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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JU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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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선교회 동북아권역 수련회
2013년 바울선교회 동북아권역 수련회가 울란바타르 테렐치에 있는 UB-2호텔에서 8월4일-8월9일 동안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MK들 그리고 본부팀들이 101명이 참석할 예정인데, 본 수련회가 하나님을 기쁘시…
2013년 바울선교회 동북아권역 수련회가 울란바타르 테렐치에 있는 UB-2호텔에서 8월4일-8월9일 동안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MK들 그리고 본부팀들이 101명이 참석할 예정인데, 본 수련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교사님들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기회가 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2
JAN.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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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기도문
2021년 기도문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인생은 한 동작, 한 호흡마다 고뇌 불행 죽음 멸망을 향해서 끊임없이 돌진해가는 것입니다(인생론, 톨스토이). (그러나)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것, 그것도 자신을 희생…
2021년 기도문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인생은 한 동작, 한 호흡마다 고뇌 불행 죽음 멸망을 향해서 끊임없이 돌진해가는 것입니다(인생론, 톨스토이). (그러나)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것, 그것도 자신을 희생해서 사랑하고, 모든 인간과 모든 것에 애정을 쏟아 붓고, 사방팔방에 사랑의 그물을 펼쳐 놓아 거기에 걸려든 것을 구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 입니다(코사크, 톨스토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요일4:11). 희망찬 2021년이 불끈 밝았습니다. 희망찬 이라고 했지만 금새 올해도 여느 해처럼 커다란 문제와 어려움들이, 어둠의 세력이 던지는 비릿한 유혹과 치명적인 덫들이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올 것입니다. 이에, 간절히 바라기는 올해 하나님 말씀만 굳게 붙잡고 소처럼 우직하게 기도함으로 기필코 승리하여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14
AP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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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세계여행
아주 특별한 세계여행 김원섭 지음 원앤원스타일 / 2014년 12월 / 376쪽 / 17,000원 ▣ 저자 김원섭 《여행신문》, 《트래비》에서 여행기자 생활을 했다. 그간 100여 개국을 여행했고, 한겨레문화센터, 현대백화점, 인프레임 포토 아카데…
아주 특별한 세계여행 김원섭 지음 원앤원스타일 / 2014년 12월 / 376쪽 / 17,000원 ▣ 저자 김원섭 《여행신문》, 《트래비》에서 여행기자 생활을 했다. 그간 100여 개국을 여행했고, 한겨레문화센터, 현대백화점, 인프레임 포토 아카데미 등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KBS <사랑의 가족>, EBS <세계테마기행> 스리랑카 편, <한국기행> 만재도 편에 출연했다. 또 지리학대회 사진 심사위원, IVI국제사진공모전 심사위원, 해양수산부 ‘수산물 스토리로드’ 평가위원, ‘2014년 아름다운 어촌 찾아가기’ 평가위원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 『사진 잘 찍는 법』, 『여행사진 잘 찍는 법』, 『내 생애 최고의 여행지 몰타 & 튀니지』, 『교과서 속 세계여행』, 『내 마음에 담은 지구별 풍경』 등이 있다. 여행을 통해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살기를 늘 소망한다. ▣ Short Summary “세상은 거대한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배우고 지혜를 얻는다. 그리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 더 열심히, 더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더욱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꾸어왔던 세계여행에 대한 꿈이 이루어진 것은 30대 후반, 여행기자를 하면서부터였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세계 100개국 300여 지역을 여행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여행지, 쉽게 갈 수 없는 오지,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거나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선별해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아시아로 특별한 여행지가 가장 많은 곳이다. 오래전부터 동서양 문화가 오고 갔던 실크로드,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 우주의 중심이라 믿는 카일라스 산과 신비로운 구게 왕국의 유적지를 소개했다. 또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느끼게 해준 필리핀 바나웨의 계단식 논과 살아 있는 원시동굴 수마깅 동굴 탐방, 빛의 도시로 추앙받는 바라나시, 지상 최고의 물감 축제인 홀리축제,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주었던 북인도의 스리나가르와 하늘호수 판공초 등을 특별한 여행지로 뽑았다. 이들 모두 아주 특별한 여행지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 곳이다. 2부는 유럽으로 얼마 전 TV에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 된 크로아티아와 사랑의 도시 프라하, 체코의 울창한 숲 속 온천 휴양지 마리안스케 라즈네와 카를로비 바리를 소개했다. 또 반 고흐와 렘브란트, 베르메르의 주옥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암스테르담, 세계의 명사들에게 사랑받는 특급 휴양지 포르토피노, 유럽에서 가장 사진 찍기 좋은 베네치아, 영원의 도시 로마와 바티칸, 물 흐르듯 감미로운 기타 선율이 느껴지는 알람브라 궁전, 파두의 고향 리스본,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로카곶, 지중해에 떠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몰타를 특별한 여행지로 뽑았다. 3부는 아프리카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위협했던 세기의 명장 한니발의 고향 카르타고, 북아프리카의 풍요로운 옛 로마의 도시 두가, 아름다운 사막을 볼 수 있는 튀니지 남서부, 순정 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케냐 코어를 소개했다. 4부는 아메리카로 미국 서부 예술의 도시 산타페,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춤추는 슬픈 감정이라 불리는 탱고의 고장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특별한 여행지로 가려 뽑았다. ▣ 차례 지은이의 말_ 세상은 거대한 한 권의 책, 지구별 여행사진가의 아주 특별한 여행 1부 아시아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실크로드를 따라 파미르 고원에 오르다 - 중국 역사 깊은 실크로드의 중심지 카슈가르 - 중국 천상의 세상 카일라스로 가는 길 - 티베트 영혼의 성소를 찾아가는 카일라스 순례 - 티베트 신비의 불교 왕국인 구게 왕국의 유적지 - 티베트 불굴의 의지가 느껴진 바나웨 계단식 논 - 필리핀 땅속 환상 세계인 수마깅 원시동굴 탐방 - 필리핀 빛의 도시 바라나시에 진짜 삶이 있다 - 인도 지상 최대의 물감 축제인 홀리축제에 가다 - 인도 스리나가르 달 호수와 이드 알 피트르 축제 - 인도 은하수 내리던 환상의 하늘호수, 판공초 - 인도 고산도시 캔디에서 만난 페라헤라 축제 - 스리랑카 원시부족 베다족이 사는 마히양가나 - 스리랑카 2부 유럽으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신심 깊은 사람들이 사는 트빌리시 - 조지아 불타는 산과 샘이 있는 도시, 바쿠_ 아제르바이잔 보석처럼 빛나는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 - 크로아티아 누구나 시인이 되는 사랑의 도시, 프라하 - 체코 숲 속 온천 휴양지에서의 진짜 힐링여행 - 체코 예술에 빠져드는 암스테르담 미술관 산책 - 네덜란드 명사들이 즐겨 찾는 특급휴양지 포르토피노 - 이탈리아 유럽 최고의 출사지로 꼽히는 베네치아 - 이탈리아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인 로마와 바티칸 - 이탈리아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과 열정의 플라멩코 - 스페인 우수가 진하게 깃든 낭만의 도시, 리스본 - 포르투갈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벨렘과 로카곶 - 포르투갈 지중해에 떠 있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소국 - 몰타 3부 아프리카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명장 한니발의 고향으로 유명한 카르타고 - 튀니지 풍요로움이 있는 로마의 옛 도시, 두가 - 튀니지 아름다운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서는 관문 - 튀니지 순정 깊은 렌딜레 사람들이 사는 코어 - 케냐 4부 아메리카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꽃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도시, 산타페 - 미국 쿠스코를 거쳐 공중도시 마추픽추로 가다 - 페루 정열 가득한 탱고의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 - 아르헨티나 『아주 특별한 세계여행』 저자와의 인터뷰 아주 특별한 세계여행 김원섭 지음 원앤원스타일 / 2014년 12월 / 376쪽 / 17,000원 1부 아시아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역사 깊은 실크로드의 중심지 카슈가르 - 중국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카슈가르는 녹색 융단을 펼쳐 놓은 듯했다. 우루무치에서 텐산 산맥을 넘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넌 후에 만난 푸른색이라 더 반가웠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이름처럼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땅이다. 그래서 동서양을 왕래하던 대상들은 이 사막의 남북 언저리를 지나는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했다. 이 실크로드가 동서남북으로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에 카슈가르가 위치해 있다. 약 2천 년 전부터 중국과 서역을 오가던 사람과 교역품은 반드시 카슈가르를 통과하게 마련이었다. 중국에 속하지만 우리가 아는 중국과는 다른 카슈가르: 카슈가르는 일 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한 지역임에도 농업과 목축이 발달했다. 북쪽의 텐산 산맥과 남쪽의 쿤룬 산맥, 서쪽의 파미르 고원에서 스며든 빗물이 복류하다가 카슈가르 주변에서 솟아나 오아시스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실크로드상의 큰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동서양의 문화도 이곳을 거쳐 가며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4세기에는 로만 글라스가 동쪽으로 전파되어 신라 경주에 이르고, 유럽에 수출된 청화백자가 르네상스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지리학도인 나는 젊은 시절부터 실크로드 깊숙이 있는 도시를 방문해보고 싶었다. 카슈가르는 중국에 속하지만 우리가 아는 중국의 모습이 아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이고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양고기와 낭(빵)이 주식이고, 달고 향기로운 하미과(멜론의 일종)를 먹는다. 한여름이지만 해발 1,294m의 고원 도시라 바람이 시원했다. 구시가지의 중심 치니바그 호텔 앞에서 지하도를 건너니 청진사로 향하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청진사 후문에 이르자 길거리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를 면도칼로 밀어주고 있었는데, 이 풍경이 우리나라의 1970년대 풍경 같아서 반가웠다. 청진사는 중국에서 부르는 이슬람 사원으로, 정식 명칭은 ‘에티갈 마스지드’다. 2개의 첨탑(미너렛)이 인상적인 모스크가 아침 햇살을 받아 진노랑으로 빛난다. 안으로 들어가니 꽃과 나무로 장식한 정원이 나오고 기도실로 이어진다. 이 지역에 이슬람교가 들어온 것은 10세기경부터라 한다. 에티갈 마스지드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무슬림의 성지다. 이 사원의 역사는 1442년부터 시작되었다. 평일에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금요예배 때는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이 기도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스크 안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남자들에게만 예배가 허락된다고 한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카슈가르 국제 바자르: 오후에 구시가지를 거쳐 국제 바자르(시장)로 향했다. 바자르 입구의 모스크 앞을 지나는데,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발길을 잡는다. 온몸을 감싼 차도르 차림의 미망인이 숨죽여 울고 있었다. 이슬람 도시를 여행해보면 대부분 남성이 경제의 주체이고, 여자들은 집안일만 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남편이 일찍 사망하면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다. 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무슬림이 지켜야 할 5대 의무 중의 하나로 ‘자카트(자선)’를 중요시한다. 잠시 지켜보니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여인의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시장은 어딜 가나 그렇듯이 카슈가르 국제 바자르 역시 활기가 넘쳤다. 이곳은 카슈가르 시내 동북쪽 투만 강 동안에 위치해, ‘중국-서아시아 국제무역시장’이라는 별칭을 가졌다. 시장에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온 다양한 물건들로 넘쳐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인근 국가에서 모여든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5천 개가 넘는 점포에 소, 말, 낙타, 양부터 전자기기와 그릇, 옷가지 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시장에서 빠지면 서운한 것이 바로 현지 음식이다. 시장 한쪽에서 면 요리와 볶음밥, 양 꼬치와 양 백숙, 빙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곳을 여행하면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요리가 위구르 국수인 빤미엔(拌麵)이었다. 양고기와 야채가 듬뿍 들어간 소스 그리고 면이 따로 나와 비벼 먹었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고 달달하고 깔끔한 맛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또한 쌀이 귀한 이 지역 최고의 음식은 볶음밥으로, 과거에는 잔칫날에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라고 한다. 쌀밥에 양고기와 양파, 당근, 피망 등을 넣고 볶아낸 볶음밥을 여행하는 내내 맛있게 먹는다. 양 백숙은 큰 컵에 양고기와 채소를 넣고 화덕 위에서 오랜 시간 끓인다. 기름진 소고기국 같은 맛으로, 나날이 지쳐가는 여행자의 기력 회복에 최고였다. 또 이곳의 명물 하미과는 달고 향긋한 맛에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우리 돈으로 2천 원 정도면 5명은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하미과의 달고 향기로운 맛이 지금도 그립다. 빛의 도시 바라나시에 진짜 삶이 있다 - 인도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이 화두의 답을 찾아 바라나시로 떠났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찬란한 빛의 도시 바라나시는 힌두교 최대의 성지다. 인도 사람들이 성스러운 어머니의 강으로 여기는 갠지스 강가에는 많은 힌두교 사원이 있고, 길게 늘어선 가트와 화장터가 있다. 사람들은 매일 강물에 몸을 씻고, 물을 마시고,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또 죽어서도 육신의 재가 갠지스 강에 뿌려지기를 소망한다. 그러면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갠지스 강에서 맞은 찬란한 아침: 아침 5시. 푸른 새벽에 나는 갠지스 강가로 향하는 릭샤에 오른다. 근육질의 릭샤왈라(릭샤를 운전하는 사람)는 금세 나를 강가에 데려다준다.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을 보고 있으니 성스러운 기운이 전해져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많은 수행자와 사람들이 해가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강가가 일순간 술렁인다. 사두(힌두교 수행자)뿐만 아니라 운집한 사람들도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기도를 올린다. 어느 가족은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가져온 공양물을 신에게 바치며 기도를 한다. 강물에 소원을 담은 등불을 띄우며 금잔화를 바치고, 신상에 꽃을 바치며 기도를 올린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왔을 아침 풍경이 지금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요즘도 이곳 사람들의 신심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바라나시는 인도 최고의 성지로 남에서 북으로 갠지스 강이 흐른다. 이들은 ‘어머니’라 불리는 갠지스 강물이 ‘신비한 힘’, 즉 생명과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 살아생전의 모든 죄가 씻기고, 죽은 육신을 갠지스 강에서 화장하고 그 재를 강에 뿌리면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곳은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일 년 내내 북새통을 이루고 강가 화장터의 불은 꺼질 줄 모른다. 나룻배를 타고 강 안쪽으로 들어간다. 강에서 바라보는 바라나시는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이곳에서 50년 이상 노를 저었다는 뱃사공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져온 초코파이를 하나 건넨다. 사공은 맛있게 먹더니 손으로 강물을 떠서 마신다. 오염된 강물을 마셔도 괜찮을지 염려가 되었지만 사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기만 한다. 다시 강가로 돌아와 걷는다. 강가에는 작은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많은 사두들이 보인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한다. 그중 몸에 진흙을 바르고 나체수행을 하는 일련의 사두들이 눈길을 끈다. 온몸에 회칠을 한 전라의 수행자들.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웃으며 허락해준다. 이들은 무소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며 수행하는 사두들이다. 속옷조차도 소유의 집착을 가져온다며 나체수행을 하고 있다. 다른 수행자들도 옷은 입고 있지만, 가진 것은 단벌옷과 작은 주머니 그리고 지팡이 하나가 전부다. 이들은 “물건을 많이 갖고 있으면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야 온전하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삶의 2가지 진리: 뜨거운 대낮의 볕을 피해 라씨(Lassi, 인도식 요구르트)를 한 잔 마시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눈앞에서 운구행렬이 지나간다. 4명의 남자들이 시신을 올려놓은 까빤(대나무로 만든 들것)을 메고 화장터로 가고 있다. 죽은 이는 은색의 화려한 수의를 입고 목에는 금잔화 꽃목걸이를 걸고 있다. 남자들은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연신 “람 남 사뜨야 헤이(Ram Naam Satya Hai, 람의 이름은 진리다).”를 외친다. 람은 인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주인공으로 비슈누의 화신이다. 류경희의 『인도의 종교와 종교문화』에 따르면 “삶에는 2가지의 진리가 있는데 하나는 태어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는 것이다. ‘람 남 사뜨야 헤이’라고 읊으면서 시신을 운반하는 까닭은 죽음은 진리이며 동시에 그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진리임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장례행렬을 따라 강가의 마니까르니까 화장터로 향한다. 화장터에는 화장용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다. 문득 화장 절차가 궁금해진다. 장작더미가 준비되고 시신을 강물에 담그는 것으로 정화의식을 한다. 그다음 사제가 경전 구절을 낭송하는 가운데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시신을 올려놓는다. 간단한 의식을 하고 삭발을 한 뒤 하얀색 옷을 입은 상주가 불을 붙인다. 이들은 불을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 보기 때문에 화장을 선호한다. 이후 망자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하며 장작더미 주위를 돈다. 시신이 완전하게 타기까지는 3~4시간이 걸리는데, 지켜보는 가족들은 담담하다. 모두들 덤덤하게 지켜볼 뿐이다. 이들은 죽음 또한 일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윤회를 믿는 인도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이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화장 후의 육신은 5가지 물질요소로 돌아가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영혼은 새로운 몸을 취해 다양한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이들에게 몸이란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는 옷과 같고, 죽음은 영혼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과정이다. 그래서인지 화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담담했고 통곡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올 수밖에 없는 곳,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든 불가촉천민이든 언젠가는 이곳으로 와야 하는 것이 진리다. 결국에는 연기로,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것이 인생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은하수 내리던 환상의 하늘호수, 판공초 - 인도 인도 히말라야 산맥 북쪽 끝자락, 해발 4,350m에 위치한 판공초는 하늘과 닿아 있어 ‘하늘호수’라 불린다. 호수의 물은 맑았고 만년설을 머리에 인 산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신비롭게 느껴졌다. 호수도 아름답지만 이곳으로 가는 길도 매력적이다. 마치 외계의 어느 별에 온 듯, 거칠고 황량한 풍경이었지만 물이 있는 곳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푸른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야크 떼와 파시미나 양 떼들이 초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천상의 세계가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 닿아 있는 마법의 하늘호수: 판공초는 라다크 지역의 중심도시 레에서 약 150km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1시간 30분이면 도달할 거리지만, 급경사를 이루는 산에 지그재그로 난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려야 하기에 자동차로 4시간이 걸렸다. 레에서 가까운 곳은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만, 고갯길은 대부분 비포장이라 먼지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동차까지 지독한 매연을 내뿜고 있어 견디기 힘들었다. 창 라 고개의 정점에 오르자 기온은 급격하게 내려가고 호흡은 가빠지며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다. 한여름이었지만 윈드재킷을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쌀쌀했다. 창 라 고개는 해발 5,360m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자동차 도로가 있다. 고갯마루에는 작은 곰파(사원)가 있고, 수많은 룽다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오색 천에 새긴 부처의 말이 세상 곳곳에 퍼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걸어놓은 것이다. 일행들과 얼른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산반응으로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창 라의 급경사 길을 내려가자 푸른 초원과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 나타났다. 고생 끝에 도착한 판공초 호수는 눈이 시릴 정도로 맑았고 아름다웠다. ‘길고 좁은 마법의 호수’라는 뜻의 판공초. 이렇게 청청하고 아름다운 호수는 생애 처음이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호수에 발을 담그니, 발이 아릴 정도로 차가웠고 물맛은 짭조름했다. 판공초는 인도와 티베트에 동서로 길게 걸쳐 있는 호수다. 길이 134km, 해발 4,350m로 사방으로 해발 7천 미터가 넘는 고산들에 둘러싸여 ‘하늘호수’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런데 다른 호수와 달리 판공초는 소금호수다. 육지에 웬 소금호수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판공초는 약 6천만 년 전에는 바다였던 곳이다. 인도 판과 아시아 판이 충돌하면서 지각이 서서히 솟아올랐고, 바다의 일부분이 산맥 사이에 갇혀 만들어진 염호다. 그래서 판공초에는 다른 호수와 달리 아득한 옛날부터 독자적으로 진화한 고래를 비롯해 다양한 바다 생물들이 살아간다. 갈매기도 날아다닌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호숫가를 산책하고 라면을 끓여 저녁식사를 했는데, 내 생에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호수의 저녁 풍경을 촬영하고, 호숫가 숙소에서 잠이 들었는데 호흡곤란으로 잠이 깼다. 다시 누웠지만 악몽과 함께 호흡이 가빠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늘호수에서 은하수를 마음에 담다: ‘억지로 자려 하지 말고 차라리 은하수를 촬영하러 나가자.’라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판공초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이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짧게 그치듯 별똥별도 내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았나?’라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많은 별들 중에 생명이 살 수 있는 별이 지구뿐이라면 공간 낭비다.”라던 영화 <콘택트>의 대사가 생각났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은하수를 마음에 담고, 또 카메라에 담았다. 은하수를 카메라에 담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화각이 넓은 광각렌즈를 준비하고 삼각대가 있어야 한다. 나는 15mm 광각렌즈로 은하수를 담았는데, 은하수의 1/3도 못 담아서 많이 아쉬웠다. 10mm나 화각이 180도인 어안렌즈를 사용하면 은하수를 더 넓게 담을 수 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카메라의 감도(ISO)는 2500, 조리개는 f2.8, 셔터속도는 25초, 초점은 수동으로 무한대로 맞추면 신기하게도 카메라에 은하수가 담긴다. 이렇게 촬영한 뒤 포토샵 등 보정 프로그램에서 밝기를 밝게 해주면 현장에서 본 은하수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지는 멋진 사진이 된다. 새벽 5시가 되자 서쪽 하늘은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고, 동쪽 하늘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늘을 품은 호수 또한 오렌지빛, 체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하늘과 호수가 연출하는 신비로운 풍경화에 빠져들었다. 호수의 아침은 쌀쌀했지만, 청정한 아침 기운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늘호수는 나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판공초 호수는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엔딩 장면의 배경지로 유명한 곳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곳곳에서 “All is well(모든 것은 잘될 거야)!”이라며 힘들 때와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용기를 낸다. 또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떻게 오늘을 살까?”, “나중에 후회할 짓은 하지 말자.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봐.”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름다운 판공초를 배경으로 열연하던 그 장면이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았다. 2부 유럽으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지중해에 떠 있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소국 - 몰타 몰타를 떠올리면 내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만들었던 어느 여인이 생각난다. 발레타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있는 <잠자는 여인>이다. 오른손을 베개 삼아 모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풍만한 몸매의 여인상. 길이 9.5cm, 폭 6cm에 불과한 작은 여인상이지만, 나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이 여인상은 4,500여 년 전의 아득한 옛날,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무덤에 넣어준 부장품이다. 갸름한 얼굴에 굵은 팔뚝, 풍만한 몸매, 주름진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은 오랫동안 일렁였다. 거대한 요새가 연상되는 몰타의 수도, 발레타: 지중해 한가운데 보석처럼 박혀 있는 몰타는 몰타 섬, 고조 섬, 코미노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다. 몰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남쪽에서 93km, 튀니지에서 북동쪽으로 28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우리나라의 강화도보다 조금 더 큰 섬에 약 40만 명이 살고 있다. 이 작은 나라는 남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잇는 요충지인 탓에 오래전부터 숱한 외침을 받았고, 주인도 수시로 바뀌었다.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비잔티움, 오스만튀르크, 성 요한 기사단이 섬을 지배했고, 근세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차지했다. 시련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몰타는 약 7천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었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할 사플리에니 지하신전, 타르시엔 신전, 하자르 임, 임나이드라, 주간티아 신전 등 온 섬을 뒤덮고 있는 거석 신전들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발레타와 스리시티, 임디나, 라바트, 비토리오사 등을 방문해보면 마치 중세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연노랑 사암으로 만든 오래된 건물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크식 교회와 궁전 등이 중세시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는 16세기 성 요한 기사단이 건설한 성벽 도시다. 한 바퀴 둘러보니 바다에서 시작해 도시 전체를 몇 겹으로 둘러싼 성벽이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실제로 성 요한 기사단은 1565년 5월부터 9월까지 계속된 오스만튀르크(지금의 터키)의 공격을 보기 좋게 막아냈다. 그것도 9,600여 명의 군사로 5만여 명에 달하는 적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다. 치열한 몰타 공방전에서 승리한 후 기사단장은 발레트를 철옹성의 요새도시로 만들었고, 발레타는 몰타의 수도로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발레타 구시가지는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발레타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가 성 요한 성당이다.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성 요한 성당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성당의 외관은 수수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보면 장엄하다. 기둥과 바닥, 천장에는 세밀한 조각과 바로크 양식의 그림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본당 양옆으로는 기사들의 기도실이 있는데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나라별로 나뉘어 있고, 바닥에는 역대 기사단장의 대리석 묘가 안치되어 있다. 성 요한 성당에는 몰타 최고의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카라바조의 <세례 요한의 목을 벰>이 있다. 1608년경 가로 5.2m, 세로 3.6m의 캔버스에 그린 대작으로,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분위기 속에서 참수당하는 성 요한. 그림 속의 얼굴을 감싼 노파가 비명을 지르는 듯하고, 철창 속의 죄수는 고개를 숙여 공포스런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사형 집행자는 단번에 목을 베지 못하자 몰래 뒤에서 단도를 꺼내려고 한다. 아무리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지만, 이 그림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한눈에 반했던 <잠자는 여인> 조각상은 발레타 남쪽 파오라에 있는 할 사플리에니 지하신전에서 발견되었다. BC 2500년에 만들어진 지하신전의 가운데 방에서 각종 도자기 파편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다른 여인상과 마찬가지로 부장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레타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몰타 선사시대의 도자기, 도구, 장신구, 조각상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한 고조 섬: 몰타는 인류가 최초로 건축한 타르시엔 신전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3600년경에 세워진 이 신전의 입구를 들어서면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양옆에 타원형의 방이 있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가 있다. 역시 이 통로를 지나면 타원형의 방이 있는 구조다. 방의 정면 또는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널따란 돌을 얹어놓은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수렵이 잘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기단석에 새겨진 식물의 덩굴 문양이나 멧돼지, 염소, 황소, 물고기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거대한 돌로 만든 신전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5,600년 전에 만든 신전치고는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몰타 본섬에서 배를 타고 10여 분 가면 고조 섬이 나온다. 고조 섬은 천혜의 휴양지로 몰타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이곳 최고의 명소는 단연 주간티아 거석 신전이다. ‘주간티아’라는 말은 몰타 말로 ‘거인’이라는 뜻이다. 거대한 석회암으로 지었는데 높이는 6m에 수 톤이 넘는 돌들을 사용했다. 이곳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당시 섬의 주민들이 어머니 신으로 숭배하던 거인 여성이 세웠다고 한다. 당시는 모계사회로 여성숭배사상을 고려해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돌을 운반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주간티아 신전 역시 198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임디나 바로 아래에는 서민들의 주거지 라바트가 있다. 이곳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지하묘지인 카타콤베(Catacombe)가 유명하다. 지상에서 5m 정도의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묘지가 나온다. 입구에는 넓은 홀이 있는데, 시신을 안치하기 전에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음이 짐작되었다. 여기서 사방으로 좁은 통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입구부터 석회암을 파내고 만든 묘실이 보였다. 대부분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인데, 어떤 곳은 여럿이 들어갈 만큼 넓다. 가족이 함께 안치되었던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마냥 신기해하며 안으로 한참 들어가니 소름이 오싹 돋았다. 사방이 지하무덤이어도 무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음습한 지하는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하기만 하고 천장 위에서 바람이 느껴졌다. 괜히 모골이 송연해졌고 서둘러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3부 아프리카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아름다운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서는 관문 - 튀니지 튀니지 서남부 지역은 사하라 사막의 관문으로, 풍경이 아름답고 도시와 가까워서 영화 촬영지로 많이 등장한다. 웅장한 협곡이 있는 미데스와 낙타의 목 형상을 한 지형이 있는 옹그제말은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촬영지고, 마트마타와 모스 에스파는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4>에 등장하는 사막과 마을 장면의 촬영지다. 마트마타의 호텔 시디드리스와 모스 에스파에는 지금도 스타워즈 세트장이 잘 보존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사막 촬영지로 유명한 미데스와 옹그제말: 미데스는 알제리 국경에 인접한 산악 오아시스 마을이다. 마을 한쪽에는 수만 그루의 대추야자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건너편 산 가운데 아래로는 S자 협곡이 있다. 수만 년의 시간 동안 침식과 풍화를 거쳐 만들어진 협곡은 아름다웠다. 내려다보니 어질어질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었고, 바닥에는 얕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협곡을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 붉은색의 황량한 돌산이지만 아름다웠다. 물이 있는 골짜기를 따라 대추야자나무가 숲을 이루는 산악 오아시스가 녹색으로 빛났고, 그 너머로는 소금호수가 끝없이 펼쳐졌다.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캐서린과 제프리, 알마시와 매독이 경비행기에서 내려다보던 장엄한 사막 풍경이었다. 다시 차를 타고 간 곳은 옹그제말이다. 이곳 역시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등장했던 곳이다. 옹그제말은 ‘낙타의 목’이란 뜻으로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을 한 언덕이다. 영화에서는 국제지리학회 팀들이 사막의 지형을 조사하여 지도를 만들기 위해 캠프를 차린 곳으로 나오는데, 제프리와 캐서린이 경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착륙하는 장면에서 옹그제말이 배경으로 나온다. 또 알마시가 베르베르족 노인에게 여인의 등 자락을 닮은 동굴에 대해 물어보는 장면,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모스 에스파는 1977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4>의 탄생지다. 마트마타, 숏 엘 제리드 소금호수, 크사르 하다다로 이어지는 튀니지 남부의 황량한 지역에서 사막 장면을 촬영했는데, 그만큼 독특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스타워즈 세트장은 철망에 시멘트를 발라 만든 간이 구조물이지만, 끝없이 펼쳐진 사하라 사막과 잘 어울려 외계의 별에 온 느낌이었다. 열기를 피해 지하에 지은 집과 독특한 크사르: 이곳 베르베르 인은 천 년 전부터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피해 지하에 주거공간을 만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약 6m쯤을 파내려가, 가운데 정원을 두고 양쪽으로 방과 응접실, 창고, 부엌을 만들었다. 이 지역은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에 흙을 파내고 집을 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지하에 집을 지으면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피할 수 있어 쾌적하고 시원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방 안에 들어가보니 시원했다. 튀니지 남서부 사막에는 이곳만의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베르베르족들이 만들어놓은 요새화된 곡물 창고 크사르(Ksar)는 흙을 층층이 쌓아 올려(보통 2~3층) 만든 건물로, 원통형의 지붕을 한 건물들이 집단을 이루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나의 크사르에는 여러 개의 창고가 있는데,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출입이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크사르 하다다와 메데닌, 쉐닌니에는 수십에서 수백, 수천 개의 크사르가 모여 있다. 크사르 하다다의 크사르는 <스타워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메데닌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크사르로 연결되어 웅장한 요새 같았다. 이곳의 크사르는 우르겜마 유목민들이 만들었다. 15세기부터 계속 넓혀 무려 6천여 개가 넘는 방이 있다고 한다. 험준한 산꼭대기에 크사르가 있는 쉐닌니는 천연의 요새도시 같았다. 산 중턱에는 자연적으로 튀어나온 바위를 지붕 삼거나 동굴을 파서 집을 만들었고, 산꼭대기에는 곡물 창고인 크사르를 빼곡하게 만들어놓았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크사르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방치되어 벽체만 남아 있다. 왜 베르베르 인은 이렇게 험준한 산꼭대기에 크사르를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곡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높은 곳에 크사르를 만들고 마을을 이루면, 적의 침입을 빨리 발견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르베르 인은 7세기 말 이슬람교를 앞세워 이곳으로 쳐들어온 아랍족들에게 쫓기고, 또 베니 힐랄 부족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이런 험준한 산꼭대기에 곡물 창고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래전 사하라 사막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나오는 동굴 벽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때는 물이 풍부하고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이었다. 선사시대에 그려진 동굴 벽화를 보면 가축과 양, 염소 등의 그림과 코끼리, 기린, 여러 종류의 사슴, 하마가 그려져 있다. 또한 수영하는 사람의 모습까지도 새겨져 있다. 일행과 함께 낙타투어를 하면서 맞은 사하라 사막의 석양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남았다. 비록 후덥지근한 바람에 날려드는 모래로 입안은 서걱거렸지만, 사막의 지평선으로 내리는 석양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사막은 불모의 땅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곳임을 사하라 사막 여행에서 깨달았다. 4부 아메리카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 쿠스코를 거쳐 공중도시 마추픽추로 가다 - 페루 2014년 여름, tvN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 페루 편이 ‘청춘’이란 화두를 던지며 우리를 설레게 만들었다. 윤상, 유희열, 이적이 마추픽추를 내려다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페루는 우리에게 ‘잉카(Inca)’와 ‘마추픽추(Machu Picchu)’라는 단어로 익숙한 나라다. 잉카제국은 15~16세기에 걸쳐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안데스 지역을 포함한 나미 지역의 대부분을 통합했고, 훌륭한 잉카문명을 꽃피웠다. 그중 하나가 신비로운 공중도시 마추픽추다.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Cuzco)에서 잉카 철도를 타고 마추픽추로 가는 길도 무척 아름다웠다. 세상의 중심이었던 페루의 수도, 쿠스코: 오늘날 페루의 수도는 리마지만, 많은 사람들은 쿠스코를 더 잘 알고 있다. 쿠스코는 옛 잉카제국의 중심도시이자 수도였고, 지금도 전통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원주민 인디오들이 있기 때문이다. ‘쿠스코’라는 말은 이곳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로 ‘세상의 중심’이란 뜻이다. 잉카제국은 세상의 중심에서 오늘날 남미 지역의 대부분을 통치했지만, 16세기에 스페인에게 정복당해 멸망하고 만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잉카제국’은 정확한 나라 이름이 아니다. 스페인 군대가 이곳에 도착해 원주민에게 나라 이름을 묻자 “이곳은 잉카(왕이라는 뜻)가 다스린다.”라고 해 잉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해 ‘잉카제국’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원래 이름은 ‘타완틴수요’다. 즉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 지역에 주요 도시인 ‘수요’를 두고, 이를 기반으로 제국을 다스린 나라라는 의미다. 인천에서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2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페루 리마.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쿠스코로 향한다. 창밖으로 3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줄지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강이 보인다. 안데스 고원을 지나 1시간 20여 분의 비행이 끝나고 쿠스코 공항에 내렸다. 한국은 봄이 시작되는 3월 초였지만 이곳은 남반구라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쿠스코의 주요 명소를 둘러보는데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인디오들이 어린 양과 라마, 알파카를 데리고 나와 사진모델을 자처한다. 한 번 찍는 데 무조건 1달러. 나는 모델료라고 생각하며 이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오후에는 버스로 시내 북쪽에 있는 삭사이와망에 올랐다. 이곳은 방어용 요새 또는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고 한다. 하나에 350톤이 넘는 거석을 지그재그로 쌓아 견고한 성벽을 만들어놓았는데, 이곳에서 매년 6월 24일 태양 축제 인티라이미가 펼쳐진다고 한다. 삭사이와망 성벽 위로 올라가니 쿠스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붉은색 지붕을 한 집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꼭 스페인의 여느 도시 같은 모습이다. 이는 쿠스코가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정복당하고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많은 건물들은 잉카시대 건물의 기초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몇 번의 지진에도 끄떡없이 견딘 코리칸차(태양의 신을 모시던 신전)의 기초 위에 산토도밍고 성당을 지었고, 관공서의 외벽 역시 잉카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쿠스코의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는데 일행 몇몇이 두통과 호흡곤란을 호소한다. 이곳은 해발고도 4천 미터의 고원도시라 반나절만 있어도 고산반응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이때는 빨리 고도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신비로움 가득한 폐허의 도기 마추픽추: 다음 날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에 올랐다. ‘잃어버린 공중도시’라 불리는 마추픽추는 잉카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고, 1911년 미국인 하이럼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 당시 마추픽추는 정글에 묻혀 있던 폐허의 도시였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홀연히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마추픽추 정상에 서자 신비로운 공중도시가 눈앞에 펼쳐진다. 산 정상에 돌로 만든 건물들이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고 골목길도 반듯하게 정비되어 있다. 주변에는 산비탈에 석축을 쌓아 만든 계단식 밭들이 있다. 잉카인들은 이 밭에서 옥수수를 경작해 식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로 우루밤바 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도시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쪼개다 만 바위가 보인다. 잉카인들의 석조기술은 신기(神技)에 가까웠다고 한다. 중앙 광장 위에는 인티우아타나가 있는데, 이곳은 잉카인들의 신, 태양신을 위한 제단으로 쓰였다는 설과 천문대로 이용된 구조물이라는 설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가운데 툭 튀어나온 부분이 해시계 구실을 하고 있어 천문대 쪽에 더 신빙성이 갔다. 마을에는 돌로 만든 정교한 수로가 설치되어 있고 여전히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마추픽추는 산책하듯 걸으면서 사진을 찍고 둘러보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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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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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vs 사람
사람 vs 사람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 2005년 2월 / 319쪽 / 10,000원 ▣ 저자 정혜신 지난 1996년부터 여러 기업에서 중견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자아경영 프로그램 ‘come back to myself’를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
사람 vs 사람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 2005년 2월 / 319쪽 / 10,000원 ▣ 저자 정혜신 지난 1996년부터 여러 기업에서 중견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자아경영 프로그램 ‘come back to myself’를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직장인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연구한 ‘ADD증후군’을 국내 최초로 제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중년 남성들의 삶을 정신의학적으로 살펴본 ‘맨 콤플렉스’ 연구 및 기업경영 전략에 정신의학적 이론을 접목시킨 ‘심리경영’ 등의 연구활동과 아울러 ‘조직원의 잠재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업차원의 정신건강관리 전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는 (주)정혜신 M연구소의 대표로 있으며, Top Man Group의 정신건강 검진 서비스와 처방, 기업체 핵심인재 선발시 사용될 심리 평가 프로그램 개발과 실행에 관련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로는『남자 vs 남자』『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이 각종 유명인사들의 발언과 행태를 체취, 그 속에 담긴 심리적 배경까지 철저하게 파헤친 책이다. 다양한 분야의 이슈메이커들에 대한 그녀의 관찰력은 집요하고도 정밀하며, 그것을 풀어 낸 그녀의 글들은 전문적이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유려하다. 4년 전『남자 vs 남자』라는 책으로 한바탕 화제를 불러왔던 그녀가, 이번에는 그 후속타로『사람 vs 사람』을 통해 소위 유명인들의 행동패턴과 그 이면에 담긴 심리적 기저까지 파헤치고 있다. 얼핏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두 인물, 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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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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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vs 남자
남자 vs 남자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 2001년 8월 / 356쪽 / 9,500원 ▣ 저자 정혜신 저자는 지난 1996년부터 여러 기업에서 중견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자아경영 프로그램 ‘come back myself'를 진행해 오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
남자 vs 남자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 2001년 8월 / 356쪽 / 9,500원 ▣ 저자 정혜신 저자는 지난 1996년부터 여러 기업에서 중견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자아경영 프로그램 ‘come back myself'를 진행해 오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직장인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연구한 ’ADD증후군‘을 국내 최초로 제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중년남성들의 삶을 정신의학적으로 살펴본 ’맨 콤플렉스‘ 연구 및 기업경영 전략에 정신의학적 이론을 접목시킨 ‘심리경영’ 등의 연구 활동과 아울러, 최근에는 ‘조직원의 잠재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업차원의 정신건강관리 전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월간 『신동아』에 「정혜신의 남성탐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 『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이 있다. ▣ Short Summary 정신과 전문의, 그 중에서도 남성 심리 전문가라고 불리는 저자가 이 시대의 ‘한다’ 하는 남자 스물한 명을 분석한다. 전직 대통령에서 연예인, 문학가, 패션 디자이너까지 대체 어떻게 뽑힌 인물들일까 하는 의구심은 ‘VS’로 묶인 절묘한 테마를 보면 해결된다. 이른바 성공한 남자들의 심리 분석을 통해 저자가 보여주고자 애쓰는 바는 그들도 당신과 똑같다는 결론이다. ‘남성 심리 전문가’로 불리며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남성의 마음에 대한 탁월한 공감력을 보여주었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우리 시대 유명남성 21인에 대한 본격적인 심리평전을 펴냈다. ‘심리평전’이란 낯선 용어가 등장한 것은 심리분석이나 인물평전 중 어느 한쪽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이 책의 독특한 성격에서 기인하는데, 저자는 대상 인물을 단지 심리적인 측면에만 국한시키지도, 사회적 맥락 속에만 가둬놓지도 않는다. ▣ 차례 김영삼 vs 김어준 - ‘내 맘대로’ 왕자 / ‘니 맘대로’ 독재자 이건희 vs 조영남 - 완벽하지 ‘못한’ 황제 / 망가지지 ‘않는’ 광대 장세동 vs 전유성 - ‘나’로부터의 도피 / ‘나’를 향한 일탈 이수성 vs 강준만 - ‘마당발’의 닫힌 연대 / ‘단독자’의 열린 고립 박종웅 vs 유시민 - ‘돈키호테’형 소신 / ‘햄릿’형 소신 김윤환 vs 김윤식 - 변화를 ‘쫓는’ 빈 배 / 변화를 ‘품는’ 거목 봉두완 vs 이외수 - 화려한 재능의 눈물 / 치열한 재능의 선혈 정형근 vs 마광수 - 피해의식, ‘시대와의 불륜’ / ‘시대와의 불화’ 김우중 vs 정동영 - 현실 부정의 몰락한 영웅 / 현실 직시의 고뇌하는 인간 김종필 vs 앙드레 김 - ‘나를 위한’ 직업 / ‘나를 거는’ 직업 이회창 vs 이회창 - ‘칼’의 이회창 / ‘저울’의 이회창 남자 vs 남자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 2001년 8월 / 356쪽 / 9,500원 김영삼 vs 김어준 - ‘내 맘대로’ 왕자, ‘니 맘대로’ 독재자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할 ‘김영삼론’ - 김영삼은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까지 만 5년 동안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첫해 90%대까지 치솟았던 YS의 인기는 임기 말에는 10% 이하로 떨어졌고, 현시점에서는 더 바닥을 치고 있다. 근자에 YS를 담당하는 기자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제발 YS를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돌대가리 YS와 붙어먹는 기자 너도 돌대가리’라는 폭언도 퍼붓는단다. YS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박종웅 의원의 육성이다. “내 홈페이지에 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런데 10건 중 9건은 욕이다. 심지어 YS를 왜 자꾸 따라다니느냐며 ‘둘이 호모냐’라는 욕까지 올라온다. 사람들이 YS를 ‘또라이’라고 하고 나를 ‘꼴통’이라고 하는 것 다 안다.” 게다가 한 네티즌은 YS의 막가파식 독설을 비난하며 “이젠 손명순 여사가 나서야 한다”며 비아냥거린다.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공개한 낸시 여사처럼 손 여사가 YS의 행동에 대해 솔직히 국민에게 고백하고 모종의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대단한 독설이지만 현재 그게 YS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솔직하고 감정적인 반응인 듯하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죽은 건 YS의 기(氣)가 셌기 때문이다?! - YS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기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문제는 그 정도가 거의 병적인 수준이라는 데 있다. 그는 전형적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 식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YS는 2000년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이라는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런데 두 회고록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역사를 YS 자신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이란다. 한 시사 잡지에 실린 만평이 걸작이다. 비서관이 그에게 자서전에 대한 시중의 여론이 ‘저질스럽기까지 하다’는 쪽이라고 전한다. 그랬더니 YS는 “그러게 내가 종이도 최고급으로 쓰고 표지에도 금박을 넣자고 했잖아”라며 흥분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걸핏하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YS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내 인생의 낙’이라고 했단다. 물론 YS의 말이다. 강력한 야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말도 예사롭지 않다. “내가 야당 때는 참 무섭게 싸웠어요. 그래서 결국 박정희가 죽은 거예요. 나를 국회의원 제명 안 했으면 박정희는 안 죽었죠.” 그러나 ‘내 멋대로’ 식 사고의 금메달감은 단연 김일성 사망원인에 관한 그의 진단이다.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죽은 건 자기처럼 기가 센 사람과의 회담 준비에 과도하게 신경을 쏟다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듣고 있던 사람은 완전히 할 말을 잃게 된다. 그가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모두 깜짝 놀랬제” - YS는 자신의 존재가 콘서트의 오프닝에서 가수가 처음으로 등장할 때처럼 극적이고 화려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YS는 대단히 강박적인 스타일리스트다. 넥타이를 잘 매고 옷을 잘 입어서가 아니라 내용보다 포장에 관심이 많다는 말이다. YS가 깜짝쇼를 좋아하는 심리적 배경이다. 1993년 3월 육국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후 수석비서관들에게 장난스럽게 YS가 던진 “모두 깜짝 놀랬제”라는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수석비서관은 이렇게 말한다. “김 대통령의 진면목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큰일을 저질러놓고 어른들이 당황하는 것을 지켜보는 악동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표정이었죠.” 신이라 불리고 싶은 사나이 - 사람들이 자주 지적하는 YS의 오만과 독선은 이러한 심리적 패턴을 바탕으로 한다. YS는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성장했고 그런 태도를 신념화했다. 그의 사진을 가만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게 있다. 사진 속의 그는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사진에서부터 그런 습관이 나타난다. 초선의원 시절 자신의 정신적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조병옥 박사와 사진을 찍을 때도 뒷짐을 지고 있으며, 46세의 최연소 야당 총재로 국회에서 대표 연설을 할 때도 그렇다. YS는 다른 사람을 언급할 때 호칭을 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대중이가, 이인제가, 이회창이는….” 매사가 그런 식이다. 오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또 그가 잘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것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나 박태준 전(前)포철회장, 박철언 의원 등은 모두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YS에게 곤욕을 치른 사람들이다. YS에게 선악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을 지지하면 선이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거나 자신과 반대 입장을 취하면 그건 바로 악이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는 지금 YS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테러리스트?! - 김어준은 1968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세 번 떨어진 후 홍익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 최초의 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이후 무려 3년 동안 이스라엘, 터키, 이집트 등 40여 개국을 여행했다. 미당의 시구를 빌어서 표현해 본다면 ‘지금의 김어준을 키운 건 9할이 여행이었다’. 이집트에서 귀국한 김어준은 여행 관련 IP 사업과 이벤트 사업, TV 다큐멘터리를 기획, 제작하는 일에 종사한다. 배낭여행과 인터넷을 결합한 신종 여행상품을 개발해서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던 김어준은 IMF를 맞아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딴지일보」는 그때 시간은 남는데 할 거는 없고 그래서 심심풀이로 만들어본 개인 홈페이지라고 한다. 그는 아랍을 여행하기 전까지는 아랍인들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 유태인은 머리 좋고 역경을 이겨낸 민족,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랍 버스에 올라와 검문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은 아랍의 편에서 보면 일본 순사였고, 팔레스타인인의 폭탄 투척을 그들의 등 뒤에서 봤더니 바로 우리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김어준이 느낀 충격의 강도나 철학적 고민이 그대로 실려 있는 에피소드다. 그렇게 선입견을 없애고 뒤집어서 생각해본 경험이 「딴지일보」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럼 니가 만들어” - 김어준은 YS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오만과 독선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의 오만과 독선은 오히려 귀엽고 유쾌하다. 「딴지일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철저하게 비주류를 지향한데다 고정관념 없이 핵심을 향해 거침없이 찌르고 들어가는 비판과 풍자 때문이라는 게 인터넷 전문가들의 평가다. 「딴지일보」의 보도원칙이라는 것도 딴지식 표현처럼 ‘엽기적’이다. “독자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독자의 항의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변명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오만과 독선을 바탕으로 한다. 「딴지일보」의 독자들은 김어준과 딴지의 ‘귀여운 오만과 독선’을 충분히 수용하고 즐기기까지 한다. 김어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독자들이 딴지가 잘못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을 해오면 그냥 놔둡니다. 왜냐하면 그 비판 자체는 그 독자가 언론으로 기능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정 귀찮게 구는 독자가 있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 그럼 니가 만들어’.” 대단한 통찰력에다 얄미울 만큼 한계가 명확하다. '당연한 걸 가지고 씰데없이 폼은‘ - 김어준은 부모의 완전 방임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맛있는 게 있으면 부모님들만 드시면서 “너는 먹을 날이 많이 남았잖아, 짜식아”,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김어준은 그런 통제 없는 시스템 속에서 자율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딴지일보」가 말을 막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거 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무책임한 짓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김어준은 늘 상식에 근거해 판단하려 한다고 말한다. 김어준은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좀 다르다. “저 페미니스트 아니에요.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남자 여자 차별 안 해야 하는 거 상식 아닌가요? 너무 당연한 걸 가지고 지가 페미니스트라고 잘난 척하는 남자들, 저 이해 못해요.” 역시 상식 수준의 역설이다. ‘니 꿈을 이뤄주마’ - 이제 김어준은 딴지사옥을 마련해 주방과 간이 바도 만들어놓고 수많은 딴지 식구들과 함께 삐딱한 책상에 않아서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다. 그가 말하는 딴지그룹의 경영철학도 삐딱하긴 마찬가지다. “저희의 사규가 ‘니 꿈을 이뤄주마’예요. 직장이 바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거죠. 저는 과거에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엔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가 중요하죠.” 어느 해 추석을 앞두고 역지사지의 정신을 설파하는 김어준의 말을 들어보자. “왜 방송은 추석 때마다 성룡 영화를 그토록 재방 삼방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PD들이 골라냈을 텐데, 그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요. ‘니넨 그거 재밌니? 니들이 재미없으면 우리도 재미없어’.” 오로지 ‘나’를 위한 예외 - 미국의 어느 기자가 ‘미국 국회의원들은 모두 다 저능아다’라는 신문기사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 문장을 미리 본 고참 기자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 기사가 나가면 국회의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그러니 한 구절만 추가하자.” 다시 고친 문장을 이랬다. “미국 국회의원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다 저능아다.” 기사가 나간 후 항의한 국회의원을 한 명도 없었단다. 국회의원들은 모두 그 ‘한 명’이 바로 자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이건희 vs 조영남 - 완벽하지 ‘못한’ 황제, 망가지지 ‘않는’ 광대 누구에게나 ‘아픈 곳’은 있다 - 오늘날에는 콤플렉스란 말이 열등감과 같은 뜻으로 일상용어처럼 쓰이고 있다. 개인적 콤플렉스는 인간의 심리적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은 구강기(口腔期), 항문기(肛門期), 남근기(男根期)의 순서로 심리적인 발달을 하며 성장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성인이 되어서도 구강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소아적 의존성을 가진 미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고, 항문기적 성향인 사람은 목표를 정하고 완벽을 추구하며 강박적인 삶을 사는데, 그들은 세상을 경쟁의 원리에 따라 바라본다. 그에 반해 남근기적 성향인 사람은 즐거움 자체를 추구한다. 그들에게 경쟁과 완벽은 의미 없는 논리가 된다. 이렇게 분류할 때 이건희는 전형적인 항문기적 성향의 소유자고, 조영남은 그것을 뛰어넘은 남근기적 성향의 사람으로 본다. 황제의 열등감?! - 이건희는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황태자’를 거쳐 ‘황제’가 된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가 한 다이어트를 ‘황제 다이어트’라 칭하고, 그가 사람들에게 베푼 정을 가리켜 ‘황제의 정’이라는 희한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런데 나는 이건희를 볼 때마다 정상에 선 사람의 고독감보다는 ‘황제의 열등감’을 느끼곤 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건희에게 ‘열등감’이란 단어는 가당치도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인간 이건희’의 일생을 찬찬히 관찰하다보면 열등감이란 키워드만큼 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건희에겐 시비도 걸지 마라 - 이건희의 성격을 정신의학적으로 규정해 보면 ‘강박적 성향’에 해당한다. 이 성향의 심리적 축은 열등의식이다. 강박적인 성격의 특징을 한번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감정기능이 빈약하다. 이건희는 취미가 ‘연구와 생각’이라고 할 정도로 감정보다는 사고가 비대한 사람이다. 이건희는 퇴근 후에도 자기 방에 들어가 한번 앉아버리면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도 2~3일에 한 번씩 아빠 방에 와서 ‘아빠’ 소리 한 번 하고 겨우 5분 정도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었단다. 강박적 성향의 소유자는 타인과의 감정적, 정서적 접촉을 꺼린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의식에는 권위에 대한 공포가 내재화되어 있고 그와 함께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강한 분노와 적개심이 혹시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강한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발간된 독일의 경영전문 월간지 『매니저』에는 삼성그룹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에는 한국에서 이건희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한 독일인이 겪은 일을 소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 독일인은 이웃집의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커 두 번이나 항의해도 통하지 않자 세 번째 항의 차 옆집으로 갔다. 그러자 관리인은 그 집이 이건희의 저택이라고 말하면서 독일인이 세든 집도 이미 이건희 소유로 넘어갔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건희가 항의 소식을 듣고 옆집을 매입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이 개입될 문제를 만나면 아예 그 해결과정을 피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비용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강박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원리원칙을 따지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할 때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이다. 이건희는 삼성직원들에게 ‘신경영’을 전수하면서 “내 말을 적어도 50번 이상 반복해서 테이프를 통해 들어라. 자꾸 들어 외울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몸에 배게 되고 실천이 가능해진다”면서 자신의 방식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직원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삶의 철학이란 것이 반복해서 듣고 보는 것만으로 체득되는 것인가. 문제가 있을 때 그 메커니즘이 머릿속에서 풀리는 순간 문제는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방식이다. 그는 인간관계도 그러한 원칙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눈치다. 강박적 성격의 세 번째 특징은 도덕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들은 예의범절이나 에티켓 같은 것을 지나칠 정도로 중시한다. 이들은 어릴 때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그 권위에 압도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건희도 성격적으로 이러한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건희는 자신이 추구하는 경영철학을 “기업이란 이윤추구 집단이 아니라 높은 도덕성과 강한 동지애로 뭉쳐 최고의 효율을 통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모임”이라고 정의한다. 기업이나 종교단체, 학교, 사회단체 등은 각기 담당해야 할 나름의 몫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기업의 오너이면서 완전한 도덕성을 꿈꾸는 이건희의 욕심은 끝이 없다. 찬바람은 옷섶을 열지 못한다 - 이건희도 개인적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다. 이건희식 사고방식을 한번 그대로 차용해 보자.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순간 문제 해결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건희 자신과 삼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인간 이건희와 삼성의 울타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더 유연하고 여유 있는 ‘남근기적 삶’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도 좋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히트곡이 나의 히트곡 -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도 설교를 계속할 자신이 없어서 목사 되기를 포기했다는 사람이 바로 조영남이다. ‘가수, 화가, MC, 글쟁이, 뮤지컬 배우, 연애쟁이.’ 그가 밝히는 자신의 이력이다. 못생긴 얼굴에다 <화개장터> 외에는 변변한 자기 노래 하나 없는 그가 평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무시 못할 존재로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저는 가수입니다.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입니다.” 언젠가 신문에 기고한 그의 칼럼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걸 자기의 무기로 삼고 인기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이 세상에 있는 히트곡이 바로 나의 히트곡’이라는 그의 배짱이나 당당함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유쾌하게 한다. 군 시절에는 부대를 방문한 박정희 전대통령 앞에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를 열창해 주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죄로 인생을 마감할 뻔하기도 했다. 