직이 우선이다. 대화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잘못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다면 정중하게 용서를 빌어라.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거짓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인간관계에서 훨씬 효과적이다. 겸손한 말, 정직하고 솔직한 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말,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는 이해심이 말에서 배어나오면 상대방도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진다. 대화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면 소통은 단절된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투를 배워라 마치 조직 폭력배나 밑바닥의 막가는 인생처럼 거친 말,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말은 그야말로 인격이다. 천한 말을 하는 사람은 천하고, 무식한 사람은 무식한 말을 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말만 하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말투가 거칠거나 저속하다면 고쳐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떨어뜨리고 신뢰감을 빼앗는 일이다. 말이란 일정한 수준을 갖춰야 하고, 부드럽고 긍정적이며 자연스러워야 한다. 물론 언제나 평상심을 유지해야 부드럽고 긍정적인 말이 나오는 법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요즘 어떠십니까?” 하는 평범한 인사를 받았다고 하자. 그에 대한 대답은 긍정형, 평범형, 부정형에 따라 차이가 있다. 부정형은 입버릇처럼 “요즘 별로예요.”, “죽을 지경이에요.”, “제가 뭐, 좋을 때가 있습니까?”, “묻지 마세요, 죽지 못해 삽니다.” 등등으로 대답한다. 평범형은 “그저 그렇죠.”, “그저 견딜 만합니다.”, “대충 돌아갑니다.”, “그냥 먹고살죠.”라고 대답하고, 긍정형은 “아, 좋습니다.”, “괜찮게 돌아갑니다.”, “네, 요즘 기분이 좋습니다.”, “요즘은 정말 살맛이 납니다.” 등등 자신 있게 대답한다. 당신은 과연 어떤 유형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 시간과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짜로 주어진다.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듯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다. 자신이 자주 쓰는 말을 분석해 보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다. 필자가 서울 충무로의 어느 김밥 집에서 경험한 일이 있다. 이 집에서 김밥을 먹다가 여느 김밥 집과 다른 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김밥 집 주변에는 기업체들이 많아서 매장에서의 판매보다 배달이 많은 듯했다.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들로 보이는 배달원이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배달하고 돌아오고, 또 배달을 나가는 등 쉴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 김밥 집 주인은 그들이 들어왔다가 다시 배달을 나갈 때마다 “좀 쉬어라.”, “천천히 다녀와.”, “조심해서 다녀와.”. “땀을 흘리는구나. 물 좀 마시고 해.” 등등 일일이 관심을 보이며 격려하는 등 정이 넘치는 따뜻한 말을 해주는 것이었다. 필자는 참 자상한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그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밥의 대가라고 했다. 한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사람이 이렇게 친절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가 흐뭇했다. 배달하는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은 틀림없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할 것이다. 성공하려면 다그치고 명령하고 윽박지르고 재촉하는 것보다 그처럼 따뜻한 말투, 배려가 담긴 말투를 써야 한다. 말투 하나가 전체를 망쳐 놓을 수도 있으며, 잘못 쓴 말투가 씨앗이 되어 상대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말이 주는 힘, 힐링의 원천이다 지방에서 두 사람이 서울에 올라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탔다. 무척 무더운 날이었는데 거리에는 차들이 워낙 혼잡하게 얽혀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운전기사는 무덥기도 하고 차가 꽉 막혀 짜증이 나는지 양보 운전은커녕 교통 신호를 멋대로 무시했고 툭하면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택시 안에는 불쾌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한 사람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서울에서 운전하시기 참 힘드시죠?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운전을 잘하세요? 기사님처럼 운전이 능숙한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승객의 그 말에 운전기사는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런 칭찬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승객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최악의 교통 상황에서 기사님같이 운전을 잘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죠. 참 대단하십니다. 가끔 운전하시다가 지치기라도 하면 어디 가서 쉴 만한 곳이 있습니까?” 승객의 계속되는 칭찬에 운전기사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가끔 강변에 가서 노을도 보고…, 그 근처 가게의 핫도그가 아주 맛있습니다.” 그 뒤로 운전기사는 짜증을 줄이고 난폭 운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혼잡한 도로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며 두 사람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다. 그의 마음도 무척 편안해 보였다.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는지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았다. “자네는 어떻게 그런 불량한 난폭 운전사에게 칭찬을 한단 말인가?” “허허, 난 지금 서울을 변화시켰다네.” “뭐, 서울을 변화시켰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의 칭찬 한 마디에 무엇이 변화했다는 말인가?” “허허, 돈도 들지 않고 힘들 것도 없지 않나? 거기다가 분명 모두 불안감도 사라졌고 기분도 좋아지지 않았는가? 칭찬 한 마디로 난폭 운전자를 순화시켰으니 그만큼 서울이 변화한 거 아닌가?” 꿈과 감동을 주는 대화 가까울수록 조심할 일곱 가지 말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아간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자매, 일가친척 등은 혈연적인 관계로 맺어진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그다음, 지연이 있다. 