그게 조영남이란 사람이다. 자기를 망가뜨리면서도 절대 망가지지 않는 사람 - 사람들한테 ‘오버’한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과장된 몸짓과 말투는 조영남의 트레이드 마크다. 예전에 <쟈니윤 쇼>에서 보조MC로 나왔던 그를 기억한다. 턱을 괴고 앉아서 웃다가 팔꿈치가 무릎에서 미끄러져 옆으로 넘어지고, 게스트가 우스갯소리를 할 때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다가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30년을 넘게 대중예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유치함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조영남은 자기를 망가뜨려가면서도 절대 망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못생겼다는 자신의 얼굴이나 두 번의 이혼 경력,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 등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쯤 되면 그의 약점은 이미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그는 열등감을 훌쩍 뛰어넘어서 진화시킨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 - 연애도 인생도 봄바람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그는 결혼 두 번, 이혼 두 번에 지금은 자유로운 싱글이다. 이젠 세상의 히트곡처럼 세상의 여자가 온통 그의 연애 대상이 되었다. 그가 두 번째 이혼을 하자 한 개그맨은 “딸 가진 부모님들 조심하십시오. 조영남이 이혼을 했답니다”라며 사람들을 웃겼다. 그는 하늘이 내린 예술적 재능과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 자신의 자유로운 삶과 대중의 욕구를 적절하게 충족시키면서 ‘풍요로운 예술가’로 살아간다. 그러한 자유로움의 심리적 근원은 무엇일까.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평생 술독에 빠져 지내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식구들을 예배당으로 내몰고 정작 당신은 장터에서 술에 절어 지내곤 하던 아버지였다. 그가 방학 때 고향집으로 달려와 “어버지, 저 왔어요”하면 아버지는 너무 반가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는 설레임과 벅찬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건희의 부자 아버지와는 달리 무능했지만 아들과 정서적인 끈을 놓지 않아 행복했을 조영남의 아버지. 조영남은 어린 자신에게 화투 ‘육백’을 가르치던 한량기 많던 아버지를 조금의 찜찜함이나 부끄럼 없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자막 좀 비뚤어지면 어때! - TV광고를 연출하는 감독의 이야기이다. CF감독에게 가장 피가 마르는 순간은 완성된 작품을 가지고 클라이언트 앞에서 시사회를 할 때라고 한다. 그래서 그 감독은 가끔 시사회장에서 장난(?)을 친단다. 그 회사의 이름이나 브랜드명을 표시하는 자막을 일부러 약간 삐딱하게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클라이언트가 그 삐딱한 자막에 신경이 쓰여 다른 부분에 제대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사 로고 자막만 똑바로 하면 좋을 거 같네요.” 자막을 교체하는 정도의 작업은 일도 아니란다. 비뚤어진 자막 때문에 정작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친다면 이것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없다. 그러나 열등감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실상은 ‘마음의 자막’을 하나 갈아 끼우는 간단한 작업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럼에도 당사자는 죽을 듯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게 우리네 삶인 모양이다. 정형근 vs 마광수 - 피해의식, ‘시대와의 불륜’ ‘시대와의 불화’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래? - 걸핏하면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가 있다. 물론 그때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이 그녀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려고 손만 쳐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남편은 혀를 끌끌 찬다. 자신의 아내가 지나친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야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피해의식’이 있다는 말인즉슨 옳다. 그런데 이따금 그 남자는 그의 아내가 했던 ‘맞을 짓’(?)을, 힘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그에게는 과장된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되고 그러면 어이없다는 상대방의 반응이 뒤따른다. ‘당신, 나한테 무슨 피해의식 있어?’ 이런 경우 아내와 남편 모두 ‘피해의식이 있다’는 진단은 둘 다 틀리지 않다. 정형근 의원과 마광수 교수의 정치행동과 지적 활동을 찬찬히 분석하다보면, 사람들이 피해의식을 가지게 될 때 생기는 양면성 혹은 그때의 미묘한 심리적 차이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최악의 서울대 총학생회장 - 작년 11월 한 인터넷 웹진에서 ‘역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중 최악의 인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네티즌 선거를 실시했다. 당선자(?)는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형근이었다. 그가 뽑힌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1980년대 공안검사 시절부터 민주화 인사에 대한 고문을 주도했고, 둘째로 서울대라는 시가 2억 원짜리 브랜드를 팔면서 학력주의를 조장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마다 신빙성 없는 폭로전을 펼치며 ‘식물국회’로 몰고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사결과를 보면서 정형근이 6.8부정선거를 규탄한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의 정형근과는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미지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정형근은 194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경남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후 법대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을 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미국 미시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다. 10년 동안의 검사 생활을 거쳐 안기부에서도 핵심 요직만 역임하다가 잠깐 동안의 변호사 생활을 거쳐 지금은 한나라당의 재선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4남2녀 중 장남으로서, 가난에 대한 처절한 기억이 있다. 아침 점심을 샘물로 대신하면서, 물론 대학도 고학으로 마쳤다. 거친 환경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그의 고난과 성공은 얼마나 큰 희망을 안겨주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2000년 현재의 젊은이들은 정형근을 역대 최악의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꼽고 있다. ‘양식 있는 엘리트가 어떻게 고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 1983년 초,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이 제일 유능한 검사를 뽑아오라고 지시해 안기부, 검찰, 법무부에서 각기 1등에서 10등까지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 세 군데 모두에서 1등으로 추천된 사람이 정형근이었다. 이렇게 출발부터가 화려했던 그는 엘리트주의가 뼛속 깊이 각인된 사람이다. 그가 안기부 대공 수사국장으로 재직시 박노해 시인에게 했다는 말은 워낙 유명하다. “너 같은 공돌이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부하들을 거느릴 수 있느냐. 너의 시나 글들은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 써준 것 아니냐.” 정형근은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운동권 인사 중에서도 자신의 출신학교인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어야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고문 국회의원 정형근을 심판하는 모임’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이 그의 고문 전력을 문제 삼았지만 정형근은 명예훼손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펄쩍 뛴다. 당시 현역 의원이던 서경원은 정형근에게 고문을 당해 피를 세 그릇이나 쏟았다고 증언을 하고, 고문의 현장에서 그와 몸서리쳐지는 대면을 했다는 증언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정형근은 당당하게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서울법대와 검사 출신의 양식 있는 엘리트가 어떻게 국민의 대표기관을 때리고 피를 세 그릇이나 받아낼 수가 있습니까?” 그의 억울한 사연(?)은 계속된다. “안기부 조사실에는 비디오카메라가 다 설치돼 있습니다. 다 찍히는데 어떻게 고문을 합니까? 내가 수사할 땐 그 많은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고문 시비가 한 건도 없었습니다. 정형근 이름으로 고소당한 것 있습니까?” 강준만 교수의 말처럼, 모두가 억울하다니 하루 빨리 ‘고문조작 의혹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모든 진상을 규명해 이 나라를 영원히 고문 없는 나라로 만들어야 옳다.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 죄? - 정형근의 안기부 재직 시절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도 했겠지만 나름대로 기준과 잣대를 갖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안기부 근무시절 사회가 좌파이념으로 물결칠 때였던 만큼 나라도 몸으로 막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낸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나름대로의 소신’은 몰가치적인 현상에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소신이란 ‘객관성’이나 ‘공동선(共同善)’을 담보로 할 때 그 진정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나를 인간적으로 매장시키고 죽이려 하는데 가만 앉아서 죽을 내가 아니다. 내가 죄가 있다면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확고한 소신을 가진 재선의원 정형근에겐 아직도 음습한 공작정치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러한 요인들은 정형근에게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폭로전문가의 폭로정치에 대한 피해의식 - 정형근 의원은 정치권을 긴장시킬 만한 발언의 소재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 최고의 전략정보통이다. 한 신문에 실린 시사만화는 그의 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의기양양하게 ‘폭로용 뻥튀기’ 기계를 돌리고 있는 정형근에게 ‘정치권’이란 이름의 사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꼭 이럴 때 ‘뻥’ 해야겠어?”라고 묻는다. 이럴 때 그가 폭로하는 내용의 실체적 진실은 두 번째 문제다. ‘뻥’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하게 가공해서 적시에 활용하는 능력 면에서 단연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다. 게다가 그의 ‘정보 공개’는 최종적으론 늘 정치권을 겨냥하기 때문에 파괴력이라는 면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맨 출신답게 폭로정치나 전력 시비 등의 여론에 대응하는 패턴도 지극히 전략적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무조건 허위라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라.” 이때 누군가 그가 폭로한 정보의 허구성을 지적하면 ‘여러 가지 확인 할 수 있는 정황과 근거가 있었다. 지금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그의 주변 인사들은 정형근의 이런 전략적 발언들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다. 이제 약속대로 - 이문열의 「약속」이라는 단편소설이 떠오른다. <머리는 좋지만 너무나 가난해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던 한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은 꿈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한 노인의 영혼을 만나 특별한 약속을 한다. 앞으로 소년이 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줄 테니 그 힘을 가지고 타살을 당했으면서도 자살로 처리된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것이다. 소년은 목숨을 담보로 그 약속에 응한다. 그 약속을 하고 십여 년이 지난 후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다. 노인과의 약속을 위해 다시 그 사건을 조사하지만 자신의 친아버지와 장인까지 그 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알고는 재조사를 포기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검사의 꿈속에 노인이 나타난다. 이제 오늘로서 그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난다며 슬픈 얼굴로 검사를 쳐다보던 노인은 ‘왜 힘 있는 사람을 만들어주었는데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았느냐’고 하소연하다가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한다. “이제 약속대로 가세.” 다음날 그 검사는 자는 듯이 죽어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정형근은 이제 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려운 사람 편에 서기 위해서” 검사가 되었다는 자신과의 굳은 ‘약속’이 지켜지길 바란다. 자신에 대한 세간의 의혹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밝힌 후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만을 돕는 전문적인 ‘인권변호사 정형근’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야한 남자(?) - 마광수는 야하다는 말의 의미를 ‘들판’이라는 개념의 ‘야(野)하다’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난만하게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가꿔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겉은 전혀 야하지 않은데 속만 야한 사람이 바로 마광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광수라는 인물을 그의 속마음(야한 남자)으로 인식한다. KAL기 폭파범이었던 김현희의 범죄 사실에 앞서서 사람들이 주목했던 건 그녀의 뛰어난 미모였다. 사람들의 인식이란 많은 경우 그렇게 일차원적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마광수는 특이하다. 많은 사람들이 겉이 야하지 않은 마광수를 ‘야한 남자’라고 인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광수 습격사건 - 1992년에 모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마광수 습격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은 『즐거운 사라』 개정판에 대한 외설 시비 사건으로 부르지만, 법률적으로 표현해 보면 현직 대학교수인 마광수가 형법 244조 음란물제조 혐의로 전격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한 사건이다. 사건의 조짐이야 그 전부터 있었다. 1990년 마광수의 소설 『광마일기』는 음란성을 이유로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는다. 이어 1991년에는 두 편의 소설로 관계당국이 제재결정 1회, 경고 2회를 내렸고 심지어 FM 라디오에서 외설스러운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방송출연금지’ 처분을 받기도 한다. 1991년 7월에 출간된 『즐거운 사라』 초판은 타의에 의해서 나온 지 한 달 만에 출판사측이 자진 절판을 하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즐거운 사라』 개정판의 외설 시비로 인해 사법적 제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은 20세기 대한민국의 문화적 후진성과 야만성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야한 교수’라서 조교를 성희롱한 것도 아니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솔직하게 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교수에서 전과자가 되어 6년여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교권과 표현의 자유를 유린당한 데 대한 울분으로 마광수는 오랫동안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에조차 무기력해져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냈으며, 아울러 자신을 변태성욕자나 다중인격자로 보는 사람들의 이상야릇한 시선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고 한다. ‘시대와의 불화’라고 표현하기조차 민망하다. ‘사라’ 사건 이후 지금까지 그는 투사 아닌 투사가 되어 심한 피해의식에 시달리면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솔직하게 발가벗기 - 한 중견작가의 수필 한 대목이 기억난다. 데뷔 초창기에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소설을 쓸 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하는 일이었단다. 요란한 섹스 장면이나 지극히 비윤리적인 행위를 묘사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부모나 형제, 애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상상력이 위축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닐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느냐고 의아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등의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 면에서 마광수는 거리낌이 없다. 무한대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의 글은 솔직하다. 그는 모든 글쓰기의 기본 심리를 노출증에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솔직하게 발가벗기’가 글쓰기의 근본 동인이요, 좋은 글의 첫째 요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광수는 옳다 - “21세기를 맞이한 지금에 있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가장 뼈아프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여지껏 끌어안고 있는 ‘문화적 촌티’다. 이러한 ‘문화적 촌티’는 문화독재적 사고방식과 수구적 봉건윤리로부터 기인하는데, 이 ‘문화적 촌티’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고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표현의 자유 억압’과 변화의 거부, 그리고 ‘성의식의 이중성’인 것이다.” 명쾌하기는 하지만 때론 너무 선정적으로 보여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마광수 주장의 핵심이라 할 만한 말이다. 마광수는 지금까지도 계속 시대와 불화를 빚으며 심한 우울증과 막연한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다. ‘사라’ 사건 직후 『인터내셔널 헤롤드 트리뷴』지는 마광수를 가리켜 “한국의 외로운 에로티카의 장인”이라고 표현했는데, 마광수는 지금까지도 그런 외로움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1995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회는 「이 시대의 가장 음란한 싸움에 대한 보고」라는 책자 한 권을 발간했다. 『즐거운 사라』 사건을 둘러싼 성에 대한 문화사적 논쟁과 마광수의 사상과 문학 세계를 집대성한 『마광수는 옳다』라는 책인데, 그 서문의 한 구절은 우리에게 ‘마광수’라는 인물에 관련된 만만치 않은 화두 하나를 던져준다. “우리 학생들은 일상생활에서 마광수 교수가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을 『마광수는 옳다』라고 정하여 일종의 선언을 하고 있다. 이 선언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영혼까지 파괴하는 피해의식 - 피해의식은 나만 손해 본다는 느낌이다. 피해의식은 또 다른 피해의식을 불러일으켜 인간관계에 신뢰가 없어지고 불신이 팽배해진다. 그러므로 결국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이유 없이 손찌검을 하는 남편과 오래 살아온 아내들 중에는 은연중에 ‘혹시 내가 맞을 짓을 해서 그런 건지 몰라’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한 개체로서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을 물론이고 영혼까지 황폐화된다. 어떤 경우에도 한 개인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피해의식을 갖게 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옳지 못하다. 김종필 vs 앙드레 김 - ‘나를 위한’ 직업, ‘나를 거는’ 직업 당신에게 직업은 무엇입니까 -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지금의 직업과 연관을 맺은 시기가 비슷하다. 김종필 총재는 1961년 35세의 나이로 5.16을 통해 정치와 연을 맺었고, 앙드레 김은 1962년 25세의 나이로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오픈하면서 패션계에 데뷔했다. 그 이후 4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업세계에서 늘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철저하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인이면서도 대중을 별반 의식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종의 ‘유아독존’형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직업의식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업인’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김종필 총재와 앙드레 김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자. ‘직업인 김종필’은 없다? - 김종필의 직업은 정치인이다. 1970년대 초와 1990년대 말, 두 번에 걸쳐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현재 9선의 국회의원인 그의 직업이 정치인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5.16이라는 무대를 통해 시작된 그의 정치인생이 어느덧 40년이다. 거의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한 직업적 노하우,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성실성이나 끈기 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감히 넘보기조차 어려운 기록이다. 그렇다면 40년의 정치 경력을 자랑하는 김종필도 당연히 직업적 예찬론의 한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보인다. 왜 그럴까. 1980년 5월 초 당시 대권을 꿈꾸고 있던 김종필에게 한 언론인이 ‘대통령직이 직업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직업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직업인이라고 봐서도 안 된다.” 그가 말하는 ‘대통령직 직업불가론’의 핵심적인 단어는 ‘사심(私心)’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든 사심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종필의 단호한 태도를 보니 의아한 생각이 든다. 혹시 김종필의 마음속에는 직업의식이라는 ‘틀’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김종필이 몸담고 있는 정당의 지지율이 겨우 3%이며,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60%에 달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김종필의 애매한 직업관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다. 1999년 월간지 『신동아』에서 유력 정치인들의 정치 행태를 조사, 분석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조사결과 김종필의 정치스타일에 대한 불만으로는 기회주의, 변신, 편법, 생존적 처세 등의 단어가 1위(17.9%)로 꼽혔다. 다음으로는 애매모호함, 어물 슬쩍, 의뭉, 선문답식(10.7%), 현실 안주, 미온적, 2인자 처세(9.6%), 구시대, 수구적(7.5%) 등의 순서로 지적됐다. “기회주의적 처신과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 그게 김종필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인식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 - 김종필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5.16혁명에 참여했다. 당시 김종필은 엄청난 결정들을 대담하게 내려가면서 상황을 끌고 나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패기만만한 혁명아의 한 전형이었다고 한다. 1962년 실질적인 2인자 김종필은 박정희의 냉혹한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그는 1963년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날아갔다. 외유를 강요당한 것이다. 너무 일찍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알아버린 30대 후반의 사내에게 8개월간의 유럽여행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김종필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알아서 긴다는 것이다. ‘쇼당패’ 정치 -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그 다음은 김영삼 최고위원이다. 최고위원도 다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김영삼 최고위원과 나란히 걷지 않고 뒤따라간다. 민주화가 됐다지만 무릇 사회와 조직에는 상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은 유교적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임금이 임금답지 않더라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배웠단다. 불교적인 집안에서 자라지 않아 윗사람을 ‘부처님 모시듯’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YS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그 유명한 ‘홍곡(鴻鵠)과 연작(燕雀)’의 발언을 비롯,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명언(?)들을 줄줄이 쏟아낸다. 김대중 정권 창출의 한 축이었으면서도 1997년 12월의 국회연설은 그의 깍듯한 몸가짐을 잘 보여준다. “김대중 당선자께서 정계에 봉사하시려는 참뜻을 보람 있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김종필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들에겐 대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한 정치인의 지적이 헛말은 아닌 듯싶다. 김종필의 정치는 어떤 면에선 ‘쇼당패 스타일’이다. 고스톱에서 쇼당이란 내가 1등을 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차선의 전략이다. 쇼당패를 만들려면 판세를 읽는 절묘한 감각과 나머지 두 사람이 필요로 하는 패가 내 손에 있도록 상황을 몰아가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김종필은 천부적인 ‘쇼당패’ 정치 감각을 타고났다. 권력욕이 없는 사람(?) - 김종필은 조선 영조(英祖) 이래 가장 오랫동안 권력의 핵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언제나 양지만을 쫓아 변신하는 권력형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김종필이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에겐 권력 그 자체가 1차적인 목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종필에게 있어 권력이란, 김종필이란 한 개인이 추구하는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실현시켜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종필이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정치적 업적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문화계에 끼친 공로는 만만치 않다. 또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는 개인적인 삶의 즐거움이나 윤택함도 동시에 챙겼다.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역임한 4년 6개월간의 총리 시절에 대해서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인간적인 교류 외에 특별한 일을 했을 리 없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 하의 파워 총리로서 재임한 1년 6개월의 기간 동안에도 그가 국정 현안에 대해 어떤 중요한 발언을 하거나 결단을 내렸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자신의 개인적 삶을 즐기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힘은 좋은데 일은 안 하는 머슴’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을까. 4.13총선 후 골프만 치러 다니면서도 늘 당당하다. “왜 유독 우리집 양반이 골프 치는 것만 그렇게 비난하느냐. 박세리나 박지은이 골프 치는 것은 국위선양이라고 하면서…”라고 그의 부인이 했다는 말은 평소 김종필이 지닌 생각을 잘 대변해주는 듯하다. 구분이 없다는 건 확실히 무서운 일이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의 길 - 얼마 전 김종필은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한 야당의원의 한마디가 걸작이다. “그 사람이 불출마 선언을 하는 건 반에서 꼴찌 하는 학생이 서울대를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쯤 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김종필처럼 ‘르네상스적 교양으로 탄탄하게 무장된 사람’이 왜 이런 ‘험한 뒷모습’을 보여주는지 안타깝다. 김종필의 좌우명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아닌가. 칠순의 노인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느껴진다면 몇 마일의 길을 더 가지 않고 책을 보면서 쉬거나 편안하게 잠을 청하면 될 일이다. 아무도 안 말린다. 홍보가 필요없는 ‘국민디자이너’ - “앙드레 김이 새삼 무슨 홍보가 필요하겠어요?” 옷로비 청문회 건으로 엄청난 광고효과를 보았다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앙드레 김이 했다는 말이다. ‘국민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이 괜히 붙었겠는가. 1982년, 패션 강국 이탈리아의 대통령은 앙드레 김에게 문화공로훈장을 수여했고, 1997년에는 패션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의 기념패션쇼 이후 지난번의 시드니올림픽까지 연거푸 4차례 올림픽무대에 서왔는데, 각국마다 내로라하는 유명 디자이너가 많지만 올림픽 행사에 초청받기는 그가 유일하단다. 샌프란시스코시(市)는 1999년 11월 6일을 ‘앙드레 김의 날’로 선포했다. 해외에서 패션 외교사절이라고 부를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놀랄 만한 사건이다. 고독 속에서 탄생한 예술, ‘패션 오페라’ - 그는 날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국내외 14개 신문을 정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해외 패션쇼가 없는 경우 그는 대부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그의 의상실에서 작품구상과 제작에 매달린다. 자신의 직업에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사람이라서 별일이 없는 한 이 스케줄엔 변동이 없다. 저녁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87개 나라 대사관에서의 중요기념일 리셉션에 참가하거나 국내에서 열리는 음악회, 무용, 연극, 콘서트 등을 관람하며, 그 나머지 시간에는 텔레비전을 본다. 5남매 중 넷째지만 부모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나서 명절 때는 꼼짝없이 아들과 둘이서만 지내야 한다. 그에게는 ‘문화적 풍성함’과 ‘일상적 가난함’이 공존한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목숨을 건다고 할 만큼 치열하고 엄숙하다. 그는 매년 2~3회씩 해외 패션쇼를 갖는데 한 번 패션쇼를 할 때 필요한 옷이 약 1백70벌이란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에 한 개씩의 작품구상과 아이디어 스케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퇴근 후 사람들과 어울려 호프집에도 가고 노래방에도 가는 따위의 평범한 생활은 해볼 짬이 없다. “예술은 고독 속에서 탄생된다”는 글을 읽고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고백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건 40년의 생활이 실제로 그렇게 일을 중심으로 치열했기 때문이다. 앙드레 김은 패션쇼에 그의 창작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쏟아 넣는다. 그는 패션쇼란 오페라처럼 웅장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며, 의상과 음악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패션쇼를 ‘패션 오페라’로 규정한다. ‘앙드레 김’ 브랜드의 독특한 자산가치 - 앙드레 김이 드디어 적당한 사업파트너를 찾았는지, 머지않아 ‘앙드레 김’ 향수를 비롯한 화장품이 나올 예정이란다. 또 청소년을 위한 캐주얼의류와 홈패션 그리고 골프의류도 준비중이라니 흥미진진하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로얄티 지불을 위해서 그의 사업파트너가 제시한 ‘앙드레 김’이라는 브랜드의 자산가치는 도대체 얼마였을까. 심리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앙드레 김’이란 이름은 독특한 자산가치를 지닌다. 의상을 디자인하는 패션디자이너로서, 패션 오페라를 기획하는 엔터테이너로서 직업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독특한 예술가, 앙드레 김. 80세가 넘어서도 계속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단다.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일상과 직업의 황금비(黃金比) - 밥 위에 카레를 끼얹어 먹을 때 카레를 끼얹은 부분이 5, 흰밥이 보이는 부분이 3일 때 카레라이스의 맛이 가장 좋게 느껴진다고 한다. 미술에서도 5대 3의 비율은 황금비라 부른다. 사람은 이 구도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일과 삶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무엇이 5가 되고 무엇이 3이 되어야 황금비가 되느냐에 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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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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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기
칭기스 칸 기 라시드 앗 딘 지음/김호동 역주 사계절/2003년 10월/506쪽/32,000원 ▣ 저 자 라시드 앗 딘 이란 중부의 도시 하마단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익힌 제약과 의술 지식을 바탕으로 몽골 군주 일 칸의 궁정에 출사하여 문…
칭기스 칸 기 라시드 앗 딘 지음/김호동 역주 사계절/2003년 10월/506쪽/32,000원 ▣ 저 자 라시드 앗 딘 이란 중부의 도시 하마단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익힌 제약과 의술 지식을 바탕으로 몽골 군주 일 칸의 궁정에 출사하여 문관으로서는 최고직인 재상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일 칸국의 군주를 시해했다는 정적들의 모략으로 처형당했다. 역사학을 비롯해 신학․식물학․약학 등 광범위한 분야의 저작들을 남겼으며, 재상 시절 가잔 칸의 명을 받들어 집필한 『집사』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최초의 세계사’로 칭해지고 있다. 중세 이슬람권 최고의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집사』의 몽골사 관련 부분은 오늘에도 그 독보적인 사료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역 주 김호동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황하에서 천산까지』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이 있으며, 주요 역서로는 『유목사회의 구조』『칭기스 칸』『유라시아 유목제국사』『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역사서설』이 있다. ▣ Short Summary 『집사(集史』는 ‘연대기의 집성’이라는 원제목이 시사하듯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고 통치했던 여러 군주들의 연대기를 종합하여 서술한 것일 뿐만 아니라, 몽골 이외에도 중국, 인도, 아랍, 투르크, 유럽, 유태 등 여러 민족들의 역사까지도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망라하여 서술한 이런 규모의 저술은 그때까지(13~14세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집사』를 가리켜 ‘최초의 세계사’라 부른다. 『집사』의 국역본 전3권 가운데 제2권에 해당되는 『칭기스 칸 기』는 분량이 다른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칭기스 칸의 조상들의 사적, 본서의 대종을 이루는 칭기스 칸의 일대기, 그가 남긴 유무형의 유산들을 정리함으로써, 몽골제국 건설의 전 과정을 주도면밀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서술했다. 그리고『칭기스 칸 기』는 칭기스 칸의 일생을 크게 여섯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세계 각지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병렬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런 서술 체제를 보면 『집사』가 무엇 때문에 ‘최초의 세계사’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차 례 제1편 열조기 제2편 칭기스 칸 기 1장 칭기스 칸의 계보 2장 칭기스 칸 일대기 3장 성훈․천호일람 칭기스 칸 기 라시드 앗 딘 지음/김호동 역주 사계절/2003년 10월/506쪽/32,000원 제1편 열조기 투르크인에 관해 믿을 만한 역사가들이 진술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몽골 종족들은 에르게네 쿤으로 갔던 두 사람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거기서 밖으로 나온 무리들 가운데 중요한 수령이 부르테 치나였고, 알란 코아의 남편인 도분 바얀과 일부 종족들이 그에게서 나왔다. 앞에서 말한 도분 바얀은 알란 코아라는 매우 정결한 부인을 얻었는데, 그녀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다. 하나는 벨구누트였고 또 하나는 부구누트였으며, 몽골의 두 종족이 그들의 후손에서 나왔다. 이제, 칭기스 칸과 그의 친족들의 지파에 관한 일화와 역사와 계보에 대한 설명을 도분 바얀과 알란 코아에서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자. 알란 코아의 후손들에게서 수많은 지파와 종족들이 나왔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의 수를 헤아린다면 백만도 넘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조상들의 계보를 잘 보전하고 있고, 그 무리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자식이 태어나면 그에게 계보를 가르쳐 주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계보를 분명하고 명료하게 알고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알란 코아의 남편인 도분 바얀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알란 코아가 과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천막 틈 새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와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출산할 때가 가까워지자 남편의 형제와 친족들이 모여 왔으나, “당신들이 나에 대해서 품는 어떠한 의심도 옳지 못하다. 내가 밴 이 자식들은 특별한 부류에 속한다. 그들이 장성하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군주와 칸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게 생긴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당신들과 평민 종족들에게 확실해질 것이다.”라는 설명을 마치자 그들은 더 이상 그녀를 비난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알란 코아에게서 세 아들이 태어났다. 큰아들은 부쿤 카타키였고, 가운데 아들은 부스킨 살지였고, 막내의 이름은 보돈차르 카안으로, 칭기스 칸의 계보는 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세 아들에게서 생겨 나와 모두 ‘니르운’이라고 불리는 - 즉, 순결한 허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 수많은 지파와 부족들은 극도의 존경을 받았다. 보돈차르는 수많은 몽골 종족들의 지휘자이자 군주로, 매우 용맹하며 출중했다. 보돈차르에게 있던 두 아들 중 큰아들 부카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부카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두툼 메넨은 칭기스 칸의 지파가 그에게로 소급된다. 그리고 두툼 메넨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여덟 명이 살해되었고 생존한 한 사람이 카이두 칸이었다. 카이두 칸은 칭기스 칸의 6대조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칭기스 칸의 조상들의 계보는 그 세 아들 중 바이 싱코르에게로 연결되어 있다. 툼비나 카안은 바이 싱코르의 아들이고, 칭기스 칸의 4대조이다. 툼비나 칸에게 있던 아홉 아들 중 여섯째 아들 카불 칸의 명성은 몽골 종족들 사이에서 매우 높았고, 자기 휘하에 있던 종족과 추종자들의 지도자요, 군주였다. 카불 칸은 칭기스 칸의 3대조이다. 또한, 카불 칸에겐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쿠툴라 카안이 군주가 되어 얼마 동안 칸의 지위에 있었으나 쿠툴라 칸이 죽은 뒤 그의 조카이자 바르탄 바하두르(칭기스 칸의 조부)의 셋째 아들인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군주가 되어 다스렸다. 이수게이 바하두르는 칭기스 칸의 아버지로 몽골의 여러 종족들의 군주였고, 그의 형과 아우들, 즉 그의 숙부와 사촌들 모두가 그에게 복속했으며, 합의에 의해 그를 자기들의 군주로 지명했다. 제2편 칭기스 칸 기 제1장 칭기스 칸의 계보 앞서 나왔던 기(紀)들과 일화들 가운데에서 설명했듯이, 칭기스 칸은 알란 코아에게서 나온 모든 니르운 종족들의 정화였다. 그가 등장한 뒤, 세상 사람들은 그가 하늘의 갖가지 도움으로 특별한 인물로 선택되어 그의 탁월한 위력과 용맹으로 투르크와 몽골의 종족들, 그리고 기타 여러 집단들을 복속시키고 예속민으로 만든 것을 목격했다. 그는 마치 여러 보석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보석 같아서, 그의 고귀한 본성과 정결한 품성은 여러 족속들 사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세상의 여러 왕국들을 장악했고, 그의 위대한 자손들과 유명한 일족들은 지상의 일곱 강역 가운데 여섯 군데에서 왕관과 보좌를 차지하고 행운의 군주가 되었다. 칭기스 칸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통치할 때 모여들어 그에게 복속했던 수많은 종족들은 칭기스 칸이 어렸기 때문에 그에게서 떠나갔다. 그의 어머니 우엘룬 에케는 매우 유능하고 현명했기 때문에 그녀의 힘이 닿는 데까지 그를 보호하고,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남기고 간 재산과 속민과 군대와 추종자들을 지키고 간수했다. 칭기스 칸은 어려운 처지와 수많은 곤경과 갖가지 고통에도 불구하고 매우 용맹하고 대담했으며, 대단히 지혜롭고 능란했고 이지적이었다. 그의 아량과 호의는 그의 명성을 주변에 널리 퍼지게 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 여러 종족들은 그에게 기울어 같은 편이 되려 했고, 결국 그는 강력한 힘을 갖추어 친구들을 승리자로, 적들을 패배자로 만들었다. 칭기스 칸은 먼저 그에게 적개심을 품었던 그의 친족과 사촌들과 부형들과 싸워서 그 종족의 대부분을 격살하고 예속민으로 편입했다. 또한 알탄 칸(주르체 종족 출신이며, 다이킴 완얀 아쿠다의 후손들 가운데 군주였던 사람들을 모두 알탄 칸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전쟁에 나서 키타이 지방 대부분을 정복했고, 티베트와 탕구스 왕국, 키타이, 카라장 지방, 투르키스탄 지방과 이란을 정복했다. 그는 조카들과 함께 키랄, 바쉬기르드, 불라르, 킵착 초원, 러시아, 체르케스, 아스를 비롯하여 북쪽 끝까지, 또 남쪽으로는 아비시니아에 이르기까지 점령했다. 솔랑카 지방도 마찬가지로 점령했다.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 칸은 키타이의 나머지 지방을 장악했고, 형제인 훌레구 칸은 바그다드, 시리아, 이란의 나머지 지방을 비롯하여 룸 지방의 가장 먼 곳까지 모두 점령했다. 칭기스 칸에게는 거의 500명에 이르는 부인과 후궁들이 있었는데, 각 종족에게서 취한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몽골식으로 혼인했지만, 대부분은 여러 나라와 지방을 정복했을 때 전리품으로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큰 부인들은, 첫째 명망 높은 네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들의 어머니인 부르테 푸진, 둘째 쿨란 카툰, 셋째 이수겐, 넷째 알탄 칸의 딸 공주 카툰, 다섯째 이수겐의 자매 이술룬이다. 부르테 푸진에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주치, 둘째 차가타이, 칭기스 칸이 사망한 후에 카안이 되어 13년간 카안의 자리에 있었던 셋째 우구데이, 넷째 톨루이였다. 칭기스 칸의 이 네 아들들은 모두 총명하고 유능하며 완벽하고 용맹하며, 아버지와 군대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칭기스 칸의 국가에 네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제2장 칭기스 칸 일대기 제1절(1155 ~1166년) 칭기스 칸이 태어난 날짜와 시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믿을 만한 점성사들은 그가 워낙 위대한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의 사망 연도를 기록했고, 돼지해의 가을 보름날에 사망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몽골의 여러 왕자들과 아미르(군 사령관 ․총독 ․황태자 등을 뜻하는 아라비아어)와 귀족들에게는 그의 생애가 만 72년이었고, 일흔 세 살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행운의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부배(父輩)들과 백숙(伯叔)들에게 속해 있던 모든 종족들의 통치자요 수령이었고, 모두 그에게 복속했다. 그러나 타타르를 비롯한 다른 종족들은 그와 적대했고, 그들 사이에는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의 부인 우엘룬 에케가 칭기스 칸을 임신했을 때도 그가 타타르 원정에 나섰을 때이다.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타타르의 군주인 테무진 우게, 코리 부카와 전투를 벌여 그들을 패배시키고 절멸한 뒤 승리하고 돌아와 그들의 재산과 가축을 약탈하고, 델리운 볼닥이라고 부르는 곳에 진영을 친 후 얼마가 지난 뒤 칭기스 칸은 돼지해(1155년) 행운의 시각에 태어났다. 칭기스 칸은 손에 마치 간(肝)처럼 생긴 복사뼈만한 응혈을 움켜잡고 있었고, 그의 이마에는 세계 정복자의 징표가 분명히 보였으며, 행운과 번영의 빛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이수게이 바하두르는 타타르와 그 군주인 테무진 우게에게 승리를 거두고 적을 눌렀기 때문에 그것을 상서로운 징표라고 생각하여 그 타타르 군주의 이름을 따서 영광스런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제2절(1167 ~1194년) 칭기스 칸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부친 생전에 그를 미워했고 은밀히 적개심을 품었던 타이치우트 종족의 수령들, 즉 그의 친족들은 오랜 원한을 드러냈다. 타이치우트는 가장 막강한 지파였기 때문에, 이수게이에게 복속하던 다른 친족과 군대가 그의 자식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타이치우트 쪽으로 기울어 점차 그들과 연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지녔다. 칭기스 칸에게 적개심을 품은 자무카 세첸도 타이치우트 종족에게로 가서 연합하고, 이키레스 종족, 코룰라스 종족이 타이치우트와 연합하여 3만 명의 기병으로 칭기스 칸을 공격해 왔다. 그들의 의도와 계략을 전해들은 칭기스 칸은 즉시 군대를 정비하고, 그를 지지하며 우호적이던 종족과 족속들 모두에게 소식을 알려 그들을 다 모여서 나누니 13쿠리엔(말의 뜻은 ‘고리’인데, 한 종족이 어떤 지점에 진영을 칠 때 고리 같은 모양을 이루고 그들의 지도자는 마치 그 원 안의 점처럼 위치했기 때문에 쿠리엔이라 불렀다)이었다. 양측의 전투가 벌어졌고 13쿠리엔으로 적군 3만 명의 기병을 격파했다. 적들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고, 우두트와 부르두트 종족의 수령인 우드트와 부르두트가 그에게로 와서 복속했다. 타타르 종족이 알탄 칸의 명령을 받들지 않고 그에게 복속을 표하지 않았는데(타타르 종족들은 키타이 군주인 알탄 칸에게 복속한 예속민이었다), 그를 대적할 만한 힘이 없어 극심한 궁지에 빠지자, 부인과 아이들과 말떼와 가축과 노복들을 데리고 이동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칭기스 칸은 타타르 종족의 무진 술투와 그의 부하들의 이런 소식을 듣고는 공격하여 무진 술투를 붙잡아 죽이고 그들이 갖고 있던 모든 말떼와 가축과 물자를 노략했다. 이 같은 일이 알탄 칸과 그의 아미르들의 희망에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탄 칸 휘하에 있던 대아미르인 칭상은 매우 기분이 좋아서 칭기스 칸을 칭찬하고 그에게 ‘자우우트 쿠리’(키타이 말로 대아미르라는 뜻)라는 칭호를 주었다. 칭기스 칸이 타타르에게 승리를 거두고 그의 군사와 속민들이 많은 보상을 받았을 때, 그는 유르킨 종족을 회유하기 위해 약탈물 가운데 일부를 그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생각했으나, 도중에 유르킨 종족 가운데 일부가 반도들과 연합하여, 칭기스 칸 휘하의 군인 두 명을 살해하고 50명의 말을 빼앗은 뒤 그들의 옷도 벗겨버린 일이 발생했다. 그러한 보고를 받은 칭기스 칸은 분노하며, 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그 후 니르운에 속하는 다른 종족들과 타타르, 메르키트 등 여러 종족들이 서서히 칭기스 칸의 어전으로 와서 그의 군대의 숫자도 많아져, 마침내 상술한 이 27년의 기간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막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제3절(1195 ~1203년) 칭기스 칸의 부친 이수게이 바하두르와 옹 칸은 서로 이웃한 곳에 살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매우 우애 있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다. 옹 칸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쿠르차쿠스의 계승권을 두고 나라 안에서 서로 다투었던 관계로 자신의 형제와 조카들 몇 명을 살해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숙부인 구르 칸이 그를 공격했고, 옹 칸은 패배하여 한동안 떠돌이 신세가 되었는데, 그때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고, 그를 도와 출정해서 구르 칸을 공격하여 나라를 빼앗아 옹 칸에게 맡겼다. 그 같은 빚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의형제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형제’라고 불렀고, “애정은 세습된다”라는 속담처럼 칭기스 칸도 우호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칭기스 칸은 메르키트 종족의 톡타이를 치기 위해 출정하여, 메르키트를 격멸하고 약탈했는데, 그 전투에서 빼앗은 것들을 모두 옹 칸과 그의 누케르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옹 칸은 강력해지고 군대와 속민(屬民)들을 지휘하게 되자 아무 상의도 없이 메르키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그 곳을 치고, 가축과 노복들과 함께 끌고 왔으나 그것을 가운데 어떤 것도 칭기스 칸에게는 주지 않았다. 칭기스 칸은 옹 칸과 연합하여 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부이룩 칸 휘하의 군사령관인 쿡세우 사브락을 치기 위해 출정하여 동이 트면 전투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옹 칸은 자기 군대가 주둔하는 자리에 불을 밝히고는 밤중에 산을 넘어서 가버렸다. 옹 칸이 그 같은 기만술을 써서 이탈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는 도중에, 메르키트의 군주인 톡타이의 동생과 톡타이의 아들이 옹 칸이 없는 틈을 타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자기들의 군대와 영지를 수습했다. 쿡세우 사브락은 군대를 데리고 즉시 추격하여 그곳에 있던 웅 칸을 급습하고, 그들의 모든 재산과 가축을 약탈했다. 옹 칸은 다시 곤경에 처하자 칭기스 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칭기스 칸은 네 명의 대아미르를 보내어 재산을 다시 빼앗아 옹 칸에게 돌려주었다. 칭기스 칸은 옹 칸과 함께 만나 회합을 열고 쿠릴타이(Khuriltai : 몽골인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사이에 옛날부터 관행(慣行)되어 온 합의제도)를 개최하고, 함께 타이치우트를 공격하여 그 종족들은 패주했다. 칭기스 칸은 타이치우트 및 그들과 연맹한 다른 종족들을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이디 코로칸이라는 곳에서 자무카를 격파했고, 쿵크라트 종족도 거기서 복속했다. 자무카 세첸은 원래 칭기스 칸에 대해서 적개심과 악의를 품었고 속임수와 악행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옹 칸의 큰 아들인 셍군에게로 가서 “칭기스 칸은 당신의 적인 타양 칸과 의기 투합하여 계속 사신을 보내고 있다”라고 말하여, 칭기스 칸이 출정할 때를 이용하여 군대를 사방에서 불러 그를 치자고 합의하였다. 칭기스 칸의 숙부인 다리타이 옷치긴과 알탄, 쿠차르 등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그에게 분노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자무카와 셍군 사이의 합의에 동참하여, 모두 연합하여 칭기스 칸을 치기로 했다. 그때 셍군은 아버지와 떨어져 엘레트라는 곳으로 이동한 뒤, “전에 그가 우리의 딸을 자기 아들인 주치를 위해서 청했으나 우리는 주지 않았다. 이제 사람을 보내 ‘딸을 줄 테니 와서 잔치를 벌이고 혼례 음식을 같이 먹자!’고 말하자. 그리고 그가 오면 그를 붙잡아 버리자.”라고 계략했다. 칭기스 칸에게 전갈이 전달되자 그는 출발하였으나 옹 칸과 셍 군이 칭기스 칸을 향해 출정할 계획을 꾸민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옹 칸 휘하의 대아미르인 한 사람이 현재 일어난 일을 부인과 말하는 이야기를 집 밖에 서 있다가 들은 키실릭은 즉시 칭기스 칸에게 신속하게 소식을 알려주었다. 칭기스 칸은 이 말을 잘 이해하고 자신은 아랄에 머물고, 천막들은 산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옹 칸이 마우 운두르산의 전면(前面)에, 붉은 버드나무 숲이 자라는 곳으로 온 소식을 전해들은 칭기스 칸은 즉시 출정했다. 양측 군대는 대치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칭기스 칸의 군대는 적었고 옹 칸의 군대는 많았으나 칭기스 칸과 다른 아미르들도 모두 함께 공격을 개시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케레이트 종족들 가운데 하나이며 옹 칸 휘하의 최정예 군대인 지르킨 종족을 패주시켰다. 그 뒤에 케레이트 종족에 속하는 퉁카이트 종족을 격파하고, 그 다음에는 옹 칸 휘하의 아미르들 가운데 대아미르인 코리 실레문 타이시를 패배시켰다. 그때 셍군이 공격을 하다가 화살 한 대가 그의 얼굴에 꽂혔고, 그로 말미암아 케레이트 군대의 공격이 줄어들고 중지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완전히 파멸할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이 전투는 몽골 종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아직도 칼랄진 엘레트의 전투에 관해서는 되풀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칭기스 칸은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퇴각해서, 옹 칸에게 그가 빚진 은혜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옹 칸의 아들 셍군은 칭기스 칸을 치기 위해 다시 진군했다. 칭기스 칸이 사신을 옹 칸에게 보냈을 때, 그는 쿵크라트 종족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모두 복속시키고 발주나 쪽으로 갔는데, 이키레스 종족에 속하는 보투가 코룰라스 종족에게 쫓겨 패주해 왔다. 그는 그곳에서 칭기스 칸과 연맹하고 함께 머물렀다. 칭기스 칸의 숙부인 다리카이 옷치긴, 자지라트 종족의 자무카, 바아린 종족, 녹타 보올의 일족, 타타르 종족의 아미르 등 모두가 연맹하여 상의하기를, “옹 칸에 대해 야습을 감행하여 우리들 스스로 군주가 되자. 옹 칸이나 칭기스 칸 누구와도 연합하지 말자”라고 말했다. 이러한 내용이 옹 칸에게 전해지자, 그는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여 그들을 약탈했다. 이런 까닭에 다리카이 옷치긴과 케레이트 종족들에 속하는 사카이트 종족, 눈친 종족 등이 칭기스 칸에게 귀순하고 연합했고, 알탄 제운, 타타르 출신의 쿠투 티무르 등은 나이만의 타양 칸에게 가버렸다. 칭기스 칸은 오난 강 원두에서 추종자들을 집결시킨 뒤 옹 칸을 치기 위해 출정했다. 밤에도 멈추지 않은 채 진군하여, 그는 옹 칸이 있는 곳에 이르러 전투를 벌였는데, 옹 칸을 격파하고 케레이트의 군대와 왕국을 모두 빼앗았다. 옹 칸과 그의 아들 셍군은 패배하여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도주를 하다가 옹 칸은 나이만의 군주 휘하에 있던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었고, 그의 아들 셍군도 도망쳐 나가 부리 티베트 지방 일부를 약탈하며 한동안 머물며 파괴를 일삼다가 지베트 종족의 한 사람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것이 케레이트 종족들의 최후이자 그 일족의 국가의 종말이다. 칭기스 칸이 이처럼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군주의 대업이 그에게 확정되었고, 주변에서 종족들이 그에게 귀순해 들어왔다. 칭기스 칸은 거대한 회의를 열고 크나큰 은총에 감사하면서 준엄하고 자비로운 법령들을 선포하고, 상서롭게 칸의 자리에 앉았다. 칭기스 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제4절(1204~1210년) 나이만의 군주 타양 칸은 “지상에서 어떻게 두 사람의 군주가 한 왕국에 있을 수 있겠는가. 칭기스 칸의 직위를 빼앗아 버리자”라고 웅구트 종족의 군주인 알라쿠시 티긴 쿠리에게 사신을 보냈다. 칭기스 칸은 타양 칸이 적대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상술한 이야기를 새롭게 듣고 보름날에 타양 칸과 전투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한동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말 한 마리가 칭기스 칸의 군대에서 도망쳐 나이만 군대 속으로 가버렸고, 그 말이 여윈 것을 본 타양 칸은 전투를 시작했다. 그 날 커다란 전투가 벌어졌고, 타양 칸의 군대가 패배하고 전투에서 물러났다. 타양 칸은 깊은 상처를 많이 입어 움직일 수 없었다. 코리 수바추와 타양 칸의 아미르들은 “타양 칸이 죽는 것을 우리가 보기 전에, 우리가 죽는 것을 그가 보도록 나가서 전투를 하자”라고 말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여 모두 죽음을 당했다. 칭기스 칸은 그들을 산 채로 손에 넣고자 했지만, 그들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죽음을 당했다. 이에 칭기스 칸은 놀라며 그 단호함과 충성심에 탄복했다. 이 전투에서 두르벤, 타타르, 카타킨, 살지우트 종족들이 모두 귀순하여 칭기스 칸의 어전으로 왔고, 타양 칸의 아들인 쿠쉴룩은 도망쳐 자기 숙부인 부이룩 칸에게로 갔다. 그 뒤, 칭기스 칸은 메르키트 종족에게 원정하여 그들을 패배시켰고, 탕구트라고 불리는 카신 지방으로 출정하여 정복했다. 1206년 쉰두 살의 칭기스 칸은 9개의 다리를 지닌 흰 깃발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장엄하게 쿠릴타이를 열어, 축복을 받으며 보좌에 앉았다. 신령한 힘과 이적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쿠케이 텝 텡그리는 앞으로 자신이 주장하던 이적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하기를, “각자 구르 칸이라고 주장하던 이 지역의 군주들은 이제 모두 그대에게 정복되었고, 그들의 왕국도 그대의 것이 되었다. 그러니 그대도 그것과 같은 뜻을 지닌 ‘칭기지’, 즉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칭기스’는 ‘칭(ching)’의 복수형이고, ‘칭기지’는 '칭‘의 강세형이기 때문에, 이 말의 뜻은 왕 중의 왕이다.” 아미르들은 그의 제의에 만족하며, 그 칭호를 그에게 바쳤다. 그의 위력과 위세는 극에 달했고, 세상의 군주라고 할 만했다. 그 회의가 끝나고 쿠릴타이가 종료되자 칭기스 칸은 부이룩 칸에 대해서 원정을 나섰다. 칭기스 칸과 그의 군대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들 위를 덮쳐, 그를 죽이고 그의 왕국과 가옥, 부인과 자식, 말떼와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키르키즈의 아미르들과 그 지방이 칭기스 칸에게 귀순하였으며, 거듭 전쟁을 벌이고 반란을 일으켰던 메르키트의 군주 톡타이 베키를 잡아 살해했으며, 위구르 종족이 귀순하였다. 제5절(1211 ~1218 년) 칭기스 칸은 이 기간 중 마지막 해에 예순네살 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먼저 군대를 정비하여 몽골인들이 ‘자우쿠트’라고 부르는 키타이와 카라키타이와 주르체 등의 지방들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는 출정하면서,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빼앗았다. 주르체의 도시들 가운데 매우 큰 도시인 퉁깅 시 방면으로는 제베를 출정시켜 함락시켜 버렸다. 칭기스 칸이 파우주이라는 도시에 진영을 치고 포위에 들어갔을 때, 키타이 군대의 수령인 쿠샤 삼진은 주르체 군대의 수령인 기우닝과 협의하여 “칭기스 칸의 군대가 파우주이 시를 약탈하고 약탈물을 분배하고 말들에게 풀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어 주의를 소홀히 하고 있으니 급습하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상의한 뒤에 함께 연합해서 수많은 보병과 기병의 지원을 받아 출정했다. 군대가 음식을 만들어서 먹느라고 정신이 없는 바로 그때 칭기스 칸에게 금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솥들을 쏟아 버리고 즉각 출정하여 두 부대로 나뉘어 적이 오기를 기다리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는데, 알탄 칸의 군대는 매우 많았다. 이윽고, 양측의 군대가 서로 부딪쳐 전투에 들어갔다. 몽골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즉시 키타이와 카라티카이와 주르체의 군대를 격파했고, 패주자들을 추격해 가서 그들을 다시 격파하고 패주시켰다. 이 전투는 매우 중대했고 유명해져서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널리 회자된다. 키타이와 주르체의 유명한 사람들이 그 전투에서 사망했고, 칭기스 칸은 그곳에서 개선해서 돌아왔다. 칭기스 칸이 키타이 방면으로 원정을 시작해서부터 미주라고 불리는 큰 도시에 도착한 그때까지 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그가 갔던 모든 도시와 지방과 성채들을 정복했다. 칭기스 칸은 키타이 지방에 대한 정복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메르키트 종족 - 칭기스 칸은 그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그들의 군주인 톡타이 베키와 그의 몇 몇 아들과 동생들을 죽였으며, 그 군대의 대부분을 궤산시킨 바 있다 - 에 속한 톡타이 베키의 형제 쿠두, 그의 세 아들이 다시 도주하여 나이만 지방의 변경에서 무리를 모아 일을 도모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수베테이 바하두르를 군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병사들을 위해 많은 수레를 준비하고 그것을 쇠못으로 단단하게 하여, 돌 위에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수베테이 바하두르는 몽골리아 지방 안에 있는 잠 무렌 부근에서 쿠두와 전투를 벌여 메르키트 종족을 격파하고 모두를 죽였다. 그래서 그 종족의 자취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키르키즈나 투마트 또는 다른 종족들처럼 귀순한 뒤에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을 모두 붙잡아 죽였다. 이제까지 1211년의 처음부터 1218 년의 마지막까지 8년 동안 칭기스 칸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했다. 제6절(1219 ~1227년) 칭기스 칸은 아들들과 만호장․천호장․백호장(칭기즈칸은 몽골을 지배하는 지위에 오르자, 그때까지의 씨족 및 부족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국가 기구를 개혁하여, 국내 유목민을 95개의 천호(千戶)로 하는 집단제로 분할하였다. 그가 구성한 천호 및 그것을 구성하는 백호(百戶) 집단은 행정단위이면서 군사 단위였는데,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는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들을 정하여 정비하고, 집회를 열어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그들 사이에 통용될 새로운 규정과 규범과 법령을 정해준 뒤, 호라즘 샤의 지방을 치기 위해 출정하여 도중에 있는 모든 지방들을 점령했다. 칭기스 칸은 대군을 이끌고 오트라르시에 도착하여,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에게 수만 명의 병사와 함께 도시를 포위하라고 명령하고, 주치에게는 약간의 군대를 주어 잔드와 양기켄트 쪽으로 보냈고, 일군의 아미르들은 호젠트와 파나카트로 보냈다. 오트라르에서는 5개월간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왕자들은 도시를 정복하고 주민들 전부를 도시 밖으로 몰아낸 뒤, 거기에 있는 것들을 모두 약탈했다. 왕자 주치도 잔드와 양기켄트 시가 있는 곳으로 진군하여 정복한 뒤 감독관을 배치했다. 이 기간 동안 칭기스 칸은 막내아들인 톨루이 칸과 많은 군사들과 함께 부하라로 가서, 부하라 시 외곽의 성문에 진영을 쳤고, 뒤이어 도시를 둘러싸고 진을 쳤다. 칭기스 칸은 도시의 구역들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해 도시의 대부분이 며칠 만에 모두 불타 버렸고, 성채를 공격해서, 3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포로로 끌려갔고, 젊은이들은 징용대로 선발해 사마르칸트와 다부시야로 끌고 갔다. 칭기스 칸은 그곳에서 사마르칸트를 정복하기 위해 출발했다. 사마르칸트 군대의 막대함과 그곳에 있는 성벽과 성채의 견고함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사마르칸트 시를 정복하는 데만도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먼저 그 주변을 깨끗이 일소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고 판단하여, 막내아들인 톨루이 칸과 함께 부하라로 가서 그곳을 정복한 뒤 거기에서 모든 징용대를 사마르칸트 쪽으로 보냈고, 도중에 어느 곳이든 복속을 하면 해를 가하지 않았지만, 반항을 하면 군대를 남겨두어 정복하도록 했다. 그가 사마르칸트 시에 도착했을 때, 오트라르나 다른 지방으로 보냈던 왕자들과 아미르들이 그곳들을 정복하고 돌아와 징발된 징용대와 함께 사마르칸트에 왔다. 칭기스 칸이 그 도시와 성문을 장악할 방책을 궁리하는 가운데, 호라즘 샤가 하영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대아미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던 제베 바하두르와 수베테이에게 3만 명을 주어 술탄을 추격하러 보내고, 알락 노얀과 야사우르를 바흐시와 팔리칸으로 파견했다. 그 뒤 셋째 날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몽골군과 징용대가 도시의 성벽을 포위해 전투를 하였고,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밤이 되자 각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칭기스 칸은 직접 말에 올라 전군에게 도시의 성벽을 포위하라고 하고, 활과 칼로 도시의 군인들을 전쟁터로 나오게 했다. 다음날 대담한 몽골인들과 주저하는 도시민들은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새벽이 되자 병사들은 다시 성채를 둘러쌓고, 양측에서는 화살과 돌이 쏟아졌다. 저녁이 되었을 때 몽골군은 성문을 장악하고 시내로 들어가 도시와 성채를 폐허나 마찬가지로 만들고 수많은 아미르와 병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다음날 남은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칭기스 칸은 그 무리들 가운데 3만 명을 직인(職人)이라는 명목으로 정하여 아들․카툰․아미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와 같은 숫자를 징용대로 정했다. 그는 징용대 가운데 일부는 후라산으로 데리고 가고, 일부는 아들들과 함께 호라즘 쪽으로 보냈다. 그 징용대들 가운데 목숨을 보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런 까닭으로 그 지방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칭기스 칸은 그해 여름과 가을을 사마르칸트 주변에서 보냈다. 마와라안나흐르의 왕국들이 모두 정복되고 다른 지방들도 마찬가지로 점령되었을 때, 호라즘은 마치 밧줄이 끊어진 천막처럼 정복지 한 가운데에 있었다. 칭기스 칸은 그곳도 정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의 큰아들인 주치와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에게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을 정복하라고 정해 주고, 자신은 톨루이 칸과 함께 행군의 피로로 말미암아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얼마간 휴식을 취했다. 그의 의도는 곧이어 자신이 직접 술탄을 추격하여 후라산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그 후 왕자들이 호라즘에 도착하여 그곳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칭기스 칸은 나흐샤브로 와서 잠시 그곳에 머문 뒤 티르미드 강을 건너 발흐로 가서 그 도시와 지방을 정복했고, 그는 거기서 탈리칸 성채를 포위하기 위해 갔다. 그가 탈리칸 성채를 포위하기 시작하려던 바로 그때 호라즘에 있던 아들들이 호라즘을 공략하지 못한 채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그 까닭의 일부는 주치와 차가타이 사이의 불화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칭기스 칸은 분노하여, 그들의 막내 동생인 톨루이가 지휘관이 되어 그들과 그 휘하의 군대를 지휘하고, 그의 말에 따라 전투를 하라고 명령하고는 톨루이 칸에게 대군을 주어 후라산 정복을 위해 보냈다. 그렇게 한 뒤 병사들을 모두 전투에 투입시켜, 일주일 만에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 그리고 칭기스 칸 자신은 티르미드를 공략했고, 그곳을 떠나 캉구르트 지방과 슈만 변경으로 가 그 부근의 지역들을 정복하고, 아무다리아를 건너서 발흐를 함락시키고, 탈리칸 성채로 진군해 그곳을 포위했다. 칭기스 칸은 탈리칸에서 사신을 보내어 톨루이 칸에게 돌아오라고 했고, 그가 도착할 즈음 칭기스 칸은 격렬한 전투를 통해서 탈리칸 성채를 점령하고 그것을 파괴했다. 술탄의 병사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칭기스 칸은 잠수부들에게 명령하여 강으로 들어가서 가능한 것들을 모두 건져 올리라고 하고 전리품을 모은 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진영을 쳤다. 그 뒤 칭기스 칸은 발라 노얀과 두르베이 노얀 두 사람을 대군과 함께 힌두 지방으로 보내서 술탄을 찾도록 하고, 자신은 인더스 강 상류 쪽으로 돌아가 그 지방을 정복하도록 했다. 칭기스 칸은 그 해 여름을 몽골인들이 파르반이라고 부르는 평원에 머물며 발라 노얀을 기다리면서 그 부근에 있는 지방들을 모두 정복하고 약탈했다. 칭기스 칸은 발라 노얀이 도착하자 그곳에서 이동했으며, 쿠나운 쿠르간 성채에 도착했을 때 우구데이가 그곳에서 어전에 합류했다. 그 뒤 칭기스 칸은 술탄 무함마드의 일을 처리하고, 그의 아들 술탄 잘랄 앗 딘의 일도 처리하고 나서 - 한 사람은 죽고, 또 한 사람은 방랑자가 되었다 - 술탄의 영역들 가운데, 아란,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시르반을 정복하러 제베와 수베테이를 보냈다. 간단히 말해 제베와 수베테이는 이라크 지방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이라크 지방과 속령의 대부분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겨울이 오자 추위가 매우 심하여 그들은 아제르바이잔 쪽으로 향했고, 도중에 가는 곳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살육과 약탈을 하면서 타직 지방을 거쳐 칭기스 칸의 어전으로 왔다. 칭기스 칸은 타직 지방을 정복한 뒤 원래의 거주지와 옛 영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서두른 까닭은 자신의 오랜 부재로 말미암아 탕구트인들이 동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칭기스 칸은 탕구트 지방에 도착하여 대부분의 도시들을 정복했다. 그가 캄주, 사주, 카주, 우루카이 등의 도시들을 포위하고 거기에 불을 지르고 있을 때, 그 지방의 군주인 시두르쿠라는 인물이 50만 명과 함께 몽골군과 전투를 하러 나왔다. 마침 그 부근에는 카라무렌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호수들이 있었는데, 모두 얼어붙었다. 칭기스 칸은 그 얼음 위에 서서 병사들에게 적을 향해 활을 쏘아 얼음 위로 오지 못하게 하고 실수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탕구트인들이 그렇게 건너다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 시신의 머리를 세워 두었다고 한다.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1만 명이 죽으면 한 시신의 머리를 세워 두는 관습이 있다. 칭기스 칸은 그 도시를 지나서 다른 도시․지방들을 취하고 키타이 방면으로 갔다. 칭기스 칸은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꾸고는 아미르들과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아들들과 함께 조용히 자리를 잡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훈계와 충고를 해주었다. “오, 아들들이여! 내가 세상을 하직하고 마지막 여행을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알라! 나는 창조주의 힘과 하늘의 도움으로, 그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 1년이나 걸리는 거리인 광대한 왕국을 너희 자식들을 위해 정복하여 완성시켰노라. 이제 나의 遺志(유지)는 너희들이 적을 물리치고 친구를 치켜세워 주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편안하고 풍요롭게 인생을 보내고 왕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우구데이 카안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유촉을 모두 마친 뒤, “너희들은 각자의 왕국과 울루스로 가라. 왜냐하면 왕국이 소홀히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으며, 나의 명성과 영예를 위해 저승으로 가겠노라.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 법령을 바꾸지 말라. 차가타이가 여기에 없지만, 그에게 내가 떠난 뒤 내 말을 바꾸어 왕국 안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감독하게 하라. 너희들은 가거라!” 그는 그들을 각자의 왕국와 울루스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군대와 함께 낭기야스 방면으로 향했는데, 그 도시의 군주들이 차례로 찾아와 복속했다. 칭기스 칸은 병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아미르들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라고 유언했다. 돼지해 가을(1227년 8~9월)에 그는 보좌와 왕국을 명망 높은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덧없는 세상을 떠났다. 아미르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이 사실을 은폐했다가 그 종족이 밖으로 나오자 그들 모두를 죽인 뒤, 그의 관을 모시고 귀환했다. 그들은 그것을 오르두들에 운반할 때까지 도중에 마주치는 모든 피조물들을 죽였다. 제3장 성훈 · 천호일람 (聖訓 · 千戶一覽) 성훈 칭기스 칸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의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는 자식들, 형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동생들, 부인을 신뢰하지 않는 남편, 남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부인,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 시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 며느리, 어린애들을 보호하지 않는 어른들, 연장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연소자, 종들의 마음을 멀리하는 대인들, 외부인을 맞아 주지 않는 사람, 나라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강화시켜 주지 않고 법령과 규범과 현명한 방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반목으로 말미암아 도둑과 사기꾼과 반도와 불법자들이 창궐하고 그들은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그들의 말과 가축은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전쟁시 선봉에 세워 타고 다니던 말들이 안식을 얻지 못해, 마침내 그 말들은 버려지고 쇠약해져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종족은 혼란되고 우둔하다.” 칭기스 칸의 행운이 분명히 드러나서 여러 종족들이 그의 명령을 받자, 그는 강력한 법령으로 그들을 다스려, 지혜로운 자와 용맹한 자들을 군대의 아미르로 만들고, 민첩한 자와 기민한 자들에게는 유수영을 맡겨 가축 떼를 지키도록 했고, 우둔한 자들에게는 작은 채찍을 주어 목동으로 내보냈다. 이런 이유로 그가 꾀하는 일은 날마다 커져 갔고, 그의 하영지(夏營地)는 연회와 잔치의 자리가 되고, 동영지(冬營地)는 넉넉하고 편안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집을 올바르게 정돈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라를 올바르게 정돈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깨끗이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왕국에서 악을 없앨 수 있다.” “현명한 세 사람이 동의하는 말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말을 다시 해도 괜찮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에 대해서 신임할 수 없다. 너 자신의 말과 다른 사람의 말을 현명한 사람들의 말과 비교해 보도록 하라. 만일 서로 일치한다면 말해도 좋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대인(大人)을 찾아가는 사람은 그 대인이 질문을 하기 전에는 어떠한 말도 하지 말라. 그 질문에 따라서 적절한 답변을 하라. 만일 그가 묻기 전에 말했을 때 대인이 듣는다면 상관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말은 차가운 쇠를 두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마치 잘 기른 송아지처럼 말없이 있어야 하고, 전투를 할 때는 마치 사냥터에서 먹이를 쫓는 굶주린 매처럼 앞장서야 한다.”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옳은지 생각해 보라. 한번 내뱉은 말은 심각하게 말했든 아니면 장난기로 말했든 다시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는 모든 것이 그 주인을 닮는다.” “술과 다라순(곡주의 일종)에 취한 사람은 장님과 마찬가지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불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어 그에게 말을 해도 대답을 할 수 없다. 술에 취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똑바로 앉으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는 마치 머리에 타격을 받아 상처를 입고 어지럽거나 혼미해진 것과 같다. 술과 다라순에 빠지면 지혜와 이성과 기술이 없어지고, 좋은 행동과 품성도 잃어버린다. 만일 술 마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한 달에 세 번 취하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니, 그것을 넘는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만일 한 달에 두 번 취한다면 더 좋고, 한 번이라면 더 훌륭하다. 만일 아예 마시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취하지 않는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그를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칭기스 칸이 젊었을 때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앞머리에 몇 오라기의 백발이 생겼다. 근신들이 그에게 “오, 행운의 군주시여! 페하의 연세는 아직 초로(初老)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어찌하여 앞머리에 백발이 생겨난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지고한 신께서 나를 만호들과 천호들의 수령과 연장자로 삼고 나의 행운의 깃발이 세워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연장자의 징표인 백발이 내게 생기도록 하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천호일람 칭기스 칸의 친위 천호인 중군, 보르추 노얀이 선임자였던 우익, 무칼리 구양이 선임자였던 좌익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그가 사망한 뒤에 유산으로 네 번째 아들인 톨루이 칸에게 속한 것들, 다른 자식들과 형제들과 조카들과 어머니에게 주어서 그들의 소유가 된 것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많은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모두 12만 9천 명이 현재까지 알려진 몽골 군대들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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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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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안병대 지음 명진출판 / 2011년 1월 / 288쪽 / 17,000원 ▣ 저자 안병대 30년 넘게 셰익스피어를 연구해 온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셰익스피어 전문가로서 현재 한국 셰익스피어학회 학술부회장을 맡고 있다. …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안병대 지음 명진출판 / 2011년 1월 / 288쪽 / 17,000원 ▣ 저자 안병대 30년 넘게 셰익스피어를 연구해 온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셰익스피어 전문가로서 현재 한국 셰익스피어학회 학술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양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에서 셰익스피어를 연구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셰익스피어 연구소와 뉴욕 주립대 스토니 브룩 캠퍼스에서 연구 경력을 쌓았다. 학술 연구 경력 이외에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원어 연극 극단 ‘Korea Shakespeare’s Kids’를 통해 〈리어왕〉, 〈태풍〉, 〈맥베스〉, 〈햄릿〉, 〈리처드 3세〉 공연에 배우로 출연하였다. 저서로는 『셰익스피어 작품 해설』, 『교양으로 읽는 영미문학』, 『셰익스피어 연극 사전』이 있다. ▣ Short Summary 400년 전, 셰익스피어는 시대를 초월하며 인간의 삶을 예리하게 살폈다. 불의와 정의가, 선과 악이 끊임없이 갈등하는 불완전한 세계와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욕망이 불타고 있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으로, 인간의 욕망이 불타오르는 전장인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신이 탐색한 것을 기록한다. 자신의 내면뿐만 아니라 외부의 악으로 인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며 진실 혹은 진리를 발견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 왕 같은 주인공들을 통해 삶, 죽음, 인간, 인생, 우주에 대해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의 37개 작품 중 4대 비극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전문가가 풀어놓은 단순한 해설서가 아니다. 20대 초반 햄릿을 통해 처음 셰익스피어를 만난 후 30년 동안 심장 가까이에 셰익스피어를 담고 살아 온 저자가, 비극을 통해 그가 던진 인생의 화두를 점검해보고, 인생의 본질에 대한 뜨거운 질문과 성찰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21세기 스타일의 ‘셰익스피어 여행 가이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 비극을 “삶, 죽음, 인간, 우주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명상록”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셰익스피어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고, 셰익스피어 비극은 슬픔이 있으되 우울하진 않다”는 재해석의 메시지를 따뜻하고 섬세한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약점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았던 사람이고, 그 약점이 인간과 삶의 비극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약점을 사랑했던 사람이고, 그래서 언어가 존재하고 인간이 존재하고 무대가 존재하는 한 셰익스피어는 불멸할 것이다. ▣ 차례 프롤로그 셰익스피어_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 Chapter 01 400년 동안 살아 있는 사람 한가한 땅에서 태어난 대담한 사람 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연극에 미치게 만든 사람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 Chapter 02 햄릿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햄릿이 아닌 사람은 없다 Stage Hamlet 빛은 감춰진 것을 드러나게 하고 Chapter 03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사랑, 오셀로의 “죽이고 사랑하리라” 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사랑을 알까 군더더기 없는 흐름 Stage Othello 슬픔과 두려움이 요동치는 Chapter 04 리어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든 고통은 내 안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인간에 관한 원형적이고 우주적인 이야기 Stage King Lear 참을 수 없는 세상이 있어 깨달음의 슬픈 여정 : 눈으로 볼 적에는 오히려 넘어졌지 운명의 수레바퀴 : 욕망의 사다리는 끝이 있다 Chapter 05 맥베스는 우리 가까운 곳에 있다 불안이 지배하는 세계 Stage Macbeth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 양심의 목소리 : “이 피를 내 손에서 씻어낼 수 있을까?” 야망은 나의 운명 : “별들아, 빛을 감추어라!” 죄는 죄를 낳고 : “악으로 시작한 일은 악으로 다져야 하오” 추락 : “내 인생 여정은 누렇게 시든 낙엽이 되었어” 에필로그_ 인생이 존재하고 무대가 존재하는 한 그의 이름은 불멸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안병대 지음 명진출판 / 2011년 1월 / 288쪽 / 17,000원 Chapter 01 400년 동안 살아 있는 사람 한가한 땅에서 태어난 대담한 사람 나는 셰익스피어의 고향에 가 보고 싶어, 버밍엄 대학 부설 셰익스피어 연구소의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런던 대학 도서관에서 며칠 동안 셰익스피어 자료들을 끌어 모은 후, 미들랜드 노선의 런던발 기차를 탔고, 1시간 반 가량 달려 도착한 버밍엄 역에서 다시 코치(coach, 영국의 대형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400년 전에 셰익스피어가 살던 에이번 강가의 작은 도시(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Stratford-upon-Avon)에 도착했다. 셰익스피어의 출생 기록은 에이번 강가에 위치한 유서 깊은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찾을 수 있었다. 1564년 4월 26일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와 어머니 메리 셰익스피어는 새근거리는 셋째 아이 윌리엄을 안고 교회로 가 존 브래치거들 목사에게 영아세례를 받으며 특히 아이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날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당시 생후 3일 후에 세례를 받는 관례를 받아들인다면, 아마 그의 출생일은 1564년 4월 23일일 것이다. 셰익스피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자유농민이었다. 할아버지 리처드 셰익스피어는 1535년 스트랫퍼드 인근 스니터필드에 정착했고, 그 지역 내 윌름코트에 사는 로버트 아든의 토지를 임대하여 경작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스니터필드를 떠나 1551년경 스트랫퍼드의 헨리 가에 정착했는데, 존은 평생을 그곳에서 장인 겸 상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존은 1556년에 부친에게 토지를 임대했던 로버트 아든의 막내딸 메리 아든과 결혼했는데, 그들은 큰딸 조앤과 둘째 딸 마거릿을 모두 젖먹이 때 잃었고, 셋째 윌리엄 이후로는 다섯 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 셰익스피어는 7살 때 스트랫퍼드 문법학교에 입학해 매일같이 라틴어를 외웠고, 상급학년이 되어서는 희랍어도 익혔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연인 앤 해서웨이는 스트랫퍼드에서 1마일 정도 떨어진 쇼터리의 휴랜드 농장에 살았는데, 그녀는 넉넉한 집안의 7남매 중 장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 친구인 존 아저씨네 식구들을 소꿉놀이하던 시절부터 잘 알았었는데, 앤은 셰익스피어보다 8살이 많았다. 그래서 떠돌이 유랑극단의 공연이 있던 날이면 왁자하고 번잡한 구경꾼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솜병아리 같은 셰익스피어를 다정하게 챙겨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 셰익스피어가 점차 청년이 되어가자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연극에 미치게 만든 사람 나에게 연극이 다가왔다. 연극은 부드러운 몸짓과 달콤한 목소리로 나를 유혹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연극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꿈꾸는 것 같았다. 아니 연극은 꿈 그 자체였다. 나는 꿈같은 무대에서 왕, 광대, 귀족, 장군, 무덤지기가 되기도 했고, 직접 꿈의 왕국을 만들기도 했다. 행복했다.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꿈으로만 채울 수 없고 꿈은 깨어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꿈에서 깨어나 다시 꿈꾸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연극은 중독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에게도 연극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왔으리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함께 성장했다. 아버지가 행정관이었을 당시만 해도 시내의 길드홀에서는 런던에서 온 명성 높은 여왕극단과 우스터 극단의 공연이 여러 차례 열렸다. 셰익스피어는 본능적으로 연극을 알아보았다. 그는 배우들의 몸짓과 언어에 따라 사람들의 영혼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잠자리에 누워도 그들의 눈빛과 눈물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폭소와 읍소와 재담과 노래가 귓가를 맴돌았는데, 그곳에는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연민과 공포와 감동이 다 있었다. 1578년 학교를 떠난 셰익스피어가 이후 몇 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졸업할 무렵 셰익스피어는 아마 아버지의 일을 도왔거나, 아니면 시골 학교의 선생 또는 북쪽 랭커셔 지역으로 가서 호텐 집안의 개인 교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호텐의 소개로 토머스 헤스키스 경 집안과 연을 맺었고, 그의 후원 극단인 헤스키스 극단에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1592년 6월, 런던은 급변하고 있었다. 로즈 극장 근처에서 일어난 도제 노동자 폭동으로 당국은 극장을 폐쇄했다. 또 늦은 여름부터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흑사병이었다. 결국 런던 인구의 14% 정도가 사망했고, 극장은 무려 20개월 동안 문을 닫았다. 셰익스피어는 이 기간에 장편시 〈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리스의 겁탈〉을 써서 사우스햄튼 백작에게 헌정했다. 다른 극작가들처럼 일시적으로 시인으로 전환하여 후원자에게 의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극단은 보통 20~40편의 대본을 보유하고 매일 다른 작품을 공연해야 했는데, 흥행에 실패한 작품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한 극단에서 6개월 동안 8~12개 작품을 공연하다 보니 항상 대본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리고 당시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유명 극작가들이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대학 출신의 재사들은 시골 문법학교만 나온 셰익스피어를 탐탁지 않아 했다. 예로 셰익스피어를 두고 라틴어를 조금 하고 희랍어는 부족한 인물이라 폄하했고,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까지 조롱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혜성처럼 등장해 런던 연극 무대의 총아로 떠올랐다. 셰익스피어는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빴다. 오전에는 오후 공연을 위한 리허설에 참여한 후 배우들에 맞춰 대본을 손보고, 오후에는 무대에 올라 연기를 했다. 또 밤이면 대본을 쓰느라 늦도록 불을 밝혔다. 셰익스피어는 제독, 더비, 레스터, 펨브룩 극단과도 관계를 맺었지만, 체임벌린 극단에 소속되어 20여 년간 활동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1594년에 그는 그 극단 소속의 배우 겸 극작가였고 주주였다. 이후 은퇴하기까지 그의 삶의 여정은 대체로 부와 명예가 동반된 장밋빛이었다. 물론 외아들과 부모가 세상은 뜬 일은 커다란 슬픔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샘솟듯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해 사극 10편, 희극 13편, 비극 10편, 로맨스극 4편 등 총 37편의 극작품과 장시 4편, 소네트 154편을 세상에 선사했다. 희극은 그의 런던 시절 전반에 걸쳐 무대에 올려졌는데 〈실수 연발〉, 〈사랑의 헛수고〉, 〈베로나의 두 신사〉, 〈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헛소동〉,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자에는 자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등으로 대체로 경쾌하고 명랑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셰익스피어는 10편의 비극을 썼는데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어스 시저〉,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오레이너스〉, 〈아테네의 타이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초로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와 1616년 4월 23일 운명했고, 4월 25일 홀리 트리니티 교회 성단소 앞에 매장되었다. 1623년, 극단 동료 헨리 콘델과 존 헤밍스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셰익스피어 작품 전집을 이절판으로 출판했는데 〈페리클레스〉를 제외한 36편의 작품을 담았고, 책 서두에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인 벤 존스의 헌시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그는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었다.” Chapter 02 햄릿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햄릿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의 봄 학기 강의실에서였는데, 햄릿의 첫인상은 나에게 뭔가 근본적인 외로움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그사이 극장에서, 학술대회에서, 책에서, 강의실에서 수없이 햄릿을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햄릿이 아직도 편하지 않다. 사실 햄릿은 무거운 인물이다. 슬픔과 무거운 복수심이 시종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언제나 날이 서 있다. 내면은 언제나 펄펄 끓어 넘친다. 생각은 무겁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가벼운 화살처럼 관객의 가슴에 날아와 박힌다. 행동은 양면적이다. 수도승처럼 침묵하면서도 광대처럼 자유롭다. 언어 역시 그 경중을 다 담고 있다. 대양을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사나운가 하면 등성이를 넘어오는 산들바람처럼 감미롭다. 햄릿의 언어는 숙고와 격정, 침울과 경쾌, 냉소와 격려, 비판과 관용, 질책과 배려, 난폭과 친절, 느림과 빠름, 어둠과 밝음이 어우러진 심포니다. 그럼에도 햄릿은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다. 나는 엘시노어 궁의 정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대관식의 끝자락에서 검은 상복 차림의 햄릿을 만났다. 그는 엄청난 불행과 고통에 직면해 있었다. 선왕인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고 왕위를 계승한 숙부 클로디어스가 어머니와 초고속으로 결혼했기 때문이다. 햄릿은 가슴이 미어진다. 왜, 어째서, 무엇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는지 끝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세상은 무심히 잘 굴러간다. 처세에 능한 궁정 대신 폴로니어스는 아들 레어티스를 프랑스로 보내고, 오필리어에게는 가벼운 연애관이나 설파한다. 그러나 햄릿은 독살당한 선왕의 망령과 조우하며 자신의 갈 길을 분명히 한다. 아버지의 원수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다. 햄릿은 미친 척하며 기회를 엿본다. 살인자 클로디어스 왕은 불안하다. 그는 모든 책략을 동원하여 상대를 읽어내고자 한다. 햄릿이 실성했다지만, 그는 햄릿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햄릿의 친구들이 염탐꾼으로 동원되고, 왕의 최측근 대신으로 소위 정보부장 역할을 하는 폴로니어스도 햄릿을 읽고 분석하여 보고하느라 여념이 없다. 햄릿은 고독하다. 아, 잡초만 무성한 감옥 같은 궁전, 빛은 어디에 있는가, 서성이기만 하는 겁쟁이로 사느니 아, 죽고 싶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복수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온통 번민에 싸여 있는데, 오필리어와의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햄릿은 번민을 물리치고 복수의 칼날을 다시 벼린다. 그러나 복수심을 다잡을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직접 클로디어스의 양심을 확인할 수는 없을까. 순회극단의 방문을 그 기회로 삼는다. 연극, 그것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선왕을 독살한 장면과 같은 내용의 공연이 펼쳐지고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햄릿은 참회 기도를 하는 왕 앞에서 다시 칼을 거둔다. 절호의 기회이지만 그의 영혼을 천당에 보낼 수는 없었다. 햄릿은 한탄한다. 어머니에게도 진실을 털어놓을 순간이 왔다. 극을 보고 진노한 왕을 대신하여 마침 왕비가 그를 호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햄릿은 대화를 엿듣던 폴로니어스를 왕으로 착각하여 피를 뿌린다. 그리고 남편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원수와 결혼한 어머니를 폭풍처럼 힐책한다. 햄릿은 정신이상자로 몰려 영국으로 추방당한다. 한편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은 오필리어는 미쳐서 궁전을 헤매고, 오래지 않아 프랑스에서 귀국한 레어티스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왕은 레어티스에게 햄릿의 짓임을 밝히고, 복수를 부추긴다. 레어티스가 결투를 모의하는 사이 실성한 오필리어가 익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는 오열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덴마크로 돌아온 햄릿은 친구 호레이쇼와 함께 묘지를 지나다가 오필리어의 장례식을 마주한다. 햄릿은 삶의 무상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비극의 끝은 햄릿과 레어티스가 벌이는 결투다. 햄릿은 결투 중 레어티스의 독 묻은 칼에 상처를 입는다. 왕비는 왕이 햄릿을 위해 마련한 독배를 마시고 쓰러진다. 레어티스도 햄릿의 칼에 찔려 쓰러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햄릿은 이 모든 비열한 계략을 주도한 왕을 찌르고 그의 입에 독배를 쏟아 붓는다.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폴란드 원정에서 귀환하고 있는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에게 왕위를 이양한다. 햄릿은 그제서야 번민과 고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사람의 삶이, 죽음이, 사랑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따위 세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인간, 회의하는 인간, 그것이 햄릿이다. 이야기 상자 밖에는 ‘복수’라는 제목이 쓰여 있으나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을 이루는 온갖 사연을 만난다. 막이 열리면, 우리는 햄릿과 그의 적대자 클로디어스 왕 그리고 그 궁전에 기거하거나 혹은 초대된 모든 이들의 언어를 듣고 표정과 몸짓을 보고, 그들의 다양한 사연들을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읽어낸다. 또 우리는 서슬 퍼런 왕의 어조에 고개를 높이 들고 햄릿의 침울한 번민에 가슴을 들여다본다. 또 호레이쇼의 우정에 고개를 끄덕이고, 폴로니어스의 수다에 고개를 내저으며 웃음을 터트린다. 왕비의 미소에 쓴웃음을 짓고, 오필리어의 순수함에 연신 감탄한다. 선왕의 망령에 흠칫하고 각기각색의 배우들과 만나 어깨춤을 추는가 하면, 긴박한 결투에 손에 땀을 쥔다. 어떤 사람은 쯧쯧 혀를 차고 어떤 관객은 통탄한다. 어떤 이는 첫사랑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세상의 변화를 꿈꾼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의로운, 정직한, 충직한, 용맹한, 냉소적인, 명랑한, 순진한, 너그러운, 회의적인, 위선적인, 비굴한, 교활한, 순종하는, 나약한, 무정한, 우울한, 배반하는, 이기적인 자신을 만난다. Chapter 03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사랑, 오셀로의 “죽이고 사랑하리라” 사랑은 삶과 역사와 운명을 바꾼다. 수많은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생사를 넘어서고, 조국과 제국의 운명을 바꾸고, 온 생애를 사랑을 위해 바친다. 생이 끝날 때면 우리는 사랑을 알 수 있을까? 1980년대 후반 나는 서울 시내 어느 극장에서 플라시도 도밍고가 주연한 〈오델로(당시 영화 제목)〉를 보았다. 오페라 영화였다. 극장은 한산했고, 화면은 어둑했다. 장군 오셀로의 외침은 넓은 객석을 압도했다. 폭풍우 치는 바다 장면이 지나고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와 반갑게 재회한다. 그러나 오셀로는 아내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몇몇 장면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행복한 만남, 의심으로 가득한 분노가 서린 얼굴, 운명을 한탄하는 비틀거리는 몸짓, 처연한 기도, 목이 졸리는 아내, 자책과 회한이 담긴 눈물과 자살 그리고 키스. 화면은 시종 음울했다. 행복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나는 도밍고의 절창을 들으며 밀려드는 슬픔에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머리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랑이 어디 있어! 바보 아냐? 정신을 차리고 한 번 더 확인했어야지.” 그러나 오랫동안 나는 책에서 무대에서 오셀로를 거듭 만나며 그것이 특별한 사랑임을, 아니 그것이 지독한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말한다. “사랑은 누구든 눈멀고 귀먹게 하는 마취제지요. 사랑은 누구라도 우습고 허튼 상상의 감옥으로 인도하는 안내자고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사랑에 빠진 인간이니라! 1604년 11월 1일,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왕실극단은 〈베니스의 무어인〉이라는 제목의 이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화이트홀 궁전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셰익스피어는 다른 비극과 달리 오셀로를 단일 플롯으로 이끌고 있다. 오셀로의 스토리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오셀로 군대의 기수 이아고는 부관 승진을 기대했으나 자신보다 경험이 일천한 캐시오가 그 자리에 오르자, 오셀로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이아고는 충직한 부하로 가장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철저히 오셀로를 무너뜨린다. 오셀로의 비밀 결혼 사실을 폭로하여 베니스 사회에 물의를 빚는가 하면, 캐시오가 파직되도록 소동을 일으키고는 다시 그의 복직을 돕는 체한다. 이아고의 덫에 걸린 오셀로는 부인과 부관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투에 눈이 멀고 거짓 증거에 현혹되어 그들의 간통을 확신하고 아내를 목 졸라 죽인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나자 자살하기에 이른다. 캐시오는 오셀로의 자리를 승계하고, 이아고는 처형당할 처지에 놓인다. 오셀로의 액션은 시종 긴박하게 진행된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관객의 관심은 온통 이아고, 오셀로, 데스데모나에게 집중된다.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는 뱀 같고, 쥐 같고, 여우같은 이아고의 혀끝에서 다음과 같이 춤을 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모르고 있었군요.” “질투는 경계하셔야 합니다.” “그놈이 부인을?” 반면 오셀로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덫에 걸려 버둥대며, 눈뜬장님이 되어 끌려 다닌다. 신열이 올라 길길이 날뛰다가 삿대질을 하고, 실신하고, 욕을 내뱉고, 손찌검을 하고, 파국으로 줄달음친다. 데스데모나는 불길이 번져오는 것을 모른 채 기도할 뿐이다. 관객은 사랑이 허무하게 지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본다. “인간이 이렇게 나약하고 사악하다니!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텅 빈 가슴에 두려움이 차오른다. 사람이 두렵고도 두렵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리의 영혼은 바람 앞에 서 있는 풀잎 같은 거요.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지요. 우리의 영혼은 저 바람 같은 거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지요. 나는 나를 본다고 하지만 나를 보지 못할 때가 더 많아요. 당신은 압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Chapter 04 리어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리어 왕〉은 두 개의 플롯으로 짜여 있다. 즉 리어 왕의 비극적 인생 여정과 그의 신하 글로스터 백작이 겪는 가혹한 삶의 행로가 서로 번갈아 진행되는데, 두 사람은 분별력을 잃고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고통으로 점철된 가시밭길을 걷는다. 둘 다 자식이 문제다. 리어에게는 세 딸(차례로 거너릴, 리건, 코딜리아)이 있고, 글로스터에게는 두 아들(적자인 첫째 에드거와 서자인 둘째 에드먼드)이 있다. 리어는 사악하고 욕심 사나운 첫째와 둘째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글로스터는 욕망에 눈먼 둘째에게 재산을 양도한다. 그리고 리어는 효심이 지극한 셋째 코딜리아를 지참금도 없이 프랑스 왕에게 넘기고, 글로스터는 진실한 첫째 에드거를 내쳐 버린다. 버림받은 에드거는 아버지가 내린 체포령 탓에 미치광이 거지로 변장하여 떠돌이 신세로 지낸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 대가는 참혹했다. 리어는 두 딸과 둘째 사위 콘월 공작에게 무참히 버림받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황야로 달려 나간다.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 처절하게 자책하고, 악을 쓰며 딸들을 저주하다가 급기야 완전히 실성한다. 두 딸은 틀어쥔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아버지를 살해하려 든다. 한편 글로스터 역시 아들 에드먼드에게 쓰라린 배신을 당한다. 에드먼드는 콘월 공작에게 아버지가 코딜리아 측과 내통하고 있다고 밀고한다. 그 결과 글로스터는 반역자로 체포되어 잔악한 콘월에게 두 눈이 뽑히는 참상을 당하고 황야로 쫓겨난다. 심지어 콘월의 부인 리건은 글로스터를 살려둔 것을 후회하며 그를 완전히 처치하라고 지시한다. 리어와 글로스터는 이렇게 고난과 고통을 겪으며 삶을 각성하게 된다. 오만, 독선, 풍요에 젖어 있던 자신을 돌아보고, 여태 인식하지 못했던 겸손, 배려, 가난을 깨닫는다. 그래서 실성한 리어는 더 예리하게 세상을 분별하고, 눈을 잃은 글로스터는 더 선명하게 세상을 본다. 도버 들판을 헤매는 광인 리어와 장님 글로스터에게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닿는다. 두 사람이 외면했던 코딜리아와 에드거가 이들의 구조를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프랑스 군대를 동원하여 도버에 상륙한 코딜리아는 극적으로 아버지와 상봉한 뒤, 영국군과의 일전을 준비한다. 에드거 역시 도버 절벽에서 세상을 하직하려는 아버지를 지혜롭게 구출한다. 절망의 끝, 죽음에서 구원된 글로스터는 삶의 의지를 회복한다. 영국 측도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투를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에드먼드는 승승장구한다. 아버지를 지혜롭게 고해바친 대가로 백작이 된 그는 사망한 콘월 공작을 대신해 전투에 나선다. 그런데 거너릴과 과부가 된 리건 자매에게 동시에 추파를 받는다. 그렇다면 올버니 공작만 없앤다면 자신이 영국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부인 거너릴이 얼마나 사악한지 익히 알았지만, 올버니 역시 출전한다. 국토 수호라는 사명을 띠고 적군의 침략에 대항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난다. 에드먼드는 포로로 잡은 리어와 코딜리아를 투옥시키고 사형을 명한다. 이제 그에게는 올버니를 제거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올버니 공작이 에드먼드와 거너릴의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한다. 그리고 자신을 살해한 뒤 거너릴과 결혼하려는 에드먼드를 반역자로 공표하고 결투를 신청한다. 이에 에드먼드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는 어떤 결투도 할 수 있다고 대응한다. 하지만 결투 상대로 나선 에드거가 에드먼드의 죄상을 폭로하고 그를 쓰러뜨린다. 극의 결말은 죽음의 소식들로 채워진다. 글로스터는 에드거가 털어놓은 자초지종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운명하고야 만다. 거너릴은 자살했으며, 리건 역시 언니 거너릴에 의해 독살당한다. 에드먼드는 리어 왕과 코딜리아를 죽이려 한 사실을 고백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실성한 리어가 코딜리아의 시체를 안고 등장한다. 왕은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절규하고 탄식하며 딸의 숨결을 확인한다. “코딜리아, 여기를 봐, 여길 봐!” 애절한 목소리가 대지를 덮는다. 노왕은 실신한다. 조용히 운명의 커튼이 닫힌다. 리어는 슬프고 길었던 말년의 여정을 끝낸다. 왕위는 올버니에게 예정된다. 새로운 여정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리어 왕〉은 인간의 속성, 인간관계, 인간의 행위와 판단에 관한 원형적인 이야기다.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은 리어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읽을 수 있다.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인간들은 리어 왕에서 삶의 교훈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은 선과 악에 뒤엉켜, 믿음과 변절을 일삼으며, 현명하게 때로는 우둔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잔악한 인간은 악만을 추구한다. 그리고 교활한 인간은 선과 악을 이용한다. 반면 현명한 인간은 부단히 선을 쫓는다. 그리고 우둔한 인간은 선악을 구분하지 못한다. 부패한 사회는 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인간들로 들끓는다. 교활한 사회는 선에 대한 믿음과 변절을 편의적으로 찾는 인간들로 넘쳐난다. 정의로운 사회는 선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하다. 또 한편으로 〈리어 왕〉은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들이 배은망덕한 행위로 아비들을 도탄지고에 빠뜨리는 이야기요, 욕망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 탐욕에 눈이 멀어 추락하고 마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며, 분별력을 잃고 어리석은 판단을 한 인간들이 겪는 수난과 깨달음의 여정이다. 〈리어 왕〉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오. 사람을 가벼이 판단하지 마시오.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오만을 버리십시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합니다.” Chapter 05 맥베스는 우리 가까운 곳에 있다 〈맥베스〉는 양심을 기만하고 야망을 이루었으나, 그 대가로 불면에 시달리고 있는 영혼에 관한 보고서다. 그리고 〈맥베스〉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전투기록이다. 또 〈맥베스〉는 부정하게 왕좌를 빼앗고 악의 들판을 줄달음치던 자가 파국의 절벽에서 추락하는 이야기다. 아울러 〈맥베스〉는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는 성서다. 〈맥베스〉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쉽게 변절하는 존재인가를 생생하게 담은 기록화다. 나는 인간의 나약함을 들여다본다. 아담과 이브는 며칠 만에 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일까? 그들에게 에덴동산의 풍요는 부족했을까? 왜 인간은 양심을 외면하거나 팔아넘기면서까지 탐욕을 추구할까? 인간은 탐욕의 노예인가, 아니면 이상의 노예인가? 니체는 말한다. “수치, 수치, 수치.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희망은 있는가. 매일 밝은 태양 아래서 양심의 거울을 닦는 것 말고 무슨 대책이 있을까? 4대 비극 중 마지막 작품인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모든 비극 중 가장 짧다. 장면들은 시종 강렬하고 압축적이며 빠른 속도로 액션이 진행된다. 무대는 어둡고 언어는 격렬하다. 관객은 공포와 전율에 휩싸인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반란군을 진압한 맥베스 장군과 뱅코우 장군은 던컨 왕의 궁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 마녀를 만난다. 마녀들은 두 사람의 미래를 예언한다. 맥베스는 곧 코더의 영주가 되고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뱅코우는 왕이 되지는 못하나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이 될 것이라고 칭송받는다. 불가사의한 예언 탓에 혼란스러운 맥베스 앞에 왕의 사자가 도착한다. 맥베스는 사자로부터 자신이 코더 영주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심장이 뛰고 숨이 막힌다. 그렇다면 자신이 왕이 되는 것도 기정 사실 아닌가. 엄청난 유혹이다. 야심의 불길이 타오른다. 던컨 왕은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개선하는 맥베스 장군을 극진히 환영한다. 맥베스는 신하의 도리와 의무와 충성을 다짐한다. 기쁨에 겨운 왕은 첫째 왕자 맬컴을 자신의 후계자로 공표한다. 그리고 자신의 혈육이자 충신인 맥베스 장군의 성을 방문하겠다고 알린다. 맥베스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머리를 조아린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가슴에 칼을 품고 있다. 맥베스 부인은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한껏 들뜬 남편의 편지를 받고 가슴이 벅차다. 하지만 야망은 있으나 실행할 용기가 부족한 남편이 걱정이다. 냉정하고 잔인해져야 한다. 그녀는 남편이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관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다짐한다. 맥베스는 거사를 앞두고 번민한다. 불의는 반드시 정의가 심판하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반역은 극악무도한 짓이다. 맥베스는 망설인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행태를 비난한다.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맥베스를 설득한다. 시해를 강력히 종용한다. 마침내 맥베스는 살인을 결심한다. 시간이 다가온다. 맥베스의 영혼은 여전히 불안하다. 맥베스는 허공에 떠 있는 단검의 환영을 본다. 약한 마음을 다잡는다. 물러설 수 없다. 종이 울린다. 내실로 다가선다. 그리고 왕을 시해한 맥베스가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등장한다. 남편을 진정시키고 사태를 수습하는 맥베스 부인의 발걸음이 바쁘다. 밤이 깊다. 아침 일찍 신하 맥더프와 레녹스가 왕의 처소를 찾는다. 참상이 드러난다. 성 안은 혼란에 휩싸인다. 맥베스는 짐짓 경악한다. 들이닥친 뱅코우 장군과 맬컴 세자와 도날베인 왕자 모두가 망연자실한다. 맥베스는 침소의 호위병들을 시해범으로 지목하고 서둘러 처치해 버린다. 맥베스 부인은 충격을 받은 양 거짓으로 기절한다. 목숨이 위태로움을 감지한 두 왕자는 국외로 탈출한다. 왕위를 차지한 맥베스는 축하 만찬을 계획한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다. 뱅코우의 자손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 탓이다. 후환을 없애야 한다. 자객들에게 뱅코우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살해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플리언스는 화를 면하고 달아난다. 연회가 열린다. 맥베스는 만찬장에서 살해당한 뱅코우의 유령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유령을 내쫓는 맥베스의 기이한 행동 탓에 연회는 파행으로 끝난다. 맥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마녀들을 찾아간다.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예언을 듣는다. ‘여자가 낳은 자는 맥베스를 해칠 수 없다. 버남 숲이 던시데인을 공격하지 않는 한 맥베스는 멸하지 않는다.’ 유쾌한 예언이다. 그럼에도 궁금한 것이 남아 있다. 뱅코우의 자손은 왕권을 잡을 것인가. 마녀들은 뱅코우의 후손이 왕이 될 것임을 여덟 왕들의 환영으로 보여준다. 이럴 수 있는가. 불길하다. 이 와중에 또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맥더프가 잉글랜드로 도망쳤다는 전갈이다. 자객들이 파이프 성으로 들이닥쳐 맥더프 부인과 어린 아들을 살해한다. 맬컴 왕자는 맥더프, 로스와 함께 잉글랜드 왕의 원병을 이끌고 맥베스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조국 스코틀랜드로 진군한다. 맥베스 부인은 밤마다 몽유병에 시달린다. 핏자국을 지우겠다며 계속해서 손을 비벼대는 모습이 처연하다. 마녀들의 예언을 굳게 믿고 있는 맥베스는 잉글랜드 군대쯤은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맥베스도 추락하는 운명을 어찌하지 못한다. 부인은 죽고, 전황도 급변한다. 삶이 무상하다. 맬컴 왕자의 군대가 나뭇가지를 꺾어 위장한 채 던시데인을 향해 밀려들어온다. 숲이 움직이는 형세다. 성이 함락된다. 맥베스가 맥더프의 칼에 쓰러진다. 맥더프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났던 것이다. 맬컴에게 왕위가 이양된다. 악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질서가 회복된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비극과 관련하여 이상한 미신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것을 ‘〈맥베스〉의 저주’라고 부른다. 〈맥베스〉를 공연하는 도중 배우가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한 일과, 천재지변이나 폭동이 발생한 사실들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결국 출연 배우들과 극장 관계자들은 연극 제목, 주인공 이름, 마녀의 주문 구절의 언급을 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연이 흥행에 실패하거나, 배우들이 불운을 겪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목은 ‘스코틀랜드 극(The Scottish Play)’이나 ‘맥비(MacBee)’로 바꿔 불렀다. 주인공 이름은 ‘엠 씨(Mr. M)’ 또는 ‘엠 부인(Mrs. M)’으로 불렀다. 실수를 하면 액땜 의식을 거쳤다.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몇 년 전 뱅코우 장군 역을 맡아 무대에 선 적이 있다. 그런데 공연 당일 아침 리허설 중에 무대에서 객석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녀들에게 칼을 내미는 장면이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으나 주위의 걱정을 샀다. 하지만 미신은 미신일 뿐이다. 〈맥베스〉는 기록에 따르면 1606년 8월 7일 런던 햄튼 코트 궁전의 그레이트 홀에서 처음 상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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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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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용의 가정의학 생활백서
신재용의 가정의학 생활백서 신재용 지음 중앙생활사 / 2012년 10월 / 320쪽 / 15,000원 ▣ 저자 신재용 경희대 한의대 수석 졸업과 한의사 국가고시 수석 합격을 하였으며, 현재 남양주시에서 가업으로 이어져 온 한의사의 길을 6대째 …
신재용의 가정의학 생활백서 신재용 지음 중앙생활사 / 2012년 10월 / 320쪽 / 15,000원 ▣ 저자 신재용 경희대 한의대 수석 졸업과 한의사 국가고시 수석 합격을 하였으며, 현재 남양주시에서 가업으로 이어져 온 한의사의 길을 6대째 계승하고 있다. 이 시대 명의로 꼽히는 그는 MBC 라디오와 TV, SBS, EBS, KBS TV 등에서 누구나 쉽게 건강을 돌보고 예방,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저서로는 『명의 신재용 아주 쉬운 지압 건강법』, 『신재용의 가정의학 생활백서』, 『음식 동의보감』 외 다수가 있다. 의료봉사단체 <동의난달>을 창설하여,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의료 봉사 활동에 힘쓰고 있다. ▣ Short Summary ‘생기발랄’하다는 말만 들어도 기운이 솟구치고 활력이 넘쳐난다. 생기(生氣)란 싱싱한 생명력이요, 생생한 빛이기 때문이다. 생명력은 삶의 원동력이며 사람을 보다 드높이 추진하는 활력이다. 생생한 빛이며, 씨알 한 톨이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우는 발아력 같은 것이다. 발랄(潑剌)은 끊임없는 에너지의 분출이며, 다함이 없는 약동이다. 팔딱 뛰는 하늘도 꿰뚫을 것 같은 발뜀이 곧 발랄이다. 아이들은 이래야 한다. 체력만이 아니라 활력이 있어야 한다. 영롱한 생체로 빛나야 하며, 높고 넓게 꿈을 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약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바이탈리티(vitality)’해야 하고 ‘라이블리(lively)’해야 한다. 이 책에서 추구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단지 질병 치료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생기가 발랄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생기가 있으면 똘똘해진다. 똘똘하면 생기를 한껏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똘똘한 아이로 키울 수 있는 동서고금의 지혜를 간추려 축약시켰다. 1부에서는 아이들이 발현하는 몇 가지 증상만 갖고도 어렵지 않게 질병을 이해하고, 이로써 용이하게 치료하고 조섭을 지도하며 혹은 응용할 수 있게 구성하였다. 2부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질병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근래 들어 급증하고 있는 어린이 성인병에 대해서도 약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아빠,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궁금해하고 때로 당황해하는 점을 ‘Q&A’ 형식으로 수록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3부에서는 이유식을 비롯해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에 대해 기술하였다. 따라서 이 책이 아이들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을 자부하며, 우리 아이들이 이로써 더욱 생기발랄해지고 똘똘해진다면 필자는 큰 보람을 얻을 것으로 믿는다. ▣ 차례 1부 이런 증상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까요 1장 소아 질환의 증상에 따른 처방법 01 아기가 이유 없이 아파요 / 02 젖을 빨지 못해요 / 03 헛것을 보며 놀라요 04 밤에 자꾸 울어요 / 05 열이 심해요 / 06 열성 경련을 자꾸 일으켜요 / 07 경기를 해요 08 걸음마가 늦고 말이 늦어요 / 09 감기에 잘 걸려요 / 10 오뉴월에도 감기에 걸려요 11 가래 끓는 기침을 자주 해요 / 12 손톱을 물어뜯고 이를 갈아요 13 토하기도 잘 하고 설사도 잘 해요 / 14 메스꺼워하고 멀미도 잘 해요 15 봄이면 봄 타고, 여름이면 더위 타요 / 16 땀을 많이 흘려요 / 17 밤에 자면서 땀을 많이 흘려요 18 헌 데가 잘 생기고 피부 트러블이 잦아요 / 19 가려워서 자꾸 긁어요 / 20 머리가 자주 아파요 21 짜증이 심해요 / 22 눈이 피로하고 늘 침침해요 / 23 몸이 까닭 없이 야위어요 24 비위가 허약한가 봐요 / 25 식욕이 없어 먹지 않아요 / 26 배가 자주 아파요 / 27 변비가 심해요 28 설사가 잦아요 / 29 밤에 오줌을 자주 싸요 / 30 허약하고 자주 피곤해요 2부 아이들을 괴롭히는 대표 질환을 알아볼까요 1장 신경계 질환과 혈관계 질환 01 주의력 결핍 과잉 운동장애 / 02 소아 불안증 / 03 틱장애 / 04 안면신경 마비 / 05 간질 2장 소화계 질환 06 신경성 과식욕증 / 07 신경성 위장장애 / 08 급성 위염 / 09 만성 위염 / 10 과민성 장증후군 3장 호흡기 질환 11 모세기관지염 / 12 기관지천식 / 13 폐결핵 / 14 폐렴 / 15 인플루엔자 4장 비뇨생식기 질환 16 유뇨증 / 17 사구체신염 / 18 외음질염 5장 유전 질환과 대사 질환 19 소아 당뇨병 / 20 소아 비만 / 21 성장장애 / 22 식품 알레르기 질환 6장 이비인후과 질환 23 중이염 / 24 알레르기성 비염 / 25 축농증 / 26 편도선염 7장 그 밖의 질환 27 철 결핍성 빈혈 / 28 습진 / 29 두드러기 / 30 연소성 류머티즘성 관절염 3부 우리 아이 건강 챙기는 음식 건강보감 1장 모유 수유와 이유식 01 모유 수유 / 02 이유식 먹이기 2장 보다 튼튼하게 보다 크게 보다 똑똑하게 키우는 음식 03 음양과 오장을 보하기 위한 기본 사항 / 04 체질 보강을 위한 기본 사항 05 체력과 저항력을 길러주는 식품 베스트 10 / 06 피와 살이 되는 보혈 식품 베스트 10 07 머리를 좋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식품 베스트 10 08 식욕을 증진하고 소화흡수력을 높이는 식품 베스트 10 09 호흡기와 신장을 강화하는 식품 베스트 10 / 10 어린이 음식 궁합 신재용의 가정의학 생활백서 신재용 지음 중앙생활사 / 2012년 10월 / 320쪽 / 15,000원 1부 이런 증상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까요 감기에 잘 걸려요 어린아이는 생후 6개월 이후부터 모체로부터 받고 태어난 면역성이 떨어지면 저항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감기에 쉽게 걸린다. 1년에 평균 8회 이상 감기에 걸릴 정도이며, 겨울에는 감기에 걸려 있는 날이 10%는 될 정도이다. 그러나 4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가 1년 중 감기가 가장 많을 때이다. 감기란 코, 목 안 등 상기도의 급성 전염성 염증을 총칭한다. 그래서 코와 인두의 염증이라고 해서 감기를 ‘비인두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곳에만 국한되어 오는 것은 드물기 때문에 국소 증상(호흡기의 여러 증상으로 재채기, 콧물, 코막힘, 인후통, 가래, 기침, 목쉼 등)부터 전신 증상(발열, 오한, 두통, 근육통, 피로감 등)까지 나타난다. 특히 어린아이는 보채며 잠을 못 자고 기운이 없으며, 소화기 증상도 함께 나타나서 식욕부진, 설사. 구토를 동반한다. 흔히 나이가 어릴수록 전신 증상이, 나이 든 소아일수록 국소 증상이 잘 나타난다. 이렇게 여러 증상이 복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감기를 정확하게는 ‘감기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소아 감기의 임상적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한증’이 ‘열증’으로 잘 변하고 고열로 인한 열성 경기가 잘 일어난다는 점, 둘째는 구토나 설사 등의 위장 증상을 잘 일으킨다는 점, 셋째는 영아나 유아는 이관이 짧고 곧으며 넓기 때문에 합병증으로 중이염이 같이 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어린이 감기는 원인에 따라 상풍(傷風), 상한(傷寒), 협식(挾食), 협경(狹驚) 등으로 구분한다. 대체로 열이 나면서 찬 것을 싫어하는데, ‘상풍 감기’는 땀이 나고 머리가 아프며, ‘상한 감기’는 땀이 나지 않으면서 머리가 아프다. ‘협식 감기’는 소름이 끼치며 배에 열이 있고, 소화장애 및 변비와 소변 농축이 있으며 두통을 호소한다. ‘협경 감기’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며, 겁먹은 시늉을 하고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열이 있는데 땀이 안 나면 칡즙을 조금씩 먹인다. 열이 있으면서 가슴이 답답할 때는 배를 생즙 내어 먹인다. 열이 심할 때는 지렁이를 달여 먹인다. 대단한 해열제이면서 인후가 붓고 아플 때 효과가 뛰어나다. 콧물 감기에는 소엽(차조기잎)을 끓여 조금씩 먹이고, 가래기침이 심할 때는 무를 설탕에 켜켜이 재웠다가 우러난 시럽을 먹인다. 소화장애를 겸하면 귤껍질을 끓여 먹이고, 목이 따끔거리고 아프면 도라지를 끓여 거품을 걷어내고 그 물만 조금씩 가글하듯 하면서 삼키게 한다. 날씨가 건조한 상태에서 감기에 걸렸을 때는 생지황을 생즙 내어 조금씩 먹인다. 짜증이 심해요 짜증이 심한 어린이는 크게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한증과 열증이다. 한증의 어린이는 불안하면서 짜증을 내는 편이다. 다시 말해 ‘울증’의 짜증이다. 눈 밑이 항상 검다. 인당(눈썹과 눈썹 사이)에 푸른 정맥이 튀어나와 있고, 손바닥에도 잡무늬가 많으면서 손가락 마디마디가 푸르다. 입가에 침이 잘 고이며, 추위를 유난히 잘 타고, 손발과 배가 항상 차다. 소변이 잦으면서 양은 적고 색이 희며, 대변도 자주 보거나 묽은 편이다. 열증은 화를 내면서 짜증을 부리는 편이다. 다시 말해서 ‘화증’의 짜증이고 ‘열불’ 나는 짜증이다. 정수리에 불덩이를 얹어놓은 듯 화끈거리고, 눈이 잘 충혈되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진땀이 솟구치기도 한다. 콧속이나 입안이 마르고 입안이 잘 헐며 갈증이 나서 물을 자꾸 마시려고 한다. 가슴속이 열기로 가득 차서 답답하고, 소변이 붉으며 양이 적고 냄새가 심하게 나며, 대변은 굳어서 때로 토끼똥마냥 동글동글하다. 배가 뜨겁고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한증 타입일 때는 까치콩이 좋다. 까치콩을 볶아 가루 내어 나이에 맞추어 양을 조절하면서 1회 2~4kg씩 진하게 끓인 대추차로 1일 3~4회 복용시킨다. 까치콩은 정신 신경을 안정시키는 영양가치가 대단히 높은 식품이다. 대추도 정신 안정제의 효과가 있다. 또 짜증이 나면서 식욕이 없을 때는 소엽을 끓여 나이에 맞추어 조금씩 먹인다. 음식 냄새까지 싫어하며 음식을 보기만 해도 메스꺼워하고, 트림을 자주 하며 헛배가 자주 불러올 때 좋다. 열증 타입일 때는 등심(골풀의 속살)이라는 약재가 좋다. 신경안정제 역할을 하고 열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며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면서 불안·초조해하고 짜증을 잘 부릴 때 효과가 있다. 등심 끓인 물을 나이에 맞추어 양을 조절하면서 조금씩 먹인다. 차게 식혀 먹이도록 한다. 또 짜증이 나서 머리가 아프고 눈이 빠지는 것 같고 번거롭고 답답해 미칠 것 같으면 메밀국수를 많이 먹이면서 메밀국수 삶은 물을 자주 먹인다. 한증인지 열증인지 가리기 어려울 때는 모려(굴)가 좋다. 탄산칼슘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인산칼슘, 유산칼슘, 케라틴 등도 함유되어 있으며, 진정 작용이 강해서 불안·초조해하고 짜증을 잘 낼 때 효과가 있다. 몸이 약해서 유달리 땀을 많이 흘릴 때도 좋다. 잘 씻은 후 1일 8~12g을 물 300cc로 끓여 반으로 줄면 하루 동안 여러 번 나누어 복용시킨다. 진정을 목적으로 하면 생껍질 그대로 쓰고, 땀이 유난히 많을 때는 프라이팬에서 볶은 후 끓인다. 변비가 심해요 변비는 대변 속의 수분이 적고 단단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변의 횟수로 정의할 수는 없다. 모유를 먹일 때는 하루에 4~5회, 많을 때는 10회 이상 자주 변을 본다. 분유를 먹일 때보다 약간 묽은 편이며 수분이 많고 거품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며, 또 분유를 먹일 때는 모유를 먹일 때보다 횟수가 적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 역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4~5일 동안 변을 안 볼 수도 있다. 잘 먹고 잘 놀며 기분 좋아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상습적인 변비는 주로 체질적인 관계가 많다. 또 어린이 변비는 특히 먹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식량이나 수분 섭취량이 부족하거나 편식 등으로 분변의 양을 충분히 만들지 못하고 그로써 장 연동을 자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음식물에 의한 영양이 불량해졌을 때 변비가 올 수 있다. 심인성 요인이 변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정신적인 변 공포증이 있을 수 있으며, 많은 어린이들이 낯선 곳, 위험을 느끼는 곳, 집을 떠난 다른 곳에서는 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변비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부적합한 배변 습관이 변비를 일으키기도 한다. 여자아이의 거의, 그리고 남자아이의 75%는 만 5세 전에 대소변을 완전히 가리는데, 만일 대소변 가리기를 너무 일찍 시작하면 변비가 올 수 있다. 그 밖에 비위장에 열이 축적될 때, 기 순환이 제대로 안될 때, 기혈 부족으로 장의 연동운동이 약할 때, 복부가 냉할 때도 변비가 잘 생긴다. 혀를 살펴봐서 혀 위에 끼는 이끼가 누런색이면 비위장에 열이 축적됐거나 기 순환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혀의 이끼가 흰색이면 기혈의 부족이나 복부 냉증에 의한 것으로 판별할 수 있다. 변비가 오면 우선 규칙적인 배변 습관을 갖도록 하고, 복부 마사지를 자주 해준다. 허리에서 꽁무니뼈까지도 마사지해주며, 좌욕을 하게 한다. 또한 변 가리기는 생후 18~24개월 사이에 느긋하게 점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섬유질이 많은 식품을 섭취하도록 하며, 수분 섭취를 늘린다. 분유를 먹는 경우라면 분유를 묽게 타서 주고 물을 더 주는 것이 좋다. 곡류는 현미, 보리, 콩, 완두, 고구마, 메밀, 검은깨 등이 좋다. 과일이나 견과류는 사과, 배, 파인애플, 프룬(서양자두), 건포도, 살구, 복숭아, 호두, 바나나 등이 좋다. 채소류 중에는 우엉, 연근, 표고버섯, 양배추, 시금치, 근대, 무청, 쑥갓, 쑥, 당근, 알로에, 셀러리, 브로콜리, 죽순 등이 좋다. 부모님이 가장 궁금해하는 우리 아이 건강백과 Q&A Q. 신생아의 피부가 얼룩덜룩한데 괜찮은가요? A. 신생아는 피부가 얇고 혈관이 풍부해 붉은 빛을 띤다. 출생 후 약 하루가 지나면 피부가 감색으로 되지만 7일이 지나면 자연히 없어진다. 손발이 찰 때는 청색증을 보이며, 울 때는 암적색이나 자색의 얼룩덜룩한 점이 나타난다. 딸기형 모반(딸기같이 보이는 약간 돌출된 검붉은 반점)은 3세까지는 없어진다. 중독성 홍반(신생아 두드러기)은 붉은 반점의 중앙에 노란색 발진을 띠며 전신에 나타날 수 있다. 비립종(진주빛의 흰 점)은 콧등 혹은 턱에 생기며 수일 또는 수 주 내에 없어진다. Q. 사시인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A. 생후 6개월까지는 정상적인 아기도 좌우 눈동자가 따로 노는 일시적인 ‘가성사시’가 있을 수 있다. 대개 8개월 정도 지나면 없어지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참고로 출생 때는 심한 근시이다. 생후 일주일경에 명암을, 1~2주에 빛을, 2~3주에 물체를 보는 능력이 생기고, 3~4주에 색을 느끼기 시작한다. 생후 1개월까지 시력은 0.05 미만이며, 초점 거리는 25cm에 불과하다. 생후 3~4개월이면 시력이 0.1 정도 되며, 초점 거리는 45cm로 길어진다. 생후 4개월이면 색에 대한 선호도가 생긴다. 생후 5~7개월이면 시력이 0.21, 초점 거리는 1.5m가 된다. 그리고 원근을 점차 구분한다. 이렇게 발달하다가 만 5~6세가 되면 시력이 1.0 이상 되고, 초점 거리는 5m가 되어 성인의 정상 시력에 비로소 접근하게 된다. Q. 구강과 치아 관리는 어떻게 해주면 좋은가요? A. 6개월까지는 끓여서 식힌 물이나 액상 세정제에 소독한 거즈를 적신 후 앞쪽 잇몸을 마사지한 다음 안쪽 잇몸을 닦아주고 혀도 같이 닦아준다. 1일 1회, 30초 이내면 된다. 이후 10개월까지는 위와 같이 닦아준 다음 핑거 칫솔을 손가락에 끼우고 액상 세정액을 묻혀 이를 닦는다. 1일 2회, 1회 1분 정도면 된다. 10개월 이후에는 치약을 아주 조금 칫솔에 짜서 잇몸과 이를 닦은 후 칫솔을 물에 헹궈 입속에 남아 있는 치약을 서너 번 반복하여 닦아낸다. 1일 4회, 1회 1~2분 정도 한다. 돌 이후에는 1일 4회, 1회 3분 정도 양치시키되 혼자 닦는 연습을 꾸준히 시킨다. 2부 아이들을 괴롭히는 대표 질환을 알아볼까요 틱장애 ‘틱’이란 뚜렷한 목적 없이 갑작스럽게 불수의적·연속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연속적 운동장애를 말한다. 초기 증상은 2~10세에 시작되며 대부분 14세 전에 시작된다. 초기 발병 전 단계에서부터 여러 행동장애들, 예를 들어 과민성, 주의력 결핍, 좌절에 인내하는 능력 부족, 공격성, 충동성 등이 있다가 비로소 첫 증상이 나타난다. 증상은 괜히 눈을 깜빡이며 괜히 목을 흔들고 안면근육을 씰룩거리는 것으로 시작하다가, 수년에 걸쳐 몸통·팔·다리에, 그리고 음성 틱의 복합적 틱이 나타난다. 또 펄쩍펄쩍 뛰거나 발을 구른다든가 코를 킁킁거리며, 혹은 괜히 헛기침을 자주 하거나, ‘악’ 또는 ‘윽’ 등의 비명소리를 내거나 마치 동물이 짓는 것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고, 의미 없는 낱말이나 여러 마디의 말을 반복하기도 한다. 괜히 공격적 내용과 성적 내용의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이것을 ‘외화증’이라고 하는데, 전체 환자의 3분의 1에서 나타난다. 혹은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 반복적으로 흉내 내기도 하고, 자신이 말한 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틱장애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일과성 틱장애’, ‘만성 운동 또는 음성 틱장애’, ‘투렛(Tourette)장애’ 등이다. 이 중 투렛장애는 다양한 운동 틱과 하나 또는 하나 이상의 음성 틱이 1년 이상 지속되는 장애이다. 다른 정신 질환, 특히 주의력 결핍 과잉 운동장애, 강박장애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즉 투렛 환자의 반 정도에서 주의산만, 과잉 운동 및 충동적인 행동이 나타나며, 강박 증세는 투렛 환자의 31~68%에서 나타난다. 틱의 예후는 만성적이며 평생 나타나기도 한다. 대개 한때 호전됐다가 악화되는 것을 반복한다. 한 부위의 틱이 심했다 덜해지면 다른 부위의 틱이 새로 나타나거나 악화되는 형태로 계속 반복된다. 치료는 가족상담, 행동치료(특히 habit reversal treatment), 약물치료를 한다. 한방 처방으로 여러 가지가 제시되고 있지만 한의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가미온담탕’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보심온담탕’을 소개한다. 처방: 백복령 12g, 반하(생강즙에 담갔다 말린 것)·진피·인삼·황기·산약·당귀·용안육·산조인(볶은 것) 각각 4g, 맥문동·죽여·치자(볶은 것)·감초 각각 1.5g, 생강 3쪽, 대추 2개 제조·복용법: 물 300cc로 끓여 반으로 줄인 후 나이에 맞추어 양을 조절하면서 하루 동안 여러 차례 나누어 먹인다. 알레르기성 비염 알레르기성 비염은 발작적으로 계속되는 재채기, 주체하지 못할 만큼 흘러내리는 물 같은 콧물, 콧속이 찍찍거리면서 숨 쉬기 갑갑할 정도의 코 막힘의 3대 증상을 특징으로 하는 질병이다. 알레르기성 결막염을 동반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보통의 결막염이라면 누런 눈곱이 끼지만 알레르기성 비염을 동반한 결막염일 때는 눈곱이 흰 것이 다르다. 알레르기성 비염을 잘 일으키는 어린이는 외형적으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눈 주위가 검다. 귀 밑으로 경부(목)를 훑어 내리면 림프선이 부은 것을 촉지할 수 있다. 피부는 아토피성 경향을 띠며, 뿌옇게 살비듬이 잘 일고 긁으면 벌겋게 줄이 생긴다. 흉골이 불거진 새가슴에 늑골이 예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머리가 잘 아프다고 하며, 설사가 잦거나 변이 시원치 않다. 소변도 찔끔찔끔 자주 보며, 때로 야뇨증 경력이 있거나 그런 증상이 현재도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유 없이 다리가 잘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알레르기성 비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첫째, 당분을 과잉 섭취하지 말아야 하고, 채소와 해조류를 충분히 배합한 균형 있는 식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둘째, 피부를 자주 건포 마찰한다. 한편 예방과 치료에는 지압도 효과적이므로 양쪽 콧방울 바로 옆에 있는 ‘영향(콧방울 양옆) 경혈’을 자주 지압하고, ‘천주(뒷머리의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부위의 홈이 파인 중앙선에서 좌우로 3cm 양옆으로 움푹 들어가는 곳) 경혈’, ‘풍지(귀 뒤에서 뒷머리 쪽으로 엄지손가락 손톱만큼 둥근 돌기에서 뒷머리카락이 있는 쪽으로 움푹 파인 곳) 경혈’을 자주 마사지해준다. 또 창이자(도꼬리마리씨)를 엷은 다갈색이 되도록 프라이팬에 볶아 끓여 먹이거나, 가루 내어 먹인다. 역시 나이에 맞게 양을 조절하여 먹인다. 혹은 창이자의 잎을 끓여 차처럼 수시로 나누어 먹어도 좋다. 알레르기성 비염의 대표적인 처방은 ‘여택통기탕’이다. 이 처방은 식독(食毒), 수독(水毒), 혈독(血毒)이 알레르기성 질환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킨 경우에 특히 효과가 있다. 처방: 강홀·독활·방풍·갈근·창출·승마·총백 각각 3g, 마황·천초·백지 각각 1.2g, 자감초 2g, 생각 3쪽, 대추 2개 제조·복용법: 이상을 한 첩 분량으로 하여, 소아의 경우는 하루에 한 첩 분량을 재탕까지 해서 3회 분복시키되 나이에 알맞게 양을 조절하여 나누어 먹인다. 두드러기 두드러기는 ‘피부에 갑자기 국한성의 발적과 부종을 형성했다가 대개 몇 시간 지나면 사라지는 일과성 질환’으로 정의한다. 흔히 ‘담마진(蕁麻疹)’이라 하는데, 이 용어는 일본식 표현이다. ‘담마’는 심마(蕁麻, 쐐기풀)를 뜻하는데, 쐐기풀 등의 식물에 접촉했을 때 두드러기가 잘 생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의학에서는 ‘은진(癮疹)’이라고 한다. 두드러기는 반복되는 기간에 따라 급성과 만성으로 나뉜다. 1개월 이상 계속되는 경우를 만성이라고 한다. 두드러기는 기관지천식이나 알레르기성 비염 등에 수반하여 생기기도 하지만, 주요 발병 원인에 따라 식사성 두드러기, 약제성 두드러기, 물리적 두드러기, 콜린성 두드러기, 심인성 두드러기 등으로 분류한다. 식사성은 생선이나 게 또는 유제품 등에서 잘 오며, 약제성은 약진이라 하고, 믈리적 인자로는 온열·한냉·일광 등의 자극을 말한다. 콜린성은 운동이나 목욕 등 발한 자극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심한 가려움증을 동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혹은 화끈거리며, 혹은 찌르는 듯 아프고, 혹은 개미가 기어가는 듯 느껴진다. 두드러기는 갑자기 발생했다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크기는 쌀알 크기부터 크게 뭉쳐서 나는 등 다양하며, 색깔은 엷은 홍색을 띠거나 창백하고, 사라진 후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 단, 긁으면 벌겋게 흔적이 남는다. 때로 호흡기 증상(호흡곤란, 천식 발작 등), 위장 증상(구역, 복통, 설사 등)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다. 비타민 C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 좋다. 또 비타민 B1, B2 및 칼슘 함량이 많은 식품을 먹인다. 식사성이나 약제성일 때는 광향차나 밤 껍질을 끓인 물을 자주 먹인다. 생선이나 게를 먹고 생겼을 때는 소엽을 끓여 먹이고, 육류를 먹고 생겼을 때는 산사육을 끓여 먹인다. 콜린성일 때는 통밀차를 자주 먹이고, 온열성일 때는 생지황을 짠 생즙을 먹이며, 한냉성일 때는 형개(정가 풀)를 끓여 먹인다. 처방으로는 ‘청기산’ 등이 좋다. 이 처방은 ‘형방패독산’의 가미방이다. 처방: 인삼·시호·강활·독활·지각·질경·천궁·적복령·감초·형개·방풍·천마·박하·선퇴 각각 4g, 박하 소량, 생각 3쪽 제조·복용법: 이상을 1첩 양으로 하여, 재탕까지 해 나이에 맞춰 양을 조절하면서 1~2일 동안 나누어 먹인다. 부모님이 가장 궁금해하는 우리 아이 건강백과 Q&A Q. 아기가 구토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구토가 있을 때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게 하여 토사물을 잘못 넘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한다. 대증요법으로는 6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이지 않는다. 단, 탈수에 대한 치료를 하며 안정을 취하게 한다. 참고로 구토는 젖이나 음식을 지나치게 먹어 위장에 정체된 경우, 또는 젖이나 밥을 먹을 때 놀라서 정체된 경우, 정서부진으로 간기(肝氣)가 제대로 운행하지 못한 경우, 또는 엄마가 맵고 자극적인 음식물을 지나치게 먹어서 젖에 열이 뭉친 채 아기가 먹어 아기의 속에 열이 적체된 경우에 잘 발생한다. 전신 증상은 없고, 토하더라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활기가 있는 경우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식장애나 경련 등이 있는 경우에는 뇌신경계 질환(뇌염, 수막염) 등을 의심할 수 있으며, 토사물에 담즙이 보이거나 멍울이 보일 경우에는 장폐색 특히 장중첩증, 급성 복막염 등을 의심해볼 수 있다. 이것은 중증이다. Q. 아이의 ‘반응성 애착장애’란 어떤 병인가요? A. 아이의 반응성 애착장애는 5세 이전에 어머니로부터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발생한다. 즉 아이의 기본적인 정서적·신체적 욕구를 계속해서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여 발생하는 병이다. 가장 전형적인 증상은 정서발달과 신체발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연스런 움직임이 없고 웃지 않으며, 무표정·무감동하거나 또는 놀란 상태에서 두리번거리는 표정을 보인다. 자극을 주어도 반응이 느리다. 식욕이 떨어지고 먹지 않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으며, 대개 배가 튀어나와 있다. 체중도 미달이며, 피부가 창백하고 근육도 약하다. 증상이 심하면 사망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보살핌 결핍 기간이 길면 길수록 예후가 나쁘다. 3부 우리 아이 건강 챙기는 음식 건강보감 머리를 좋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식품 베스트 10 1. 녹두는 신경질적인 어린이에게 좋다: 녹두는 신경질적인 어린이, 화증이 있는 어린이, 속에서 열불이 나는 어린이, 열성 체질로 더운 것을 못 참는 어린이, 몸 안에 생긴 열독으로 걸핏하면 부스럼이 잘 나는 어린이에게 잘 어울리는 식품이다. 녹두를 싹 틔워 숙주나물로 키워 먹여도 좋다. 단, 냉증 체질이 녹두를 자주 먹으면 원기가 떨어진다. 소화기가 약한 어린이에게도 좋지 않다. 2. 대추는 잘 놀랄 때 안정제로 좋다: 신경성으로 얼굴에 열이 훅 달아오르기도 하고, 몸이 노곤하며 마음이 번거로워질 때, 걸핏하면 노여움을 타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울음을 터뜨리거나 잠을 잘 못 이룰 때, 감정이 쉽게 바뀌고 어디에도 열중하지 못하며, 밤중에 자주 깨거나 악몽을 꾸는 것처럼 자지러지게 깜짝 놀랄 때는 신경안정 작용이 큰 대추가 좋다. 단, 생대추를 많이 먹으면 몸에 열이 생기고 소화장애를 일으킨다. 열성 체질로 입이 마르고 변비가 있을 때도 삼가야 한다. 3. 땅콩은 기억력을 증진시킨다: 땅콩의 지방은 콩의 3배, 비타민 B1은 12.6배에 이르며, 리신, 레시틴, 비타민 B1, B2, E 등도 많다. 땅콩은 적혈구를 증식시켜 철분의 흡수를 향상시키고, 기억력을 증진시키며, 호흡기 기능을 강화한다. 땅콩의 붉은 껍질에는 조혈 효능이 있기 때문에 껍질째 먹이는 게 좋다. 단, 땅콩이 굳어져 딱딱해진 것은 기름기가 산화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한 땅콩에 곰팡이가 피면 아플라톡신이 생겨 독이 있으므로 먹을 수 없다. 4. 홍화는 머리를 좋게 하는 셀레늄을 갖고 있다: 홍화(잇꽃)에는 머리를 좋게 해주는 성분인 셀레늄이 많이 들어 있다. 홍화는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며, 심장기능을 강화하고, 피부를 맑게 해준다. 홍화씨 기름에는 리놀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머리를 총명하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홍화를 적당히 쓰면 혈액순환도 촉진하고 혈액을 생성하지만, 지나치게 많이 쓰면 피를 파괴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5. 미역은 신경을 진정시킨다: 미역은 속에 열을 느끼며 가슴이 답답해하거나 화를 잘 내고 잘 보채는 어린이에게 좋다. 또 피를 만들어주고 피를 깨끗하게 해주며, 뼈를 강화하고, 변비를 개선해준다. 미역 요리를 할 때는 참기름과 함께 조리하면 미역의 요오드 흡수율이 훨씬 높아진다. 단, 냉성 체질의 어린이에게는 많이 먹이지 않는 게 좋다. 6. 상추는 감정이 격변할 때 좋다: 상추는 신경안정 작용을 한다. 그래서 신경과민이 되거나 화증을 일으키기 쉽고, 감정의 격변이 심한 어린이에게 잘 어울리는 식품이다. 또한 소변을 원활하게 하는 이뇨작용을 하며, 열성 체질로 구취가 심해질 때도 좋다. 피를 맑게 하는 정혈작용 및 해독작용도 하므로 피부트러블을 잘 일으키거나 상습적으로 변비가 있는 어린이에게도 좋다. 단 냉한 체질, 또는 설사를 자주 할 때는 맞지 않는다. 7. 소엽은 신경이 예민하고 소화기가 약할 때 좋다: 소엽은 차조기라는 풀의 잎이다. 신경이 예민하고 짜증을 잘 내며, 식욕이 변하고 소화도 못 시키며, 트림을 자주 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헛배가 잘 불러올 때 좋다. 또한 감기로 오한이 생겨 온몸이 쑤시거나 콧물이 흐르고 목이 마를 때도 좋다. 목구멍이 아프면서 누렇고 끈끈한 가래가 많이 나와 고생할 때, 코가 막히고 희고 맑은 가래가 나올 때도 좋다. 8. 오미자는 뇌파를 자극해 기억력을 높인다: 오미자는 심장기능을 강화하여 중추신경을 흥분시키며, 시각의 감수성을 증가시켜 눈을 밝게 하고, 뇌파를 자극하는 성분에 의해 기억력을 증진시킨다. 또 간장기능을 강화하며, 갈증을 내리고 기침, 가래, 천식을 가라앉힌다. 신장기능을 강화하고 소변이 잦은 것을 개선하며, 지나치게 땀을 많이 흘리는 탓에 온몸이 나른하고 입이 마를 때도 좋다. 단, 기침 초기에 열이 있을 때는 삼가는 것이 좋다. 9. 토마토는 총명하게 해주는 성분을 갖고 있다: 토마토는 진정작용을 하고, 소화를 돕고, 간장기능을 좋게 해주며, 피로를 빨리 회복시킨다. 또 피를 맑게 해주는 정혈작용도 뛰어나다. 단, 냉한 체질은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이유식으로 줄 때는 완전히 익은 것을 먹이거나 가열해서 먹이는 것이 좋다. 10. 호두는 열량이 높고 영양가가 풍부한 건뇌식품이다: 호두는 신경안정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세포의 방수성을 높이며, 수분 배출을 돕고 뇌세포를 활성화시킨다. 특히 만성 기관지염, 천식, 기침이 심하고 가래가 많을 때 아주 좋다. 단, 열성 체질 또는 대변이 항상 묽은 어린이에게는 좋지 않다. 또 여름에는 먹이지 않는 것이 좋다. 다음 해 4~5월이 지나면 기름기가 절어서 맛도 없고 영양가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린이 음식 궁합 감자와 치즈: 감자에 부족한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하면서 어린이 입맛에 맞게 맛있게 먹이려면 삶은 감자를 뜨거울 때 으깨어 생치즈를 섞어 먹인다. 치즈와 감자가 만나면 상호보완 작용으로 영양의 상승효과를 가져와 거의 완벽한 식품이 된다. 굴과 레몬: 굴은 어린이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영양소를 가장 이상적으로 갖추고 있는 식품이다. 그러나 부패가 빠르다. 이때 레몬을 떨어뜨리면 나쁜 냄새도 없애고 식중독을 일으키는 세균을 살균시키며, 철분의 흡수 이용률도 향상시킨다. 당근과 양배추·오이: 당근을 식용유와 함께 조리하면 카로틴 흡수율이 향상되며 소화·흡수가 잘 된다. 또한 당근주스를 만들 때 양배추를 함께 섞으면 더 또렷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당근과 오이를 배합하면 비타민 C를 파괴하는 아스코르비나아제 성분이 있어 비타민 C가 파괴된다. 두부와 무: 두부는 비타민 B군이 풍부한 영양제이며,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한 단백질 식품이다. 그러나 두부를 먹고 때로 중독되는 일이 있다. 이때는 무 끓인 물을 먹이거나 무씨를 갈아 가루약처럼 먹이면 도움이 된다. 딸기와 설탕·우유·콩: 딸기는 어린이의 얼굴에 기미 같은 것이 앉지 않게 하며, 잇몸에서 피가 잘 나고 구내염에 잘 걸리며 구취가 심해지기 쉬운 어린이에게 좋다. 철분과 비타민 C도 풍부하다. 그러나 설탕을 타면 딸기의 비타민 B1과 사과산, 구연산 등이 파괴된다. 딸기와 꿀을 배합하면 비타민 C의 흡수가 좋아진다. 딸기를 우유와 배합하면 딸기에 부족한 단백질, 칼슘 등을 보강할 수 있으며, 딸기는 콩의 불포화지방산이 산화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딸기와 두유를 섞고 레몬즙을 떨어뜨려 먹이면 좋다. 오이와 식초: 오이는 싱그럽고 향이 좋은 식품이다. 몸의 열을 내려주면서 피를 맑게 해주고, 몸속에 쌓인 불순물과 쓸데없는 염분까지 배출시켜 어린이의 몸을 정화시킨다. 그러나 오이에는 비타민 파괴 효소인 아스코르비나아제가 들어 있어 다른 채소와 함께 주스를 만들 때나 요리할 때 비타민 C가 손실되기 쉬우므로, 식초를 약간 섞어 주스를 만들거나 염분을 조금 넣어 조리하면 좋다. 토마토와 부추·설탕: 토마토는 어린이가 더위를 잘 타거나 갈증을 호소할 때 좋다. 또한 어린이가 신경 흥분으로 쉽게 긴장하고 쉽게 불안해할 때 진정시켜준다. 따라서 감정의 변화가 매우 심한 어린이에게 좋다. 특히 토마토와 부추는 궁합이 잘 맞는다. 