같은 마을 이웃에서 함께 성장한 사람들, 특히 자기 또래들은 영원한 친구이다. 지연을 넓히면 같은 고장까지 연결되고 타지에서 같은 지연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가깝게 느껴지고 쉽게 친해지기도 한다. 또 학연이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만나 함께 공부한 가까운 친구들이다. 어쩌면 일가친척보다 더 자주, 더 많이 만난 가까운 사람들이다. 혈연은 변함이 없지만, 지연이나 학연은 환경과 여건에 따라 수없이 바뀌기도 하고, 또 헤어지고 잊혀진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지연과 학연을 너무 따진다는 ‘연고주의’가 사회문제가 된다. 그 밖에도 직장, 취미 동호회, 종교 생활 등을 통해 만나는 가까운 사람들이 있고, 남자들은 군대 생활을 함께한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과 항상 가깝게 지내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이라도 아무런 이해상관 없이 자신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대략 150명에서 200명 정도라고 한다. 여러분도 자기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가까운 사람 연락처를 살펴보라. 많아야 100여 명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 친한 사이일수록 비교적 자주 만나며 서로 이해 상관이 없기 때문에 반갑고 편안하다. 또한 서로 허물이 없어서 아무런 조심도 하지 않고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는다. 서로 반말하고 악의 없는 욕설도 서슴지 않고, 서로 놀리고… 그래서 가까운 사이의 대화는 편하다. 하지만 가까울수록, 친할수록 조심해야 할 여섯 가지 말이 있다. 비판적인 말: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마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성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거침없이 말을 한다. 그래서 서로 비판적인 말도 가리지 않는다. 물론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너는 임마, 도대체 시간관념이 없어. 넌 약속시간 지킨 적이 한 번도 없어.”, “넌 도대체 신용이 없어. 툭하면 약속을 어기잖아?”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다. 워낙 가까운 사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없는 데서 비판하거나 자주 비판적인 말을 하면 그것이 뜻하지 않게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대개 부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남에 대해 비판을 잘한다. 특히 업무와 관련해서 매일 함께 생활하는 직장 동료를 은근히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어휴, 그 인간은 너무 까다롭고 괴팍해서 가까이 가기도 싫어.”, “그 자식은 항상 자기만 잘났어.” 등등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비판적인 말은 삼가는 것이 좋다. “인간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 있다. 비판적인 말을 자주 하면 매사를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고, 마침내 자신도 비판을 받는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말: 엄마들이 자주 쓰는 ‘엄친아’라는 말이 있다. 자기 아이를 꾸중할 때 “엄마 친구 아들은…” 하고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말이다.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개는 항상 100점인데 너는 어떻게 만날 70점이냐?” 하는 식으로 엄마가 자꾸 자기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 아이는 그 친구를 싫어하게 될 뿐 아니라 적개심, 반발심까지 갖게 된다. 남편들도 아내에게 듣기 싫은 말이 있다. “아무개 아빠는…”, “옆집 남편은…” 하며 아내가 다른 남편과 비교해서 털어놓는 푸념을 제일 듣기 싫어한다. 차라리 “돈 좀 많이 벌어 와요.”, “아이들한테 관심 좀 가져요.” 하고 푸념하면 괜찮은데, “아무개 아빠는…”, “옆집 남자는…” 하며 다른 남편들은 대단하고 완벽하게 평가하면서 자신을 폄하하면 몹시 화가 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동료와 비교해서 평가하면 몹시 화가 난다. 당연히 그 동료에게 적개심, 반발심을 갖게 된다. 남들과 비교하는 말은 삼가야 한다. 특히 여자를 비교 평가하면 마음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단정적인 말: 우리는 사실, 알게 모르게 단정적인 말을 많이 하고 있다. 특히 화가 나거나 심기가 불편할 때 더욱 단정적인 말을 많이 한다. “그 자식을 절대로 가만둬서는 안 돼.”, “그놈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자식이야.”, “그는 재기불능이야.” 등등 정말 너무 쉽게 단정적인 말을 사용한다. 자기는 몹시 화가 나서 단정적으로 말함으로써 다소 울분이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된다. 우리는 친구 사이에서도 단정적으로 말할 때가 많다. “너하고 이제 끝났어.”, “너하고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어린이들이라면 그런 단정적인 말을 하고도 다시 또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어울리지만 성인으로서는 그야말로 관계를 단절시키는 말이 된다. 친구가 거의 없는 사람,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 부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 가운데 이런 단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 사람을 몰아내고 인간관계를 망쳐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없고 외롭다. 단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조차 없다. 우리는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언제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여 단정적으로 비난하던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정치가나 사업가들은 좀처럼 단정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화자찬: 누구나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그러나 자화자찬이 지나치면 능력이 있더라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의 말에 진실성이나 신뢰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말 자랑할 만하고 인정받을 만한 일을 했더라도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애는 좋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자화자찬이 심해진다. 더욱이 남들이 볼 때 대수롭지 않은 것을 과장해서 자기자랑을 늘어놓고, 여럿이 힘을 합쳐 어떤 성과를 거뒀는데, 마치 자기 혼자 다 한 것처럼 자기 공만 내세우면 다른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는다. 