그러나 토마토와 설탕을 배합하면 토마토의 비타민 B가 당분대사를 원활히 해주는 대사작용을 설탕이 방해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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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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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속인 거짓말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지음 뜨인돌/2002년 3월/287쪽/8,500원 ▣ 저 자 이종호 고려대학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열역학,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유치과학자의 일원으로 국…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지음 뜨인돌/2002년 3월/287쪽/8,500원 ▣ 저 자 이종호 고려대학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열역학,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유치과학자의 일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세계 및 한국의 문화유산을 연구했으며, 현재는 각종 강의와 저술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저서로는 『신화와 역사로 읽는 세계 7대 불가사의』『피라미드의 과학』『노벨상이 만든 세상 1,2,3』『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등과 소설『아누비스』『피라미드』가 있다. ▣ Short Summary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 중엔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왜곡된 것이 많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혹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교묘하게 조작된 역사적 사실들.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철저한 자료 분석과 고증을 통해 그 진실을 밝힐 뿐 아니라 조작하게 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마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 책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된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 점령이나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부터 개인의 영리를 위해 조작된 희대의 사기극 필트다운인 사건,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의 출현까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열한 가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크게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 첫째, 역사는 대부분 승리자들의 입장에서 기록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역사적 사실의 일부분을 삭제하거나 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왜곡된 사실들의 파급효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그것을 사실로 믿으려 하는 속성도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의심을 하다가도 나중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바스티유 점령’이 그 예이다. 두 번째, 사람들에겐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속성이 있다. ‘필트다운 사기 사건’의 경우 기존의 뇌의 용량이 작은 원인과는 달리 뇌의 용량이 큰 필트다운인 화석이 발견되자 인류는 다른 동물보다 뇌가 발달된 동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세 번째로 언론 매체의 조작이다. 사람들이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이 이권과 타협하여 사실을 왜곡할 경우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파라오의 저주’가 그 예이다. 이 책은 이런 세 가지 종류의 경우를 다루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좀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차 례 1. 콜럼버스의 신대륙 2. 링컨의 노예 해방 3.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4. 자유를 향한 바스티유 점령 5.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동상이몽 6. 인류의 조상 필트다운인 7. 갈릴레이의 이단 심판 8. 전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9. 비운의 아나스타샤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 10. 파라오의 저주 11. 사상 최대의 상륙 작전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지음 뜨인돌/2002년 3월/287쪽/8,500원 1. 링컨의 노예 해방 땅이 넓고 기름진 남부는 식민지 시대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고 노동력은 흑인 노예를 이용했다. 특히 그들은 대농장에서 면화 등을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필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반면 북부는 철과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적 공업이 발달했으므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것은 남부와 북부에서의 노동력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노예제도는 남부에서 먼저 폐지하려고 생각했었다.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전부 영국으로 수출했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목화씨를 빼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려서 실제로 농장주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3년 엘리 휘트니라는 미국 발명가가 목화의 씨를 뽑아 솜을 타는 조면기를 발명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마침 영국도 산업혁명 덕택에 수많은 기계로 많은 옷감을 짤 수 있는 대량생산체제로 돌입했다. 노예제 확대는 세계적으로 보아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1833년에, 프랑스는 184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미국은 이 골머리 아픈 문제를 각 주의 자치에 맡겼고 그 결과 남부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북부는 이를 금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다. 흑인도 인간이라는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는 이들이 세를 점점 불려 가고 있는 도중인 1848년 캘리포니아의 한 물레방앗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바로 이 골드러시는 노예제도 폐지의 기점이 된다. 이런 와중에 1852년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발간되었다.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인 면을 반영하여 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한 것인데 놀랍게도 미국 전역을 강타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노예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다. 1860년 11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바로 노예제도 폐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은 취임식에서 미합중국의 헌법은 각 주의 자치는 인정하되 합중국에서 빠져나가 새 나라를 세우진 못하게 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7개 주가 합중국에서 탈퇴하는 것은 미합중국의 헌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이를 막을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주의 문제는 계속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에게 노예제 문제는 연방의 통일이라는 문제보다 항상 뒷전이었다. 링컨의 노예 해방에 대한 소신은 여러 번 오락가락했다. 링컨은 1858년 7월에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 사람이니 저 사람이니, 이 인종이니 저 인종이니, 어떤 인종은 열등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모든 모호한 말들을 버립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의 단일한 국민으로서 뭉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선언을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찰스턴에서 한 연설은 노예 해방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담고 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흑인이 정치․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습니다. 흑인에게 선거권이나 배심원의 권한을 주는 것, 그들이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 것, 또한 백인과 결혼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한 그들이 우리처럼 살 수 없으므로 상층과 하층 계급은 반드시 존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상층의 지위는 백인들에게 할당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생각은 단순했다. 단일 연방의 유지야말로 미국 정부가 지켜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며, 노예제 폐지는 정치적 이해에 따라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그는 노예제도에 관한 소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1861년 4월 12일 섬터 요새에 대한 남부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어도 노예 문제에 대한 링컨의 대도는 여전히 모호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들이 점령 지역에서 노예제를 즉각 폐지하자고 건의했을 때조차 그는 반대했다. 그렇지만 전투는 북군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북군은 남군에게 연전연패했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자 링컨은 1862년 7월 노예 해방령을 선포한다. 남부에 유리하던 전쟁은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한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결국 1865년 4월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몬드가 함락됨으로써 전쟁은 끝난다. 놀라운 것은 남북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많은 남부인들이 남부의 독립을 얻기 위해 노예제도의 철폐를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전쟁 종료 한 달 전, 제퍼슨 데이비스는 한 외교관을 시켜 영국과 프랑스에 “두 나라가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다면 남부연합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키겠다.”라고 제안했다. 당시 남부의 한 신문 사설도 이를 증명해 준다. “남부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극복할 수 없는 방해물이 된다면 노예제도를 당장 폐지해 버리자.” 그러나 이런 발언들은 너무 때가 늦은 것이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흑인 노예들은 링컨에 의해 해방되었다. 비록 전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예 해방을 전격적으로 선언했지만 그에 의해 노예가 해방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엄밀한 검증에 의할 경우 그는 결코 노예 해방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 의해 노예 해방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포장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는다. 극도의 첨예한 문제를 절묘하게 빠져나간 링컨은 가장 현명하게 거짓말을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 대통령 사상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 자유를 향한 바스티유 점령 프랑스 대혁명은 근대사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적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미국에서 먼저 독립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식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미국이 독립에 성공하자 자유, 평등의 개념이 백성들에게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반감이 프랑스 백성들의 마음 속에 축적되기 시작했으며, 그들도 미국과 같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대혁명도 사실은 돈과 관련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대혁명 전 프랑스는 유럽의 부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는 왕과 귀족의 손에 쥐어져 있는 반면에 백성들은 가난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막상 돈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에 가난한 백성들은 세금을 꼬박꼬박 부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의 무분별한 국고 소비로 극심한 빚더미에 올라앉은 프랑스는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이자 상환을 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었다. 국고가 바닥나고 더 이상 다른 나라로부터 차관을 끌어다 쓰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프랑스는 국내 세금을 인상한다. 당시에 먹을 빵도 없어서 빵을 달라는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백성들에게 세금을 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내어먹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국민들이 세금을 인상해야 하는 근본 요인이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낭비가 어찌나 심했던지 ‘적자 부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녀의 사치는 사실 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인들이 처형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들이 외국의 보수 세력만이 왕정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치밀한 탈출 계획을 세운 후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발각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이 탈출극으로 왕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결국 죽음을 자초했는데 그들의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데는 앙투아네트의 왕비병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38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구설수로 군주제에 내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바스티유 함락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바스티유 공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유명한 ‘공격자’의 한 사람인 에리라는 장교는 “바스티유는 결코 무력으로 공략되지 않았다. 공격받기 전에 항복했기 때문이다.”라고 시인했다. 1806년 나폴레옹 밑에서 장군으로 승진한 유란도 같은 발언을 했으며, 바스티유 수비대 소속 하사관도 이를 수긍했다. 나중에 민중의 혁명적인 영웅 행위를 조사하는 상설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역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원래 요새인 바스티유는 그 당시 감옥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신분 높은 사람들을 위한 호화로운 설비의 감옥이었다. 파리의 시내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은 정치범 등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관련되었던 사람들만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420년이나 되는 바스티유 성은 5.5미터나 되는 높이에 견고하게 축조되어 외부에서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82명의 수비병과 31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떠한 공격에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바스티유 성 안에 단 1일분의 식량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봉기한 민중도 당시 7명이던 죄수를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화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바스티유 사령관 드 로네이 후작과 몇 차례 교섭을 가졌고 드 로네이는 최종적으로 수비대 전원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바스티유를 넘겨주는 데 동의하고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바스티유 성의 수비병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군중들은 혁명기간 동안에 사망한 동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스위스 용병들은 시청에 끌려가 총살되었고 드 로네이 사령관은 시청으로 끌려가는 도중 군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며, 파리 시민의 봉기는 ‘앙시앵 레짐(낡은 제도)’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스티유 감옥이 혁명의 와중에 민중에 의해서 공격당한 후 점령되었다고 설명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바스티유의 점령이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믿는 것에는 그 사실이 진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것이 일반인들의 구미에 어떻게 잘 부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굳이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항상 값비싼 정보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시민들이 믿고자 하는 상황,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진실과는 전혀 다른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가 되는 것이다. 3. 갈릴레이의 이단 심판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갈릴레이가 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피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현대와 같은 과학시대가 열리진 못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원래부터 과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사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하지만 그는 이 대학의 교육방법에 실망한다. 사물을 차분히 관찰하고 근본 이치를 깨닫게 되는 학업방식이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한 갈릴레이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과학과 수학 공부를 시작한다. 갈릴레이는 매우 머리가 좋은 학생으로 새로운 학문에 입문하자마자 천재성을 발휘한다. 겨우 18세에 유명한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다. 1592년에 갈릴레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파도바대학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그의 생애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놓는 전기가 생긴다. 1608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는데 샘플 하나가 1609년 7월에 파도바에 도착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천재성은 곧바로 발휘되어 이 망원경을 바탕으로 눈으로 볼 때와 비교해서 약 1천 배로 확대되고 30배 이상 가깝게 보이는 개량된 망원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망원경으로 본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던 갈릴레이는 달은 미끈하지도 않고, 완전한 구형도 아니며, 바다와 깊은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뿐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은하수가 사실은 무수히 많은 별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목성을 관측하여 목성의 달, 즉 4개의 위성들이 그 둘레를 돌고 있음을 알아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발견한 천체의 현상을 연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이론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때부터 갈릴레이의 수난이 시작된다. 그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갈릴레이 자신이었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들이 목성의 둘레를 돌고 있는 것과 같이 달도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고, 지구도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고 생각한다. 망원경으로 발견한 현상들을 과감히 발표한 갈릴레이의 주장은 즉각적인 반박을 받는다. 그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하는 전통적인 생각이 뒤집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신이 의도한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갈릴레이는 자연적 현상에 의한 지동설을 주장했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발견 사실을 고집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부정하는 언사를 자행하자 1605년에 피렌체의 성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갈릴레이에 대한 고발장을 두 번에 걸쳐 교황청에 보낸다. 물론 교황청은 공소기각 결정을 내린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갈릴레이는 자신이 고발되었다는 사실에 동요하여 예수회파 장군이며 성청(이단을 결정하는 교황청의 부서)의 심판위원장인 벨라르민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낸다. 벨라르민은 한때 천문학을 강의한 적도 있었으므로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인 편지를 쓴다. “갈릴레이 씨는 제가 항상 이해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처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가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 같군요. 그러나 내가 그 같은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벨라르민이 갈릴레이에게 쓴 편지에서 보듯 교황청에서도 지동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교황청에서도 명확한 증거를 보여 준다면 지동설에 대해서 신축성 있는 견해를 보이겠다고 적은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지동설에 대한 완벽한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자 교황청은 1616년에 판결을 내린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철학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이단”이라는 것이다. 1618 년에는 갈릴레이가 또다시 큰 실수를 저지른다. 1613년 예수회 수사인 그라시 신부가 세 개의 혜성을 발견했는데 갈릴레이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혜성이 착시현상에서 비롯되었고 땅에서 나오는 증기가 반사되어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 간의 논쟁은 그 후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며, 예수회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적이 되어 갔다. 이때 갈릴레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울 5세가 1623년에 사망하자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었던 우르바누스 8세가 새 교황으로 임명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태양계에 대한 정확한 책을 쓰겠다고 밝히자 교황은 잘 해보라고 격려까지 했다. 갈릴레이가 교황과의 약속으로 저술한 책이 1632년 2월에 발간된 『우주의 커다란 두 가지 체계에 관한 대화』이다. 이 책을 찍은 것이 갈릴레이로서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칭찬을 받을 줄 알았으나 교황청에서는 그의 책에 대해 판매 금지를 시키고 책을 압수하더니 갈릴레이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 책에서 우회적으로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가설들이 옛 가설들보다 현실을 더 잘 설명해 준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성스러운 사람들이 새 가설들을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적었다. 그것은 교황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갈릴레이의 선의의 표현이었으나 문제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그 대목을 갈릴레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신성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이성의 무능함을 꼬집었는데 바로 그 무능한 자가 교황 자신을 빗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르바누스 8세는 굉장히 진노했고 갈릴레이가 죽은 후에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목성과 금성, 수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을 발견한 갈릴레이가 모든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 발견으로 박해를 받기는커녕 1611년에 교황 바울 5세를 알현하고 예수회 회의에서 표창까지 받는다. 이때 이미 교황청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론은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이미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는 지동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세 군데를 바꾸면 금서 목록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첨부했고, 1620년에 이렇게 정정된 이론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학자인 갈릴레이는 1616년에도 교황을 접견했다. 교황은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대해 반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레이가 자연 현상을 엄밀하게 증명하는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절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유지했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여러 해를 거쳐 증명도 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자 학자들이 그에게 증거를 대라고 다그쳤다. 결국 갈릴레이는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1633년의 재판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 열린 것이다. 그때의 재판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갈릴레이가 유죄가 된 것은 불복종이라는 죄목에 따른 것이지 이단이라는 죄목 때문은 아니었다. 갈릴레이는 추후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진실이라고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으나 천문학적, 수학적 연구로서의 가정을 논의하고 부연하는 것까지 금지 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갈릴레이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갈릴레이가 재판 기간 중 감옥에 있었고 고문을 받았다는 말은 다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갈릴레이는 교황청에 의해 소환되자 처음에는 생탱쥐 성에 있는 종교재판소 감옥 대신 토스카나 대사관이 자리잡은 메디치 관에서 묵었다. 물론 첫 번째 심문을 받은 뒤에 수감되었지만 그는 독방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주거를 할당받은 데다가 집사와 하인이 각각 한 명씩 딸려 있었다. 법정은 갈릴레이에게 형식적인 금고형을 선고했으며, 놀랍게도 감옥에 들어가지도 않고 재판이 끝나자마자 로마를 떠났다. 갈릴레이의 재판 결과가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변질된 것은 갈릴레이와 같은 대학자가 이단 심문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가 진정으로 사면된 것은 그가 교황과 잘 알고 있으며 힘이 있는 추기경과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원래 이단 심문에 걸리면 그 어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나 대학자들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가 근신이라는 처분을 받은 것은 교황청에서조차 이미 천동설은 폐기되어야 할 학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이 불공정했고 그가 비록 교황청의 이단 심문 재판에 순종하는 서약을 했지만 재판이 끝난 후 과학자적 양심을 철회한 것에 대한 가책을 받고 “그래도 역시 그것은 움직인다.”라고 말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전설 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은 과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으며 위인전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에피소드이지만 이 내용 역시 조작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지 않다고 철회한 상태에서 갈릴레이가 재판관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법정 모독죄에 해당하는 그런 발언을 들었다면 유머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재판관들이 곧바로 가혹한 형벌을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1757년에 인쇄된 그의 초상화에 적혀 있었던 것이 최초인데 그때는 그가 사망한 지 1백 년도 넘은 후이다. 갈릴레이가 과학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후대에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4. 파라오의 저주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을 만들어 낸 투탕카멘 파라오는 유명한 왕은 아니었지만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신비로운 왕이다. 기원전 1343년에 이집트 18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와 제2 왕비 키야 사이에서 태어나 기원전 1333년인 10세에 파라오가 되어 기원전 1323년에 불운의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1992년 10월 26일, 사망한 지 3245년 만에 거의 완벽한 상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유물 발굴 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인 투탕카멘의 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남달랐다. 발굴에 얽힌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것은 물론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된 이후에 ‘파라오의 저주’라는 뜻밖의 전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왕가의 계곡’에 묻혀 있던 투탕카멘을 발굴해낸 장본인인 고고학자 카터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고고학에 입문하여 20대에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상 이집트 및 누비아 지역의 사적 주임 조사관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한편 자동차 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이집트에 요양 중이던 영국의 카나번도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골동품 수집 및 발굴 작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는 발굴 작업을 함께 할 전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때 한 친구의 권유로 카터를 만나게 된다. 1907년 두 사람은 드디어 의기투합하여 발굴 작업에 나선다. 발굴은 생각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카터는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발굴지를 정리하기로 한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1922년 11월 4일, 발굴하던 장소에서 마무리 청소를 하던 한 인부가 계단의 흔적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카터는 즉시 달려가 표면을 석회로 입힌 입구에 지하 묘지를 지키던 사람들의 관인과 투탕카멘 파라오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1월 26일 카터는 카나번과 그의 딸, 사위, 그리고 인부들을 뒤에 세워 둔 채 문에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불을 비추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안에서 훅 하고 뛰쳐나온 더운 공기 때문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윽고 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이상한 동물이며 조각상 등 방안의 풍경들이 차츰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황금! 온 사방에 눈부신 황금들이 번쩍거렸다.” 투탕카멘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아마도 호화로운 유물보다는 발굴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찾아온 의문사, 소위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 있다. 사람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도 이런 글이 써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이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 ‘파라오의 저주’를 만든 장본인은 사실상 카나번이라고 볼 수 있다.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고 카나번이 이 이 소식을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카나번에게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파라오의 저주가 카나번에게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나번은 유명한 점장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노파 점장이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이런 충고를 듣지 않고 카나번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의 발굴에 참여한다. 이후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지의 특파원 아더 웨이갈은 카나번에게 만약 투탕카멘 왕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6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고, 이 말을 들은 소설가 마리 코렐리는 카나번이 사망하기 15일 전 왕의 저주에 대한 흥미 위주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카나번은 투탕카멘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린 후 합병증으로 1923년 4월 5일 사망하고 만다. 무덤에 손 댄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카나번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 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나번의 애완견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후 카터 및 카나번과 관련된 사람들의 의문의 죽음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약 30여 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 TV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적인 분석이라는 것은 파라오의 저주가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의 저주에 대해서 조사하던 학자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 그 발굴 작업에 관련된 1천 5백여 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했다. 193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는 그 동안 신문이 발표한 21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뒤쫓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이거나 우연한 죽음이라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에는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카나번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카나번이 발굴하는 데 자금이 쪼달리게 되자 발굴이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런던 타임스 신문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당시 유례가 없던 이 일은 전 세계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파라오의 저주는 때마침 카나번이 일찍 죽게 되자 이런 ‘악감정’을 가진 언론에 의하여 과대 포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기사들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이자 언론은 ‘파라오의 저주를 받은 죽음’, ‘파라오의 복수’라는 제목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카터는 ‘투탕카멘의 저주를 둘러싼 소문은 중상 모략을 위해서 짜낸 착상’이라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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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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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의 기술
요약의 기술 와다 히데키 지음/하연수 옮김 김영사/2004년 2월/177쪽/8,900원 ▣ 저 자 와다 히데키 1960년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동경 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동경 대학 부속병원 신경정신과와 미국 칼메닝거 정신 의학교 국…
요약의 기술 와다 히데키 지음/하연수 옮김 김영사/2004년 2월/177쪽/8,900원 ▣ 저 자 와다 히데키 1960년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동경 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동경 대학 부속병원 신경정신과와 미국 칼메닝거 정신 의학교 국제부를 거쳐, 2004년 현재는 정신과 의사로 가와사키 사이와이 병원(川崎幸病院)의 정신과 상담의로 있으면서 히토스바시 대학(一橋大學) 경제학부에서 의료경제학을 강의한다. 심리학을 사업에 접목시킨 연구기관 '히데키 와다 인스티튜트'의 대표이며, 2003년 6월 '와다 히데키 전직 예비학원' 교장으로 취임해서 전직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행력으로 일이 10배로 가능한 사람이 되라』『30대부터 시작하는 '머리'좋아지는 공부법』『기업이 불상사에 대처하는 심리학』『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 등이 있다. ▣ 역 자 하연수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 Short Summary 자신의 전문분야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서 들어가는 방대한 정보, 그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고르고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요약에 강한 대표적인 인물로 도산 직전의 닛산 자동차를 1년 만에 흑자로 만든 카를로스 곤을 들 수 있다. 그에게 회생의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과거 미쉐린 사와 르노 사에서 비용을 절감하고 수익을 증대시켰던 경험들을 하나하나 쌓아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가 판단력이 빠른 것도 과거의 정보를 단순히 알고 있기보다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정리해놓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요약력을 기르기 위해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사실과 인용을 구별하여 핵심 정보만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인 정보들은 과거의 전후 정보들과 서로 엮어서 맥락을 파악한다. 필요하다면 도해로 요약정보를 시각화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매스미디어의 경우에도 비슷한 방법이 적용될 수 있다. 필요한 부분만을 선별하고 요약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 차 례 제1장 생존의 키워드 '요약의 기술' 제2장 요약의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이유 제3장 요약의 기술을 강화시키는 기본원칙 제4장 매스미디어 정보에 적용하는 요약의 기술 제5장 비즈니스에 활용하는 요약의 기술 제6장 요약의 기술로 대인관계를 매끄럽게 제7장 요약 잘하는 두뇌를 만드는 9가지 방법 요약의 기술 와다 히데키 지음/하연수 옮김 김영사/2004년 2월/177쪽/8,900원 제1장 생존의 키워드 '요약의 기술' '감상'과 '요약'의 균형을 유지하라 책을 읽고 난 후의 심상이나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달되도록 구성하는 것이 감상문이다. 감상문에서는 자신의 느낌, 감정 표현이 주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이 표현되면 전체 내용에 대한 요약이나 논리적인 분석이 포함되어 있지 않더라도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즉, 독서 감상문은 그 책의 심정적인 독해를 얼마나 잘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며 책의 주제, 내용을 보충하는 정보의 제공이나 분석 등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한편 요약문을 쓰려면 먼저 자기가 전하려는 주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어떤 정보(혹은 이야기)를 토대로 어떤 자료(혹은 등장인물)가 제시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그 책에서 느낀 주관(감상)을 표현하는 것보다 우선시된다. 감상보다는 책의 내용을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논리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것이다. 감상과 요약이라는 두 가지 태도를 대인관계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자. 감상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과 같은 주관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이른바 ‘개성을 정서적인 측면에서 키우는 힘’이다. 또한 대인관계에 있어서 감상은 주관적인 느낌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접근방식이다. 이에 반해 요약이란 상대(저자)의 주관(자신의 객관성)이나 정보, 자료를 논리적으로 포착하는 능력이며, ‘상대방의 개성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힘’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내가 사용하는 ‘요약의 기술’ 혹은 ‘요약’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정보나 데이터를 정리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주관과 논지, 개성 등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의사소통 기술이 포함된다. 비즈니스 사회에서는 효율화와 함께 논리적 사고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의사소통의 결함’이 다양한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논리력과 객관성을 높이는 ‘요약의 기술’은 앞으로 학교 교육이나 비즈니스 사회가 함께 키워나가야 할 ‘힘’이다. 나만의 맞춤 정보 ‘요약 캡슐’ 우리는 많은 정보를 우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요약하여 기억중추에 입력하는데, 이 단계를 ‘1단계 요약’이라 부른다. 이 1단계 요약에서 필요한 것은 정보의 정확하고 간결한 압축이다. 1단계에서 흡수된 요약정보는 머릿속에서 집약되고 목적에 따라 정리․분류되어 통합됨으로써 새로운 정보가 되는데, 이것이 2단계 요약이다. 즉 요약정보가 강화된 것이다. 이 ‘요약의 강화’가 행해졌을 때 비로소 요약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이 강화된 요약정보를 요약 캡슐이라 부른다. 1단계 요약과 2단계 요약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1단계에서 요약된 정보는 ‘축적으로서의 요약 정보’로 쌓아두는 데 의미가 있다. 신문이나 TV를 통해 얻은 정보를 요점을 간추려 자신의 기억 중추에 저장하는 것이다. 쌓아둔 요약정보는 2단계에서 부가가치를 지니게 되어 ‘유통’된다. 기억 중추에 저장했던 요약정보를 다양한 상황에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그 정보는 유통가치를 가진 것이다. 또 프레젠테이션 등에서 강화된 요약 정보를 제시하면 대외적인 유통 가치도 지니게 되는 셈이다. 요컨대 1단계 요약은 축적의 단계이며, 축적에서 흐름으로의 전환이 2단계 요약에서 이루어진다. 기업의 결산보고서는 돈의 축적과 흐름을 나타낸 것인데, 요약이란 바로 ‘지혜의 축적과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장 요약의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이유 논리를 가르치지 않는 교육 시스템 감상 위주의 독해를 중시하는 국어 교육을 받은 결과 ‘어려운 소설을 읽는 것이 독해력을 향상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소설은 허구이며, 작가는 표현을 위한 다양한 수사적 표현을 구사하는데 이러한 소설 읽기는 요약의 기술을 기르는 데 적합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신문이나 잡지의 평론을 접하는 쪽이 정보를 정리하는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글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서술 방식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고등교육의 현장에서도 논리적으로 문장을 읽고 쓰는 훈련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대학의 보고서조차도 논리적인 구성은 무시한 채 감정 위주의 글쓰기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보고서의 생명은 설득력이다. 그리고 설득력의 기본이 되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이다. 이는 문장을 읽고, 대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하고,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가는 훈련을 통해 얻어진다. 그런데 감상 중심의 국어 교육이 실시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훈련이 간과되기 쉽다. 그 결과 대학생이 제출하는 보고서의 대부분이 잘 쓰여지긴 하지만 논거가 빈약하고 감상에 치우친 서정적인 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설득력은 보고서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날마다 접하는 비즈니스 문서에서도 중요하다. 그럴듯한 문학적 표현에 집착하지 말고 상대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명확히 나타나도록 써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 제3장 요약의 기술을 강화시키는 기본원칙 자신만의 '필터'를 가져라 저장하기 위해 요약정보를 섭취하는 1단계 요약의 기본원칙을 알아보자. 예를 들어 어떤 글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요약정보를 만들어낸다고 하자. 이때에는 문맥에 있는 정보 가치를 가려내는 감각이 요구된다. 그리고 정보의 가치는 정보의 제공자나 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결정된다. 즉 아무리 긴 평론이라 할지라도 관심이 가고 정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요약 후의 정보는 하나의 문장이나 단락에 그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1단계 요약에서는 정보를 거르는 자기 나름의 필터가 필요하다. 자신의 흥미, 지식, 상상력, 연상 등의 필터를 통해 정보를 섭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가령 주간지의 신문광고나 지하철의 광고판에서 ‘특종! 공무원의 퇴직금 극비 리스트 입수!’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그 잡지를 구입했다고 하자. 이러한 기사의 흔한 패턴은 본격적으로 ‘극비 리스트’를 거론하기까지 서두가 상당히 길다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도달하기까지 독자를 붙잡아두려 한다. 그 주간지의 취재활동을 이미 알고 있고,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무엇보다 ‘극비’라 불리는 리스트의 내용과 그것의 신빙성에 중점을 둘 것이다. 이때 기사 말미의 결론에 해당되는 정보만 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처럼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사전지식 등 나름의 필터가 있다면, 새로운 사실과 그 사실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파악하면 충분하다. 요약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기사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필요 없이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얻으면 된다. 페이지 전체를 눈으로 훑어보고, 관련된 내용이 들어있을 만한 소제목의 본문 중에서 ‘그 리스트의 내용은…’이라는 문장을 찾은 다음, 그 뒷부분을 면밀히 읽어보면 된다. 그 이상의 시간을 투입할 필요는 없다. 요약정보를 검증하고 수정하라 ‘요약정보의 강화’가 목적인 2단계 요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석→가설→검증→수정’이라고 하는 사고․행동의 사이클이다. 1단계 요약에서 머릿속에 축적한 요약정보를 비평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때 다른 요약정보와의 관련성을 깨닫는다면 1차 요약정보에 부가가치가 생성되어 요약이 강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분석→가설→검증→수정’이라는 요약 강화 사이클의 첫 번째 단계인 분석적 사고이다. 머릿속에 요약정보가 많이 저장되어 있을수록 인간의 두뇌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활발히 연상 작용을 할 수 있다. 즉 뇌에 축적되어 있던 요약정보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분석적 사고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단계가 바로 가설을 세우는 것이다. 가설이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생각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나만의 가설이 나오지 않는다. 창조적․논리적 사고를 토대로 ‘자신만의 가설’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가설을 세울 때는 목적의식이 수반된다. 목적의식이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이 두뇌 활동을 위주로 한 분석 단계와의 차이점이다. 가설을 세움으로써 참신한 요약정보를 생성할 수 있다. ‘고객의 만족도가 올라가지 않는 것은 고객의 입장에 선 마케팅의 발상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같은 가설도 ‘강화된 요약정보’에 해당된다. 가설은 검증을 거쳐 핵심(확신)으로 승화된다. 가설을 세우는 단계에 포함된 행동 에너지는 이 단계에서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모니터 정보를 수집하거나 영업 현장의 의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요약정보를 좀더 강화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가설과 검증 결과가 다른 경우 수정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이것이 사고․행동 사이클의 마지막 단계이다. 제4장 매스미디어 정보에 적용하는 요약의 기술 필요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어라 서적에 의한 정보 수집은 독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독서에는 읽는 대상에 따라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취미로 소설이나 오락서 등을 즐기는 취미형 독서이고, 또 하나는 비즈니스 기획에 참고하거나 기술을 향상시키고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읽는 목적형 독서이다. 목적형 독서를 할 때 요약법의 기본으로서 ‘일부 숙독법’을 추천한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경우 한 권의 책에서 어느 부분이 목적에 부합되는가에 대한 판단 없이 책을 전부 읽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되기 쉽다. 다른 부분을 읽고 싶더라도 좀더 중요한 부분을 찾아내어 충분히 읽는 것이 요약에 따른 두뇌의 활동을 촉진시킨다. 경제경영서나 실용서 등은 대개 한 권이 6~8장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2~3장을 추려내어 읽고 남는 시간에 다른 책도 두세 권 정도 읽는 등 이런 식으로 일부만 숙독을 하면 한 권을 읽는 시간에 3~4권을 읽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일부 숙독법이 한 권을 다 읽는 것보다 주의력과 집중력을 더 요구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뇌에 기억되는 요약정보도 좀더 강화된다. 일부 숙독을 하다가 건너뛰려 한 부분이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거기서부터 읽으면 된다. 요약문을 작성하는 3가지 요령 요약의 기술을 강화하기 위해 요약문을 작성해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요약문은 어디까지나 요약의 기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요약 메모를 쓰는 법은 다음과 같다. ․ 우선 요약해서 써야 할 내용을 항목별로 기술한다(각 항목은 50자 이내가 좋다. 그 이상이 되면 요약정보로서 머리에 남지 않는다). ․ 항목은 10개 이하로 한다. ․ 써놓은 항목들의 인과관계, 상호관계에 의해 전체 문맥이 보여야 한다. 어떤 내용이 쓰였는지 처음에는 핵심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글쓰기에 익숙해지면 끝 부분에 자신의 의견을 한마디 덧붙인다. 이는 결코 정서적인 독해를 할 때 쓰는 감상문이 아니다. ‘이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수치에 입각한 근거가 부족하다’ 등 정보 가치에 대한 논평을 한마디 덧붙인다. 요약문 쓰기는 요약하는 사고 습관을 몸에 지니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제5장 비즈니스에 활용하는 요약의 기술 회의를 활성화시키는 메모의 힘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각 발언자들의 요약정보를 그 자리에서 기록하는 일이다. 최근에는 노트북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지만, 나는 손으로 쓰는 메모를 추천하고 싶다. 같은 문자를 기록하는 데에도 키보드를 치는 것과 손으로 쓰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손으로 쓰는 족이 분명 더 머리를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머리를 사용하는 것은 다른 정보의 연상이나 그와 관련한 두뇌 활동에도 영향을 준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메모를 할 때도 동일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자유 토론에 가까운 회의에서는 전체 토론의 흐름이나 발언 내용이 주제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에 대한 요점을 어떻게 메모할 것인지는 메모하는 사람의 요약하는 기술에 달려 있다. 발언 순서대로 쓰기보다 자문하는 형식으로 메모를 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의 발언 내용에 호응하기도 하고, 의문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의 느낌도 메모의 대상이 된다. 중요한 것은 참가자의 발언 내용에 관한 요점을 써나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사고활동을 메모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활동의 흐름을 남기는 메모를 하는 점이 바로 강연 기록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늘 발언 내용을 음미하고 때로는 반추하며 두뇌를 활용하며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면 자신이 발언할 때가 되었을 때 의문점이나 의견을 적절한 요약정보로 제시할 수 있다. 토론이 격해지면 사람에 따라서 감정적인 반응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의 냉정한 요약이 도움이 된다. 이야기의 논점을 제대로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논의 자체가 활발하게 진행된다. 결론을 내리되 항상 대안을 마련하라 적극적인 ‘공격적 경영’을 필요로 하는 오늘날의 비즈니스에서 프레젠테이션은 사업전략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무대라 할 수 있다. 요약정보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생각해보자. 시나리오를 생각할 때 각각의 요약정보를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으면, 즉 요약의 강화가 이루어지면 논리를 세우는 것도 매우 순조로울 것이다. 요약의 강화란 요약정보를 의미하는데, 사고활동의 네트워크에서 각종 요약정보가 부가가치를 지닌 새로운 요약정보를 창출한다. 이러한 사태가 되면 프레젠테이션의 컨셉을 만들고 면밀한 시나리오를 짜는 것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정보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할 주제, 분석 내용, 결론, 뒷받침할 자료, 이러한 것들이 요약된 내용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사의 솔루션 서비스를 도입하는 이점에 대해 도표를 설명한다면 그 도표 자체가 논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요약이다. 포지셔닝, 애프터 서비스 면에서의 강점을 강조하며 표현된 각각의 프레젠테이션 시트는 그 강조 방법 자체가 요약이 되는 셈이다. 프레젠테이션의 시나리오 만들기는 ‘기결승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기’는 프레젠테이션의 화제를 제시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다음의 ‘결’, 다시 말해 결론의 제시이다. 자사의 서비스를 도입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고 하자. 서비스를 도입하면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점이 있다는 문맥은 물론 결론이라 할 수 있지만 이는 상대방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또한 프레젠테이션의 결론이라 할 수도 없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따른 임시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임시적인 결론이 중요한 이유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보며 유연한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언급한 이점 중에서 상대방이 어느 요소에 강한 반응을 보이는지 주목하도록 한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설명의 강조점도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준비한 자료에 대해서든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에 대해서든 언제나 강조점을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이다. 직선적인 이야기 구조나 시나리오 구성으로는 별 효과를 얻지 못한다. 요약의 사고․행동 사이클인 ‘분석→가설→검증→수정’이라는 과정은 프레젠테이션의 준비 단계뿐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현장에서도 순간적으로 발휘해야 한다. ‘기결승전’의 ‘승’은 상대방의 반응을 살핀 후에 전개하는 이야기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상대방과의 대화에 따른 반응인 것이다. 이러한 임기응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요약의 기술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사용할 자료, 논거, 예시 등 다양한 요약 캡슐이 있으면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승’을 극복할 수 있다면 ‘전’의 단계는 한층 수월해진다. ‘승’에서 자료를 제시했다면 ‘전’에서는 정서적인 면으로 상대방에게 공을 넘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6장 요약의 기술로 대인관계를 매끄럽게 요약정보를 공유하여 의사소통의 질을 높여라 의사소통 기술과 요약의 기술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여러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다보면 간혹 ‘결국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고 눈이 둥그레지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상대방이 처음부터 갖가지 변명을 하거나 그 변명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 때 일어난다. 참을성 있게 결론을 기다려도 결국 ‘따라서 가급적 ~게 하면 좋겠습니다’라는 식의 막연한 제안으로 끝을 맺는다면 듣는 쪽도 혼란스럽고 요지의 논점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논점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재구성하여 자신의 이해가 올바른지 확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요약 캡슐을 활용하여 상대방의 결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할 때와 마찬가지로 비즈니스에서의 의사소통도 서로의 의견을 수시로 확인하며 요약 캡슐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라고 하는 공동작업장에서의 의사소통은 ‘요약정보를 공유’하는 일이다. 또한 상대방의 의견, 자신의 의견이라는 요약정보를 참조하여 업무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공통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을 말한다. 의욕을 갖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게 되면 요약의 기술도 발전하고 의사소통 기술도 향상된다. 인물 사이의 관계를 도식화해보자 사내의 인간관계를 파악해두지 않으면 편향된 의견을 듣게 될 수도 있다. 이는 큰 조직일수록 중요하며, ‘입사했을 때부터의 경쟁관계’, ‘대학시절부터의 친구’, ‘대학의 선후배 사이’, ‘같은 지역 출신’ 등 대략적인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언짢은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관계를 파악하는 손쉬운 방법은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A와 B는 이렇고, B와 C는 저렇다는 관계를 도식화하면 사내의 인간관계를 알 수 있다. 도식화하면서 구체적인 관계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메모를 한다. 동료나 선배들에게 물어 나름대로의 사내 인간관계도를 만들면 하나의 요약이 될 수 있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밝혀낼 수 있으면 더욱 정밀도가 높은 요약정보가 된다. ․ 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부서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 ․ 상사나 동료 등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 ․ 조직의 상부에서 평이 좋으며 장래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중요 인물로 체크해두는 것이 좋다. 인간관계도가 있으면 의사소통을 할 때의 요약정보로 이용가치가 클 것이다. 회사조직에 한정해서 설명했지만 이는 어떤 조직이나 그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임의 경우에도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 주변의 영향을 받기 쉬운 사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 등 여러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파악을 해두는 것만으로 불필요한 다툼을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배후 관계에 관한 요약 정보가 있다면 조직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 된다. 제7장 요약 잘하는 두뇌를 만드는 9가지 방법 출력 훈련을 통해 요약정보를 강화하라 기억을 보관하는 최선의 방법은 역시 ‘복습’이다. 복습함으로써 기억은 자리를 잡고 사라지지 않게 된다. 책이나 잡지 중에서 외우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메모를 해서 나중에 다시 읽어본다면 분명 ‘보관’ 효과가 올라갈 것이다. 정보가 일단 뇌에 저장되었다고 해도 필요에 따라 ‘상기’, 다시 말해 출력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출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사고습관으로는 ’출력 훈련‘이 있다. 평소에 뭔가 새로운 분야의 정보를 입력할 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말하면 좋은지, 어떻게 쓰면 좋은지 등을 생각하며 출력을 시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비즈니스와 입시공부 모두 기명(입력), 보관(저장), 상기(출력)의 기억 시스템을 활용해 요약정보를 강화시키는 쪽이 승자가 된다. 비즈니스의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요약의 바탕이 되는 기억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지식을 정보의 요약 캡슐로서 서랍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고, 필요할 때에 적합한 요약정보를 끄집어내 자꾸 상기시키는 훈련을 통해 기억력을 강화해야 한다. 가끔은 두뇌에 휴가를 주어라 제안한 기획안은 통과되지 않고 실수를 연발하며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을 때 혹은 거래처로부터 불만사항이 접수되었을 때는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여기며 정신적인 슬럼프에 빠지기 쉽다. 슬럼프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우울증이다. 이럴 때는 주의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입력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요약정보를 섭취해도 왜곡되기 쉽다. 이럴 때 효과적인 사고행동 습관으로 인지행동 요법에 의한 처방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두통을 앓고 있는 환자가 “더 이상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한다면 손을 잡고 일단 같이 걸어본다. 이렇게 해서 그 환자의 비관적 인지가 잘못 되어 있음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비즈니스에서도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응용할 수 있다. 즉 슬럼프일 때는 새로운 과제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습을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인, 혹은 단순히 사무적인 작업이라도 좋다. 이해할 수 있고, 모르는 부분이 적은 일을 하며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다 보면 우울한 상태가 개선되고 어느새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번 비관적 인지에 빠지게 되면 점점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관적 인지가 자신을 잠식해버리기 전에 빨리 ‘수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찾고 그 다음에 새로운 과제에 착수하는 쪽이 다시 일어나기가 쉽다. 또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자신의 결점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시기를 결점을 고치는 기회로 이용해보는 것도 좋다.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해서 요약해두면 좀더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17