그렇게 자화자찬이 심한 사람이 어떤 일을 추진하며 앞장서면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는다. 또한 일부러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언제나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자랑하는데 “그래, 그러면 어디 너 혼자 해봐.” 하고 협조하지 않는다. 솔직히 자화자찬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화자찬한다고 자신을 더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진정한 실력조차 의심받고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겸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겸손하면 자기자랑을 하지 않더라도 알아줄 사람은 다 알아준다. 험담: 어느 신앙심 깊은 수도사가 젊은 과부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것을 본 마을사람들은 음탕한 수도사라고 그를 비난하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얼마 후, 그 젊은 과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서야 마을사람들은 수도사가 말기 암환자였던 젊은 과부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앞장서서 수도사를 험담했던 두 여인이 그를 찾아가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수도사는 두 여인에게 닭털을 한 봉지씩 나눠주며 들판에 나가서 그것을 바람에 날려버리고 오라고 했다. 두 여인은 시키는 대로 들판에 나가 닭털을 모두 날려버린 뒤 다시 수도사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수도사가 이번에는 그 닭털들을 모조리 주워 오라고 했다. 여인들은 바람에 멀리 제멋대로 날아간 닭털을 어떻게 주워 오냐고 난처해했다. 수도사가 두 여인에게 말했다.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한번 입 밖으로 내놓은 말은 다시 주워 담기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 한번 입 밖에 내놓은 험담은 다시 되돌리기 힘들다. 험담은 한꺼번에 세 사람을 해친다. 욕을 먹는 사람, 욕을 듣는 사람 그리고 험담하는 자기 자신이다. 그 가운데 결과적으로 남을 헐뜯고 흉을 본 자기 자신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것은 자업자득이다. 택시 기사가 공항에서 외국인 두 명을 태웠다. 흑인들이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호텔로 가는 도중, 택시 기사가 휴대폰으로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가 지금 뭐하느냐고 묻자 택시 기사가 말했다. “응, 지금 연탄 두 장 싣고 가는 중이야.” 이윽고 호텔 앞에 도착했다. 요금이 2만 원 나왔는데 흑인이 1천 원만 내는 것이 아닌가? 기사가 미터를 가리키며 2만 원이라고 했다. 그러자 흑인이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연탄 한 장에 5백 원 아닌가요? 연탄 두 장이면 천 원 맞지 않습니까?” 험담은 물론,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그 때문에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불필요한 말: 사람이 항상 꼭 필요한 말만 하기는 어렵지만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하다가 그것이 화근이 되어 구설수에 오른다.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은 불필요한 말도 많다. 또한 원래 말이 많고 혼자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지만 그만큼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게 되어 실수하기 쉽다. 자기가 한 말에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앞에서 얘기한 에피소드처럼 확신이 없는 말이나 착하고 긍정적이지 못한 말, 말할 필요도 없고, 남들이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은 삼가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거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다시 묻는 것이 좋다. 정확한 내용을 알아야 올바른 대화가 이루어진다. 성급한 사람은 상대방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단어 하나만 듣고 말을 가로채고 나서기도 한다. 이는 옳지 못한 행동이다. 상대방의 말은 항상 끝까지 들어야 한다. 말은 인생을 푸는 열쇠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 세 가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내면을 보면, 자기 자신의 삶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통 뒤죽박죽되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고 여긴다. 자신이 평상심을 찾으려면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따라서 용서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은 용서하더라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면 안 되는 것, 자기 자신을 자기가 용서할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소중한 시간을 허송세월로 낭비하거나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일에 매달려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결코 자신이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신에게 분노하고 분발해야 한다. 두 번째는 세상을 재미없어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가며 세상을 통해 공부하고 배우라는 것이다. 학생이 학교 가는 것을 싫어하고 공부를 재미없어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면 원하는 상급 학교로의 진학이 어렵다. 결국은 자기 인생의 진로도 흔들린다. 직장인이 자기 회사를 싫어하고, 직장에 나가기를 싫어하고, 자신이 맡은 업무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처럼 의욕이 없는 사람을 받아 줄 회사는 아무 곳에도 없다. 마침내 실업자가 되어 방황하거나 자신의 인생도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장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으며 결혼해서 가정이 있다면 가정도 파탄날 것이다. 자신이 세상 사는 재미가 없다면 절대로 그런 자신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은 세상의 주인공이며 모든 행위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다. 자기애, 이기심, 개성, 정체성, 자존심 등등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을 사랑할 때, 잘되고자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자기가 자신에게 애착이 없다면 자기 학대, 자해 행위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일어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티핑 포인트를 찾아 한계의 벽을 뛰어넘어라 티핑 포인트: 물컵에 물을 90%쯤 넣고서 나머지 10%를 컵에서 물이 넘치지 않게 천천히 따르다 보면, 컵에 물이 가득 차고 어느 한계에 이른다. 