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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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4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41.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준다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41.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준다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귀가하기 전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 이유인즉 아버지가 귀가해서 샤워를 끝내는 즉시, 가족 모두가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기 위함이다. 가정의 저녁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태인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순서와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으며 자란다. 그것은 비단 샤워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금요일 일몰 때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날, 자녀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숙제 등을 재빨리 마친 다음 목욕을 하고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모든 일과는 어머니가 일몰과 동시에 양초에 불을 켤 때까지 마치도록 정해져 있다. 이런 까닭으로 자녀들은 매일, 또는 매주 시간과 승부를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엄수함으로써 자녀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정된 시간 안에 끝내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 가는 것이다. 그 밖에 유태교의 축제행사 때에도 시간의 중요성을 통감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면 봄철에 치르는 가장 큰 축제인 '유월절(Passover)'에는 빵을 못 먹게 되어 있다. 그날에만 먹는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대단히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은 이것이 큰 고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성한 행사인 만큼, 축제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 자녀들은 시간의 중요성을 거의 생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영생이나 불교의 윤회 사상을 믿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시간관리가 공부의 기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유태인 소년들은 열세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 주로 손목시계를 선물로 준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다짐을 주기 위해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할 일을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서를 상세하게 짜는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맞춰 일을 확실히 해치웠을 때는 일종이 쾌감마저 느낀다. 흔히 동양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 원인이 자녀들이나 부모가 사전에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부 계획표를 짜기는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리인 것을 알고는 몇 번씩 변경을 하는 동안에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책상에 모래 붙들어 앉히려고 한다. 이것은 곧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떻게 시간을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는가 하는 방법을 깨우쳐주도록 해야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리듬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는 30분 이내에 끝내도록 시간을 정해 놓고, 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우물거린다면 사정을 보지 않고 모두 치워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30분이라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그 시간 안에 식사를 끝마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다. 나는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학교에 늦지 않으려면 정해진 시간 내에 세수하고,식사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재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즉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더욱 중요한 일을 등한시하는 따위의 나쁜 버릇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어렸을 때의 시간관리가 가장 능률적인 공부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42. 가족 모두가 모이는 식사시간을 활용한다 식당에는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잘 아는 일본인 가정에 저녁식사를 초대받았을 때 대단히 기묘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집 가족들과 우리 부부가 식탁에 둘러앉아 막 식사를 하려던 때였다. 초등학교 4년생인 그 집 장남이 벌떡 일어나더니 식당 한쪽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켜는 것이었다. 마침 텔레비전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 광경이 나에게는 참으로 기묘하게 생각되었다. 우리 집의 경우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홈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마침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시각 아마 다른 집에서도 이와 똑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가족의 일체감을 느끼는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식사시간은 자녀들의 마음의 양식이다 우리 유태인은 구약성서에 의해 굳게 뭉쳐져 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태인에게 있어 식탁은 무엇보다도 신성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유태인들이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이유는, 텔레비전은 한갖 오락물일 뿐이지 가족 전체를 하나로 묶는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는 다양해서 가족 모두가 공통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족이 텔레비전 프로를 화제로 삼는 것은 '회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대화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역시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간의 대화의 단절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듯한데, 그 한 가지 원인은 식당에 텔레비전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낮 동안 아버지는 직장에서, 자녀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활동하다 한 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가족들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유익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이러한 귀중한 시간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봄으로써 가족의 유대관계를 흐려놓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이 포인트!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다. 43. 외식을 할 때는 어린 자녀를 데려가지 않는다 젖먹이는 외식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부모들이 음식점에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가족이 정답게, 늘 머리를 맞대고 사는 자기 집과 다른 분위기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겨우 두세 살밖에 안 된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온다는 사실이다. 한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유태인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 또래의 어린이들이 밖에서 식사하는 즐거움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에게는 외식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경우,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거나 돌아다니며 수선을 떠는 등 다른 손님들에게 폐를 끼칠 것이 틀림없다. 때로는 음식을 흘리거나 그릇을 깨서 종업원이나 주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 봐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진짜 이유는, 밖에서 식사를 하는 행위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외식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는 생일 등 축하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이다. 그 외에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일 경우도 있을 것이고,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서 외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른의 세계에서는 어느 경우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해되지 않는 것들 뿐이다. 그들에게는 평소와 다른 상황에서 식사하는 것만이 흥미로울 뿐, 외식을 통해 그 어떤 기쁨도 얻지 못한다. 이처럼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 외식은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어른들 역시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쓰느라 외식의 즐거움은커녕 기분만 망치게 될 것이 뻔하다. 어른에게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유태인들의 상식이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외식을 할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남에게 협조하는 것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탈무드>에 '날마다 오늘이 최후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하루 하루, 한순간 한순간을 전 생애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내세'라든가, '저 세상'을 믿지 않는 유태인들의 생활신조이다. 그러므로 외식을 즐기는 것도 우리들 생애의 귀중한 한순간이며,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이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약간 과장된 말 같지만, 외식에 어린이를 동반하는 것은 유태인의 생활 방법에 역행하는 셈이다. 음식점에 어린이를 데리고 가서 다른 손님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다른 사람과의 협조는 곧 자기 희생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견해도 우리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44. 한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함께 식탁에 앉히지 않는다 식탁은 인간형성의 장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녀들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교류하는 최초의 자리가 바로 식탁이다. 그것은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 전체가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을 때, 어른들은 물론이고 비록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중에 '가족'이라는 집단 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느낌은 어린아이의 연령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 예로, 전혀 말을 못하는 어린아이와 조금이라도 말을 할 줄 아는 어린아이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경우, 분위기를 인식하는 차이는 아주 다르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특히 젖을 먹는 유아인 경우, 간혹 가다가 식탁의 침략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가족과 별도로 식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 경계를 첫 번째 생일날로 잡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비로소 부모 형제들과 나란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다. 그쯤 되면 겨우 어른이나 다 큰 형제들의 식사법을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부터 한참 동안 아이는 식탁의 불법 침입자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그랬듯이, 아이들은 차츰 부모 흉내를 내면서 식탁에서의 기본 예절을 배우므로 어른들은 사소한 실수쯤은 눈감아주면서 아이가 식사 예절을 터득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협력해야 한다. 먹는 방법에서도 '인간다움'을 고려한다 유태인들은 그 행위로 보아서는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에 특히 주의한다. 동물이나 인간의 공통적인 행위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섹스와 먹는 일이다. 그러나 섹스도 그렇지만, 먹을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해서 동물처럼 무조건 입에 넣거나 손으로 집어먹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게 되면 포크나 나이프, 혹은 젓가락이나 숟가락 따위의 도구를 사용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답게 먹는 첫 걸음이라 하겠다. 즉 이것이야말로 동물과는 구별되어지는 첫 단계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나기 위한 초보 훈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비로소 아이에게도 가족의식이 형성된다. 유태인들이 식탁을 인간 형성의 자리로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포인트!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동석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45. 편식 버릇을 방관하면 가족이란 일체감을 잃게 된다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구미인들이 '유태인 어머니'라는 말에서 우선 연상하는 것은 '교육 엄마', 즉 교육에 열성적인 엄마이고, 그 다음이 식사 때 자녀들에게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권하는 어머니이다. 사실 이런 지적을 받을 만큼 유태의 어머니들은 귀찮을 정도로 자녀들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구미나 동양에서는 흔히 '치즈는 프로틴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라거나 '시금치는 철분이 많은 식물이기 때문에'라는 따위의, 주로 영향학적인 지식을 과시하면서 자녀들이 싫어하건 말건 먹을 것을 강요하는 엄마들이 많다. 그런데 유태인 엄마들은 '먹어라, 많이 먹어라'고 권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 어머니들처럼 영향학적 가치까지 들먹이지는 않는다. 소박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에게는, 특히 젖먹이에게는 '성장' 이 첫째 요건이다. 더욱이 모든 음식은 성장의 필수 요건이므로, 성장한 다음 어떤 생활환경에 처하더라도, 또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남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 확고한 '체력'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된 자의 의무라고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믿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을 가려서 먹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야, 안 먹을 테야'라는 말을 못 들은 척 묵인해 버린다면 그만큼 자녀들의 올바를 성장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행동이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물론 어린이들 자신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먹는 것이 다르므로 하나 하나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해 준다 하더라도 이해할 리가 없다. 그래서 '많이 먹으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유일한 방법인 까닭이다. 음식점에 갔을 때, 어린이들이 간혹 자기 식성에 맞지 않는다며 먹기를 거부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에는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으니 정 싫으면 너 혼자 다른 음식점에 가서 먹으라'고 딱 잘라 말하라. 그러면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먹게 될 것이다. 또는 참을성 있게 '아이 착해, 이걸 먹으면 건강해진다'라고 타이르면 대개의 어린이들은 왕성하게 먹게 되므로 편식 습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의 자극성이 강한 것들은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결코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만든다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어 음식이 맛있느니 없느니 하며 가려먹는 습관이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인간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짐승들처럼 단지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족이 정답게 한 자리에 모여서 연대감을 결속하는, 나아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신성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트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 된다. 어쩌면 이런 위험성이 예상되기 때문에 유태인의 어머니들이 편식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기를 먹는 부모 옆에서 자녀들이 생선을 먹는다면, 한 가족이 따로 따로 생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광경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음식은 되도록 엄마가 정성 들여 손수 만든다. 엄마가 직접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자녀들에게 식사라는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뜨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편식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46.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상, 외견상 목적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몸이 깨끗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손을 씻는 것뿐 아니라 자기 몸을 청결하게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의무이자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마찬가지이겠지만, 유태인 가정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손을 씻고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는 절대로 입을 떼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엄격히 가르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축복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기 위함이다. 즉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이며, 그러므로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신성한 의식은 비단 식사때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출입구에는 물을 담아놓은 그릇이 있어 그곳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손을 씻으면 마음도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이 히렐이라고 불리는 랍비의 대승정이 있었다. 그는 손꼽히는 랍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그리스도의 말은 사실은 히렐의 말을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이 위대한 랍비 히렐이 어느 날 거리를 황급히 걷고 있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좋은 일을 빨리 하고 싶어서 서두르고 있네." 제자는 좋은 일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히렐은 공중 목욕탕으로 들어가더니 온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에게 히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곧 선행이라네." 나는 수시로 우리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한마디 덧붙이곤 한다. "집 안을 청소하거나 교회를 깨끗이 하는 것도 꼭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어.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들 몸부터 청결히 하거라. 그것이 바로 선행의 시작이니까." 청결은 과학적, 종교적 의미가 있다 우리들 유태인의 이와 같은 청결벽은 예로부터의 전통이며,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까지 생기게 되었다. 중세 때 페스트가 퍼져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그때 유태인이 이 무서운 페스트를 만연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왜냐하면 오직 유태인만이 이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태인만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 당시 그리스도들은 평소 목욕하는 습관이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모르게 돈은 감추려면 비누 밑에 숨겨라'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목욕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실제로 비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태인만은 그 당시에도 목욕을 자주 하는 습관이 있었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에도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은 종교상의 규칙이기까지 했다. 이 청결함이 페스트로부터 유태인을 구해 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유태인이 페스트균을 우물에 넣었다는 소문이 퍼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우리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민족이며, 또한 현실주의적 생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온 민족이기도 하다.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연관된다는 신앙은,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건강에 관한 생활의 지혜가 고대 유태인들에 의해서 신앙으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습관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이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청결의 필요성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경우에도, 손을 씻고 샤워를 하는 것은 질병을 예방하고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해준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의 마음속 깊이 그런 습관이 보다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노력한다. 또 현대생활에서는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인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도 있다. 47. 용돈을 줌으로써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인다 쓰는 것보다 저축하는 습관이 먼저 유태인 자녀들 중에는 용돈을 넉넉하게 받는 어린이도 있고 전혀 받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다. 왜냐하면 어린이에게 반드시 용돈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일상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부모가 알아서 사주던가, 아니면 필요한 만큼 돈을 주면 되므로 그 이상의 돈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초등학생에게는 용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유태인 부모들이 자녀에게 용돈을 준다면, 그것은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여덟 살된 아들이 있는 내 친구는, 아들에게 처음으로 용돈을 주면서 '꼭 필요한 때만 써라'고 했더니, 곧바로 은행에 저금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은행원한테서 '저금을 해두면 이자가 불어 돈이 불어난다'는 말을 듣고 아이가 매우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자'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기 돈이 무사한가 매주 한 번씩 은행에 들어 확인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유태인 어린이들은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는 습관이 별로 없다. 대개는 용돈은 아껴서 저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린이가 많다. 다만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얼마간의 돈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용돈을 써도 돼요?'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후 돈을 쓰는 자녀들이 많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에게 미리 용돈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경우,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용돈을 준다. 이 경우에도 아이들은 쓰고 남는 돈은 반드시 저금한다. 그 대신 가족의 생일 등 선물을 살 때에는 아끼지 않고 필요한 만큼 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돈을 쓸 때는 마음과 일치해야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항상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가족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친구끼리의 우정의 표시인 것이다. 유태인 어린이들이 조그마한 저금통에 자선용으로 따로 저금을 하는 마음과, 용돈을 아껴 저축하는 마음가짐은 똑같은 심정에서 출발한다. 돈이라고 하면 인간적인 정감과는 약간 거리가 먼 차가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 유태인들이 특히 돈의 사용 방법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흔히 수전노라고 손가락질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돈의 중요성과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격언 중에 '돈이란 벌기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48.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내적인 충실을 중요시한다 대개의 유태인들은 겉치레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다. 아니 경원하고 주저하며, 오히려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항아리의 겉모양을 보지 말고 내용물을 보라'는 격언은 유태인들의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는 인간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철저하다. 예를 들어, 번지르한 포장술로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약삭빠른 상혼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겉모양을 치장하는 데만 집착한다면 아무래도 내면을 충실히 하는 데 소홀하기 쉽다. 즉, 내면이 알차지 못한 사람일수록 겉모양을 적당히 치장하여 마치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이러한 심리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다. 외면을 도외시하는 만큼 내면에 충실한다 뉴욕에 살고 있는 유태계 부호 중의 한 사람인 필립 J. 구다스 부인은,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처세훈으로 삼고 있다. "옷을 구입할 때는 최고급 옷감에 최고의 솜씨로 지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야한 색깔이나 유행을 따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으며, 밍크 코트 같은 최고급 의복은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해도 입어서는 안된다. 또한 좋은 그림을 벽에 걸어두는 것은 좋지만 손님들 눈에 잘 띄게 거는 것은 피해야 하며, 소녀는 둥근 밀짚모자와 흰 장갑을 끼는 것이 좋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무겁게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예컨대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꾸미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으로부터 공연히 반감을 사지 말라는 뜻이다. 런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초대 총수였던 네이슨 로스차일드도 당시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옷 끝단 장식 등의 치장이나 허례허식을 극단적으로 경멸했으며, 오직 실력만이 전부라고 믿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은이 참무게를 자랑하는 것처럼 내면의 충실에 힘을 쏟는다. 비근한 예일지 모르지만. 조그마한 명함 한 장에 앞뒤가 꽉 차도록 직함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와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직함보다는, 남이 인정할 수 있는 실력 함양에 모든 힘을 경주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뛰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킨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켜야 단다. 49. '내 것' '네 것' '우리 것'을 구별시킨다 소유권은 명확히 구별한다 유태인들이 어린 자녀들을 교육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소유권에 관한 것이다. 소유권이라고 하면 대단한 재산이 연상되는 거창한 말 같지만, 한 가정 내에서, 그리고 비록 한 가족끼리지만 자기 물건 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경우, 물건의 소유자를 정하는 데는 다음의 세 가지 부류가 있다. 1. 내 것(MINE) 2. 네 것(YOURS) 3. 우리 것(OURS)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이나 노트 등을 자녀들이 가지고 놀 때는, '이것은 엄마가 쓰는 거니까 가지고 놀면 안 돼'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비록 형제간이라 해도 쓰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는 '빌려줄래?'하고 동생이나 언니에게 물어본 다음 빌리도록 한다. 공놀이 등을 하다가 유리창을 깨뜨렸을 경우에는, '이 유리창은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스스로 깨닫도록 부드럽게 타이른다. 한 가족이면서 왜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소유권을 분명히 하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이 '소유권'문제를 확실히 교육시켜 두면, 그들이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을 가족 전체의 것으로 알고 조심성 있게 다루는 어린이가 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의 물건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유권을 인식시키는 것이 결국 아이의 인격을 배양하는 더없이 훌륭한 교육 방법인 셈이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새삼스럽게 공중도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예절과 질서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단 2∼3세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를 구별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린아이라고 해서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한 예로, 우리 딸아이는 두세 살 때까지 관엽식물의 잎사귀를 따서 먹으며 '샐러드, 샐러드' 하고 뛰어 놀았다. 그러면 나는 그 현장을 목격하는 즉시, 딸아이가 보란 듯이 그 화분을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돼." 비록 어린아이지만 '내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처럼 유태인 어머니들은 '애들이니 할 수 없다'라는 태도는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 진정 자녀들의 '인격'이나 '인권'을 존중한다면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부터 '내 것', '네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킴으로써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만든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50.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은 아이들의 문화적 유산이다 유태인은 전통의 메신저 유태의 격언에 '늙은이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신이 늙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미 인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늙은이와, 인생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엄청난 세대 차가 생기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요즘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는 노인이 경멸 당하고 그로 인해서 문화의 전통성을 잃어 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문화적 전통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유태의 노인들은 전통을 전하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결코 경멸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또한 젊은이들도 노인들의 귀중한 체험을 통해 5천 년 유태민족의 역사와 지혜를 배우며, 아울러 생활 방법도 터득한다. 히브리어에는 경어가 없다. 대신 노인들에게는 공손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노인데 대해 난폭한 행동이나 예의에 어긋난 말을 하는 사람은 유태의 전통을 무시하는 자로 취급되어 멸시를 받게 된다. 노인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중시한다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장 32절) 젊은이들은 노인을 인간으로서의 역할이 끝난 '퇴물'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동양에서는 지난날 나이 많은 노인들을 깊은 산 속에 버리는 풍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럴 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노인을 문화의 전달자로서 존경하고 있는 유태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육체'가 시든 노인들일지라도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그들의 '정신'을 높이 사는 사고방식이 뿌리 내린다면, 노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할 존재이다. 51. 부모에게 받은 만큼 자식들에게 베풀어라 부모는 주기만 하고, 자식은 받기만 한다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언-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그만큼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유태인들은 예로부터 부모는 오직 줄뿐이고 자식은 오로지 받으면 그만인 존재로 생각한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너는 너희들로부터 아무것도 되돌려 받을 생각이 없어. 만약 내게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이다음에 너희 아이들에게 엄마가 너희들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돼. 그것이 나에게는 제일 기쁜 일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에서이다. 나의 이와 같은 생각도 사실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내가 IBM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언젠가 봉급에서 얼마를 떼내어 어머니의 선물을 산 적이 있었다. 무엇을 샀는지는 잊었지만, 당시 나의 형편으로는 비교적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선물을 받고는 '왜 이런 것을 사왔느냐'고 내게 물으셨다. '어머니가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손을 내저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니야, 내가 너를 키우는 건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란다. 내게 보답하고 싶거든 나중에 시집가서 네 아이들에게나 그렇게 해주어라." 내 친구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젊었을 때에 집을 장만하기 위해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돈을 당연히 빌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3년 동안 열심히 저축을 해서 그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은 이유로 그 돈을 돌려 받았다는 것이다. 유태인의 부모들은 늙어 병이 들어도 자녀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병든 부모를 돌볼 때만큼 신경 쓰이는 일도 없다.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은 '보은'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애정과 자식된 도리임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10년후'를 생각한다 <탈무드>에는 이와 같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다룬 일화가 있다. 한 노인이 뜰에 묘목을 심고 있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언제쯤 그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습니까?" "70년쯤 후에나 ..." 노인의 대답에 나그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노인장께서 그때까지 사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닐세.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잔뜩 열렸었네. 아버지께서 심어두셨기 때문이지. 나도 그저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할뿐이라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다시 그 자신의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면면하게 지켜지고 있는 유태의 전통중 하나이다. 동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고, 자식은 당연히 부모의 시중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물론 자식의 부모에 대한 애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 애정을 새로운 세대에 쏟는 것이 미래를 위한 확실한 방법이라고 우리 유태인들은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 언, 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52. 남한테 받은 피해는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 복수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의 역사는 바로 '박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동안 받아온 박해에 대해 복수를 해야 한다거나, 상대를 증오하는 내용이 담긴 유태의 문헌은 하나도 없다. 복수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의 자녀들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악한 자가 너에게 가한 짓을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고 배우면서 자라난다. 유태인들에게 가해진 잔인한 박해는 비단 나치스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왕 아하슈에로가 간신 하만의 말에 따라, '12월, 곧 아달의 달 13일 하루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유태인을 도륙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라(에스더 3장 13절)'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명령은 다행히 실행되지 않았지만, 크리스트교가 유럽을 지배한 이후로 유태인에 대한 박해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자행되었다. 1215년 라테란 교회의 회의에서는,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있도록 황색 또는 진분홍색의 헝겊조각을 달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의를 했고, 심지어는 여러 사람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다니게까지 했던 것이다. <안네의 일기>는 유태인들의 개인적 역사 그러므로 나치스에 의해서 저질러진 박해는 유태민족의 '박해의 역사'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사건에 불과하다. 유태인은 노란 색 별을 달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자전거를 공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차도, 자동차도 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에만 물건을 사야 한다. 그것도 유태인 상점이라는 표시가 있는 가게에서만 살 수 있다. 그리고 유태인은 밤 8시 이후에는 반드시 집 안에 있어야만 한다. 이 글은 네덜란드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나치스 치하에서 쓴 <안네의 일기>중 일부분이다. 안네는 결국 강제수용소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유태인의 개인적인 역사인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소년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스에 의해 교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신은 김나지움(대학 진학을 위한 정규 예비교육학교)에서 퇴학당해 부득이 유태인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가 열네 살 때까지 14명의 친척들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래서 키신저 일가는 하는 수 없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일 이 없도록 하라. 역사란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 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마빈 토케이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B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히브리어의 B는 왼쪽이 열려 있는 모양이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므로 오른쪽의 과거는 닫혀 있지만, 왼쪽의 미래는 열려 있다." 즉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것이다.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53.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다 '이 사람은 유태인이다'라고 항상 말한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아들러, 트로츠키, 키신저, 프루스트, 샤갈, 로스차일드, 구다스, 미요, 토머스 만, 아서 밀러, 하이네, 프란츠, 카프카, 맨델스존 등의 유태계 사람들이 과학, 예술, 문화, 정치, 경제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지금도 많은 유태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족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중 반드시 한 번쯤은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유태인은 전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야기 속에 유태계 위인이 등장할 때는, 아이들에게 '이분은 유태인이다'라고 반드시 말해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인물에 대해 대단한 친근감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사람의 행적을 굉장한 자랑거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은 긴 세월 동안 조국이 없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민족으로서,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도우며 가까이 지낸다. 토케이어 씨는 랍비 신분으로 일본에 부임하기 전, 일본 규슈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사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오기 전까지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 가운데 유태인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 이틀만에 그 두 사람은 서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유태인끼리는 자석같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이 강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위인이 유태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이 자기 친척인 듯한 기분에 젖는다. 그리고 차츰 세계사에서 유태인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고, 아울러 그 이면에 흐르는 박해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과연 유태인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수한 유태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태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며, 세계를 이끌어나갈 주역인 어린아이들에게도 큰 격려가 되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자기 민족의 위인들에 대해 얘기해 줌으로써 민족적 긍지를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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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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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3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29.친절을 통해 아이를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운다 친절을 부정하다 불타 죽은 소돔 사람들 친절은 유태인에게 있어, 단지 도덕이나 …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29.친절을 통해 아이를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운다 친절을 부정하다 불타 죽은 소돔 사람들 친절은 유태인에게 있어, 단지 도덕이나 공공심이라는 교훈적인 행위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란 나름대로 지혜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자녀들이 무엇인가 남을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부모가 칭찬을 한다거나, 자녀들 자신이 칭찬 받을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남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권장할 일이 못 된다.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태인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 구약성서에는 친절에 관한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온다. 이중 '소돔과 고모라'는 친절이라는 지혜를 망각한 인간들의 죄를 잘 표현한 얘기인데, 여기서 잠시 소개할까 한다. 소돔은 인근에 있는 도시인 고모라와 함께 사해의 남쪽 해안에 접해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소돔으로 한 나그네가 찾아와서는 이 도시의 금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고 있는 금화 50닢을 훔쳐가 버렸다. 이 나그네는 도둑맞은 금화를 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딸과 함께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데 이 소돔의 백성들은 사실 죄 많은 인간들로, 오랫동안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잔악한 일들을 저질러 왔다. 이 나그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소돔의 시민 중 한 사람이 그 금화를 훔쳤던 것이다. 그런데 노예로 팔려간 딸 중 하나가 옛 친구를 만나 먹을 것이 없다고 애걸하자 친절한 친구는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돔 시민들은 친구에게 먹을 것을 준 친절한 친구를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 처형 방법도 잔인해서, 발가벗긴 온 몸에다 꿀을 바른 다음 벌집 아래 매달아 수많은 벌들이 쏘아 죽이게 하는 잔인한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 결과 친절한 인간을 죽인 도시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세기 제19장) 이와 같이 친절은 최고의 지혜인 한편, 친절을 부정하는 행위는 마땅히 최고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친절에 보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유태의 격언에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는 말이 있다. '스푼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는 손님의 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스푼을 챙겨주는 친절을 베풀라는 뜻이다. 그만큼 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잊지 말라는, 지극히 유태인다운 격언이다. 친절이란 꼭 남의 칭찬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행위만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생활의 사소한 배려에서 나오는 행위를 뜻한다. 말을 바꾸면, 친절이란 그것이 도덕이니 공공심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 상대방에 대한 마음씀씀이를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포인트!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30.자선행위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선행'은 사후에까지 남는다 언젠가 일본의 한 거리에서 '사랑의 열매'라든가, 신체장애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양인들이 이런 '자선활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으나 유태인들은 자선행위 등 남을 위한, 특히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나 신체장애자에 대한 선행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로부터 유태인들 사이에는 그런 행위에 대한 확실한 가치 기준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탈무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화가 나온다. 옛날 어느 왕이 한 남자에게 사신을 보내어 곧 입궁하라고 명령했다. 그 남자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와는 매우 적절한 사이였다. 두 번째 친구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친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는 친구이기는 했으나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겁에 질린 그는 무엇인가 문책을 당할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인지라 아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 친구를 불러 동행해 주기를 간청했다. 먼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냉정하게 한마다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왕궁의 대문 앞까지만 동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자네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함께 임금님을 만나도록 하세." 이렇게 쾌히 승낙한 친구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 세 번째 친구였다. <탈무드>에 의하면, 첫 번째 친구는 다름 아닌 '재산'을 말하는 것으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죽을 때는 가지고 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을 뜻하는 것으로, 겨우 화장터까지만 동행한다는 의미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을 뜻하는 것으로,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사후에까지 남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사람,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선행'은 <탈무드>가 집대성된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재산이나 친척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공공관념이 매우 부족한 것 같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의 지성이라 할 대학생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고 폭행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 나 나름대로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전철이나 버스 등에서 젊은이들이 노약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거나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모르는 체하는 광경을 더러 볼 수 있다.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공공관념의 결여는 대개 어렸을 때 형성된다. 그런 까닭에 사회 윤리를 바로 보는 눈이 트이지 않는 것이다. 즉,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또 일류 회사에 입사하기만을 바라는 부모들이, 어떻게 해야 남과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배움과 일과 자선 위에서 성립된다 유태의 속담에 '세상은 배우는 것과, 일하는 것과, 자선행위 위에서 성립된다'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란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선'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체다카'는 정의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영어로 '자선'에 해당하는 '채리타'가 라틴어의 '베풀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유태인에게 있어 '자선행위'는 '정의' 바로 그것으로 통한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조그만 저금통을 사주고 '자선'을 위해 저축하도록 가르치는데, 아이들은 교회당(시나고그)에 갈 때마다 저축했던 돈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바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과 이 사회가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노인이나 신체장애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자연스럽게 행하며,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않고 사회윤리에 동화되어 가는 것도 바로 이 '자선행위'를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남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런 행위 역시 선심을 쓴다는 의식에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취해야 할 행위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지능개발에 신경을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아이의 지능개발에 신경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31.돈으로 선물을 대신하지 말라 큰 부자는 자식이 없고 오직 상속자만 있을 뿐이다 유태의 격언에 '큰 부자에게는 자식이 없다. 오직 상속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매우 냉정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 있다. 큰 부자는 싸늘하고 차가운 돈을 가득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가슴에 전해지고 나아가 자식들에게도 전염되어 따스한 마음이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가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은 다만 부모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싸늘한' 돈의 상속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이 격언은 가르쳐주고 있다. 즉, 부모와 자식 사이에 금전문제가 개입되다 보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나 다른 아이들에게 선물을 할 경우, 선물 대신 돈을 주는 짓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 선물 대신 돈을 준다는 것은 결국 '이 돈으로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사 가져라'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무성의한 태도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애정이 부족하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가끔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이 돌아가면서, '자녀들에게 전해주세요'라며 돈을 놓고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아이들에게 '친절하신 분이 돈을 놓고 가셨다. 그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라'고 말하며 돈을 나누어준다. 어떤 선물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의미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오가는 선물 역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인간적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돈이란 이런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19세기 중엽까지 유태인 중에는 손꼽히는 갑부였던 로스차일드가의 암셰르는, 반유태계 폭도들이 습격해 오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 많은 유태인에게서 돈을 얻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독일인은 다 합쳐야 4천만 명에 불과해. 그 정도의 금화는 내게도 있어. 우선 한 사람 당 1프로린씩 던져주지." 그러고는 손을 내미는 폭도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암셰르에게는 끝내 자식이 없었다.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모욕적'인 방법으로 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은 결코 애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애정의 표시이어야 할 선물 대신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진정한 돈의 가치를 모른다 유태인은 돈에 인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질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아닐까.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시대는 이미 유태인이 영국 땅에서 추방되고 난 후였다. 즉, 셰익스피어는 유태인에 대한 편견이 한창일 때 자라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갖고 있었던 유태인에 대한 편견, 다시 말해서 셰익스피어의 마음속에 '내재화'되어 있던 편견이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으로 유태인을 그리게 된 것이다. 즉 돈을 죄악시하는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두툼한 지갑은 별로 훌륭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빈 지갑은 나쁘다(유태인의 격언)'고 말하는 유태인을 상대적으로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으로 그린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유태의 격언 중에 '돈이란 무자비한 주인에게도 유익한 하인이 된다'는 말도 있다. 돈 자체는 따지고 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주인이 되는 것도 하인이 되는 것도 그 돈을 쓰는 사람의 인간성, 즉 됨됨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이처럼 돈의 미묘한 성격에 대해 가르쳐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로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다. 18세기까지 유태인에게는 아직 성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가 유태인들에게 성을 팔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은 좋은 성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을 지불했으며, 나쁜 성은 싼값에 거래되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유신 때까지는 보통사람은 성이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 유태인들도 똑같은 처지였던 셈이다. 유신에 의해서 자유롭게 성을 선택하게 된 일본인들은 그나마 유태인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좋은 이름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보석이나 꽃의 이름은 매우 비쌌다. 로우젠탈(장미)이란 유태 이름은 비싼 돈을 지불하고 얻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개중에는 골드 브룸(황금꽃) 따위의 욕심을 부린 성도 있다. 한편, 싼 이름으로는 동물을 상징하는 윌프슨(늑대) 등이 있고, 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힌터게슈트(엉덩이) 따위의 별난 성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자녀들은 '로우젠탈보다는 윌프슨이 훨씬 좋게 들려요'라며 아주 재미있어 한다. 그러나 재미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돈이란 사람에 따라서 여러모로 사용되지만, 로우젠탈 씨가 힌터게슈트 씨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훌륭하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아직 돈의 진짜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선물 대신 돈을 준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애초에 자녀들이 돈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돈은 결코 애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애정의 표시이어야 할 선물 대신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32.음식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은 곧 신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먹기만 하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유태인들은 매일 식탁에서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식사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행위이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매일 매일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식사 때마다 잊지 않고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루를 무사히 끝맺게 되었음을 저녁식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안식일인 금요일 저녁에는 세 시간 정도 걸려서 요리한 고기 등을 차려 놓고 역시 세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한다. 그리고 식후에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동물과는 달라서 단지 먹는 것만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유태인은 믿고 있다. 요즈음에는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모든 식구가 함께 모여 식사할 기회가 적어졌고, 식사시간마저 매우 짧아져 식탁에 둘러앉아 얻는 즐거움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유태인 가정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먹는 식사만은 언제나 아기자기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화목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축제 역시 언제나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새해-유태력을 1월 1일인데, 보통은 9월-10월에 있다 - 첫날에 하는 식사는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유월절 -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서, 보통 3월-4월의 일주일 동안 계속되나 - 예는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이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다. 이때 나오는 고기 종류는 대개 세 시간 이상 걸려서 정성껏 장만한 것들이다. 이런 축제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삼촌, 사촌 등 가족 전원이 한 식탁에 둘러않아 즐겁게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하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나 전설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을 축복하며 가족들 간의 굳은 유대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자녀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접하며 자라고,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인간답게 깨끗한 음식만 먹는다 식사를 천천히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과, 식탁에서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유태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간 신경을 쓰는 게 아니다.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인간답게 깨끗한 음식만 먹는 것'이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먹어도 되는 음식, 즉 청정한 음식물을 코우샤 푸드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많은 가정에서 엄격하게 그것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어떤 것이 코우샤 푸드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준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코우샤 푸드는 고기를 먹는 방법에서 일반적인 음식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유태인들은 동물은 식용으로 죽일 경우, 파가 고이지 않도록 단번에 죽이고 거꾸로 매달아서 피를 빼낸다. 그리고 피를 완전히 제가하기 위해 고기를 물에 담그고 소금을 뿌린 다음 30분 정도 놓아둔다. 소금이 남은 피를 말끔히 빨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손질이 끝난 고기라야만 먹는 것이 허용된다. 이것은 본디 성경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인데, 노아의 홍수 때까지는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다음 방침을 바꾸어 인간이 육식하는 것을 허용했다. 단, 피가 섞인 고기는 먹지 말며 생식은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여졌다. 유태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 음식물에 대한 계율은 매우 까다로워서, 네 발을 가진 동물은 위가 두 개 이상 있어야 하고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것만을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가 하나인 돼지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말은 먹지 못한다. 또한 물고기는 비늘이 있어야만 허용되기 때문에, 뱀장어나 미꾸라지를 먹어서는 안 된다. 식육조인 독수리도 못 먹는다. 그리고 새우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은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들은 음식물을 통해 '인간다움'을 자각한다 뉴욕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나의 큰딸아이가 텔레비전 광고에서 본 빵이 마음에 들어 스쿨버스 안에서 남자친구에게 그 빵을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남자친구는 '그 빵을 먹으면 너는 유태인이 아니야'라고 단언했다. 큰딸아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빵은 라드(돼지기름)를 써서 구운 것이었다. 그 남자친구는 돼지가 코우샤 푸드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친구의 일곱 살된 딸아이가 요코하마로 소풍을 갔다오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나 백 엔 손해보았어." 친구는 영문을 몰라 자초지종을 물었다. "친구들은 모두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나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다른 것을 샀거든. 그런데 그 속에 조금만 새우가 들어 있지 뭐야. 그래서 아까웠지만 버렸어." 친구의 딸아이는 새우가 유태인에게 금지된 음식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태인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음식물을 통해서 '유태인다움'뿐 아니라 '인간다움'을 배운다.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네 발 가진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지만, 요즈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코우샤 푸드는 우리 유태인들만의 종교적 계율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예로부터 먹는 행위 자체를 종교와 관련시킨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을 축복하며 가족들 간의 굳은 유대관계를 재확인한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접하며 자라나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33.성문제는 사실만을 간결하게 가르친다 성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섹스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4장에 '아담이 그 아내 화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카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라고 인류 최초의 성행위가 간결하게 씌어 있다. 이 구절 중에 '동침하였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섹스를 한다'와 '상대를 안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 진정으로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처럼 섹스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것이므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탈무드>에도 '섹스는 자연의 일부, 부자연스러울 까닭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4-5세 때부터 섹스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부모에게 묻는다.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로부터 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태인 부모들은 '섹스=자연'이란 사고방식을 자녀들의 성교육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더듬거리거나 얼굴을 붉힌다든지, 혹은 화를 내는 일이 결코 없다. 성경에 씌어 있는 사실만을 간단명료하게 자녀들에게 전할뿐이다. 사실대로 말해 주면 쓸데없는 망상을 하지 않는다 성에 대해 감추거나 공연히 주저하는 것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불필요한 흥미를 품게 하는 역효과밖에 내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그런 때에 '비밀스런 냄새'를 맡게 되며, 그것에 대해 집착한 나머지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는 동시에 괴상한 일들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질문 받지 않은 것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질문을 받았다면 거짓말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무슨 일이든 사실대로 솔직히 이야기해 주면, 어린아이들은 절대로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성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대로 얘기해 주면 공연한 상상력을 발동시킬 여지가 없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이상의 일들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도 어린이들의 섹스는 자연 그대로 맡겨둔다. 어린이가 자위행위를 하더라도 못 본 체한다.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키부츠에서는 아홉 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자위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주의도 받지 않지만, 아홉 살이 되면 비로소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타일러준다고 한다. 그리고 여섯 살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장난을 목격한 교사가 '네 몸에 하라'고 간단히 타이르자, 그 후로는 절대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이와 같이 섹스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 자녀들이 섹스와 관련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주의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은 흔히 '5분 동안에 끝낼 수 있는 말이 아니면 아예 꺼내지도 말라'고 말한다. 즉 무슨 말이든지 간에 간단 명료하게 하라는 경고인데, 이와 같은 유태인의 사고방식은 아이들의 성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포인트! 성에 대해 감추거나 공연히 주저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불필요한 흥미를 품게 하는 역효과밖에 내지 않는다. 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그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주도록 하라. 34.어릴 적부터 남녀의 성별을 자각시킨다 '할례'는 유태인이 되는 의식 유태계 화가 마르크 샤갈의 초기 그림 중 '할례(1909년 제작)'라는 작품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후 '혼례(1909)', '부부(1909), '성가족(1910)' 등 유태인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할례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한 행사로서, 생후 8일째 되는 날 남자아이의 페니스 표피를 잘라 버리는 의식이다.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자녀에게 남녀의 성별을 명확하게 자각시키는 것이다. 할례의식은 다음과 같이 행해진다.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가 되면, 그 아기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이웃이나 친척들을 불러 그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먼저 아버지가 한 입 가득 술을 머금고는 솜 조각에 술을 뿜는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아기의 입을 적신다. 이것은 아기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알코올로 마취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아직 신경이 덜 발달된 만큼 통증을 느끼지는 못한다. 할례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모헬'이라고 일컫는데, 모헬은 자신이 비장하고 있는 특수한 칼로 남자아이의 표피를 자른다. 의식이 끝나면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축하해 주는데, 이때 아이의 엄마는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은 남자아이는 유태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은 유태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한 가족이 되는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가 여자일 경우는 교회에서 명명식을 하는 것으로 할례의식을 대신하며, 남자아이 때처럼 축하파티를 벌이지는 않는다. 구약성서에는 할례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씌어 있다. 너희들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은 너희 자손이 아닌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태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남성의 권위를 자각시키는 유태인의 성인식 유태인 남자는 장남일 경우, 생후 30일째 되는 날 또 다른 의식을 치뤄야 한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남자에 한해서 '바알 미츠바'라고 하는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바알 미츠바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열세 번째 생일날 다음에 돌아오는 안식일을 택해 행해지는 이 의식은, 어린이가 교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는 친척, 친구들을 초대하여 축하 파티를 여는 것이다. 유태인 사회는 이처럼 철저하게 남성의 권위가 존중되는 사회이다. 남자아이들은 이러한 의식을 치름으로써, 남자로서의 힘과 권위를 자각하면서 성장한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남자가 한 가정을 이룰 경우, 그는 가정의 중심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안정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기초는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치름으로써 다져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포인트!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태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35.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는 꼭 보여준다 부모가 신경만 쓰면 텔레비전의 악영향은 없다 텔레비전의 대량보급으로 화면을 통한 폭력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을 모방한 젊은이의 탈선 이야기가 이따금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텔레비전의 폐해를 실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들은 텔레비전의 악영향으로부터 거의 안전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여덟 살인 둘째딸아이와 여섯 살인 아들에게는 안식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오후 여섯 시 반까지만 텔레비전 시청을 허락한다. 그것도 어린이 프로에 한정되며, 혹시 그들이 어른 프로를 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집에선 폭력장면 따위가 어린이 시청 시간에 화면을 비치는 일이란 절대로 없다. 다만 폭력적이라 할지라도 다큐멘터리는 예외이다. 우리 유태인은 지난날 셀 수 없이 많은 박해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의한 대량 학살은 우리 유태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조부모는 물론이고 백부 내외가 모두 학살당해 지금은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 씨 가족 역시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몰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11형제나 되었지만, 그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형제와 자손들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다 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스의 학살 역사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남아있다. 우리 집에서는 이와 같은 종류의 기록영화만은 폭력적인 장면이 있더라도 자녀들이 보는 것을 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을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다. "우리에겐 사촌들이 없나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단다. 우리 친척은 모두 학살당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없단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있다면 자녀들은 그 어떤 폭력장면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폭력장면이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그들이 '사실'과 '픽션'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가는 동포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그러한 비참한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우리집 큰딸아이는 텔레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영화는 이따금 본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과 픽션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 애 재량에 맡긴다. 이것은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일일이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전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젼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36.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헛된 꿈을 갖게 하지 않는다 유아 때부터 합리적인 사고를 심어준다 유태인은 합리주의자이다. 이를테면 <탈무드>의 해석을 둘러싸고 장장 몇 시간에 걸쳐 토론을 할 때라도, 서로가 이치를 따져가면서 전개해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 이런 경향 때문에 더러는 '유태인은 추상적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리 유태인은 합리적인 사고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의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다'는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지는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자녀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죽은 뒤에 '천당'에 가느니 '지옥'에 떨어지느니 하는 따위의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서 자녀들에게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합리주의적인 환경 아래에서 성장한 유태인 가운데,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이나 매독반응의 발견자인 와세루먼, 그리고 혈액형을 발견한 란드슈타이너 등의 과학자들과, 냉철한 현실 감각으로 세계 제일의 금융 재벌이 된 로스차일드 일가 등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합리주의 신봉자인 유태인들은 이 세상에 '기적'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는 온통 기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모두 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들뿐이다. 즉,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은 한 가지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다. 모세의 기적도 과학적으로 입증된다 한 가지 예로 모세의 기적을 들어보자. 노예의 몸인 유태인들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친 모세가 홍해에 다다랐을 때, 앞은 바다가 가로막고 뒤쪽에서는 이집트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있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출애굽기에는 그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밀 때 여호와께서 큰 돌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 홍해가 둘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건너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백 년에 한 번쯤 강풍으로 인해 조류가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홍해가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얕아지는 경우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적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모세가 일으킨 이 현상을 오로지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기적이 헛된 공상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처럼 기적마저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는 일곱 살 때 친구에게, '인간이 죽으면 하늘의 어디엔가로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실을 죽기 직전까지 믿었다고 한다. 또 음악가인 다리우스 미요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 소피로부터 '그림 같은 광경'이라는 터키의 추억담을 듣고 옛날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는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우리 유태인들은 기적과 같은 공상을 부정하고 현실성이 짙은 것을 통해서만 이론을 관철하려고 에너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합리주의적인 교육은 수많은 과학자, 사업가, 음악가, 미술가 등을 배출하는 토대가 되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 공상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이런 번거로움을 생각해서라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 아닐까.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도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제 3장. 의를 기른다 37.자녀를 꾸짖을 때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꾸중은 부모로서의 의무 "당신들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깊으니 자녀를 꾸짖을 때,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말함으로써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별시키지는 않습니까?" 이 말은 내가 흔히 듣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꾸짖거나 타이를 때, 절대로 하나님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가정교육이란 한마디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 만큼 거기에는 좋으냐, 나쁘냐의 기준 이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뿐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짓 하면 못써!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라는 말로 자녀들을 꾸짖는데, 이는 옳지 못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꾸짖을 일이 있다면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꾸짖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은 부모들이다.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꾸짖는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만큼 하나님 핑계를 대거나 다른 이유를 둘러대며 부모로서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초 인간적인 덕보다 현실적인 덕을 행하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소설 중 '랍비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 이 소설은 유태계 작가인 해리 케멜만이 쓴 것으로서, 그의 첫 작품인 <화요일에 랍비가 격노했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태인의 종교는 매일 매일 의식하면서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더욱이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덕이지 초인간적인 성인의 덕은 아니다.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스몰이란 랍비가 한 말이다. 선과 정의는 인간으로서 살아나가기 위한 조건으로, 날마다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만큼 구태여 하나님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착실한 방법을 우리들 스스로 알아서 실천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잘못을 꾸짖을 때도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탈무드>에는, 대홍수 때 선이 노아의 방주에 함께 타려고 했지만 '무엇이든 짝이 있는 것만을 태워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거부당함으로써, 짝이 되는 악을 찾아 함께 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 기준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꾸짖는다'는 것은 선과 악 중 한 가지 기준만을 부모의 책임 아래 자녀에게 심어주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포인트!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해야 하며,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안 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38.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 '침묵'이 매보다 효과적이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줄 것인가-이것은 가정 교육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어떻게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예를 들면, 자녀들이 관여해서는 안 될 일에 나섰을 때,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라며 말로써 꾸짖는 경우도 있겠고, 조금 심한 경우에는 매질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어느 정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벌인데, 벌은 미워서가 아니라 예방적인 차원에서 절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이것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부모의 경고나 꾸중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 역시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을 만큼 체벌의 강도가 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나 외출에서 돌아와 책가방이나 입었던 코트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면 큰 소리로 꾸짖는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을 경우에는 엉덩이나 뺨을 때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런 체벌보다 한 차원 높은 방법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라는 무기이다. 언젠가 겨우 세 살밖에 안된 딸아이가 제 친구한테서 받은 유리컵을 들고 다니면서 장난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얘야, 깨뜨리기 전에 엄마에게 오렴." "안 깨뜨려요." 그러고는 유리컵을 건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내 단념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쨍그렁'소리와 함께 마루에 떨어진 유리컵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봐, 엄마가 말했잖니. 너하고는 이제부터 말도 하기 싫으니 너도 엄마한테 말 걸지 마!" 그때부터 30분 동안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이처럼 의사 소통의 수단인 대화를 끊는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최대의 벌이 아닐 수 없다. 즉, 자녀들의 존재를 아주 무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면서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때나 이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로써 타일러도 안 듣거나, 부모를 모욕하는 언동을 하는 등 가정교육의 근본에서 벗어났을 최악의 경우에만 비상수단으로 써야 하는 '무기'인 것이다. 침묵은 부모에게도 반성의 기회가 된다 한편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부모 자신에게도 매우 가혹한 벌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말이 많은 민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리만큼 대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입'이나 '말'에 대한 경구가 수없이 많은데,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유태인은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인다'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누에가 항상 뽕잎을 먹고 있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다, 즉 유태인은 언제나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 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이렇든 '침묵'이 보통 벌과 다른 점은, 벌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에게 독특한 심리작용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39. 협박은 금물이다,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지 하라 부모의 애매한 태도는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우리 유태인들은 '건강'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깨끗한 코우샤 푸드만을 먹으며,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을 종교적 계율로까지 삼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신체의 건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건강이다. 마음의 건강이란, 육체적으로 말하자면 찌뿌드드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녀들로 하여금 항상 우울하거나 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녀들의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유태인의 격언에 '자녀들을 협박해서는 안된다. 벌을 주든 용서하든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에 건강을 심어주는 최상의 조언이라 하겠다. 유태인들은 아이들에게 벌을 주려고 결심한 이상 도중에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반면 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일곱 명의 충실한 제자가 있다. 그들은 스승인 프로이트에게 주피터의 머리모양을 조각한 고대 로마의 복제품 반지를 선물로 받고, 합심해서 정신분석학계를 지도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인 모토 랑크가 프로이트 학파로부터 탈퇴하여 스스로 한 학파를 만들었다. 랑크는 프로이트가 온 정열을 쏟아 정신분석을 훈련시킨, 프로이트에게는 마치 자식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랑크의 배신에 대해서 '나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제는 끝이 났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 일화는 비록 스승과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이긴 하지만, 명쾌한 판단을 내린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명쾌한 결단이 사제지간이 아닌 부모자식 간에 일어났다면 자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자녀들은 벌을 주든지 용서해 주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는 부모의 명쾌한 태도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건전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벌을 주는 것인지, 용서해 주는지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태도를 취한다면, 자녀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협박은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비근한 예이지만, 자녀가 그릇을 깨뜨렸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가만 두지 않겠어'라고 위협을 했다면 아이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분명 잔뜩 겁에 질려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협박조로 말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도 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녀들의 마음속에 불안감만 심어줄 뿐 아무 이득도 없다. 부모의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말의 이면에는 은근히 자녀들에 대한 협박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협박은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한 명쾌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초조감이 변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양 어머니들의 '잔소리'는 자녀들의 행동에 큰 걸림돌이 된다. 물론 나쁜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겠지만, 언제나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끊임없는 잔소리는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린다 자녀를 때릴 때는 구두끈으로 때려라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지혜의 근원인 머리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에 매질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도, 아이들이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서 엉덩이나 뺨을 때리며 꾸짖는다. 내가 아는 성미 급한 친구는, 아이가 잘못을 했을 경우 길거리든 식당이든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리기도 한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손도 입(말로 꾸짖는 거)이나 눈(침묵으로 꾸짖는 것)처럼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육적 도구'라고 생각한다. 특히 손은 눈이나 입과는 달리 실제로 육체적 '고통'을 주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하는 효과가 크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매질은 자녀들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고쳐주는 데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자녀들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13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어떤 자녀이건 응석을 마냥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지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만이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장 15절) 자녀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 매는 꼭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통해 지혜까지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 말들이다. 물론 채찍으로 노예를 때리듯이 자녀들을 다루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로서, 부모의 손으로 직접 때린다는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의 채찍'임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스킨쉽인 것이다. 한편 유태인의 격언 중에 '아이들을 때려야 할 때는 구두끈으로 때리라'는 말이 있다. 즉 매를 때리는 목적은 아이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으므로 아이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심한 매질은 피하라는 뜻이다. 신념이 없는 부모는 자녀들을 때리지 못한다 요즘은 어느 나라에서건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자녀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매를 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다. 그렇지만 매질이 자녀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에는 예외이겠지만, 잘못을 저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수단일 때는 결코 야만적이라 할 수 없다. 사용하는 시기와 정도를 분별할 줄만 안다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서 매를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를 맞는 자녀들도 부모의 손길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편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매를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에게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이 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을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매를 포함한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옳게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신의 신념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자녀들을 어정쩡하게 다스리는 부모가, 자녀들만큼은 신념 있는 확고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바람이다. 즉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의 응석을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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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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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2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14.외국어는 어릴 때부터 습관화시킨다 동양인들은 왜 외국어에 약한가 내 친구의 남편 중에 일본인 행세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14.외국어는 어릴 때부터 습관화시킨다 동양인들은 왜 외국어에 약한가 내 친구의 남편 중에 일본인 행세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일본인을 가장해서 일본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전혀 유태인이라고 눈치채지 못하리만큼 그의 일본어 발음은 정확했다. 보통 외국인이 일본말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모국어의 악센트를 감출 수가 없는데, 그는 5개 국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2개 국어 이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유태인이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널리 흩어져 살고 있고, 오랜 세월 박해를 받아 각 나라를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국어를 잘하는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다 보니, 유태인들은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유능한 '언어 학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나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동양인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시가가 너무 늦은 탓이 아닐까? 외국어는 가능하다면 어릴 적부터 가르쳐주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젖먹이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라는 얘기가 아니다.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이라도 음악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주라는 것이다. 언어란 말하기보다는 듣고 이해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유태인들은 대부분 그들이 처한 특수한 환경 덕분에 최소한 몇 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마잘 토케이어 씨는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아라비아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데, 그는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아르메니아어, 영어까지도 능통하게 구사한다고 한다. 또한 마잘의 남편은 그 외에도 독일어와 스페인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고, 나 역시 히브리어, 영어, 헝가리어, 이디슈어(독일어와 히브리어 등의 혼성어), 그리고 프랑스어도 조금은 한다. 나의 남편도 이디슈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들어서 좋지 않은 말을 할 때는 둘만이 통하는 이디슈어로 얘기한다. 어학에 능통했던 프로이트 프로이트 역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고 한다. 전기 작가 라시엘 베이커가 쓴 <프로이트의 사상과 생애>에는, 프로이트가 겨우 열 살 때 라틴어의 의미변화와 그리스어의 문법을 외우기 위해서 벽을 두드리면서 방 안을 빙빙 돌아다녔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를 자주 접하는 유태인들은 단일어만 쓰는 사람보다 언어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발음도 1개 국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원어에 가까운 발음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 동양의 언어는 구라파나 영어권 말과는 그 구조가 전혀 달라서 배우는데 어려운 점이 많다. 히브리어도 구미 각국의 언어와는 구조가 전혀 다르므로 중학교 때부터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유태인들 역시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볼 때, 어려서 외국어에 접한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장 후 어학 습득 능력에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외국어의 조기교육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말하는 것보다는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하라. 15.이야기나 우화의 교훈은 어린이 자신이 생각토록 한다 우화는 지혜의 보고 내가 알기로는 유태인만큼 이야기를 즐기는 만족도 드물 것이다. 구약성서가 장대한 이야기의 보물창고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탈무드> 역시 기원전 5백 년 전부터 기원후 5백 년에 이르기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들을 10년 동안 약 2천명의 학자들이 모여서 엮은, 1만2천 페이지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것은 평생동안 읽어도 모두 읽을 수 없는 대단한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내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좋아하는 유태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교훈적인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는 이야기 속의 교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만 된다. 우리 집에서도 남편이 아이들에게 우화를 들려주면서, 그 우화의 교훈을 아이들 스스로 이해하고 터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대부분이 <탈무드>인데, <탈무드>에는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 유태민족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두 머리의 어린이'이야기가 있다. "만약에 머리가 둘인 아기가 태어난다면, 이 아기는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대답을 상상하면서 사고능력을 기르게 된다. 그런데 <탈무드>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만약 뜨거운 물을 한 쪽 머리에 부었을 때 양쪽이 다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한 쪽만 비명을 지른다면 두 사람이다. 이 이야기를 그저 하나의 우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태인에게는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랍비가 말한 것처럼, 유태민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유태인이 박해를 받거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이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유태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유태인이 아니다." 이처럼 유태의 어린이들은 우화를 통해서 스스로 교훈을 터득하는 훈련을 하고, 또 그 교훈을 통해 민족애를 습득하는 효과도 얻는 것이다. 이야기의 해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성서 중에 흔히 인용되는 부분은 '창세기'의 첫 부분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6일 동안 하루가 끝날 때마다 '좋았더라'라고 말했는데, 둘째 날만은 그 말이 빠져 있다. 바다와 육지를 나누는 작업을 셋째 날로 넘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둘째 날에 하나님은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을 나누었는데, 랍비들은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하게 되었다. '나눈다'는 것은 천지창조에는 필요했지만, 그것은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좋았더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랍비는, 그렇다면 빛과 어둠을 나눈 첫째 날에 '좋았더라'라고 한 것은 어찌 된 것이냐는 반론을 내세웠다. 그러자 '빛과 어둠은 이질이므로 동질인 물을 나눈 둘째 날과는 다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하여 '태양은 밤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달은 낮에도 보이는가'라고 반박한 랍비도 있었다. 논쟁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만드셨다. 달은 하나님에게 하나의 세계에 두 개의 위대한 빛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한 달은 그 벌로 빛이 약해지고 작아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그 대가로 태양은 절대로 밤에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 대신에, 달은 낮에도 모습을 나타나게 했다." 이렇듯 유태인 자녀들은 서로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그 이치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유태의 이야기나 우화들은 오직 한 가지 해답, 즉 정답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물론, 동양에도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는 성서나 <탈무드>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손치더라도, 어른들이 그것을 오직 한 가지 해석으로 국한시켜 자녀들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머리 쓸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의 이야기나 우화들은 오직 한 가지 해답, 즉 정답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16.어떤 장난감이라도 교육용 완구가 될 수 있다 유태인 엄마들은 '교육환경 엄마' 유태인 엄마들은 '교육 엄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동양, 특히 일본의 '교육 엄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녀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자녀들의 지능지수에 신경을 쓰거나 천재교육 등 남보다 특별나게 가르치려는 일 따위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린이의 지적 성장을 돕기 위해 교육환경을 정비하고, 그런 적절한 환경 속에서 자녀들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장난감이다. 유태인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장난감 하나를 주더라도 언제나 교육적인 면을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완구',즉 학교 공부와 직결되는 장난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선택 방법에 따라서는 기발한 지적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장난감은 한 살에서 세 살까지의 어린이들에게 갖가지 감각적인 자극을 주며, 운동 신경을 발달시키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장난감을 선택할 때 어린이의 마음과 두뇌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측면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조상 대대로 어떤 장난감을 선택해 왔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확대경. 집짓기 나무: 모서리가 정확하게 갈라진 반들반들한 것이 좋다. 정삼각형이나 정방형 등 기본적인 형태를 두루 갖춘 것이면 더욱 좋다. 록박스: 뚜껑을 잠갔다 열 수 있는 장난감 통. 플래시 라이트: 회전전등 같은 것. 단순한 리듬의 악기: 벨, 트라이 앵글, 탬버린, 드럼, 심벌즈, 실로폰 등. 분해할 수 있는 것. 소꿉놀이용 모자: 어린이가 각종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모양의 세트로 되어 있는 것. 큰 자석. 숫자 맞추기 퍼즐판. 완성품이 아닌 장난감 집. 농장놀이 장난감:동물 등. 세 살이 지나면 흉내낼 수 있는 장난감을 준다.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의 어린이에게는 감각이나 운동신경에 자극을 주는 장난감보다는 지적 자극을 주는 장난감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장난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집짓기 나무: 공간이 허락하는 한 큰 것을 사주는 것이 좋다. 어른 흉내를 내는 장난감: 유태인들은 어른을 흉내내는 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이런 종류의 장난감을중요시한다. 병원놀이, 은행놀이, 살림살이, 목수도구, 원예놀이 등이 있는데 위험하지만 않다면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는 실제로 어른들이 사용하거나 사용하다 버린 것들이 좋다. 그림과 조각도구: 크레용, 핑거 페인트, 색연필, 분필, 칠판, 찰흙, 색종이 등. 악기: 플레이어, 드럼 등 세 살 이하 때에 가지고 놀던 것도 좋다. 연극용 소도구: 마스크, 의상, 가발, 화장품 등. 손가락으로 하는 놀이: 주사위, 퍼즐, 도미노 게임, 간단한 보드 게임등. 사람을 가르치는 장난감: 아기인형, 동물인형 등. 그러나 이상 열거한 것들을 무두 다 사준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서 유태인 엄마들은 어린이에게 장난감을 구해 줄 때, 어느 한 편에 기울지 않고 전체적인 자극을 줄 수 있도록 필요할 때마다 장난감의 종류를 바꾸는 배려를 하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선택 방법에 따라서는 기발한 지적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17.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거나 얘기를 들려준다 얘기를 들려주면 편안하게 잠든다 유태인 엄마들의 하루 생활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녀들을 침대에 눕히고 그 곁에서 잠들 때까지 함께 있는 시간이다. 이는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시간이다. 어린이들이 낮에 잘못을 저질러서 꾸중을 했더라도, 또 저녁 식사 시간 때 버릇이 나쁘다고 엄한 주의를 주었더라도 일단 침대에 들게 되면 가능한 한 다정하게 토닥거려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덮고 있는 이불 위에 손을 얹고, '내일은 좋은 날이 될 거야,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이고 ...'라는 식으로 아이들의 마음에 안도감을 심어준다. 이것은 어린이가 잠들 때까지 낮에 있었던 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근심할까 봐서이다. 이처럼 자녀들이 하루 이로가 중 그 마무리를 같이하고, 내일도 평온할 것을 빌어주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습관이다. 보통 어린이가 깊이 잠들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엄마들은 짧고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한다. 이는 유태인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지적 교육방법의 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의 전통에 따라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는 대개의 경우 구약성서 중에서 골라낸다. 그러나 성서에는 어린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아이가 쉽도록 풀이를 해서 얘기해 주어야 한다. 이때, 어린이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것은 주로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한 얘기나 다윗 왕과 거인 골리앗의 이야기 등, 아이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서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마음껏 상상력을 펼친다. 한편 가정에서뿐 아니라 유치원에서도 성서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는데, 이것은 엄마가 침대 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지혜를 심어주고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러시아 혁명가로 유명한 유태인계 아이자크 도이치는 유치원에 다닐 때, 붉은 수염의 선생님으로부터 '출애굽기'를 여러 번 들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 선생님은 자기 나름의 수식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홍해의 대가와 바다의 향기가 산들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구름기둥을 움직이게 하는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라고 말하면, 교실 안에 있는 학생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숨을 죽이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엄마들이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는 작가를 낳는 계기가 된다 엄마들이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 중 영웅담에 대한 흥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과 작가를 낳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태인 중 영웅 나폴레옹을 찬미한 것이 동기가 되어 걸작을 쓰게 된 시인 하이네를 비롯하여 프란츠 카프카, 토커스 만 등 상상력을 구사하는 타입의 인물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토머스 만은 성서의 단 몇 구절에서 테마를 얻어 장편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엄마들이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게 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도 좋은 효과가 있다. 특히 텔레비전에 매혹되어 잠을 자려 하지 않는 어린이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데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뿐 아니라 책을 통하여 엄마와 어린이가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붙여주면, 성장한 후에 모자나 모녀가 시간이 적더라고 긴밀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관계의 기반이 침대 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싹트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엄마가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모와 자식간의 신뢰관계를 쌓는 기반이 된다. 제 2장 정을 기른다 18.오른손으로는 벌을 주고 왼손으로는 껴안아준다 껴안아주는 것은 최고의 사랑 표현 자녀를 기르면서 이따금 벌을 주는 엄마의 행위는 어린이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22장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 하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그들이 가야 할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만 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벌을 줄 때에도 반드시 애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 벌은 어버이의 권위에 의존해서 어린 자식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개성을 자유롭게 살려나가지 못하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벌은 어린이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라'는 유태인의 옛 격언은 '벌은 반드시 애정을 수반한 것이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사실 유태인은 도구 같은 것을 써서 어린 자녀를 때리는 따위의 끔찍한 짓은 하지 않으며, 오직 손으로만, 그것도 머리는 피해서 때린다. 한편 유태인에게 있어 껴안는 행위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스라엘에는 농업 생산을 축으로 삼고 있는 '키부츠'라는 공동 생활체가 있다. 이 키부츠는 이스라엘 국가 탄생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양의 젊은이들 중에는 '키부츠'를 견학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다녀간 사람들이 많다. '키부츠'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육아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가 어린이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주로 '메타페레트'라고 불리는 잘 훈련된 육아전문 여성이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부모가 있는 자기 집이 아닌 '어린이 집'에 있는 것은 아니고, 오후 4시부터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는 각기 자기 집에서 보낸다. 너무 어려서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들이 와서 데려가는데, 이때 볼 수 있는 광경은 제일 먼저 어머니가 자녀를 포근하게 껴안는 모습이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는 자녀를 껴안은 채 그 아이가 기거하는 방으로 가서 다른 한 손으로 서랍을 열고는 옷가지와 기저귀 등을 챙긴다. 이런 광경은 키부츠뿐 아니라 유치원 등으로 아이를 마중 나가는 유태인 어머니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보면, 그의 엄마는 항상 그를 껴안고 '꼬마 무안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꼬마 무안인'은 그의 별명이다. 이처럼 오른손으로는 때리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것은, 유태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길들이는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가정에서도 스파르타식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데, 이러한 경우에도 때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한 쪽 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이 포인트! 벌을 줄 때에도 반드시 애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개성을 자유롭게 살려나가지 못하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으로는 때리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19.심한 꾸지람을 했더라도 재울 때는 다정하게 대한다 나쁜 감정을 꿈속으로까지 가져가지 않게 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첫머리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첫째날 낮과 밤을 구분해서 나누었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들은 하루를 주기로 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낮이 지나 밤에 이르러 잠들 때까지 그날 하룻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그날이 지나기 전에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민족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루의 일과 중 두려웠던 일이나 슬펐던 경험을 그날로써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자녀들을 심하게 꾸짖었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만은 정답게 다독거려 주어 좋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어린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혼을 낸 담음 다독거려 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나쁜 감정을 그대로 흡수해 버린다. 그러나 한 번쯤 정답게 쓰다듬어 두면 스폰지에서 물이 빠져나온 듯이 나쁜 감정도 쉽게 흘러나오고 마는 법이다. 공포감이나 혐오감, 증오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의 꿈속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나쁜 감정이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되면, 그 다음날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다정스러운 태도만큼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산 속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던 어느 날의 일이다. 프로이트는 딸 안나가 잠꼬대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안나 프로이트, 딸기 많이, 딸기 많이" 안나는 그날 아침 배가 아팠기 때문에 좋아하는 딸기를 먹지 못했었는데, 그것이 '딸기 많이'라고 잠꼬대를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갖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꿈속에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1처 가지나 되는 꿈의 실례를 수집함으로써 '꿈은 무의식에서 생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의 원시적 감정을 반영한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실제로 누구든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불쾌했던 체험이 어른이 된 다음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그날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이 무의식중에 축적되어 꿈을 꾸게 되는 셈인데, 유태 어머니들은 여러 감정 가운데에서 적어도 부정적인 감정만을 어린이들로부터 말끔히 제거시켜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침대에 누운 자녀 곁에 앉아 정답게 껴안아주는 다정스런 어머니 ... 이것만큼 아이들에게 평온한 마음을 주는 것은 없다. 어머니의 이 다정한 배려가 아이들에게는 안정감을 주고, 하루 일과의 긴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밝으면 다시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다 보며 자녀들은 지난 일을 되세기며 과거에 얽매이는 인간이 되지 않고, 항상 산뜻한 기분으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무리 자녀들을 심하게 꾸짖었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만은 정답게 다독거려 주어 좋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어린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20.어른들이 쓰는 물건과 장소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미용실에는 어른이 된 후에 보내라 내게는 열세 살과 여덟 살된 딸이 있다. 그런데 둘째 딸아이는 여자답게 제법 멋을 내는 데 민감했다. 그 애는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헤어스타일을 눈여겨보아서 그런지, 이따금 '엄마, 나도 미장원에 데리고 가줘요 깨끗하게 머리 손질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라고 조르곤 한다. 그러나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네가 큰 다음에 네 힘으로 돈 벌어서 미용실이고 어디고 마음대로 가. 지금은 안 돼." 그러고는 딸애의 머리 손질을 직접 해준다. 큰 딸애와는 가끔 미용실에 함께 간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커트만 하게 하고 그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는 작은 딸애에게 한 말과 같다. 유태인들은 다른 나라 어른들과는 달리, 어른과 아이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언제나 어린이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부모는 자녀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과 장남의 특권을 빼앗는 것 이외에는 자녀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고 되어 있다. 어린 자녀들을 어른의 세계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모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해놓기 위해서이다. 딸들이 내 화장품에 관심을 보이며 루주를 발라보고 싶다면서 이따금 떼를 쓰는 일이 있지만, 나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정장을 할 수 있는 축제 때만은 딸들에게도 화장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만, 그날 이외에는 화장품에 절대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부모 자식간의 경계선이 없으면 그 관계는 허물어진다 요즈음은 어디서나 어린이용 화장품을 팔고 있는데, 과연 그런 상품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또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어른들의 패션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어린이옷이 아주 많다. 게다가 어린이가 마치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머니들도 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래도 되는 것인가'하고 의문을 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부모와 자식간의 경계선을 허물어버리는 것이 새로운 부모 자식 관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 유태인들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어는 시대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어린이답게 행동하지 않고 어른들을 흉내낼 때 부모들이 그런 행동을 좋게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자녀들에게 어른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즉, 어린이들은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평소 가르치지 않는다면,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포인트! 가정의 참다운 질서가 유지되려면, 어린이들은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들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인간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21.평생을 가르치려면 어릴 때 마음껏 놀게 하라 죽어도 자식신세 질 생각은 하지 말라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어릴 적부터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자녀들이 자유롭게 놀 시간마저 빼앗아버린다. 나에게는 부모들의 그런 행동이 마치 자녀들이 일류 대학, 일류 회사에 들어가 빨리 돈을 벌어 자신들의 노후를 보살펴주기를 바라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양인과 유태인의 자녀 교육법의 차이는 보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언제까지 지속시키느냐 하는 시간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자. 우리 유태인의 경우 자녀는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자녀일 뿐이다. 부모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 또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늙어서 자식들의 도움을 받겠다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긴 안목에서 생각한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부모이고, 자식 역시 평생 자식이므로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 집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나의 할아버지는 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전에 이 과수원을 아들에게 분할하여 형식적으로는 상속을 해주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할아버지 자신의 손으로 과수원을 운영했으며,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해 내갔다. 그러므로 과수원의 아들, 즉 나의 아버지에게 넘겨진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이렇듯 유태민족은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만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면 된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부모와 자식간의 역할을 짧은 시간 내에 끝맺고자 하는 것이다. 동양인과 유태인의 교육 방법 중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놀 때는 마음껏 놀게 하라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유태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놀 수 있는 시기에는 마음껏 놀게 한다. 다시 말해서 어린 시절에 놀 기회를 빼앗아버리면 배움의 길에 들어섰을 때 놀 수 있는 시간을 얻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서의 놀이는 정신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을 빼앗으면서까지 공부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긴 안목으로 볼 때 절대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학문은 어른이 된 다음부터 이루어진다고 유태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동양의 어머니들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가 중요하므로 그때까지만 가르치면 된다. 그 후는 그다지 학문의 필요성이 없으므로 될 수 있으면 어렸을 때 공부에 열중하도록 해서 유명한 대학에 들여보내면 그만이다. 생각으로 부모로서의 책임감에서 일찍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녀들의 미래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놀게 하라. 이것이 포인트!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유태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놀 수 있는 시기에는 마음껏 놀게 하라. 22.가정교육에 좋지 못한 것은 서슴없이 거절한다 초콜릿은 주지 마세요 자녀들에 대한 모든 책임은 부모가 진다. 나 또한 우리 아이들의 가정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가정교육에 대해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의 지침은, 부모이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딸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초콜릿 같은 단 것을 절대 주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 한 분이 초콜릿을 가지고 와서는 딸애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아주머니는 선의의 인사 표시를 한 것이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애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는 내가 선택합니다. 더구나 단 것이나 자극성 있는 음식은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것쯤은 자녀를 키우는 아주머니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초콜릿은 주지 말았으면 합니다."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이런 태도는 대단한 실례일 뿐만 아니라 냉정한 인상을 주는 말이 되겠지만, 유태인들에겐 당연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위와 같은 경우는 어느 때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는 일인만큼, 그때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가정교육'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키우셨고, 내 딸아이도 어머니가 된다면 틀림없이 내가 한 대로 따를 것이다. 이런 행동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대개 자기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무엇을 하면 되고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준을 어른인 부모가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부모가 진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들은 부모가 세워놓은 기준에 의하여 심신이 고르게 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의 간섭을 받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쪽을 택하게 마련이다. 어린이들은 더 더욱 그렇다. 만약 부모가 '가정교육'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면 자녀들은 가정교육보다 엄격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 그쪽으로 따라가게 될 것이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은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기도 쉽고, 즐거운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정교육을 시키는 데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남의 간섭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루하루 들인 정성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빗나간 자녀들을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여태까지 투자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더구나 자녀의 정신적인 성장은 정지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자녀들의 앞날에도 큰 손해를 끼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녀들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남의 간섭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자녀들은 의지가 약한 어린이로 성장할 위험성이 많아진다. 유태인은 남들이 완고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심리적인 거점이 되는 동시에 신념의 중요성을 심어주는 대단히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남의 간섭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성장과정의 지침은 부모이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23.조상의 이름을 통해 '가족의 맥'을 일깨워준다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유태인 이름 유태인을 만나거나 유태인과 관계된 책들을 읽다보면, 사람들 이름 중 첫머리에 야곱, 아브라함, 사무엘, 다윗, 이삭 등 유태인 조상들의 이름을 붙인 독특한 이름이 많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성경이나 유태인의 전통에서 따온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우리 집 큰딸아이의 이름 '아비가일'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다윗왕의 첫째 부인의 이름을 딴 것이며, 또 둘째 딸아이 '타마르'와 장남 '오난'도 모두 성서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더욱이 유태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등 친족의 이름을 자녀들 이름에 붙여주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이는 가족의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자녀들에게 자가시키기 위함이고, 또한 유태인이 가족의 전통에 충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거 수천 년에 걸쳐 몇 만 명, 몇 천 명의 타마르나 이삭, 다윗 등의 동명이인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친구 마잘 토케이어의 남편, 즉 앞에서 잠깐 소개한 적이 있는 마빈 역시 그의 외삼촌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외삼촌은 헝가리의 육군병사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태인들은 죽은 조상을 기억하기 위한 이름을 짓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죽은 조상의 이름만을 따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토케이어 부부의 장남 아미엘은 마잘의 부친, 즉 아미엘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 마잘에 따르면, 장녀인 사라가 태어난 지 2주일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이름을 짓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잘의 시아버지와 친아버지의 이름이 우연하게도 동명이었으므로 장남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고는, 아미엘 이란 이름을 짓고 싶다고 했더니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명예로운 일이다'라며 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유태인은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들이 성장하면 그들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등 가족의 일체감을 심어주며, 또 그 이름을 근거로 해서 성경이나 이스라엘의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한다. 얼핏 생각해도 자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졌던 조상이나 위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린이들은 그만큼 자기 조상에 대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러시아 혁명사>의 저자인 아이자크 도이처는, 탈무드 학자로서 엄격한 유태교도였던 증조부에게서 '아이자크'라는 이름을 이어받았고,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지크문트'는 전설에 나오는 영웅 이름이다. 한편, 지난날 일본에서는 아버지의 이름 중에서 한 글자만을 자녀 이름에 붙여주었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런 전통도 사라졌다고 한다. 반면 그때 그때의 유행에 좌우되어, 황태자가 성혼하던 해에는 황태자비의 이름인 미치코란 이름의 신생아가,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 있을 땐 그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을 본뜬 신생아가 급증했다고 하니, 유태인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자녀들의 이름짓기는 자녀들의 교육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지, 결코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행이란 물같이 흘러가며 변하기도 쉽기 때문에, 어린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될 무렵이면 유행하던 시절에 빛을 보던 이름도 그 빛을 잃고 말아, 자녀들이 '내 이름은 왜 이렇게 고리타분해요?'라고 따진다면 그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우리 유태인들은 가정의 전통을 떳떳하게 자녀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이름도 언젠가는 손자나 증손자의 이름으로 다시 불려지게 될 것이므로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친족의 이름을 자녀들 이름에 붙여주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는데, 이는 가족의 맥은 물론,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24.아버지의 휴일은 자녀교육에 꼭 필요하다. 안식일은 엄격하게 지킨다.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와 자녀간에 대화 단절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비단 일본을 포함한 동양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아버지가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하루 평균 3분이라고 한다. '3분간 기다리는 거야'라는 유머러스한 일본의 텔레비전 광고카피가 생각나는데, 아버지와 자녀들은 인스턴트 카레가 익을 때까지의 시간 정도밖에는 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자녀들이 부모, 특히 아버지로부터 좋은 말을 듣거나 올바른 행동을 배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태인의 가정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없다.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가정의 가장으로서 존경하며, 아버지 역시 한 가정의 중심답게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은 자연히 아버지를 본받으면서 자라난다. 공부하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모두 아버지한테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유태인들의 안식일(샵바트) 때문이다. 여기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모세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7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 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오늘날에는 정말 죽이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유태인들은 지금도 금요일 해가 지면서부터 다음날 해가 지기 직전까지는 안식일에는 불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요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부들은 안식일에는 불을 피울 수 없으므로 미리 모든 것을 장만 해 둔다. 또한 자동차는 물론이고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을 정도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면, '정통파' 유태교인 수천 명이 검은 수염에 검은 코드 차림으로 안식일 날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이때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걷다가는 돌에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설사 돌에 얻어맞았다 해도 어느 누구 한 사람 보호해 줄 사람도 없다. 이처럼 유태인들 사이에는 안식일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어, 가장인 아버지는 이날 집 안팎의 모든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자녀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는다. 아버지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되면 아버지는 언제나 자녀들을 한 사람씩 방으로 불러서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한 주일 동안 있었던 일, 공부에 관해 들어보고 거기에 대해서 조언을 해준다. 물론 이런 대화들은 아버지와 자녀간의 관계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한 가정의 가장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 상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확립되는 한편, 그러한 아버지야말로 산 교육을 행하는 '선생님'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이자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만남의 시간은 대개 30분 정도가 보통이지만,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일주일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아버지의 의견을 듣고 총정리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또한 유태인 아버지들은 평일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저녁 식사를 가족과 함께 들 수 있게 일찍 귀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동양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거나 자녀들이 잠든 후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마치 아버지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일요일이면 골프나 낚시를 하러 나가버리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안식일 같은 관습이나 규칙은 없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일요일만큼은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나라 아버지들이나 똑같겠지만, 유태인 아버지들은 특히 자녀들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배려한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차린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크게 걱정하면서, 장성한 아들에게 '흥분하지 말라. 신중하게 행동하고 교양을 몸에 익혀라. 은인에게는 경의를 표할 줄 알아야 하며 반항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유태인의 아버지 상이다. 아버지가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부모의 자식간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포인트! 엄격하게 지켜지는 안식일의 전통은 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아버지와 자녀들이 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휴일마다 아버지가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부모와 자식간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25.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라 '폐쇄공간'이 되기 쉬운 핵가족 구미 각국에서는 오래 전부터의 일이지만, 동양에서도 핵가족이 점차 늘어나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부부와 자녀들로만 구성된 이 핵가족 제도는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는 거의 예외 없이 존재하는 것 같다. 전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가족과 비교해 본다면 현재의 핵가족은, 어느 면에서는 확실히 세대간의 불화도 적어지고 집안의 공간도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주부에게는 시부모를 비롯한 여러 인간관계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육아나 자녀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상적인 가족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녀들이 웃어른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삼촌, 숙모 등 세대가 다른 어른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을 기회가 없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지적인 자극이 적은, 이를테면 폐쇄공간에서 살게 될 위험성이 많다. 