그다음에는 물 한 방울만 더 떨어뜨려도 컵에서 물이 넘치고 만다. 불과 물 한 방울에 컵이 넘치는 것이다. 이 물 한 방울이 가져오는 엄청난 변화, 그것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이다. 티핑 포인트는 원래 물리학 용어이다. 99도의 물은 1도 차이가 나는 100도의 물과 완전히 다르다. 99도에서 1도만 올라가면 액체의 물이 기체 상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균형이 깨지는 극적인 변화의 시작점이 티핑 포인트이다.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면 물질은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 말콤 글래드웰이 쓴 『티핑 포인트』라는 책이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이 용어는 더욱 널리 유행하고 있다. 작은 변화로 예기치 못한 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순간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인다. 누구나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한계점도 그렇다. 어떤 티핑 포인트만 찾아내면 그 한계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있다. 한 순간에 놀랄 만큼 자신을 변화시켜, 비약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엄청난 잠재 능력을 찾아낼 수 있는 계가를 만들어야 한다. 부정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도 그러한 계기만 찾아낸다면 한 순간에 긍정적 마인드로 바꿀 수 있다. 파탈破脫: 우리가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것을 일탈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벗어나 도박이나 마약과 같이 쾌락을 쫓는 일탈은 큰 문제가 되지만, 너무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다. 파탈은 일탈보다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망가진다고 할까? 점잖은 연기자가 요란한 분장을 하고 코미디로 사람을 웃길 때, 흔히 망가졌다고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파탈은 파격적으로 관례나 격식에서 벗어나는 행동 또는 일정한 환경과 구속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자신이 정해 놓은 규범의 한계를 뛰어넘는 튀는 행동일 수도 있다. 나아가서 지금까지 없었던 창의적인 사고나 행동도 파탈이라고 할 수 있다. 파탈은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는 대인관계의 기술이며 자신을 새롭게 향상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한계에 부딪혀 있다고 생각할 때,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느낌이 들 때, 스스로 지금까지 자신이 고수해 온 규범이나 생활 질서에서 한 번쯤 과감하게 벗어나 보면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고, 남들도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졌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평가할 수도 있다. 파탈을 통해, “어허, 당신에게 그런 면이 있었어? 난 정말 놀랐는걸.” 그런 평가를 받는다면 자기 변화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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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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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카드 & 신년 인사
사랑하는 동역자께 이제, 2013년이 아쉬움을 남기고 '저만큼' 저물어 갑니다. 지난 1년 동안, 가장 부족한 저희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교사로 믿고, 기도와 물질로 최선을 다하여 섬겨 주셔서 큰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동역자께 이제, 2013년이 아쉬움을 남기고 '저만큼' 저물어 갑니다. 지난 1년 동안, 가장 부족한 저희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교사로 믿고, 기도와 물질로 최선을 다하여 섬겨 주셔서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였지만, 이리 귀한 동역자들이 계셔서 저희는 너무나도 마음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희망과 사랑이 가득한 성탄을 보내시기를 바라오며, 대망의 2014년 새해에는 바라시는 소망이 주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안식년중인 캐나다 에드몬톤에서, 이경환, 박인선 드립니다. 전화 : 070-7562-0627, 1-780-2334412 홈피 : www.himongol.com (홈피에 방문시 '한마디'라도 응원해 주세요)
17
DE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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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모두가 선교사 되어라
“농도 짙은 크리스천이 되려는가? 선교사가 되어라"라는 명언이 있다. 초대교회 성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증인(순교자란 뜻이란다)이 되는 등식이 통했다. 경건한 집사 스데반을 죽이는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사도 외에 모두 …
“농도 짙은 크리스천이 되려는가? 선교사가 되어라"라는 명언이 있다. 초대교회 성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증인(순교자란 뜻이란다)이 되는 등식이 통했다. 경건한 집사 스데반을 죽이는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사도 외에 모두 유대 전 지역과 멀리 이방에까지 피난 길에 올랐다. 이상한 것은 도망 나온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따리 걸머 쥐고 은밀한 곳에 숨은 것이 아니라 머무는 곳에 교회를 세웠고 방화범(?)이 되어 온 천지에 성령으로 맹렬히 불을 붙였다. 바톤을 이어 받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에는목 죄이는 핍박에 못 이겨 삼 주만에 야간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삼주내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떳떳이 자랑 품으로 내 놓았던 크게 소문난 데살로니가 교회(살전 1:8)를 형성한 것이다. 21일 젖먹이 어린 것이, 그러나 그 복음의 젖이 진기가 있고 생명이 있기에 바울 사도가 목숨까지 그들에게 주고 싶었던(살전 2:8) 보화덩이가 된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젊은 선교단체들의 특성이 있다. 훈련 받은 선배가 같은 또래의 또 다른 젊은 후배를 양육하고 있는 점이다. 