나는 자녀들을 올바르게 기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이 말하는 '가족'이란 자녀들과 부모뿐 아니라 조부모, 그 밖에 삼촌이나 숙모, 그리고 사촌형제까지를 일컫는다. 그러나 유태인들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삼촌과 숙모, 사촌들은 가족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가정의 예를 들면, 축제일이나 주말에는 서로 친척들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하께 보낸다. 말하자면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일체감을 다짐하는 날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먼 곳에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딸들이 모처럼의 휴일을 이용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느낌과 흡사하다. 물론 가족의 의미를 중요시하는 유태인이라 할지라도 가깝게 모여 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은 자기 부모와 다른 생활, 다른 사고방식,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친척 어른들과 접촉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유태인들의 지혜는 단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한 사람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와의 단절 없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 시인 하이네 독일의 유태계 시인 하이네는 대가족들 사이에서 성장함으로써 재능을 꽃피운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증조부와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시인으로서의 소질을 길렀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거의 배울 것이 없었던 하이네에게는 외삼촌인 시몬 반 괴르테론의 서고가 그의 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서고에서 데카르트, 네테스하임, 헤르몬트 등의 철학서적을 탐독했으며, 그 결과 '나의 가슴속에 문필적 시도를 할 용기와 욕망이 불타오르게 되었다'고 회상할 만큼 지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서고에서 하이네는 조부의 형제인 종조부 시몬의 방랑생활을 통해 모험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정열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네는 이와 같은 가족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만약 그가 핵가족 속에서 성장했더라면, 어쩌면 그의 재능은 발견되지도, 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의 대가족 제도는 이처럼 자녀들의 정신적인 성장을 돕는 데 더 없이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올바르게 기르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6.친구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올라서라 공부를 잘한다고 좋은 친구는 아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유태인은 친구와의 교제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러나 아무나 하고 교제를 하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우리 유태인은 친구 한 명을 사귀어도 참된 친구를 선택하도록 언제나 신중을 기한다. 친구란 무엇보다 우선 자기를 이끌어줄 사람이어야 한다. <탈무드>에 '친구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올라서라'고 씌어 있는 것처럼, 자기 향상에 도움이 되는 친구라면 더욱 바람직스러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바람직스럽지 못한 친구일 경우에는 '엄마는 그 친구와 교제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분명히 의사표시를 한다. 그것은 곧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내려가는'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단계 올라서서 친구를 선택하라'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유태인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다. 무어보다도 자기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비록 식사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솜씨가 서툴다 하더라도 남보다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더 높게 평가받는다. 즉, 포크를 맵시 있게 사용하는 것보다는 한 나라 말이라도 외국어를 마스터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극히 단면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개성이나 가능성을 이끌어줄 상대라면 역시 '한 계단 올라선' 친구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의 친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친구에게서 자극을 받아 개성이 연마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아무리 싫어하는 타입이라도 반대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녀 중심으로 판단을 내린다. 좋은 친구가 위인을 만든다 유태인이 성장한 다음에도 친구를 잘 선택하고 무엇보다 친구를 중요시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 향상'을 위해 친구를 선택했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예로, 유태계 음악가인 다리우스 미요가 청년 시절에 만난 두 친구의 우정에 자극을 받아 수많은 명곡을 작곡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시인 하이네 역시 유태계 철학자 칼 마르크스와 교제할 때, 그 우정에 영향을 받아 산문시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겨울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특히 하이네는 마르크스보다 스물 한 살이나 위로, 나이로 따진다면 하이네가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하겠지만, 오히려 하이네가 마르크스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나이 차이는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또한 천재적인 음악가 구스타프 마라도는 36년 연상의 작곡가 브루크너와 사제지간이었으면서도 마치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탈무드>에 '애매한 친구보다는 분명한 적이 되라'말이 있다. 이 말은 친구를 사귀려면 '분명한 친구'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개성이나 가능성을 이끌어줄 친구라면 얼마든지 사귀도록 하라. 자녀의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의 친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7.아이들끼리 친구라고 해서 그 부모들까지 친구일 수는 없다 아이들끼리의 우정은 부모와는 무관하다 동양,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에서는 아이가 없을 때는 이웃과 서로 내왕이 없다가도 아이가 태어나면 차츰 그 아이들로 인해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부부가 많다고 한다. 일본에 사는 내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녀의 딸이 두어 살 정도가 되어 집밖에서 놀면서부터 이웃집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딸아이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가 매일 아침 현관으로 딸아이를 데리러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어느 날인가부터는 아이를 따랄 그 아이의 어머니가 함께 놀러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직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마치 친한 사이처럼 말을 걸어오더니, 마침내는 집안에까지 들어와서는 한 시간 이상이나 수다를 떨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자 그 친구는, '정말 곤란해. 나는 친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데, 그녀는 마치 나와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시장이나 하이킹을 가자는 것 아니겠어'라면 내게 하소연을 했다. 우리 유태인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교제란 절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자녀들을 통해 부모들이 가까워지는 일은 없다. 부모들은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낼 뿐, 그 한계를 넘어선 '친구'관계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주어라 유태인의 격언 중에 '남의 백 마디 중상보다 친구의 무분별한 한마디의 말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친구는 중요한 존재이며, 또한 마치 자기 자신의 일부분과도 같다는 뜻이다. 자녀들끼리 친하다고 해서 부모들까지 쉽사리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단 친구로 생각하면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줄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한편,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나의 경우, 친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다고 해도 대개 저녁식사 후에 하므로 아이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이다. 혹시 아이들이 나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방에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만 할 뿐,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이들 친구의 부모에게 대하듯이, 우리 아이들도 나의 친구를 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녀들은 자녀끼리, 부모는 부모끼리 각각 우정을 나누는 것이 우리 유태인들의 '교제방법'의 기본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내 친구와 친해진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요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신뢰하며 교제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자녀들이 친구라서' 또는 '부모들이 친구라서'라는 조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끼리의 우정 때문에 그 부모가 서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28.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젖먹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젖먹이를 바깥세상과 접촉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 유태인들은 생후 1년 전후의 젖먹이는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더구나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더 더욱 그렇다. 그것은 아기에게도 어른에게도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친구로부터 '오늘 놀러오지 않으래?'라는 청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돌이 안 된 아기가 딸려 있는 동안에는 '아기와 함께 있어만 돼'라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때로는 아기와 함께 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초대를 받더라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데리고 가는 일이 거의 없다. 설사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수다를 떨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야말로 간단히 커피 한 잔 정도 들고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철없는 아기들은 대개 의자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귀중품이나 깨질 염려가 있는 물건에도 손을 대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초대를 한 쪽은 물론 아기의 부모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기 쪽에서 보더라도 자신이 취하는 행동 모두를 엄마로부터 제지당하는 꼴이 되니, 이것은 엄마나 아기, 또 초대한 주인에게 신경만 쓰일 뿐 아무런 이득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낮에는 간혹 데리고 가는 수가 있지만, 밤에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은 결코 없다. 어릴 때부터 일정한 시간에 잠자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만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야 한다. 어중간한 교제는 아기나 부모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다 나는 동양의 어머니들이 흔히 젖먹이를 등에 업고, 혹은 안고서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 집에서 그런 어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아기 시중을 드는 것이 목적인지 친구와 환담을 하는 것이 목적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아기에게만 신경 쓰다가, 친구와는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방문은 아기 엄마에게 있어서 불유쾌한 일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모처럼 즐거워야 할 만남인데 아기 시중드는 데 정신이 팔리다 보면, 초대한 쪽이나 방문한 쪽이나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즐길 때는 마음껏 즐겨야 한다. 어중간한 즐거움은 차라리 즐기지 않느니만 도 못하다는 것이 유태인의 사고방식이다. 젖먹이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아기만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아기에게도 엄마에게도 행복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엄마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그대로 놔두지 않는 것 같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은 아기들을 몹시 보고 싶어하며 오히려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환영한다. 커가는 아기의 재롱을 보고 어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움이 될지 모르지만, 아기나 엄마에게는 즐거움은커녕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아기에게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한 살 전후의 아기와 그 엄마는 편하게 지내도록 신경을 써주며, 되도록 외출은 삼가도록 한다. 이것이 포인트!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은 자칫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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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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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제1장. 지를 기른다 1.'남보다 뛰어나게' 아니라 '남과 다르게' 아인슈타인은 여덟 살 때까지도 저능아 유태인 어머니들은 모두가 한결…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제1장. 지를 기른다 1.'남보다 뛰어나게' 아니라 '남과 다르게' 아인슈타인은 여덟 살 때까지도 저능아 유태인 어머니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교육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Jewish Mother(유태인 어머니)'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자녀들에게 배움의 필요성을 지겹도록 강조하는 극성스런 어머니'란 뜻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을 어머니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19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야곱은 유태인의 조상이다. 하나님이 후세에 유태인의 일상생활의 기본이 되는 십계를 가르치라고 모세에게 명령한 이 성경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아주 부드럽게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매우 엄하게 이 말을 되풀이했다는 사실이다. 이 일로 인해서 십계의 구상은 먼저 여성에게 전해졌고, 다음에 남성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랍비(유태교의 율법사)들은 생각했다. '야곱의 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이 감돌게 발음되는데, 이것으로도 짐짓 수긍이 간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먼저 듣게 된 여성은 그것을 가족들에게 전달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어머니들은 여성이야말로 최초의 교육자이며, 자녀들은 가르치는 의무는 당연히 여성이 지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바로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어머니들과 유태인 어머니들과는 약간의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웃집 어린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거나 일류학교 진학을 지상목표로 삼는다고 해도 유태인 가정에서는 그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한 '남보다 뛰어나라, 남들을 앞질러라' 하고 어린이들을 달달 들볶지도 않는다. 일류학교이든 이류학교이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대학은 어느 대학에 가야만 된다는 식의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엄마들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여덟 살 때까지 저능아였다'는 사실을 유태인 어머니들은 잘 알고 있었다. 유태인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다. 그러나 네 살이 되도록 말을 못하자,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그를 '저능아'라고 체념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머리 회전이 늦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아서, 1학년 때 담임선생은 '이 아이에게서는 어떤 지적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신상기록을 남겼다. 또한 그가 학교에 계속해서 다닐 경우, 다른 학생에게 방해가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리만큼 아인슈타인은 저능아였다. 다른 아이와 다른 점, 즉 개성을 중요시한다. 내 여동생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늘 '너는 츠바이슈타인이야!'라는 칭찬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아인'은 독일어로 'l'을 의미하고 츠바이는 '2'를 의미한다. 즉'아인슈타인 다음으로 머리가 좋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의미의 농담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들먹인 진짜 이유는, 커 가는 어린이에게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각자 타고난 개성에 따라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것이 바로 유태적인 교육을 하는 어머니들의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다른 집 아이들과 똑같이 뛰어 놀고 함께 공부하면 행동하는 스테레오 타입(고정적인 틀)에 속해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어린이와는 어딘지 다른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성장하는 것이 좋은 장래를 약속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열을 다투는 경우 승자는 언제나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저마다 남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아인슈타인은 담임 선생으로부터 저능아 취급을 받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 다섯 살 때까지 유클리드, 뉴튼, 스피노자, 그리고 데카르트를 독파했다. 후일 그는 '나는 강한 지식욕을 품고 있었다'고 지난 일의 일들을 술회했으리만큼 속마음이 꽉 차 있었지만, 그 당시 그의 심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가 다른 어린이들과 똑같이 되기를 강요했더라면 그의 재능을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열세 살 난 딸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학에 특히 재능이 있어서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영어, 불어, 일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늘 '너는 어학에 재능이 있으니 통역관이 된다면 아주 좋겠구나'하고 부추켜준다. 대신 '너는 어학을 잘하니까 수학도 잘한다면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없겠지'라는 식으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유태인 어머니들은 예외 없이, 다른 집 어린이와는 무엇인가 다른 자기 자녀만의 특성을 찾아서 그것을 신장시켜 주는데 전력투구한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히브리'라는 말의 원래 뜻은 '혼자서 다른 쪽에 선다'이다. 자기만의 개성을 충분히 키워준다는 것은 유태인의 생활방법 전반에 걸친 원칙인 셈이다. 2.'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성적인 어린이는 잘 배우지 못한다 동양의 어머니들은 대개 '댁의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얌전하고 착한 가요?'라는 말로 칭찬하기 일쑤인데, 유태인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이 만약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나는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얌전하다, 착하다.'라는 말은 진취성이 없어 공부를 잘할 수 없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속담에 '내성적인 어린이는 잘 배우지도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성적인 아이는 공부를 잘 못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수줍음을 잘 타서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성격이라면 참다운 학문을 깊이 터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는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닥치는 대로 질문하도록 길들여져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러시아 문제 연구가이고, 러시아혁명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진 폴란드 태생의 아이자크 도이처는 불과 열세 살에 랍비가 될 만큼 천재소년이었다. 그가 부모로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던 충고는,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고 할말이 정해졌다면 똑바로 서서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랍비'의 자격을 얻기 위하여, 겨우 열세 살의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거리의 많은 군중 앞에서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대 연설을 했다. 청중은 어린 소년의 말이지만 완전히 매혹되어 감동 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조리 있는 연설을 들은 약 1백여명의 랍비들이 논의한 결과 그는 랍비에 임명될 수 있었다. 유태인 사회에서 제일 존경받는 대상인 랍비가 되려면, 내성적이거나 얌전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덕이자 절대적인 조건이다. 내가 동양사람과 이야기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대화 도중에 곧바로 침묵이 찾아오는 일이다. 사실 나는 유태인으로서는 그다지 수다쟁이가 아닌데도 나 혼자만 계속 지껄이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나는 말에 의해서 배우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침묵이란 배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에 대한 욕구의 결여라고 생각한다. 매사를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남에게 '나는 진정 배우고 싶다'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듣기만 한다면 앵무새가 될 뿐이다 나는 언젠가 어느 동양인 엄마에게 '당신은 자녀가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무슨 말을 해서 보냈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돼요,라고 했지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하나같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을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정말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수업방식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그냥 일방통행 식으로 듣게 할뿐이고, 선생님의 말이라면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무조건 따르다 보면 독창성이 없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태인의 교육은 다르다. 유태인 엄마들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의심나는 것은 주저하지 말고 물어봐야 돼요'라고 일러서 보낸다. 어린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고 학생들은 그것을 풀면서, 의심나거나 모르는 점은 끝까지 질문하도록 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성전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말이 있다. 교사는 혼자만 알고 떠들어대서는 안 된다. 만약에 학생이 잠자코 듣기만 한다면 많은 앵무새를 길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가 이야기하면 학생은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건 교사와 학생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많이 오가게 된다면, 교육효과는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다. 내가 알고 있는 랍비 중 한 사람인 마빈 토케이어 씨는 <일본인과 유태인>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유태 붐을 타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어, 일본의 여러 지방에서 초청을 방아 강연을 하러 다녔다. 그런데 그는 그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열띤 강연을 끝내면 청중들은 박수만 쳤지, 누구 한 사람 강연한 내용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침묵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태인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유태인의 모임이라면 이런 초청강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연자가 쩔쩔맬 정도의 질문이 사정없이 날아드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연 내용을 되풀이 질문함으로써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끈질긴 탐구욕인 만큼,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법이 아닐까? <탈무드>가 가르치는 두 가지 학습법 <탈무드>에 유태인의 탐구욕에 대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나그네가 있었다. 두 사람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길을 걷다가 외딴집을 찾아냈다. 그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는데, 다행히 높은 천정에 과일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그러자 한 사나이가 벌컥 화를 내면서 집에서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남은 한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꼼짝하기 싫을 만큼 허기진 상태였지만 그는 그 바구니를 보고 '이는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힘을 내어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사다리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사다리로 올라가서 과일이 든 바구니를 내려 맛있게 먹었다. 유태인이라면 언제나 후자의 방법을 모범으로 삼는다. 뭔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의 눈앞에 있는 물건에 가만히 손만 내밀 뿐 그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짓은 절대로 사절한다. 말하자면 유태인의 어린이들은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과일을 손에 넣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 사다리를 찾아 한 칸씩 타고 올라가 기어코 과일을 손에 넣듯이, 한 가지씩 질문을 하면서 문제를 풀어 가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배움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유태인이 많은 것을 발명하고 항상 지적인 개척자의 지위를 지켜온 비결은, 오랜 옛날부터 이런 방법으로 교육받아 왔고 도전적인 질문을 그치지 않는 자세를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지의 체계화를 서서히 이룩하고, 그것이 곧 위대한 업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이 많은 것을 발명하고 항상 지적인 개척자의 지위를 지켜온 비결은, 옛날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그치지 않는 자세를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다. 3.머리를 써서 일하라 머리가 좋아지도록 만들어진 교육환경 사람들은 대체로 '유태인은 머리가 좋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미국에서 아이비 리그(동부지역 명문대학군)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하버드, 예일, 칼럼비아, 프린스턴 등의 일류 대학교수진의 30%가 유태인이라고 한다. 또 1905년부터 1973년까지의 노벨상 수상자 310명 중 유태인이 43명으로, 전체 수상자의 10% 이상이 유태인이거나 유태계라고 한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곧 유태인은 선천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능의 우열은 결코 인종과 민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유태인은 어려서부터, 유태인답게 살아가려면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머리를 써서, 즉 두뇌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일해야만 된다고 항상 배워왔다는 사실이다. 또 유태인이 어려서부터 받아온 학교나 가정교육 시스템은 머리 쓰는 일에 알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유태인에게는 아주 자연스런 일로 인식되어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활 환경 모두가 머리 쓰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통계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이 육체노동을 천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시에 두 초등학교를 다닌 토케이어 씨 마빈 토케이어 씨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1936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동시에 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는 미국 초등학교에 다니고, 이곳에서 수업이 끝나면 버스로 40분이나 걸리는 다른 학교로 달려가야 했다. 그는 그 학교에서 네 시간 동안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유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학교를 다닌 습관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 반까지는 미국인들의 학교에 다녔고, 그 수업이 끝나면 다시 유태대학인 예시버 대학엘 다녔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케이어 씨는 힘은 들었지만 동시에 두 개의 대학 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스포츠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는데, 특히 야구를 아주 잘해 대학팀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뛰어난 소질을 발견한 어느 프로 야구팀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손가락 모양이 특이해서 직구를 던질 때도 자연스럽게 공이 처져서 아무리 잘 치는 타자라도 여간해서는 홈런을 칠 수 없는 변형 구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프로 야구단의 입단 교섭에 마음이 쏠려 아버지와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아버지는, '야구도 좋지만 그것은 네게 적당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두 학교에 다녔을 만큼 머리 쓰는 일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선천적으로 특이한 '황금 손가락'을 가진 그였지만 빈틈없는 두뇌 교육과정을 밟아온 그에게 프로 야구선수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적합치 않다고 그의 부친은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프로 야구팀의 유혹을 뿌리치고 랍비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머리를 써라' 이는 어느 유태인 어린이건 간에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항시 듣는 말이다. 또한 유태인 엄마들은 어린이를 꾸짖고 때릴 일이 있으면 뺨을 때릴망정 절대로 머리는 때리지 않는다고 한다. 뇌가 상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게다. 그러므로 유태인의 머리가 좋은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머리를 잘 쓰는 방법을 어릴 적부터 훈련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라면 누구나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 그런데 똑같이 머리를 쓰는 방법이지만, 직접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과 지식을 터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태인의 속담에 '물고기를 한 마리 준다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지식'이란 말과 바꿔놓고 본다면 이 속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만이 우리 어른들의 임무는 아니다. 그와 더불어 배우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은 대부분 어떤 일정한 양의 지식을 학생들 머리 속에 넣어주고, 어떻게든 시험에 통과하는 능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요구한다. 즉 대부분의 부모들은 상급학교에 입학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어떻게 물고기를 잡을 것인지는 가르치지 않고, 당장에 먹을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나눠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보다는 지식의 체계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흡수하느냐 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면, 학생들은 그것을 다른 일에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학문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학교 교육에는 문외한인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유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제출시킬 경우,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그 수집된 자료들을 적절히 종합, 분석, 정리해서 자신의 머리로 리포트를 작성하게끔 이끌어준다. 그리고 리포트의 평가 기준은 그 내용이 아니라, 자료를 다룬 솜씨가 중요 포인트가 된다. 이렇게 유태 아이들은 최대한 머리를 활용하는 환경 속에서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물고기를 한 마리 준다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4.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의지할 것은 오직 지혜뿐 유태인의 격언 중에,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남고 싶다면 먹는 것으로도, 마시는 것으로도, 춤을 추는 것으로도, 또는 일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지혜를 가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유태인은 그야말로 온갖 박해를 받으며 생존해 왔다. 그런 유태인에게 만약 지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중세 유럽 시대의 유태인은 토지의 소유를 금지당했고, 직능별 조합인 '길드'에마저 가입할 수 없었다. 유태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오직 의사나 상인뿐이었다고 한다. 고등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어 편히 살거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지혜를 터득해서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길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전 <탈무드>에는 '유태인의 유일한 재산은 지혜'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우화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한 가지를 들어보자. 거부들만 타고 있는 배에 '랍비' 한 사람이 편승하고 있었다. 부자들이 서로의 재산을 비교하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랍비'가 말했다. "가장 유복한 사람은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보여드릴 수가 없군요." 그로부터 얼마 후, 해적의 습격을 받게 되어 부자들은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마침내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그는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만들었다. 그러곤 단번에 거부가 되었다. 함께 배를 타고 왔던 부자들은 이미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 있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랍비'가 한 말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라는 속담처럼, 지혜를 갖지 못한 자의 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지혜 있는 자 모든 것을 갖춘 자 다음의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유태인은 지혜를 갖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거침없이 버리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유럽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 사이에 미국으로의 이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독일 바바리아 지방 바이에르스 돌프촌에 파니 셀리란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녀들을 부자유스런 생활환경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 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기초작업으로 장님인 조세프를 대학에 진학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직공생활을 하고 있던 남편 데비드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다며 반대했다. 하는 수 없이 파니는 그 동안 남모르게 모아두었던 돈을 털어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조세프를 에드란켄 대학에 입학시켰다. 대학에서 그는 그리스어, 영어, 프랑스어를 익힌 결과 이미 알고 있던 독일어, 히브리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조세프는 졸업 후 17세가 되던 해에 '약속의 땅'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그의 주머니 안에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미국 지폐 1백 달러가 전부였다. 조세프는 그 후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뉴욕에 'J&W 셀리그먼 컴퍼니'란 은행을 설립하고 어학 실력을 마음껏 발휘, 국제 금융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민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셀리그먼 산(Mount Seligman)'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그의 모친 파니가 교육이라는, 즉 어학이라는 '지혜'를 터득케 해서 조세프를 신대륙에 보낸 결과였다. 이렇듯 유태인들은 '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라는 속담과 '지혜 있는 자 모든 것을 갖춘 자'라는 격언을 굳게 믿고, 어린이들을 그렇게 되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이 세상에서 진정 살아남고 싶다면 먹는 것으로도, 마시는 것으로도, 춤을 추는 것으로도, 또는 일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지혜를 가져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 5.배움은 벌꿀처럼 달다 즐거움을 못 느끼는 동양식 교육 어린이가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책임의 태반은 어른인 부모에게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학교나 유치원은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당연히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의무인 만큼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공부이고, 또한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곳이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공부를 좋아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이 싫다'고 고개를 적으면, 어른들은 대개 '공부를 안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강요만 한다. 이렇게 되면 어린이는 더욱 공부가 싫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유태인의 눈에는 이런 일들이 이상하게 보여진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본디 인간에게 있어서 배운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즐겁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는데, 그 부모들이 이 '의무'란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여기서의 '의무'는, 부모가 어린이를 교육받게 할 의무인지는 몰라도, 어린이가 '좋은 성적을 올릴' 의무는 아닌 것이다. 배움이란 '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유태 초등학교에서는 공부란 '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란 사실을 어린이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이스라엘서는 초등학교 신입생이 선생님과 처음 만나는 등교 첫날, 공부란 '달콤한 꿀과 같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준다. 선생님은 1학년 학생들 앞에서 히브리어의 알파벳 22자를 벌꿀이 묻은 손가락으로 써나간다. 그러곤 '이제부터 너희들이 배우는 것은 모두 여기 쓴 22자에서 출발하게 되며, 더구나 그것은 벌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또 신입생 모두에게 케이크를 주는 학교도 있다. 흰 설탕이 덮인 맛있는 케이크 위에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역시 설탕으로 씌어져 있다. 어린이들은 선생님에게 이끌려 설탕의 알파벳을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면서 단맛을 빨게 된다. 이 역시 '배움이란 꿀처럼 달다'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좋은 방법이다. 외국에 있는 유태인 학교 입학식 때에는 알파벳 대신 유태민족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그린 케이크를 나누어준다. 그리고 학생들은 '별'을 그린 손가락을 빨아가면서 배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이로 하여금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공부이고,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곳이 학교라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려면, 배움이 달콤한 꿈과 같다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6.싫으면 그만 두라, 그러나 하려면 최선을 다하라 '무엇이 되라'는 식의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서 엉뚱한 꿈이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예를 들어, '너는 앞으로 의사가 될 각오로 공부하라'는 식의 말은 결코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공부를 잘하라고는 말하지만, '의사나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잘하라는 것은 아니다. 학문 자체가 목적이지 수단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장래의 선택은 어린이 자신들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어른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부 이외의 어떤 예능이든, 전혀 강요하거나 권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하면 가르치고, 싫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즉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가르쳐야 되겠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싫은 것은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라'는 것으로 족하다. 만약 어린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싶다고 할 때는, 그렇게 하기 위해 후회 없는 노력을 하라고 충고해 줄뿐이다. 이처럼 어린이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어버이가 멋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유태인 부모들의 교육 방식이다. 러시아계 유태인으로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영화음악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부친은, 아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자 이웃에 사는 한 여선생에게 1시간에 1달러씩 주기로 하고 레슨을 받게 했다. 레너드는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병약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의지로써 그것을 극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용돈을 아껴 레슨비를 내면서까지 열심히 배워 마침내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흥미 있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일곱 살 때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레슨 시간이 길고 지루해서 1년만에 집어치웠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아인슈타인이 처음 바이올린을 시작했을 때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그만두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 후 2-3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 아인슈타인은 다시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평생 바이올린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린이는 스스로의 능력을 끝까지 추구한다 어린이는 부모들이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주면, 공부를 할 때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의욕을 갖게 된다. 그 한 가지 예로,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는 열 살 때부터 남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선생님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와 선생을 곤경에 빠뜨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렇듯, 자기 자신의 능력을 추구하는 데 지나치리만큼 열성적인 유태 어린이들은 부모의 희망을 받아들일 때도, 자기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유명한 정신의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열 일곱 살 나던 해에 빈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의학부에 적을 두었지만, 개업의사가 되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곤 13년 동안 연구실에 틀어박혀 과학으로서의 의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명한 정신분석학도 결국은 개업의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 추구에 열중한 결과였으리라. 우리는 어린이들의 장래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감을 갖거나, 꿈을 그리는 식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월권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디까지나 어린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능력에 의하여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만이 최선의 결과를 얻는 방법인 것이다. 7.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의 정신적 기둥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인 유태인 가정 유태인 사회는 부계 사회이다. <탈무드>에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아버지가 먼저 등장하고, 어머니만 등장하는 경우는 한 군데밖에 없다. 이 성전에는, 부모가 함께 물을 요구할 때는 아버지에게 먼저 가져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먼저 가지고 가더라도 어머니는 남편인 아버지를 존중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머니 손에서 아버지 손으로 건너가고 말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히브리어로 아버지는 '교사'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이렇듯 유태인들에게 있어 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에게 마음의 기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역시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로 인해 성공한 사람 중하나이다. 그는 어렸을 때 수학 성적이 아주 형편없어 낙제까지 한 적이 있었다. 보다못한 담임선생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러는 공부를 시켜봐야 별 수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양화점 견습공으로나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권고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계속 학교에 보내 수학공부에 전념케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태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인 만큼, 아들러도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아들러는 수학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어려운 문제를 칠판에 써놓고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누가 이 문제를 풀어볼까?"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아들러가 대답했다. "제가 풀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열등생인 아들러는 도저히 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클래스메이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문제를 손쉽게 풀어나갔다. 그 뒤로 그는 수학 성적에서만큼은 클래스에서 손꼽히는 존재가 되었다. 아들러는 나중에 심리학의 새로운 체계를 이룬 ' 개인심리학'을 내놓아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저명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권위가 사람을 만든다 요즈음 동양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잘 아는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은 탄식조의 넋두리를 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내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들은 남편을 단순히 돈이나 벌어들이는, 이를테면 '꿀벌' 같은 존재쯤으로 여긴다. 그뿐 아니라 어린 자녀들 앞에서도 그런 내색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아비를 지도자로서, 가장으로서 존경할 뿐 아니라 어떤 일이건 최종 결정권을 남편에게 맡기는 유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되고, 또한 이것이 유태인 가정에 흐트러짐 없는 정연한 질서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항상 이상적인 아버지 상을 추구하면서 자아 형성을 도모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유태계 작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는 이런 부자관계가 농도 짙게 그려져 있다. 아버지의 정사와 아들의 사업상의 실패가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희곡은,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있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핵심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유태 어린이들을 정신적으로 조리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이 포인트!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하는 어머니를 보고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태인 가정에 정연한 질서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다. 8.'배운다는 것'은, 배우는 자세를 '흉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버지가 기른 키신저 외교 유태인의 성전인 <탈무드>에서는 '돈을 빌려주는 것은 거절해도 되지만 책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거절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유태인들이 독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랍비'인 토케이어 씨는 한가한 시간이면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데, 이제 겨우 다섯 설인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흉내를 내면서 '공부하는 척'을 한다고 한다. 아이는 서재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꺼낸 다음 의젓하게 앉아 페이지를 넘기면서 눈을 치켜 뜨는 아버지의 폼을 흉내낸다. 물론 아직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아버지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어린 그의 가슴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그의 정신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책 읽는 모습을 흉내내면서 성장한 어린이 중에 세계적인 명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유태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의 직위에까지 오른 헨리 키신저 박사로서, 그는 어렸을 때 매일 아버지와 함께 공부를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 루이는 독일 여학교 교살로 재적하고 있었는데, 그의 일가가 살던 아파트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화려한 기록을 남긴 키신저 외교의 이면에는 19세기 유럽 외교사에 대한 그의 넓은 지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정설인데, 그가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그를 깊은 학문 속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린이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른들을 '흉내내다' 일본어로 '배운다'의 어원은 '흉내낸다'와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 나는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들 유태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운다는 것은, 흉내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유태인과 일본인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아버지들은 어린 자녀들이 흉내내도 좋을 만큼 모범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따금 일본인 가정에 초대되어 그들 생활의 단면을 보게 되는데,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전용 책상이나 책꽂이조차 없다는 것은 유태인의 눈으로 보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회사나 바깥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에서까지 책상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자녀들한테는 '공부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닌가. '아무리 공부를 하라고 타일러도 우리 애들은 통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아야'라고 탄식조로 말하는 아버지, 그 탄식은 자녀들이 흉내낼 만한 아버지 상을 가지고 있지 못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교육은 모방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부모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지 않고서는 자녀들의 올바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9.배움을 중지하면 20년 배운 것도 2년 내에 잊게 된다 돈은 빌려주지 않더라도 책은 빌려줘라 유태의 속담 중에 '현인은 없으나 현명하게 공부하는 사람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한평생 배우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유태인이 지닌 인간에 대한 기본 시각이다. 아무리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배움을 중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년 걸쳐서 배운 것을 2년 내에 잊어버린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배움을 중지하면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을 한순간에 모두 잃게 된다. 인간에게 '현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인간'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배우고 있느냐', '배우지 않느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즉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성서 신명기 6장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성경 구절 가운데 '마음에 새기고'란 말은, 히브리어로 '조각하다'라는 의미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자녀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먼저 배우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즉, 매일 매일 배우는 일에 정열을 쏟음으로써 비로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녀들의 모범적인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탈무드>의 율법이 말하고 있듯, 책이란 만인의 공유물이며, 만인은 배울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 한 권을 읽으면 축하파티를 ... '책의 민족'이라고 불리는 유태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이 있다. 유태인 비지니스맨들 중에는 아침 통근차 안에서 <탈무드>를 공부하고 퇴근길에도 <탈무드>를 읽으며, 안식일에는 마음놓고 몇 시간씩 <탈무드>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한평생을 다 읽어도 읽지 못할 책이지만, 한 권이라도 독파한다는 것은 우리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한 권을 독파하면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다가 축하파티를 열 정도로 유태인은 학문에 대한 정열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생각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동양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배움을 멀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대학생의 경우에도, 입시 관문을 뚫고 난 다음에는 해방감에 사로잡혀 스포츠나 오락 따위로 세월을 보내는 학생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배움을 직업을 얻거나 결혼을 위한 패스포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비싼 등록금을 주고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학문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이 어린이 교육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잃은 학문을 자식을 통해 되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그러나 배우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는 부모가 자녀들의 장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포인트! 배우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는 부모가 자녀들의 장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10.상상력에도 한계는 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란다 어린이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고 있음에도 도저히 이해시키기 어려운 관념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예를 들어, 가까운 친척이나 어른들이 죽으면 어린이들은 그 이유를 물어본다. "왜 죽었어요?"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젊은 나이에 죽었을 경우에는 '응, 큰 병이 들었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게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다시 추궁한다.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응,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란다." 유태인은 저승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어린 자녀들에게 들려주려 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의 상상력은 그들 자신이 자유롭게 펼치거나 비약시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부모들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앞의 예처럼 대답할 수 있지만, 어린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관념,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답하는 각도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 딸이 세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딸아이가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마마, 하느님이 뭐야?"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지. 공기 속에도 계시고, 우리가 먹는 과일 속에도 계시고, 또 ..." 그러자 딸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야, 나 하나님 먹는다'하고는 무슨 보물이나 얻은 듯 뽐내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무리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사고의 방향을 잘못 잡아 어린이들의 미숙한 상상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단계로까지 어버이 멋대로 이끌어 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은 첫째, 어린이에게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둘째, 어린이에게는 절대로 공포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들은 '하나님은 저 어딘가에 살고 계시단다'라는 식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혼내주신다'라는 공포감을 자아내는 말도 하지 않는다. 심한 자극은 어린이에게 해롭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어려운 관념에 대해 질문하는 어린이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 명료하게 대답해 주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그 근원을 캐어보면 그러한 전통이 구약성서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매우 간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향년 175세다.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사후의 거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신에 아브라함의 업적과 가르침이 '그 열조(백성)에 돌아가니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다'라는 뜻이다. 죽음이라든가 하나님에 대해 억지로 꾸며내거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어린이들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어린이들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흐려놓는다면 어찌되겠는가. 유태인들은 업무에 골몰한 나머지 가정을 내팽개쳐 버릴 정도의 주관적 자세를 싫어하며, 식욕, 성욕, 음주, 금전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탐하지 않는다. 이런 성격은 관념이라는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자극을 주거나 흥분을 자아내는 것들은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부모들은 어린이의 상상력을 무시한 지나친 요구를 절대 하지 않으며, 적당한 자극을 통해 어린이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개발시켜 줌으로써 구김살 없이 키우려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것이 포인트! 어린이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념에 대해 얘기할 때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절대로 공포감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11.추상적 사고는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은 언제나 추상의 영역에 있다 유태민족 중에는 높은 추상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학문과 사업부문에 종사하는 인물이 많다. 이론물리학자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심리학자로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비지니스에서도 실제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 유통에 관계되는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 뉴욕 금융의 중심지인 월 가의 금융브로커 중 과반수가 유태인이라고 하며, 미국인이 소매상점에 지불하는 총 금액의 17%를 좌우하는 카탈로그 판매회사인 시아즈 로바크도 유태인이 경영하는 회사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유태인이 추상 능력에 뛰어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어릴 적부터 '추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습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은 어떠한 우상 숭배도 거부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의 그림이나 조각 등은 너무나 많다. 말하자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추상이 아닌 구상인 만큼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태교에서는 인간과 똑같이 그려진 예는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추상의 영역 속에 존재하며 그런 까닭에 유태인은 항상 '구상화될 수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것이 사물을 논리적, 추상적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유태인 어린이들이 자주 듣는 이야기 가운데 최초의 유태인인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부친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브라함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어린 나이의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만든 우상을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섬기며 사는 것이 이상하기 작이 없었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아브라함은,'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하나님일 수 없다면 하나님은 우상이 아닌 다른 것, 혹은 태양일지도 모르며 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태양은 해가 지면 사라져 버리고, 달은 날이 밝으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태양이나 달과는 다른 더 멋진 존재가 틀림없으리라는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왜 '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까? 이로써 아브라함은 유태인의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추상적 영역에서 이해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유태민족의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고 있다. 즉, 유태의 어린이들은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애써만든 우상을 모조리 파괴하면서,'우상이란 말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걸어다닐 수도 없는데 어째서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왜 우상을 숭배하고 절을 합니까? 우상에게 예배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하고 반박하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이란 실체가 아닌 추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상상력의 확대를 통해 아이들의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교육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만도 아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수학 공부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학령기 이전에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12.어머니의 과보호가 때론 아이의 독창적인 재능을 살릴 수도 있다. 과보호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유태의 격언에,'하나님을 언제, 어디에나 계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머니로 만들었다'하는 말이 있다. 아버지가 한 가정의 지도자인 것은 틀림없으나, 어머니의 애정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못지않게 절대적이다 때로는 애정이 너무 지나쳐 '유태의 어머니'라는 말이 마치 과보호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랍비' 요셉은 이러한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났는데, 자기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성령이 가까이 오시는 구나, 빨리 일어나야지'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탈무드>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과보호는 어린 자녀들의 장래를 그르친다는 것이 통상적인 관념이어서, 응석을 부리는 아이를 보면 '엄마가 귀엽다고 떠받들어주었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리에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과보호가 반드시 어린이의 성격형성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의 과보호가 어린이의 독창적인 재능을 개발시킨 사례도 흔히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유태계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대단한 응석받이로 자라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보라고 하면 신경질을 부리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가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의 엄마가 물었다. "너에게 가장 비참한 일은 무엇이냐?" 그러자 프루스트는 '엄마와 헤어져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서른세 살 때까지 편지의 첫머리에 '진정으로 좋은 어머니'라고 썼을 정도로 응석받이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한 것은 그다지 신가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프루스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머니와 나는 언제나 무선전화로 연결되어 서로 곁에 있건, 멀리 떨어져 있건 항상 긴밀하게 마음이 오가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적혀 있을 만큼 마치 연인들 사이에 오가는 러브레터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프루스트는 이렇듯 어머니와 친밀하게 지냄으로써 다른 어린이들과는 전혀 다른 감성의 소유자로 자라날 수 있었다. 대학 예비학교인 리세에 다닐 때도 방자하리만큼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프루스트는 마치 여자처럼 차분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이런 차분한 성격이 그의 문학적 소양과 연결되어 만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명작을 쓰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과보호로 성공한 위인들 프루스트뿐 아니라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도 과보호라 할 정도로 어머니의 '열정적인 애정'의 비호 밑에서 성장했다. <꿈의 해석>으로 유명한 프로이트는 어렸을 때,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기묘한 새를 닮은 남자들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대드는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워낙에 특이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열정적인 애정이 밑바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과보호는 확실히 어린이의 정신적인 균형을 무너뜨리지만, 한편으로는 독특한 재능을 최대한으로 키워주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개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유태의 어머니들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기보다는 개성이 뚜렷한 어린이가 되는 쪽을 바람직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호를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푸르스트 등의 예에서처럼 어린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보호가 결코 나쁘다고만 단정지을 일도 아닌 것 같다. 이것이 포인트! 프르스트,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의 성공 뒤에는 과보호라 할 정도로 열정적인 '어머니의 애정'이 숨어 있었다. 13.형제간의 두뇌 비교는 둘을 다 해치지만, 개성의 비교는 둘을 다 살린다. 키신저 형제의 건전한 라이벌 의식 유태인들은 형제 자매를 서로 다른 인격체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과 동생을 비교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형은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니?" 이런 식으로 형제간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동생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그렇게 따진다고 해서 동생의 성적이 오를 리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를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형과는 개성이 다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마저 자르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다시 말하면 형제를 한 가지 능력, 예컨대 학교 성적만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해독만 끼칠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의 동생 월터 키신저는 언젠가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우리 형제는 라이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엇나간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둘은 성격이 달랐고, 커서는 직업도 전혀 달랐다." 이는 유태인인 부모로부터 서로 다른 인격체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월터 키신저는 앨런 전기회사 사장으로서 형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존경받는 비지니스맨이 되었는데, 그는 형에게 열등감을 갖기는커녕 '신문사는 헨리의 뒤만 쫓는데, 내가 업계에서 성공한 비화도 탐색할 만한 가치가 있지'라며 건전한 라이벌 의식을 강조했다고 한다. 비록 형제간이라고는 하지만 각기 다른 인격체라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 있어서는 실로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신명기 24장에, '아비는 그 자식들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은 그 아비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가족 전체가 벌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그 당시에도 유태인들은 개인의 책임을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비록 한 가족이라 하더라도 개인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형제가 함께 어울리면 서로의 개성을 기를 수가 없다 유태인 부모들이 자식들을 대할 때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 사이의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각각의 개성'이며, 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자식들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결코 형제를 함께 보내지 않는다. 서로간의 취미가 다를 것이므로 같은 장소에 가기보다는 각자 다른 장소로 가서 서로 다른 세계를 접하는 편이 그들의 장래에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들의 형제 자매가 우애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그들의 관계를 느긋하고 경쾌한 관계로 만들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배려하기 때문이다. 유태인 출신의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잡지 편집인인 샤리버튼 형제의 우애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처음으로 가졌던 책은 누나와 형이 준 몇 권의 컬러북이었는데, 그는 나중에 '만약에 나를 다시 한 번 파리로 보내준다면 책을 사기 위하여 내 헌 옷을 팔아서라도 세느 강가를 헤매련만 ...'하고 술회했을 정도로 억척스러운 책 수집광이 되었다. 유태인들은 자식들이 각자 개성에 따라 성장하는 한편,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평생 유지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형제간의 두뇌와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각기 개성이 다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마저 자르는 결과는 낳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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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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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禮가 일상이 된 대한민국
[趙甲濟의 조용한 잔소리] 無禮가 일상이 된 대한민국 대통령이 나서서 무례를 시범하는 나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汎사회적으로 사라진 곳, 無禮가 국가경쟁력을 깎아먹는 나라. 이렇게 예의를 모르는 인간집단이…
[趙甲濟의 조용한 잔소리] 無禮가 일상이 된 대한민국 대통령이 나서서 무례를 시범하는 나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汎사회적으로 사라진 곳, 無禮가 국가경쟁력을 깎아먹는 나라. 이렇게 예의를 모르는 인간집단이 一流국가를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승객들. 지난 4월5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내 체육경기장에서 「심수봉 콘서트」가 열렸다. 두 시간 동안 熱唱(열창)한 심수봉씨가 『마지막 노래를 보내드리겠습니다』고 말하고 노래를 부르자 수백 명이 일어나 出口(출구) 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출구가 많고 주차장이 넓어 빨리 나갈 이유가 없었다. 심수봉씨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저들이 내 노래를 지루하게 느끼면서 들었다」고 오해했을지 모른다. 그날 심씨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그때 그 사람」, 「나는 여자이니까」 등을 정말 잘 불렀고 관중의 반응도 좋았다. 마지막 노래가 끝나자 앵콜 요청이 나왔고, 심씨는 두 곡을 더 불렀다. 마지막 노래인 줄 알고 먼저 일어서 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앵콜 송을 들었다. 20년 전 파바로티가 이곳에서 공연했을 때는 노래를 부르는 그를 향해서 플래시를 터뜨리면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았다. 주최 측에서 『제발 사진을 찍지 말아 주세요』라고 호소했고, 노래가 잠시 중단되었다. 지난 2월25일 국회 앞에서 있었던 李明博(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한 기업인은 이런 불평을 했다. 『李대통령의 연설이 끝나고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연주될 때 청중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면서 「야, 가자!」 하니까 주변 사람들의 3분의 1이 나가버렸다. 유세장에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연설을 한 뒤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단상에서 각국의 축하사절들이 이걸 보고 한국인들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李대통령은 선진화를 강조했지만 지도층의 예절이 이 정도라면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의 없는 국민들이 一流국가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KTX 특실에서 만난 네 사람 지난 2월23일 밤 9시30분에 부산역을 출발한 KTX 특실에 올랐다. 출발하자마자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실내에선 전화를 걸지 맙시다』고 호소하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동대구역에서 20세 전후의 여자 두 사람이 올라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한 여자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전역까지 가는 동안 쉬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내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친구한테 『좀 조용히 하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전화 말소리는 다소 약해졌지만 통화는 끊지 않았다. 열차에서는 객실 바깥으로 나가서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저 나이에 특실을 탈 정도면 수입이 많은 직장에 다니든지 父母(부모)가 부자일 것이다. 다행히 두 여자는 대전역에서 내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40代 후반으로 보이는 뚱뚱한 여성 두 사람이 탔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실내가 쩡쩡 울렸다. 그 큰 목소리로 휴대전화를 걸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완전히 교정 불능의 수준이었다. 聲帶(성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목소리를 작게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목소리가 크다고 한 번도 경고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기고만장 그 자체였다. 야간열차여서 승객들은 대부분 잠을 자고 있었다. 두 여성의 목소리는 열차 객실 끝에서 끝까지 들렸다. 충고도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저 수준이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 다행히 두 여성은 천안역에서 내렸다. 이날의 문제적 인물 네 사람은 남한테 폐를 끼치고도 폐를 끼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런 어머니는 그런 20代 딸을 만들 것이다. 지난해 6월 후쿠오카의 하카타역에서 신칸센(新幹線)을 타고 혼슈의 남쪽 야마구치縣(현)의 아사에서 내려 나가토로 가는 支線(지선) 기차로 갈아탔다. 운전사 한 사람이 움직이는 한 輛(량)짜리 원맨 카였다. 승객은 거의가 통학하는 중학생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들을 한 시간 동안 관찰해 보았다. 12명 중 책 읽는 학생이 8명, 조는 학생이 3명, 한두 명은 휴대전화기를 열고 이리저리 누르기만 했다. 한 시간 동안 지켜보아도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야기도 조용조용하게 했다. 잠을 자는 학생도 단정하게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본식 예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현장이었다. 불법주차 지난해 12월 말 일요일 오후 경기도 안성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한남대교와 1호 터널을 지나 을지로로 진입하는 데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을지로로 들어섰으나 시청광장을 지나는 데 30분을 더 停滯(정체)했다. 교통체증의 원인은 서울시청 광장 주변의 不法(불법)주차였다. 광장에 마련된 스케이트장을 찾는 청소년들을 태우고 온 차들이 광장을 삥 둘러 두 車線(차선)을 차지한 채 서 있었다. 경찰이 이런 不法주차를 일시적으로 허용한 것인지, 아니면 집단 不法에 경찰이 손을 들고 말았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한심한 시민이고 경찰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 자녀들에게만 즐거움과 편안함을 선사하겠다는 마음 아닌가? 지난여름에 일본 시모노세키의 뒷골목을 한 시간 동안 걸어다녔다. 한국의 거리풍경과 다른 모습이 하나 있었다. 거리에 자동차를 세워놓은 모습이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모든 집이 주차장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마당이나 건물 속을 주차장으로 내어놓고 있었다. 좁은 길임에도 마음 놓고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구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 오피스텔 빌딩 복도 벽엔 이런 요지의 告知文(고지문)이 붙어 있다. <밤중에 술에 취해서 고층의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구토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토물이 강한 酸性(산성)이고, 벽을 타고 내리면서 더럽힌 것은 청소하기도 어렵습니다. 부디 화장실에서 구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오피스빌딩 엘리베이터 안 스크린에는 이런 당부의 말씀이 나온다. <문을 열고 깡통이나 병을 바깥으로 던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20층에서 아래로 물건을 던지는 것을 자제해 달라니? 금지해 달라고 해야 할 것을 어중간하게 표현한다. 교통방송을 들어보면 「통행금지」를 의미하는 데도 「통제」라고 말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분명히 하는 것을 죄송스러워하는 당무자가 있는 한 행패 전문가를 막을 순 없다. 지난 6월 일본의 혼슈 남단 야마구치縣의 新야마구치역에서 하카타(후쿠오카)로 가는 新幹線 열차를 타자마자 화장실을 찾았다.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깨끗했다. 종착역에 가까이 왔으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 지저분할 텐테 출발역인 것처럼 청결했다. 나는 KTX 열차를 자주 탄다. 특실 화장실도 출발해서 몇 정거장 지나면 지저분해진다. 승객들도 함부로 화장실을 이용하고 열차 관리자들도 청소를 소홀히 한다. 화장실이 그 모양이니 KTX 전체가 불결해 보인다. 일본의 新幹線보다 40년 늦게 개통했으면 모든 면에서 더 좋아야 한다. 定時 출발률이 더 높아야 하고 더 깨끗하고 더 편해야 한다. KTX는 7~10분 연발착이 보통이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같지 않다. 新幹線은 全구간의 1년분 연발착 시간을 다 모아도 한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화장실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종업원들의 정성, 서비스 정신의 문제다. 그러니 더 창피한 일이 아닌가? 할 수 있는 일을 게을러서 안하는 것이니 더 문제인 것이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KTX 특실을 이용하는 이들은 한국의 지도층일 것이다. 그들이 화장실을 깨끗이 이용할 줄 모른다면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까지 올라도 一流국가가 될 수 없다. 여행을 많이 해보니 一流국가의 특징이 이렇게 잡힌다. 1. 화장실이 깨끗하다. 2.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다(일본의 경우 텔레비전 뉴스 앵커들의 목소리가 특히 낮다). 3. 인물을 기리는 銅像(동상)과 기념관이 많다. 4. 사람들이 친절하면서도 절도가 있다. 5. 옷차림이 간소하다. 6. 일을 하는 모습이 즐겁게 보인다. 7. 보통국민들도 글을 잘 쓴다. 8. 경찰에 대드는 사람이 없고, 경찰도 듬직하고 친절하다. 선진국일수록 목소리가 낮다. 만원인 식당이 조용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댄다. 한국에선 목소리가 커야 제 몫을 찾아먹는 경우가 많다. 銃器(총기) 소지가 허용되는 미국에서 한국식으로 고함을 치다가는 총격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의 유적지에 가 보면 幕府(막부) 시절의 무사가 다이묘(大名)라고 불리는 領主(영주)한테 보고하는 장면을 모형으로 再現(재현)한 것을 보게 된다. 부하도 칼을 차고 보고하고 영주도 칼을 차고 보고받는다. 「이런 관계에선 허위보고가 어렵겠구나, 상관이라도 부하에게 함부로 인간적 모독을 주어선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악수와 같은 公衆(공중) 예절의 상당부분은 무장한 사회에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몸짓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영국·독일·일본 등 무사, 騎士(기사) 지배, 즉 군사문화가 지배했던 나라에서 공중도덕이 성숙해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일본 택시 기사 1975년 4월 어느 날 저녁 일본을 혼자서 여행하던 나는 유명한 해안 휴양지 아다미(熱海)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근처 여관에 들었다. 저녁을 먹을 겸 도시 구경에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여관으로 돌아가려는데 「아차」했다. 여관 이름을 기억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명함이나 성냥갑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우선 택시를 잡아 탔다. 『아다미에 여관이 몇 개 있습니까』 『400개입니다』 택시로 400개를 전부 뒤지다간 날이 샐 것 같았다. 택시 운전자에게 여관을 잊어버렸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말했다. 『같이 찾아봅시다. 그런데 역으로 돌아가서 거꾸로 내려옵시다』 택시기사는 역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오면서 골목을 누볐다. 여관마다 들렀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닌데요』 『혹시 바다가 보였습니까』 『기억이 안 나요』 이런 식으로 한 시간 정도 헤맨 끝에 눈에 익은 한 여관 앞에 닿았다. 내 여관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택시 기사도 『야, 참 잘 되었습니다』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요금도 더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첫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이 택시 기사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만큼 일본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은 그 택시 기사가 나에게 베풀어 준 好意(호의)는 몇 배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회사와 오랫동안 거래해 온 한 기업인은 『나는 일본이라면 세 단어가 생각 난다』고 말했다. 정직, 청결, 친절. 평소 생활이 청결하니 정직하고 친절한 것이다. 청결은 남에 대한 배려다. 친절의 표현이 청결이다. 청결하지 않은 음식점이 친절할 수는 없다. 청결은 형식이고 정직은 내용이다. 지난 1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 근방의 新치도세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다. 4박5일 동안 尙美會(상미회) 여행단을 태우고 다녔던 관광버스 운전기사는 30代의 말없는 사나이였다. 눈이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그렇게 부드럽게 달릴 수 없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暴雪(폭설)과 한파 속 장거리 운전을 해준 것이 고마워 여행객들이 헤어질 때 박수를 쳤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헤어졌던 운전사가 뛰어오더니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 尙美會 여행단을 찾았다. 버스를 주차장으로 몰고 가서 정리하다가 손님이 놓고 내린 물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운전사는 한 30분간 차를 몰고 가 車內(차내) 청소를 하다가 분실물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달려온 듯했다. 그가 내어놓은 것은 돋보기 안경이었다. 그때까지도 안경 주인은 버스에 놓고 내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2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한 여성이 버스 안에 막 구입한 화장품 세트를 놓고 내렸다. 버스 회사에 연락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한 평범한 일본인 운전기사의 정직과 친절은 수십 명의 한국인을 감동시켰다. 이런 친절이 국가경쟁력이다. 안경을 찾은 한국인은 자주 일본을 찾을 것이고, 화장품을 잃은 한국인은 이탈리아에 대한 險談(험담)을 열심히 하고 다닐 것이다. 일본 교수 부부의 친절 2004년 5월22일 나는 일행 19명과 함께 일본 가고시마에 있었다. 현직 일본인 교수 부부가 하루 종일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오후 늦게 그는 우리 일행을 가고시마 시내에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전세 버스에서 내리면서 두 시간 후에 버스가 그곳으로 오게 한 뒤 시내 구경에 나섰다. 일본인 교수 부부와는 작별 인사를 했다. 오후 6시 우리는 내렸던 장소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 두 시간 전에 헤어졌던 교수 부부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교수 부부는 우리 일행이 시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빠짐없이 재집합 장소에 모였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歸家(귀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교수 부부는 일부러 두 시간 동안 시내에 머물러 있다가 점검차 다시 들른 것이었다. 부부는 다시 헤어지면서 과자가 든 봉투를 선물로 주었다. 車中(차중)에서 이 과자를 나눴더니 1인당 하나씩 정확하게 스무 개였다. 생전 처음 만난 사이이고 다시 볼 일 없는 외국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가 습관화한 일본사람들이다. 알수록 무서워지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온천탕에 들어가면 시설이 간단한 데 놀란다. 샤워기가 앉은키와 같은 높이에 붙어 있어 서서 할 수 없다. 쪼그리고 앉아 몸에 먼저 비누칠을 한 다음 옆사람에게 물을 튀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샤워기 물을 머리에 뿌린다. 욕탕으로 들어올 때는 호텔방에서 가져온 얇은 수건 하나만 휴대할 수 있다. 이 수건이 특이하다. 때를 미는 데도 쓰고 몸을 닦는 데도 쓴다. 아주 얇은 데도 흡수성이 좋고 빨리 마른다. 한국의 공중 목욕탕에 들어가보면 한 사람이 평균 석 장 이상의 수건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일본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하나에 200엔 하는 일본 목욕탕 수건을 몇 장 선물로 사와서 나눠 준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 집 목욕탕의 많은 수건들 가운데 일본 수건이 끝까지 남게 된다. 2003년 말 일본의 시고쿠(四國: 막부 시대에 네 개의 藩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린다)에 있는 古都(고도) 高知(고치)의 400년 된 淸酒(청주) 공장을 방문했을 때다. 우리 여행단은 공장 구경을 끝내고 공장 간부와 인사를 한 뒤 골목에 세워 둔 버스에 올랐다. 인사를 끝낸 공장 간부가 갑자기 버스 앞을 지나 골목 입구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다른 차가 골목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 주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차내에서 우리는 『한국 같으면 인사한 뒤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을 터인데』라고 감탄했다. 보수가 먼저 깨끗해져야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선 이후 차관으로 승진한 K씨와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식사 중에 『車가 있느냐』고 했더니 『공무원 생활 중에 처음으로 車가 나온다』고 했다. K차관은 강북의 허름한 빌라에서 약 20년째 살고 있다. 한 끼당 1만원 이상인 식사는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후 8시30분쯤 청진동 골목으로 나와서 헤어졌는데, K씨는 모범택시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일반택시를 기다렸다가 타고 갔다. 자신의 관용차는 식사 전에 먼저 보냈다는 것이었다. 기업인들과 고관들 가운데는 저녁식사가 끝날 때까지 자가용 운전기사를 대기시켰다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식당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운전사들도 고역일 것이다. 80세를 훨씬 넘은 롯데의 辛格浩(신격호) 회장은 일본에 머물 때는 저녁 식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보내고 자신이 차를 몰고 歸家(귀가)한다고 한다. 보수세력이 나라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보수가 먼저 겸손해지고, 깨끗해지고, 그래야 용감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저녁에 운전기사를 일찍 퇴근시켜 주는 것도 작은 自淨(자정) 노력의 하나가 아닐까? 공자는 論語(논어)에서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갖지 않는 것보다는 부자가 겸손해지기가 더 쉽다』고 말했다. 일본 총리의 전화 예절 모리 요시로 前 일본 총리. 일본 前 총리 모리 요시로(森喜明)가 현직 때 일본 월간지 「文藝春秋(문예춘추)」와 인터뷰한 자리에서 자신의 전화 거는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비서를 통해서 전화를 거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내가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지요. 가끔 비서가 전화번호를 대신 눌러 주지만 상대방이 나오기 직전에 내가 전화기를 듭니다. 「총리께서 전화를 겁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안 됩니다. 제가 「모리입니다」라고 하면 상대방이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어느 모리 말씀입니까」하고 反問(반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총리대신 모리입니다」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해서 「모리라고 하면 알 겁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면 「회사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환수도 있어요. 그러면 제가 이러지요. 「회사 이름에 따라 연결해 줄 수도 있고 연결 안 해 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라고 따지면 그쪽이 당황하지요. 「어쨌든 연결시켜 준다면 귀하가 곤란할 일은 없을 거요」라고 달래지요. 「총리 모리입니다」란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하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집도 가끔 늦은 밤에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번호를 착각한 경우가 많다. 『번호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해 주면 『어이쿠,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끊는 사람이 10명 중 한두 사람이다. 『나는 피시를 먹어야 해』 태국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식사 시간, 50代 남자가 스튜어디스를 향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나는 피시(fish)를 먹어야 해』 스튜어디스는 울상이 되어 사과했다. 『손님, 피시는 다 나가고 치킨만 남았습니다』 『그건 당신네들 사정이야 나는 꼭 피시를 먹어야 해』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정말 죄송해요』 『난 무조건 피시를 먹어야 해. 치킨은 싫단 말이야』 그는 골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피시를 달라』는 투정이 계속되자 옆자리에 앉았던 한 60代 남자가 말했다. 『저하고 바꿉시다. 제가 치킨을 먹을테니 이걸 드세요』 그는 아직 숟가락을 대지 않은 피시를 건네주었다. 그 50代는 인사 한마디 없이 피시를 받아 열심히 먹고 있었다. 1990년대 초 한국의 한 장관이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싱가포르行 여객기 1등석을 탔다. 싱가포르 항공이었다. 곧 눈에 익은 사람이 올랐다. 李光耀(이광요) 당시 싱가포르 총리였다. 그는 1등석 맨 앞자리에 앉았다. 1등석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줄로 친다. 그는 다른 승객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다. 李총리 비서관이 한 자리 건너 옆에 앉았을 뿐이다. 총리는 비행 도중 일어나 몸을 푸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식사 시간에 승무원들은 李光耀 총리를 맨 나중에 대접했다. 後食(후식)으로 케이크가 나왔다. 李光耀 총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남은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먹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한국 장관이 승무원에게 물었다. 『당신네들의 총리를 그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고. 승무원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총리께서 그렇게 해주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 항공에서는 李 총리가 주인인데, 주인이 맨 나중에 대접을 받아야지요』 1988년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李光耀 총리는 싱가포르가 청결한 것은 시민 덕분이 아니라 청소부들이 매일 열심히 치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랫동안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고, 학생들에게도 철저히 교육을 했지요.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싱가포르 화폐로 500달러(미화 200달러 상당)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광고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벌금을 내는 사람은 없고, 단지 명목적인 액수만 납부하게 되지만 단속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환경청 장관이 청소부들에게 거리 청소를 중단시켜 보았더니 온 거리가 하루 만에 지저분해졌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싱가포르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고 청소부들이 매일 열심히 쓰레기를 치우기 때문이란 사실이 밝혀졌지요』 『감시자가 많아야 예절이 선다』 李光耀 前 싱가포르 총리. 일본은 그렇지 않지만 독일·영국에선 시민들의 고발정신이 나라를 질서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국인들은 불법을 보고도 지나치는 것은 공범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독일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했던 P씨의 경험담이다. 독일의 한 도시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한 승용차가 계속 따라왔다. 호텔 앞에 택시가 멈추니 그 승용차도 멈췄다. 운전사가 내려 다가오더니 택시 운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횡단보도 신호를 위반했어요. 주의를 주려 했는데, 손님이 타고 있어 내릴 때까지 따라 온 거예요』 한국인들은 아는 사람들한테는 매우 친절하다. 친절이 지나쳐 過恭非禮(과공비례)일 경우가 허다하다. 집회에 참석해 보면 사회자가 內賓(내빈)을 소개하는 데 30분이 걸리기도 한다. 참석자의 반이 내빈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참석자로 소개 받은 뒤엔 곧 자리를 뜨는 이들도 많다.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무례와 아는 사람들끼리의 過恭非禮가 한국식 예절의 이중성이다. 주자학은 예절을 강조했지만 家門(가문)을 떠난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에 대해선 의외로 관심이 적었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나서서 국민예절을 강조하면 「그건 維新(유신)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예절 강조는 사소한 것이거나 민주주의에 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1년 취임사에서 예절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예절이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세력은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므로 자연히 예절을 중시한다. <우리를 단결시켜 온 것은 혈통이나 가문이나 토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단결시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출신 배경과 이해관계를 초월하게 하며, 미국 시민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理想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국민은 이 원칙들을 존중해야 하며 모든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이 이상들을 받아들여, 이 나라를 덜 미국적이 아니라 더 미국적인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절과 용기와 동포애와 인격을 가지고 국민적 약속을 지켜나갈 것임을 새롭게 다짐합니다. 예절을 지키면서 원칙을 지키는 나라가 이상적인 미국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선의와 존경, 공정함과 용서를 가지고 대할 때 예절 바른 사회가 이룩됩니다> 한국에선 문민, 좌파 대통령들이 앞장서서 예절감각을 파괴했다. 대통령들의 의리 없고, 무식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언행들과 일상적으로 접해 온 국민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닮아 갔을 것이다. 특히 대통령의 언행을 자연스럽게 행동의 한 기준으로 삼게 되는 젊은이들은 敎養語(교양어)와 예절 바른 행동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인간의 집단 무의식은 그 사회의 담론이다. 한 사회가 쏟아 내는 말들, 대통령과 언론의 말들, 정치인과 지식인의 말들, 식탁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인간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이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잔소리가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 10명의 대통령 가운데 한국적 예절감각이 가장 투철했던 이가 李承晩·朴正熙였고, 가장 무례했던 이가 盧武鉉이었다. 朴正熙는 청와대 보일러공한테도 존칭을 썼다. 약속한 이발 시간이 늦을 것 같으면 회의 도중 이발사한테 달려와 『미안하다. 좀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이였다. 私信에선 절대로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고 「朴正熙 拜」라고만 썼다. 盧武鉉 의원은 1989년 12월31일 국회에서 증언하러 나온 全斗煥 前 대통령 쪽을 향해서 명패를 던졌다. 한국인의 비뚤어진 예절감각은 이런 만행을 「민주화의 義擧」 정도로 귀엽게 보아 주었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런 나라에서 교양과 예절을 강조하는 것은 激流(격류)에 돌멩이를 던져 둑을 쌓으려는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무례한 자는 응징을 당하고 교양인이 출세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잔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국 戰國시대의 管仲(관중)이 말했듯이 「곳간이 차면 사람은 결국 염치를 알게 된다」. 잔소리는 그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미니기사] 해외여행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 이들은 독일인 2007년 세계에서 해외여행을 한 사람은 8억9800만 명이었다. 지난 57년간 해외여행객 수는 연간 6.5%씩 증가했다. 세계 각국이 관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연간 약 7330억 달러다. 2020년에 가면 해외여행객 수가 16억 명에 달할 것이라 한다. 중국인 해외여행객은 약 1억 명에 달해 이 부문에서도 세계 1위가 될 것이다. 2007년에는 약 4090만 명의 중국인이 해외여행을 위해 출국했다. 한국인은 1300만 명이 나갔다. 중국인 해외여행객의 약 71%는 홍콩과 마카오行이다.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나라는 프랑스로 연간 7910만 명이다. 두 번째는 스페인 5850만 명, 3위는 미국 5110만 명, 4위는 중국 4960만 명이었다(2006년 기준). 세계에서 관광 수입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으로 857억 달러, 이어서 스페인 511억 달러, 프랑스 429억 달러, 이탈리아 381억 달러, 중국 339억 달러, 영국 337억 달러, 독일 328억 달러, 호주 178억 달러, 터키 169억 달러, 오스트리아가 167억 달러로 10위다. 해외여행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나라는 독일이다. 2004년 기준 독일인들은 710억 달러를 해외여행에 썼다. 2위는 미국으로 665억 달러, 3위는 영국 559억 달러, 일본 381억 달러, 프랑스 286억 달러, 이탈리아 205억 달러, 중국 191억 달러, 네덜란드 164억 달러, 캐나다 160억 달러, 러시아가 10위로 157억 달러를 썼다. 한국은 16위였다. ● (趙甲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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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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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물 치료 건강법
신비한 물 치료 건강법 F. 뱃맨겔리지 지음 중앙생활사 / 2014년 9월 / 324쪽 / 14,000원 ▣ 저자 F. 뱃맨겔리지 물의 자연치유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저명한 주창자이자 연구가이며 저술가인 저자는 1931년 이란에서 출생했으며, 런던 대학…
신비한 물 치료 건강법 F. 뱃맨겔리지 지음 중앙생활사 / 2014년 9월 / 324쪽 / 14,000원 ▣ 저자 F. 뱃맨겔리지 물의 자연치유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저명한 주창자이자 연구가이며 저술가인 저자는 1931년 이란에서 출생했으며, 런던 대학교 세인트메리병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란으로 귀국한 후 병원과 의료센터의 발전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1979년 이란혁명의 정치범이 되어 악명 높은 에빈교도소에서 2년 7개월을 복역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물의 치유력을 발견하였다. 어느 날 밤, 저자는 위궤양 통증으로 꼼짝할 수 없는 동료 수감자를 물 두 잔으로 처방하였다. 그 계기로 각종 통증으로 고통받는 동료 수감자 3,000명을 단지 물만으로 완쾌시켰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고통스러운 퇴행성 질병들을 예방하고 완화해주는 물의 의약적 효능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고, 그 연구 성과는 《임상위장병학저널》, 《뉴욕타임스》 등에 게재되었다. 1982년 석방되자 곧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단순의학재단’에서 탈수가 인체에 끼치는 효과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연구 성과들은 《단순의학저널》에 발표되었고, 수백 차례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물의 치유력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물, 치료의 핵심이다』, 『자연이 주는 최상의 약, 물』 외 다수가 있다. ▣ 역자 이수령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과학교육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교육 현장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역자는 중동중학교 과학교사를 거쳐 현재 중동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재직 중이다. ▣ Short Summary 우리 인체는 70%가 물이며, 특히 뇌는 85%가 물로 되어 있다. 또한 체내 수분이 1~2%만 부족해도 갈증을 느끼며,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어떤 건강식품보다도 중요한 것이 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곤 한다. 그 이유는 현대의학이 기초하는 과학적 토대가 많은 그릇된 가정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질병을 부르는 탈수를 방치하게 하는 그릇된 과학적 가정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증 그리고 암이 원인이 되는 합병증은 지속적인 탈수 때문에 야기된다는 것을 소개한다. 또한 물의 자연치유력을 이용하면 우울증, 비만, 암, 당뇨병, 천식, 요통, 변비, 심장마비, 뇌졸중, 주의력결핍장애, 스트레스, 불면증, 피부노화, 백혈병, 월경불순, 발기부전,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루게릭병 등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음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평균적인 인체는 하루에 3.8L의 물이 필요한데, 그중 1.9L는 물의 형태로, 나머지는 물질대사와 음식에 함유된 수분에서 공급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8시간 수면 동안 소실된 수분을 보충하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적어도 두 잔의 물을 마셔야 하고, 또 식사 30분 전에 한두 잔을 마셔 음식을 섭취하기 전에 물이 조절 공정을 준비할 시간을 갖게 해야 하며, 식사를 하고 2시간~2시간 30분이 지난 후 섭취한 음식량에 따라 물 240~360cc를 마실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포만호르몬을 자극해서 소화관의 소화 공정을 마무리 짓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어떤 신체적 활동, 예를 들어 산책 또는 땀을 흘리게 하는 격렬한 운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물을 마셔야 한다고 강조한다. ▣ 차례 머리말 / 의사와 환자를 위한 타운센드 서한 1부 비만과 물 왜 살이 찔까 비만의 가장 큰 원인은 탈수 / 질병을 부르는 탈수 / 첫 번째 그릇된 가정 두 번째 그릇된 가정 / 세 번째 그릇된 가정 / 네 번째 그릇된 가정 왜 반드시 물이어야 할까 알코올성 음료수, 무엇이 문제인가 / 카페인 함유 음료수의 문제점 / 카페인은 마약 카페인은 식물의 독 / 비만의 적, 다이어트 음료 /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생명을 주는 물 이야기 몸에 에너지를 불러오는 물 / 뇌는 늘 목말라 한다 탈수는 비만과 어떤 관계일까 과식을 부르는 목마름 / 지방을 녹여내는 물 / 살찌는 사람에게 물은 천연 치료제 물, 비타민, 미네랄로 체중을 줄인다 / 뇌가 배부름을 느끼게 하려면 물 치료로 새 삶을 찾은 사람들 / 물 치료로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 / 당뇨병을 부르는 비만 2부 우울증과 물 우울증과 물은 어떤 관계일까 몸이 보내는 탈수 신호 / 우울증이란 물, 자연이 선사한 항우울제 / 물 치료로 우울증을 잡은 사람들 3부 암과 물 왜 하필이면 나여야만 하는가 암은 무엇인가 / DNA 손상, 암에 걸리는 필요조건 / DNA 손상을 일으키는 탈수 수용기 손상을 가져오는 탈수 / 면역 시스템을 억압하는 탈수 / 만성적 탈수는 암의 일차 범인 암에서 해방되려면 / 탈수되었을 때 피부의 혈액순환 / 물 치료로 암에서 탈출한 사람들 유방암에서 해방된 데이 박사 / 유방암에서 종양의 성장을 촉진하는 탈수 스트레스 호르몬과 탈수는 어떤 관계일까 우울증과 유방암의 관련성 / 물 치료가 동물에게도 효과가 있나 4부 자연 치료와 물 탈수가 야기한 질병을 치료하는 이상적인 식단 얼마나 많은 물을 언제 마셔야 할까 / 탈수의 합병증을 바로잡으려면 비만, 우울, 암의 예방과 치료에 물이 왜 긴요한가 / 물은 몸에 가장 중요한 영양소 혈액은 붉은 물이다 /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 물 미네랄은 필수불가결한 요소 인체에 미네랄이 있는 이유 / 필수미네랄의 기능적 중요성 / 소금, 불후의 명약 소금이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 / 소금을 얼마나 먹어야 하나 단백질, 에너지, 운동 달걀, 나쁜 콜레스테롤은 없다 / 고급 단백질, 유제품 / 효율적인 에너지원, 지방 매일 필요한 과일과 채소 그리고 햇빛 / 삶의 질을 높이는 운동 / 내게 가장 좋은 운동은 신비한 물 치료 건강법 F. 뱃맨겔리지 지음 중앙생활사 / 2014년 9월 / 324쪽 / 14,000원 비만과 물 왜 살이 찔까 비만의 가장 큰 원인은 탈수: 비만과 우울, 우울과 암 사이에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흔히 우울한 사람은 과식하는 경향이 있으며, 우울은 암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데 비만과 우울증, 암이 원인이 되는 합병증과 사망은 지속적인 탈수 때문에 야기된다. 이제 탈수가 어떻게 몸 안에서 암을 유발하는지 알고 싶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탈수는 인체 내의 정상적인 생리적 기능에서 다면적인 교란을 초래하는데, 이 교란 때문에 암이 발생한다. 질병을 부르는 탈수: 사람들은 왜 질병을 부르는 탈수를 방치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현대의학이 기초하는 과학적 토대가 많은 그릇된 가정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운 과학적 가정, 즉 사회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가정 그리고 사람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 부지불식간에 삶의 종착역을 향한 제약산업의 열차에 떼 지어 몸을 싣게 만드는 가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그릇된 가정 - “목마름이 인체 내 탈수의 유일한 신호다.”] 인체는 목마름 징후를 나타내지 않고도 세포 내부에서 격심한 탈수를 겪을 수 있다. 몸 안에 수분이 부족하면 부족분의 66%는 세포 안에서 뽑아내고, 26%는 세포 주위 환경에서 끌어낸다. 나머지 8%만이 혈액에서 소실된다. 그렇지만 혈액순환에서 수분 소실을 보충하려고 모세혈관그물이 압축되며, 광범위한 분배망을 점차 수축시킨다. 참고로 인체에 있는 물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삼투압과 관련된 물로, 이 종류의 물은 자유롭지 못해 새로운 활동에 관여할 수 없다. 다른 유형의 물은 삼투압과 관련되지 않아 자유로운데, 이 부류의 물은 자유로운 물을 필요로 하는 인체의 새로운 화학반응과 중요한 활동에 관여한다. 예컨대 자유로운 물은 세포 내부에 들어가 영구적 손상이 발생하기 전에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한다. 내가 탈수를 말할 때 실제 의미는 새로운 수분 의존적 기능을 수행할 자유로운 물이 인체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몸무게가 80kg인 당뇨병 환자는 조직 속에 물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세포 내부에는 자유로운 물이 부족하다. 순환하는 혈액의 당 수치 상승은 물이 혈당을 따라 세포 안으로 적절히 들어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삼투압을 증가시켜 세포 밖으로 더 많은 물을 끌어내기 위해 마련된 장치다. 이 때문에 당뇨병 환자에게는 치사(致死) 과정인 세포 내 탈수가 야기된다. [두 번째 그릇된 가정 - “물은 다른 물질들을 용해해서 순환시키고 공간을 채우는 단순한 불활성 물질일 뿐이다. 물은 인체의 생리적 기능에서 자체만의 어떠한 화학적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인체 내의 모든 화학적 작용은 물속에 용해된 고형 물질이 수행한다.”] 물은 단순한 불활성 물질이 아니다. 인체 내에서 물의 기능은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생명 유지 기능이다. 때로는 용매로, 때로는 인체 세포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충전물질로 그리고 혈류 안에서 또는 신경과 근육 속의 세류에서 운송 시스템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물의 더 중요한 기능은 생명 부여 또는 에너지 생성 작용이다. 물은 세포막에서 수력전기를 제조한다. 물은 음식물 소화와 가수분해로 알려진 화학반응에 관여하며, 이런 모든 기능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응집하는 성질로, 세포막의 고형 구조물을 부착하고, 세포 내부의 생명을 보호한다. 현대의학에서는 물의 생명 유지 성질만 인정한다. 이것이 만성적인 탈수가 부지불식간에 치명적인 과정이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이유다. 물 섭취가 줄어듦에 따라 인체 내의 생명 공정이 제한되어 쇠약해지는 패턴이 자리 잡는다. 따라서 건강과 생명을 자연적으로 구하는 공정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몸이 요구하는 것은 시기적절한 물 섭취뿐이다. 따라서 우리 몸이 요구하는 물 대신 값비싼 의약품을 복용하라고 전문용어로 지껄이는 제약산업의 장사꾼을 조심해야 한다. [세 번째 그릇된 가정 - “인체는 평생 수분 섭취를 효율적으로 조절한다.”] 이 가정 또한 옳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갈증감각을 상실한다. 그러면 물을 적절하게 마시지 못하여 핵심기관 안의 싱싱한 자두 같은 세포들이 말린 자두같이 되어 더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네 번째 그릇된 가정 - “어떠한 액체도 인체의 수분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따라서 제조된 음료수와 액체가 물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체를 만족시킨다.”] 이런 잘못된 인식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건강문제의 배경이다. 일부 제조된 음료수는 몸 안에서 천연의 물처럼 기능하지 않는다. 우유와 과일주스까지도 인체의 일상적인 수분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좋든 싫든, 유명 상표의 물이든 맹물이든 물맛에 익숙해져야 한다. 더 맛있다고 느끼는 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갈증과 탈수를 규칙적으로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울증과 물 우울증과 물은 어떤 관계일까 우울증이란: 뜨거운 계절에 바쁜 나머지 잔디에 물을 주지 못하면 잔디는 ‘갈변증(褐變症)’으로 죽는다. 처음에는 시들다가 노랗게 변한 다음 갈색이 된다. 우울증의 초기 단계는 뇌세포의 갈변증과 같다. 그것은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지 않은 것, 더 나쁘게는 물 대신에 카페인 함유 음료를 마신 결과인데, 카페인은 건조시키는 인자이며, 인체를 탈수시킨다. 뇌는 85%가 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도 필요로 한다. 우울증은 잔디가 갈색으로 시드는 단계와 똑같지만, 아직까지는 뇌세포를 파내고 유전자가 향상된 모델을 심을 수는 없다. 우리가 현재 가진 것으로 어떻게든 지내야 한다. 그러려면 물을 섭취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제약산업의 광고용 프로그램으로서의 정신의학에 깊게 물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천연 항우울제로서 물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려면, 물과 세로토닌 및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인자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인체는 인체의 조직과 기능을 조절하는 활성 전달인자를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을 제조하는데, 아미노산 가운데 10가지는 제조할 능력이 있으나 다른 10가지는 제조할 수 없으므로 외부에서 도입해야 한다. 뇌기능에 중요한 필수아미노산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히스티딘, 트립토판, 페닐알라닌, 메티오닌, 리신, 트레오닌, 발린, 아르기닌, 루신, 이소루신의 순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히스티딘은 신경전달물질인 히스타민(histamine)으로 변환되어 인체의 수분 조절과 자원 관리를 책임진다. 히스타민은 몸의 갈증감각을 작동시키고 수분 배급 프로그램을 조절하는데, 히스타민은 유년기와 노년기에 매우 많이 필요하므로 히스타민의 전구체인 히스티딘이 필수아미노산이 된다. 다발성 경화증 같은 신경학적 장애도 히스티딘 대사 불균형 때문에 야기되고, 정서적 문제도 히스타민이 수분을 조절하는 동안 행하는 과잉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 몸이 탈수될수록 수분이 맡던 생리적 기능을 히스타민이 더 많이 떠맡는데, 미네랄 펌프 또는 양이온 펌프를 가동하고 나트륨(세포 밖에 머물러야 한다)과 칼륨(강제적으로 세포 안으로 주입해야 한다)의 밸런스를 조절할 수분이 체내에 충분하지 못할 때에는 히스타민이 단백질 펌프에 시동을 걸 에너지 방출을 자극하며, 뇌에서는 아주 중요한 세포 환경의 삼투압 평형을 가져온다. 인체에 수분이 부족할 때 히스타민 없이는 뇌기능이 효율적이지 않다. 뇌가 오랫동안 물의 기능 대체물로 히스타민에 의존하는 것 또한 효율적이지 못하다. 본질적으로 물의 부작위로 야기된 비효율적인 뇌 생리 상태가 바로 우울증이다. 내 생각에 히스타민의 인체 내 작용은 물이 충분히 공급되어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때까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 자체가 더 나은 천연의 항히스타민제가 되므로 항히스타민약의 사용은 범죄행위다. 한편 필수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은 적어도 네 가지 신경전달물질과 세 가지 호르몬, 로토닌, 트립타민, 인돌라민, 멜라토닌으로 변환된다. 한 가지는 세로토닌 생산 세포에 특이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뇌에 전반적으로 분포한 두 가지 효소가 이 변환 과정에서 트립토판에 작용한다. 자연은 뇌가 인체의 모든 감각과 기능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아미노산으로 트립토판을 선택했다. 세로토닌은 인체 생리를 묵묵히 조절하는 많은 기능에 필요한 핵심적인 화학물질이다. 바로 이것이 정상적인 생리적 조건에서라면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세로토닌 양의 부족 정도가 우울증을 인증할 표지가 되는 이유다. 한편 트립토판을 세로토닌으로 변환시키는 뇌세포는 트립토판이 도착하는 동시에 그 변환기능을 수행하는 능력이 있다. 이들 뇌세포는 트립토판 자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로토닌을 소포(小胞, vesicle)에 저장하며, 심지어 이들 소포를 신경이 운송 시스템에 실어 궤도를 따라 신경종말로 보내 신경이 자극을 받을 때 사용하게 한다. 따라서 트립토판이 신경세포에 전달될 수 없을 때에만 우울증에서 볼 수 있는 신경계의 낮은 세로토닌 수준이 야기된다. 물, 자연이 선사한 항우울제: 트립토판이 세로토닌으로 직접 변환하는 것을 돕기 위해 물은 직ㆍ간접적으로 뇌조직으로 흘러가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비율을 유지한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① 인체가 탈수되어 체내 독성 노폐물과 세포 내 산(酸) 체증을 제거할 적절한 소변을 생산할 수 없을 때 산을 중화하고 인체를 알칼리 상태로 만들기 위해 일부 아미노산이 희생되며, 이것이 인체의 정상적인 생리기능이다. 여기에 보통 사용되는 용어는 항산화제다. 인체 내 화학의 산-알칼리 평형을 정상 범위에서 유지하려는 시도에서 트립토판과 티로신, 시스테인, 메티오닌 등이 모두 희생당한다. ② 무색 소변을 생산할 정도로 물을 충분히 마시면 결과적으로 초과 산(酸)을 인체 밖으로 씻어내 자동적으로 필수아미노산을 보존하게 해주어 인체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 따라서 물 섭취와 더불어 일어날 적절한 소변 생산이 우울증의 주요 방패가 된다. ③ 뇌로 들어가 뇌세포에 도달해야 할 모든 요소는 특수한 운송자 시스템에 실려 운송되어야 한다. 이들 운송자 시스템은 요소에 따라 특이성이 있는데, 트립토판은 다섯 가지 다른 아미노산(발린, 루신, 리소루신, 페닐알라닌, 티로신)과 운송자 시스템을 공유한다. 트립토판이 혈액뇌장벽(BBB, blood-brain barrier)을 통과할 비율은 혈액순환 속에 있는 이들 다섯 가지 아미노산의 농도에 달려 있다. ④ 굶주림과 탈수, 운동 부족 시 혈액 속의 발린과 루신, 이소루신의 농도가 상승한다. 이것이 BBB를 통과하기 위해 트립토판이 이용할 운송자 시스템을 감소시킨다. 그리하여 뇌에서 이용 가능한 트립토판을 점차 소모시킨다. 탈수와 운동 부족이 생활방식으로 굳으면 뇌의 세로토닌 수준은 저하된다. ⑤ 발린과 루신, 이소루신은 생성물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뇌나 인체 내 근육조직에서 사용될 에너지가 실린 아미노산이다. 운동을 하면 근육조직이 이 아미노산을 혈액순환에서 걷어내 중간 생성물을 만든 다음, 간이 공정을 완료하여 뇌가 사용할 혈당을 만든다. 근육이 이 아미노산을 순환하는 혈액에서 걷어낸 결과 트립토판은 운송자 시스템상의 증가된 공간을 타고 혈액순환계의 뇌 쪽에 도달할 수 있다. ⑥ 동일한 방식으로 티로신이 혈액순환계의 뇌 쪽으로 이송되는 비율이 증가하며, 뇌에서 동기부여와 목적의식을 증진하기 위한 세로토닌 활성을 보완하는 도파민 농도를 증강시킨다. 따라서 적절한 운동은 뇌의 세로토닌 수준을 보충하고 우울증을 벗어나게 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⑦ 간략히 말해 트립토판은 열에 극히 민감하다. 물은 세포막에서 높은 활성 열을 생산하여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혈액뇌장벽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행해진다. 이 국소적인 열이 트립토판을 자극한다. 트립토판은 혈액 속의 운송자 단백질을 떠나서 더 잘 수화된 뇌의 모세혈관벽에 있는 다른 운송자 시스템에 가서 붙고, 모세혈관벽에 있는 새로운 운송자 시스템이 트립토판을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뇌에 전달하는데, 트립토판은 뇌에서 세로토닌과 멜라토닌, 트립타민, 인돌라민으로 변환된다. 물은 간단하게 국소적 열을 발생시켜 트립토판이 뇌 속으로 더 신속히 이동하게 해주고, 또 트립토판이 뇌세포로 들어가도록 돕는 간접 효과가 있다. 따라서 물은 천연 우울증 약이다. 질병을 예방하려면 탈수가 인체 세포 내부에서 자리 잡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자연 치료와 물 탈수가 야기한 질병을 치료하는 이상적인 식단 만성적 탈수는 많은 징후와 신호를 나타내고 결국 퇴행성 질병을 야기하는데, 최근에는 일부 정형화된 혈액검사로 징후 일부를 구분하고 묶어서 루프스와 다발성 경화증, 근육영양실조, 인슐린 의존성 당뇨병 같은 자가면역질환으로 부른다. 내가 보기에 대다수의 고통스러운 퇴행성 질병은 유형이 서로 다른 국소적 또는 지역적 갈수 상태다. 따라서 갈수와 갈수에 의한 대사합병증을 바로잡으려면 탈수의 손상이 광대한 것이 아닌 한 그 문제가 치료될 것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이제 탈수가 초래한 모든 상태를 치료할 방법이 동일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치료 프로그램의 첫 조치는 매일 물 섭취량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상향조정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탈수는 또한 인체에 저장된 비축분으로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일부 요소의 불균형적 소실도 초래한다. 따라서 당연히 이상적인 치료지침에는 관련된 대사장애를 적절하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도 포함된다. 간략히 말해 탈수가 낳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물의 결핍이 인체의 일부 조직에 강요하는 이차적 결핍을 바로잡는 것도 포함된다. 얼마나 많은 물을 언제 마셔야 할까: 인체는 소변과 호흡, 땀으로 배출되는 자연적인 수분 소실을 보충하기 위해 하루에 1.9L 이상의 물과 약간의 소금을 필요로 한다. 그 이하는 신장에 부담을 주는데, 신장은 소변을 농축하여 적은 물로 가능한 한 많은 화학적 독성 노폐물을 배설하려고 그만큼 더 애를 써야 한다. 바로 이 공정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주 단축된 인생 말년에 투석을 필요로 하는지를 설명한다. 대체로 평균적인 인체는 하루에 3.8L의 물이 필요한데, 그중 1.9L는 물의 형태로 공급되고, 나머지는 물질대사와 음식에 함유된 수분에서 공급된다. 즉 인체에는 대략 소변 1.9L(잘 수화된 사람의 밝은 색깔의 소변)를 생산하기 위해 3.8L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체격이 큰 사람은 하루에 체중 450g당 14.8cc의 물을 마셔야 한다. 그리고 갈증이 날 때에는 언제든, 심지어 식사 중에도 물을 섭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식사 중의 물 섭취는 소화 공정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식사 중 탈수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8시간 수면 동안 소실된 수분을 보충하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적어도 두 잔의 물을 마셔야 하는데, 바로 이때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물 섭취 시간이다. 또 식사 30분 전에 한두 잔을 마셔 음식을 섭취하기 전에 물이 조절 공정을 준비할 시간을 갖게 해야 하는데, 식사 전에 물을 마시면 소화관의 많은 문제, 즉 더부룩함과 흉통, 대장염, 변비, 게실염, 크론병, 열공탈장, 소화관의 암, 체중 증가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2시간~2시간 30분이 지난 후 섭취한 음식량에 따라 물 240~360cc를 마실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포만호르몬을 자극해서 소화관의 소화 공정을 마무리 짓는다. 또 이 물은 이미 섭취한 음식 소화 완료 단계에서 물을 더 갈망할 때 공복으로 느끼게 되는 감각을 경험하지 않게 막아준다. 인체에 갈수를 피하려면 규칙적인 간격으로 물을 섭취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신체적 활동, 예를 들어 산책 또는 땀을 흘리게 하는 격렬한 운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물을 마셔야 한다. 탈수의 합병증을 바로잡으려면: 탈수로 야기된 모든 장애를 바로잡으려면 반드시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물 치료 프로그램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① 충분한 물과 소금 섭취 ② 규칙적인 운동 ③ 많은 종류의 과일과 채소, 세포막과 호르몬과 신경절연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방과 풍부한 미네랄을 포함하여 균형 있게 짠 식단(콜레스테롤 고민은 버려야 한다.) ④ 카페인과 알코올 배제 ⑤ 스트레스가 많은 사념을 해독할 명상 ⑥ 인공감미료 배제 비만, 우울, 암의 예방과 치료에 물이 왜 긴요한가: 인체에서 물의 주요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① 물은 면역 시스템의 핵심인 혈구세포를 순환시키기 위한 운송수단이다. ② 물은 인체 세포를 싱싱한 자두 같은 상태로 유지하는 산소와 미네랄을 포함한 필수물질을 위한 용매다. ③ 물은 인체의 공간을 채우는 충전물질이다. ④ 물은 세포막이나 세포 주위에 보호 장벽을 형성해 세포의 고형 부분을 결합시키는 접착제다. 탈수 시 이 임무는 콜레스테롤에게 넘어간다. ⑤ 뇌와 신경의 신경전달 시스템은 신경 전체에 걸쳐 있는 신경세포막 안팎의 나트륨과 칼륨의 신속한 움직임에 달려 있는데, 다른 어떤 것에도 부착되지 않아 매이지 않은 물은 세포막을 자유롭게 통과하여 ‘원소이동’ 펌프를 돌릴 수 있다. ⑥ 원소이동 펌프의 일부가 전압 발생 펌프다. 따라서 신경전달 시스템의 효율성은 신경조직에 있는 자유롭고 매이지 않은 물의 이용 가능 정도에 달려 있다. 참고로 세포로 들어가려는 물의 삼투압에서 물이 세포로 칼륨을 밀어 넣고 나트륨을 세포 밖으로 끌어내는 펌프 단위를 회전시킴으로써 에너지를 발생시키는데, 이는 수력발전용 댐에서 터빈을 돌려 수력전기를 만드는 것과 같다. ⑦ 하나의 세포막에는 두 개의 층이 있는데, 두 층 사이에는 물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수로가 있어 외부 메시지는 대부분 그 안에서 처리된다. 그런데 탈수 시에는 수로의 효소활동 효율성이 저하되고 세포의 본래 기능이 활력을 잃는데, 이렇게 되면 세포막에서는 그 이상 탈수를 막기 위해 콜레스테롤을 사용한다. ⑧ 물은 인체의 에너지와 삼투압 균형을 조절하는 중심 인자다. 나트륨과 칼륨이 펌프의 단백질에 달라붙어 발전기의 자석 역할을 하는데, 물이 펌프 단백질을 회전시킬 때 전기가 발생하고, 양이온 펌프의 급속한 회전은 에너지를 발생시켜 많은 장소에 저장한다. ⑨ 우리가 먹는 음식은 시초의 전기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물과 햇빛에서 에너지를 변환한 생성물인데, 인간을 포함해 살아서 자라는 모든 종은 물의 에너지 발생 결과로 생존한다. 미네랄은 필수불가결한 요소 소금, 불후의 명약: 소금은 오랫동안 무지한 의료 전문가들과 미디어 앵무새들에게 혹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소금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물과 소금, 칼륨은 함께 인체의 수분 함유량을 조절한다. 물은 모든 세포 속으로 들어가 세포 내부의 수분 함유량을 조절하고, 그 속에서 세포대사의 독성 노폐물을 청소하고 추출해낸다. 일단 물이 세포로 들어가면 세포에 있는 칼륨이 그 물에 달라붙어 물을 그곳에 머물게 한다. 그런데 과일과 채소에는 풍부한 칼륨이 포함되어 있지만 천연 상태의 소금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일상 음식에 소금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염분은 일부 수분이 세포 밖에서 함께 있도록 붙잡아둔다(염분에 의한 물의 삼투성 역류). 또 세포 밖에 보유되는 수분 양의 균형을 조절한다. 참고로 인체에는 두 가지의 물바다가 있다. 하나는 세포에 보유하는 물이며, 다른 하나는 세포 밖에 보유하는 물이다. 건강은 이 두 바다의 수분 용량이 어떻게 세심한 균형을 유지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데, 수분 용량이 균형을 이루려면 물과 소금, 칼륨이 풍부하고 몸에 필요한 비타민이 함유된 과일과 채소를 규칙적으로 섭취해야 한다. 한편 소금은 정제하지 않은 천일염이 더 좋은데, 몸에 필요한 다른 미네랄도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포로 자유롭게 들어갈 여분의 물이 없을 때에는 물이 세포 밖의 소금기 있는 바다에서 여과되어 수분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세포 속으로 주입된다. 그런데 몸은 비상시 핵심세포에 여과하여 주입할 여분의 물을 보유하기 위해 세포 밖의 물바다 범위가 확장되게끔 설계되어 있고, 이를 위해 뇌는 신장에게 염분과 물의 보유분 증가를 명령한다. 이 같은 뇌의 명령에 따라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으면 부종(浮腫)이 생긴다. 인체의 수분 부족이 중대한 수준에 이르고, 점점 더 많은 세포가 주입 방식으로 물을 공급받으면 주입 압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결국 세포에 물을 주입하는 데 필요한 압력이 현저하게 증가하면서 고혈압이라는 병명이 붙는다. 한편 수분 여과와 세포로의 수분 전달 공정은 몸이 수평 상태로 누워 있는 밤에 더 효율적으로 진행되는데, 이러한 자세에서는 여과되어 모아진 물(낮 동안에는 주로 두 다리에 머물러 있는)이 혈액 순환으로 들어가기 위해 중력의 힘과 애써 싸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부 세포가 긴급 수화 공정에 오랫동안 계속 의존하면 폐에 물이 배기 시작하여 호흡이 어려워진다. 결국 베개를 높게 베고 앉은 채 잠을 자야 한다. 이런 상태를 심장천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탈수로 인한 결과다. 그렇다고 이러한 상태에서 처음부터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폐 시스템에 과중한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소변 배출이 물 섭취량과 같은 비율로 증가할 때까지 서서히 시간을 두고 물을 섭취하는 양을 늘려야 한다. 소변을 많이 배출할 정도로 충분히 물을 마실 때 몸에 보유한 많은 소금도 함께 배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물을 더 마심으로써 부종액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뇨제가 아니라 더 많은 물로! 물은 현존하는 최고의 천연 이뇨제다. 광범위한 부종이 있고,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또는 매우 빠르게 뛰는 사람은 시간을 두고 물 섭취량을 늘려야 한다. 소금이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 소금은 인체의 수분 함량 조절 외에도 많은 기능을 담당하는데, 인체에서 수행하는 특별히 중요한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① 소금은 강력한 천연 항히스타민제로 천식 완화에 사용할 수 있다. 예로 물을 한두 잔 마신 뒤 혀에 소금을 올려놓으면, 소금은 아무런 독성도 없이 흡입기 같은 효과를 낸다. ② 소금은 몸을 위한 강력한 스트레스 저항요소다. ③ 소금은 세포, 특히 뇌세포에 쌓이는 과도한 산성물질을 추출해낸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소금 섭취를 제한해서는 안 되며 이뇨제의 장기 복용을 삼가야 한다! ④ 소금은 신장이 소변을 통해 과도한 산성물질을 씻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체내에 염분이 부족하면 몸은 점점 산성화된다. ⑤ 소금은 정서장애와 애정장애 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우울증 치료에 사용되는 리튬은 소금 대체 물질이다. ⑥ 소금은 뇌 속의 세로토닌과 멜라토닌 수준 보존에 꼭 필요하다. ⑦ 내 생각에 소금은 암 예방과 치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암세포는 혐기성 유기체로서 산소가 희박하고 산성이 강한 환경에서 사는데, 몸이 잘 수화되고 소금이 모든 부위에 이르도록 혈액순환 용량을 증대시키면 혈액 속의 산소와 활성화되고 ‘유도된’ 면역세포들이 암조직까지 이르러 그것을 파괴한다. ⑧ 소금은 불규칙적인 심장박동을 안정시키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소금이 고혈압을 일으킨다는 오해와 반대로, 실제로 소금은 물과 협력하여 혈압을 조절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다. 물론 적절한 비율이 아주 중요하다. 물을 많이 섭취하면서 무염식사를 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실제로 혈압이 상승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포 내부에 필수적인 미네랄은 정제하지 않은 천연 소금에도 포함되어 있는 미네랄이며, 이것들은 혈압을 정상으로 유지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요소다. 한편 무염식사의 이차적인 합병증으로 천식 같은 숨찬 증세를 야기할 수 있다. 만약 물을 마시고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그 물은 모든 혈관을 완전하게 채울 만큼 혈액순환 속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을 실신하게 하게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의 동맥 조임을 야기하기도 하며, 고혈압이 있는 사람에게는 숨이 차는 증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 한두 잔과 약간의 소금으로 두근거리고 쿵쿵 소리를 내는 심장을 효율적으로 진정시킬 수 있으며, 장기간 섭취하면 혈압이 낮아지고 숨찬 증세도 치료된다. 또 소금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⑨ 소금은 수면 조절에 꼭 필요하다. 물을 한 잔 가득 마시고 나서 소금 몇 알을 혀에 얹고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럽게 깊은 잠에 빠진다. ⑩ 소금은 당뇨병 치료에 필수 요소다. 소금은 혈액의 당 농도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되고, 혈당 수준을 조절하려고 인슐린을 주사해야 하는 사람에게 인슐린의 필요성을 줄여준다. 또 물과 소금은 당뇨병과 연관된 이차적 손상 정도를 감소시킨다. ⑪ 소금은 인체의 모든 세포 속에서 수력전기 에너지 생성에 반드시 필요한데, 세포들이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부위에서의 지역적 전력 생산에 이용된다. ⑫ 소금은 잉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뇌세포들이 살아 일하는 평생 신경세포의 의사소통과 정보처리에 반드시 필요하다. ⑬ 소금은 소화관을 통해 음식 입자를 흡수하는 데 꼭 필요하다. ⑭ 소금은 특히 천식과 폐기종, 낭포성 섬유증 환자들이 폐 속의 점액성 충전물과 끈적끈적한 가래(痰)를 없애는 데 꼭 필요하다. 소금은 점액구조의 물리적 상태를 변화(차폐)시킴으로써 점액을 유동적이고 느슨(분리)하게 만든다. ⑮ 혀 위에 소금을 얹으면 그치지 않던 마른기침이 멈추며, 물이 효과를 증진시킨다. 또 소금은 카타르성 콧물과 만곡부 울혈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다. 아울러 소금은 통풍과 통풍성 관절염 예방에 필수적이며, 근육경련 예방에 반드시 필요하다. 한편 소금이 천식에 좋은 것만큼이나 과도한 칼륨은 천식에 해롭다. 따라서 너무 많은 오렌지주스나 바나나, 많은 칼륨을 함유한 어떤 음료수는 특히 운동하기 전에 섭취할 경우 천식발작을 촉진할 수 있다. 이 같은 천식발작을 예방하기 위해 운동 전에 소금을 조금 섭취하면 가스교환을 위한 폐활량이 늘어나며 과다한 땀 배출도 줄어든다. 세포의 내부와 외부에서 필요한 수분량을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나트륨 작용과 칼륨 작용의 균형을 맞추는 데 오렌지주스에 소금을 조금 첨가하는 것도 좋다. 소금을 얼마나 먹어야 하나: 대략 하루에 물을 8~10잔을 마시면 약 3g의 소금을 먹어야 하므로 물 1.14L당 4분의 1티스푼의 소금을 먹으면 된다. 그런데 소금은 종일 조금씩 나누어 먹어야 하며, 운동하고 땀을 흘리는 경우에는 소금을 좀 더 섭취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뜨거운 기후에서도 소금을 더 섭취해야 하는데, 이런 기후에서는 소금이 생존과 건강, 열탈진과 죽음 사이를 갈라놓는다. 참고로 우리가 아파서 입원하면 즉시 염분농도 0.9%인 생리식염수 살라인Ⅳ드립을 주사하는데, 이 수치는 물 1L당 소금 9g을 뜻한다. 그렇지만 매일 섭취하는 소금의 양은 3분의 1 정도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체는 소금을 보존하려는 기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소금을 과잉 섭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체가 필요로 하는 물과 소금의 비율을 준수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든 과도한 소금을 몸 밖으로 씻어낼 수 있게 물을 충분히 마셔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체중이 늘어난다면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했기 때문인데, 하루 동안 소금 섭취를 억제하고 소변 배출이 늘어나도록 물을 많이 마시면 불어난 체중이 줄어든다. 한편 심부전증이나 투석이 필요한 신부전증 환자는 소금 섭취를 늘리기 전에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내 지침에 따라 물을 마시면 하루 한 알 비타민제 복용도 도움이 된다. 특히 운동을 하지 않거나 채소와 과일을 충분히 먹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 효과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면 그 상황이 종결될 때까지 비타민제를 통해 섭취할 수 있는 것 외에 음식에 비타민 B6와 아연을 첨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발진이나 음부포진으로 시달리면 음식에 비타민 B6와 아연을 추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이러스성 포진은 아연 결핍의 결과 또는 아연 결핍과 관련된 합병증의 결과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금의 참된 가치는 그것에 함유된 미네랄에 있다. 나트륨은 좋은 소금에 함유된 80가지가 넘는 미네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식탁염은 유익한 미네랄들이 제거된 채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지만, 요즘은 정제하지 않은 천일염도 일부 슈퍼마켓과 건강식품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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