훌륭한 목사나 신학 전공한 성직자가 아닌 풋내기들의 줄 이은 양육으로 웅장한 선교집단을 형성해 가고 있음을 본다.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을 얕잡아 보는 악습이 있다. 몇 년 길러야 제대로 된 온전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느릿한 계산이다.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안이한 생각만 거듭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양육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씨 뿌리는 일과 물주는 일을 성실히 하고 있다면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고전 3:6)의 위대한 작품을 믿음과 희망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어느 수준처럼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지금 당장 선교사의 사명을 주어 세상에 과감히 내보내어야 한다. 주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사탄도 서투른 초년병을 기용한다. 음란사이트를 크게 유포시켜 사회를 혼란케 한 대단한(?) 사람들이 놀랍게도 중학생이나 대학생, 컴퓨터 배운지 1년밖에 되지 않았던 새내기들이다. 이들이 사탄 나라에서 유능하게 고용되는 것을 얼마든지 본다. 이 사실에 우리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직을 회복시켜야만 한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단 시간에 그의 말굽아래 넣을 수 있음도 점령당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그 다음 정복할 땅의 점령군으로 군사화시켰다는 것은 깊이 배워야 할 전법이다. 선교사와 지도자는 그 지역의 분봉왕이다. 지역사령관이다.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경고가 있다. 벼락처럼 꽂히는 성령의 검은 출발할 때 날카로워진다. 위기불감증에 걸렸는가. 빨리 보내라. 물론 잘 훈련하라. 부족한 그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그를 끌고 가고 있음을 경험할 것이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 6:8)"란 고백을 크리스천 모두가 골고루 응답하도록 당장 기회를 주어라. 온 세계 크리스천이 서 있는 곳에서 강력한 선교사가 될 때 천국왕국은 건설될 것이다.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담임목사)
17
DE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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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정신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용맹을 춤추며 기뻐했던 여인들의 즉흥 노래 가사였다. 위기에서 벗어난 온 국민의 축제였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임금만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용맹을 춤추며 기뻐했던 여인들의 즉흥 노래 가사였다. 위기에서 벗어난 온 국민의 축제였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임금만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천이고 다윗은 만?" 나라의 첫째인 대왕의 권위가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즉시 다윗을 죽이려는 살인마로 변했다. 반면 바로왕은 일부러 차석으로 내려앉는 지혜를 보였다. 새 총리 요셉에게 "너보다 높은 것은 보좌뿐이다"(창 41:40) 인장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웠다. 최후 결재권을 미련 없이 넘긴 것이다.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창 41:44) 왕의 권위와 통수권을 고스란히 요셉의 것이 되게 했고 자기는 보호막이 되었다. 그의 2등 정신의 너그러움으로 애굽의 살인적인 7년 흉년을 거뜬히 넘길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최고 빠른 일등 발을 가졌다는 우쭐함 때문에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참패를 당한 토끼의 실수와 경험은 반복되기만 한다. 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 앉다가 벌레 먹혀 죽은 헤롯왕(행 12:23)들은 계속 같은 함정에서 몰사 당하고 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이다. 세계 테니스 결승전에 오른 영국선수는 유리하게 굴러오는 운 좋은 공을 내리치기만 하면 금메달을 목에 거는 황금 기회를 맞았다. 승리는 틀림없는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공을 높이 올려주어 맞수로 충분한 기회를 이용토록 짬을 주었다. 상대방은 힘껏 내리쳤고 승리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벌떼같이 몰려 온 기자들은 "우승을 포기한 이유?"를 캐물었다. "바다 건너 저 멀리서 온 선수가 우승컵을 안고 가야 되지 않을까요?" 2등으로 내려 앉은 그의 명성은 1등 선수의 몇 배로 세계인의 가슴을 뭉클케 했다. 뒤로 힘껏 또 힘껏 후퇴해야 이기는 운동이 있다. 줄다리기다. 현명한 또 하나의 처세술이다. 한사코 2등이 되어야 산다는 진리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2등 정신은 예수님 정신이다. 하나님 뜻대로만 되기를 원했고 그 뜻을 따르기로 작심하셨다(마 26:39). 자의(自意)로 말씀하신 일이 없고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을 말씀하신다고 하신 분이다.(요 16:13) 하나님과 동등 되는 것은 더군다나 원치 않으셨다(빌 2:6). 한 조각 감미로운 글을 소개한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아직 프로포즈를 못했거들랑 이렇게 한번 말해보지 않으시렵니까. “나는 당신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왜 두 번째냐고 물어오겠지요. 이렇게 답하십시오.“내 사랑이 아무리 뜨겁다 한들 당신의 부모님들만이야 하겠습니까. 나는 그 분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들 말고는 이 세상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사랑은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음식점을 차려놓고 하루빨리 소문난 음식점이 되고 싶거들랑 이렇게 한 번 써 붙여보십시오. 소박한 글씨체로 단정하게 써 붙여보십시오.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집”왜 첫 번째가 아니냐고 물어오겠지요. 이렇게 답하십시오.“세상 어딘가는 우리 집보다 더 맛있는 집이 있겠지요. 하나쯤은 있겠지요” 당신의 가게가 가장 맛있는 집이 될 것입니다. 1885년 인천에 도착한 두 선교사는(언더우드,아펜젤러) 손잡고 똑같이 배에서 내렸다. "내가 처음 선교사다. 이곳에…" 오만함을 포기하기 위해서다. 2등 정신은 연합 정신이다. 공동 정신이다. 부디 2등 정신으로 살기 바란다.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담임목사)
17
DE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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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꾼들아!
몸집이 제법 큰 교회들이 요사이 싸움판을 크게 벌여 한국 기독교를 난도질하고 있다. 적군의 공격이 늦춤 없이 돌진해 오는데도 한가로이 자중지란(自中之亂)만을 겪고 있다. 주님 몸이신 교회를 두 조각으로 찢은 다음에야 살육의 칼…
몸집이 제법 큰 교회들이 요사이 싸움판을 크게 벌여 한국 기독교를 난도질하고 있다. 적군의 공격이 늦춤 없이 돌진해 오는데도 한가로이 자중지란(自中之亂)만을 겪고 있다. 주님 몸이신 교회를 두 조각으로 찢은 다음에야 살육의 칼을 놓을 생각인가 보다. 탈진한 양떼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또 다시 우상종교에 빠져들어간다. 상하 구별도, 위계 질서도 없는 막판 사회가 교회 풍토인가? 툭하면 치사한 졸전을 벌이면서도 자기가 성경적이라고 서로 우기고 예배만은 꼬박꼬박 챙기는 위선적 작태를 하나님이 과연 받으실까? 6.25전쟁도 3년만에 휴전되고 치열한 제2차 세계대전도 8년에 끝났는데 예수의 사람들은 도대체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투쟁할 셈인가? 평안한 교회가 별로 없고 조용한 가정도 직장도 선교현장도 보기 드물다. 목사도 선교사도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모두 순교순(殉敎順)일 뿐 명예순이 아닌데 분란은 으레 중직들(별난 존재인줄 착각하며 권리 주장을 하다가)이 만들어낸 작품이니 직분을 거두어야 하나? 평화로운 들판에 불지르는 짓이나 하라고 붙여준 명예는 아닐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지금도 아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딸이요 아들인데 무자비하게 서로 헐뜯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모르는가? 죄를 덮어주자는 것은 아니다. 허물을 따지지 말고 용서해 주자는 것이다. 그렇게도 싸우고 싶은가? 이왕 싸움꾼이 된 이상 바닥을 보고 싶은가? 상대할 만한 만만한 적수를 붙여줄까? 죽이기 아니면 맞아 죽는 시원한 한판 승부를 겨루고 싶은가? 싸움 기질이 있는 사람은 싸워야 직성이 풀린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싸움꾼” “염병을 퍼트리는 사람” 으로 소문나 결국 로마황제 앞에 도끼로 맞아 죽었던 사도 바울의 전쟁마당으로 들어가자. 원수 하나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 혈육으로 뭉쳐진 자기 자신을 또 다른 강적으로 취급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 자기억제에 최선을 다한 현명한 싸움꾼이다. 원수를 고르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마귀,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 이 셋을 공격의 대상으로 정했다. 우리 예수님은 최강의 적 사탄을 골라 싸우셨다. 싸움꾼의 왕초답게 사탄의 머리를 깨부수고 온 천하를 탈환하신 후 십자가에서 장렬하게 죽으셨다. 영적 싸움의 특징은 자신도 같이 죽는다는 것이다. 너는 죽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세상 싸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원리를 깨달은 스데반은 성난 군중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렸다. 큰 싸움 영적전투에 가담하기 위해선 혈육의 옹졸한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 마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전쟁은 종지부를 찍으라. 무장해제하라. 진흙탕 개싸움에서 빠져 나오라. “교회는 더 나은 방법”을 찾느라고 한마디씩 하는 말이 불씨가 되어 소란한 풍경을 만든다. 하나님은 “더 나은 사람을 찾으신다”라는 말을 기억하자.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자녀, 좋은 직분자가 되도록 하라. 화목의 손길을 주저 없이 쑥쑥 내밀어야 한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 (마 5:9) 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동휘목사(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담임목사)
17
DE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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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나 당당한 권위를 가진 사람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면 군중들은 술렁거렸다. 때 묻은 서기관과는 차별되는 참신한 권위와 사악한 귀신까지 쫓아내는 권세(막 1:27)에 탄성을 울렸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쓰실 때도 역시 하늘능력을 풍족히 내려 주시며 일감을 맡기셨…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면 군중들은 술렁거렸다. 때 묻은 서기관과는 차별되는 참신한 권위와 사악한 귀신까지 쫓아내는 권세(막 1:27)에 탄성을 울렸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쓰실 때도 역시 하늘능력을 풍족히 내려 주시며 일감을 맡기셨다. 팔십 세 늙은이 모세를 부르실 때에는 바로왕 앞에 신이 되는(출 7:1) 권위부터 주셨다. 과연 10가지 재앙을 이집트에 부어 애굽인의 간담을 얼어붙게 만드는 신적 존재로 군림했다.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응석 떠는 예레미야를 고용하실 때는 쇠기둥, 놋 성벽의(렘 1:18) 강질로 만드신 후 능글맞은 거짓종교인들과 과감히 맞서게 하셨다. 예수님은 아예 어리석은 하층민만 열두 제자로 골랐다. 지성인 서기관이 지원했을 때는 겁주어 돌려 보내셨고(마 8:20) 평균 이하인 어부가 태반을 이루었다. 장엄한 파송의 날에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마 10:1)을 안기어 현장에 보내는 순간 사탄을 향하여 호령하는 영적거성이 되었다. 약한 자도 다윗처럼 강자가 되고 다윗 같은 자는 하나님 같은 거창한 존재(슥 12:8)로 탈바꿈시키는 하나님이시다. 성령님 모신 사람은 누구나 빠짐없이 걸출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야심찬 보장을 받은 셈이다. 기독교가 기백 잃고 초라한 모습을 띠는 순간 마귀군사들은 맹공을 퍼부었다. 이슬람과 힌두교는 다산(多産) 전략으로 무서운 속도로 세계종교를 앞지르는 중이다. 하루 다섯 차례 기도와 연중 한 달 금식 및 필수적으로 메카성지순례하는 무슬림, 이 년 간 해외선교사로 파송하는 모르몬교, 강제 결혼시키는 통일교, 두 사람씩 짝지어 전도시키는 여호와의 증인 등은 의무화(義務化) 전략으로 그들의 군대를 강화시켰다. 공산당의 밤마다의 세뇌(洗腦)교육과 코카콜라의 군사(軍事)작전 같은 것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개미는 자기 몸보다 50배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고 벌은 자기보다 300배 큰 것을 운반할 수 있단다. 인간으로 보면 10톤짜리 트레일러를 끄는 비율이다. 우리 역시 몇 갑절의 영적권세로 무장되어야 할 것이다. 산을 번쩍 들어 바다에 꽂아넣는 믿음의 비범함(마 21:21)을 보여줘야 하리라. 기독교 탄압은 갈수록 거세진다. 이단과 이방종교가 득세한다. 한국도 기독교인 수가 크게 줄었다. 기독교 선진국의 선교사 파송수가 점점 시들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천사가 반겨 웃을 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칼바람 강추위만 있는 남극이나 북극에는 오히려 감기가 없단다. 감기 바이러스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극심한 박해와 살벌한 환경이 도사리는 곳에는 세속의 오염에 감염되지 않는다. 탈진상태로 주저앉게 된 것은 오히려 안일한 태도에서 온 결과다. 스며든 세상욕심과 사소한 감정을 페기처분하지 못한 후유증이다. 기도의 정열을 잃었기 때문이다. 원망과 나태함은 유배지로 성큼 내 보내야 산다. 멍석을 깔아주어야 노래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려라. 꿀은 영양덩어리다. 철, 구리, 망간, 규소, 염화칼륨, 나트륨, 인, 마그네슘 등 희한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단다. 다윗은 꿀보다 단 영양가 있는 특식으로 말씀을 주야로 흠뻑 먹었기에 영적 스태미나(정력)가 넘쳐 흘렀다. 어디로 가든지 이기는 자(삼하 8:6)가 되었다. 천국건설에 동원된 십자가 군사들이여! 예수님을 위해 홀라당 타버리는 인생이 되어라. 위험천만한 결단을 과감히 단행하라. 죽고져 해야 산다. 주님 하신 일을 능히 할 수 있다는 예약된 권능을(요 14:12) 승계 받아라. 감히 넘나 볼 수 없는 늠름한 천국품위로 무장하라.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17
DE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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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지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하나님과 사탄의 운명적 싸움이었다. 우선 숫자적으로 예수님은 홀로였다. 반면 적들은 떼로 뭉쳤다. 저들은 창으로 찌르고 주먹으로 치고 녹슨 못으로 성체(聖體)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일방적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하나님과 사탄의 운명적 싸움이었다. 우선 숫자적으로 예수님은 홀로였다. 반면 적들은 떼로 뭉쳤다. 저들은 창으로 찌르고 주먹으로 치고 녹슨 못으로 성체(聖體)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셨다. 저들은 꾸민 증인을 동원시켜 거짓말로 우겨댔으나 예수님은 꾹꾹 할 말만 하셨다. 뾰족한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조롱했으나 예수님은 수욕을 고이 받아 하나님께 평가를 의뢰했다. 혈루병 여인을 고치신 향기로운 성의(聖衣)를 홀랑 벗겨 흔적을 소멸시키고 수치를 들쳐 냈으나 그날의 부끄러움이 인류구원의 보약임을 아시고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제자가 적군의 길 앞잡이가 되고 또 다른 아군은 스승을 저주하는 내부혼란까지 도래해(마 26:74) 우군의 지원군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요압의 살인키스(삼하 20:9)를 배운 가룟유다의 입맞춤이(마 26:49) 선전포고가 된 전쟁은 예수님의 참패로 끝났다. 의인들을 왕창 눈물짓게 했다. 그 후 3일간! 악인의 군사들은 축제판을 벌였다.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떨림 속에서, 얼얼해진 제자들은 추레한 거지꼴이 되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집안에서 초상이 난 것이다. 면류관을 받기 전까지는 의인들은 한결같이 이 길을 겪는 것 같다. 북한에서도, 중동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가정과 교회에서도 십자가사건은 끊일 줄 모르고 살벌하게 벌어지고 있다. 사막을 건너는 것은 용맹한 사자가 아니라 못난 낙타인 줄 알면서도 뱃장 좋게 이기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제 삼일(호 6:2)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이러므로"(빌 2:9)의 진리대로 죽은 예수님을 살려내셨다. 하늘의 권세로 온통 판세를 바꾸셨다. 예수님을 하늘나라로 올리신 10일 후에는,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비겁한 겁쟁이 제자들이 천하제일의 장수가 되어 지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악인들이 얻은 승리는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기루에 홀린 것이었다. 이기기 원하는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지는 수련부터 받아야 한다. 사랑하면 약해지는 법이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서만은 약하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지구에오신 예수님은 어떤 여인에게라도 돌봄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구유 속에 누인 여린 인간이 되셨다. 십자가는 친히(벧전 2:24) 결심하신 것이기에 그 여인이 가까이 서 있으면서도 어떤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 지듯(고후13:4) 바울 역시 약한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고후 12:10). 강해지면 십자군이 되어, 거만 떨어 위협하며 횡포해지는 이치는 희한하다. 진 꽃은 또 피지만 꺾인 꽃은 다시 피지 못한다는 속담도 삭여야 될 교훈이다. 악인과의 싸움에는 지옥에 없는 무기를 써야 필승한다. 악한 것은 마귀나라에서 더 개발시켰다. 이기기 위해 악한 방법을 썼다면 이겼어도 진 것이다. 순결을 무장으로 기습해야 한다. 마귀나라는 겸손이 없다. 양보란 단어도 없다. 말씀도, 인내도 절제의 무기도 이름조차 거론된 바 없다. 가장 찬란한 원자력적인 무장은 감사다. 그리고 찬송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평강이 흘러넘치기를 간구하라. 그들이 받을 수 없다면 고스란히 내게 돌아올 터이니 이왕이면 원수 사랑을 박격포처럼 마구 퍼 부어라. 머리가 숯불에 타도록(롬 12:14) 복을 빌라. 무골호인이 되란 말인가? 깊이 찔린 창끝의 고통 속에서도 "다~이루었다!"(요 19;30) 승리선언을 포함한 일곱 마디의 핵심진리를 당당히 선포하신(가상칠언) 주님께서 굴욕 당하신 것일까. 사지에 몰린 궁지 속에서도 지옥 불에 떨어질 흉악범을 낙원으로 입성시켜(눅 23:43), 긴박한 순간에도 세상에 오신 사명을 거뜬히 성취하신 예수님의 청초함이 부럽지 않은가. 위급 상황이라 하여 겁 질려 복음전파를 소홀하면 직무유기가 아닐까. 초라한 죄수 신분인데도 감히 아그립바왕 앞에서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바울사도의 뱃심전도를 놓쳐서는 안 된다(행 26:29).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강 같이 흐르고 있는 이상, 지는 것으로(세상적으로) 이기는 천국전략을 즐겨야 한다.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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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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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을 상속 받으라
어떻게 이런 신기한 일들이 거침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막 6:2) 민중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경탄할 뿐이다. 하늘나라에 가시는 날! 예수님만이 가지신 그 신기한 권능을! 미련 없이 자기 사람들에게 물려주시겠다는 통쾌한 약속…
어떻게 이런 신기한 일들이 거침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막 6:2) 민중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경탄할 뿐이다. 하늘나라에 가시는 날! 예수님만이 가지신 그 신기한 권능을! 미련 없이 자기 사람들에게 물려주시겠다는 통쾌한 약속을 하셨다. 달마의 제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가진 혜가는 한쪽 팔을 싹둑 잘라 피투성이를 눈밭에 던지므로 소원을 이루었다. 곰국 끓이는 비법을 전수 받는데도 온갖 치욕을 감수한 후에야 뛰어난 달인이 된다. 경쟁국의 산업기술이나 군사기밀을 훔치려고 사람을 매수하거나 스파이를 밀파하는 억지 방법을 쓰기도 한다. 나아만의 한센병이 게하시에게 전가된, 재앙을 전수 받는 악한 계보도 있다.(왕하 5:27)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쉽게도 물려주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요 14:12) 자격은 오직 믿는 자다. 물론 제대로 믿는 자일 것이다. 그럼 제자들은 언제 그 권능을 전수 받았나. 오순절 성령 강림 때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 "회개하라" 외쳤던 예수님의 첫 말씀이 그날따라 우렁차게 귀청을 울렸을 것이다. 누가 크냐고 거들먹거리며 방방 뛰던 어리석은 짓거리를, 예수님을 홀로 남겨둔 채 뿔뿔이 도망친 비겁했음을, 사마리아 동네를 하늘에서 불내려 사르겠다던 고약한 혈기를 뽑아달라고 눈물을 폭탄처럼 쏟았을 것이다. 변덕스럽고 줏대 없는 자신들을 주님이 다시 쓰시려면, 결코 새롭게 빚어 주셔야만 된다는 애절함으로 각자의 고운 옷을 찢었을 것이다. 기도는 한 순간에 하나님을 꽉 붙잡고 동시에 사탄을 묶는 순간이란다. 이용도 목사는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어버리소서. 그리고 예수님께 아주 미쳐 버릴 수 있는 혼을 넣어 주옵소서. 예수님께 미치기 전에는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몸부림이었다. 존 번연은(천로역정 저자) 당대의 영혼들을 번쩍 들어 흔들어 깨우는 영감 넘치는 설교를 했었다. 그의 감동으로 성령의 임재 속에 파묻힌 존 오엔 박사를 처다 본 왕은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에 매혹 당했다고 비꼬았다. 그때 오웬은 겸손히 아뢰었다. "폐하! 만일 제게 그 땜장이의 설교능력이 있다면 쌓아둔 학문을 모조리 포기 하겠습니다." 번연은 천국대학을 나온 사람 같았다. "아! 그리스도여! 저의 눈은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영감을 이어 받은 엘리사의 기상으로, 사탄의 격렬한 맹공을 마비시켜야 한다. 칙칙하게 굳어있는 허약한 영성을 흔들어 맑고 밝게 정화시켜라. 미소 한방이면 해결될 것을 딴죽을 걸어 미루면서 은혜의 바다에서 배회만 하려는가. 천국의 천덕꾸러기로 살아서는 안 된다. 세계 최대의 보물을 상속받을 자들이여! 손 벌려 받으라. 종이돈 위에 쓴 숫자는 생명같이 믿으면서 예수님 약속은 도무지 믿기지 않은가. 혹시 조급하지 않아서인가. 부닥치기보다는 도망가는 것으로 상책을 삼는다면 니느웨 성은 언제 구출할까. 백 명 중 겨우 열사람만이 천국행이고(세계기독교인 비율) 열 명의 아홉 배는 불과 유황으로 불타는 지옥으로, 마귀에게 코 뀌어 줄지어 끌려가는데도 열 불나지 않은가. 마음이 정말 편한가. 자신만이 가지는 다락방을 갖추어야 한다. 능력을 전수 받는 비밀장소는 여기뿐이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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